근대 이후 작가들은 글쓰기에 대한 질문, 문학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머릿속에 이상적인 책의 형태를 구상했다. 이 책은 성서와 같은 절대적인 위상을 지닌 것이다. 발자크는 한 사회 전체를 담을 수 있는 Ʈ ...
근대 이후 작가들은 글쓰기에 대한 질문, 문학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머릿속에 이상적인 책의 형태를 구상했다. 이 책은 성서와 같은 절대적인 위상을 지닌 것이다. 발자크는 한 사회 전체를 담을 수 있는 ꡔ인간희극ꡕ을, 졸라는 한 가문의 역사를 담을 수 있는 ꡔ루공마카르ꡕ를, 말라르메는 세계 전체를 담을 수 있는 ‘유일한 책’을, 플로베르는 ‘아무것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 책’을 구상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작가들의 상상 속에서 개념의 형태로 존재하는 책을 ‘가상의 책’으로 명명하고자 한다.
‘가상’이란 단어는 오늘날 정보사회의 발달과 함께 널리 유행하게 되었지만, 사실 이에 대한 논의는 중세 스콜라학파로부터 시작했다. 흔히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을 가상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가상적인 것은 ‘현실화 할 수 있는 잠재적 상태’를 의미한다. 철학에서는 ‘가상(virtuel)’과 ‘가능(possible)’을 구별한다. 오늘날 질 들뢰즈(Gilles Deleuze)나 피에르 레비(Pierre Lévy)와 같은 철학자들은 ‘가상’이라는 개념이 ‘현실(actuel)’이라는 개념과 대립하고, ‘가능’이란 개념은 ‘실재(réel)’라는 개념과 대립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 두 쌍의 개념어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다른 범주에 속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가상’이라는 개념과 ‘가능’이라는 개념을 혼동하지 않고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가능한 것’은 이미 정의되고 결정된 것이다. 그것은 단지 ‘실재화(réalisation)’ 하기만 하면 되는 ‘잠재적 실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상적인 것’은 구체적인 방식이 아닌 추상적인 힘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자주 인용되는 예를 들자면, 나무는 씨앗 속에 가상적으로 존재한다. 이와 같이 ‘가상적인 것’은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예견할 수 없고, 다양한 변수에 대응할 수 있다.
이러한 철학적 구분을 바탕으로 우리의 논의를 발전시키면, 작가가 추구하는 ‘가상의 책’은 작가가 구체적으로 쓰기만 하면 되는 ‘가능한 책’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가상의 책’은 ‘문제의 복합체’와 같아서 ‘현실화(actualisation)’라는 특수한 해결 과정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발자크의 ꡔ인간희극ꡕ, 지오노의 ‘진정한 단 한권의 독창적인 작품’, 말라르메의 ‘유일한 책’, 플로베르의 ‘아무것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 책’ 등은 이미 결정된 책, 단지 종이 위에 쓰기만 하면 되는 책을 가리키지 않는다. 플로베르는 ꡔ마담 보바리ꡕ를 집필하기 시작할 무렵, ‘아무것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 책’이라는 자신의 ‘가상의 책’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다. 그러나 이 개념은 ꡔ마담 보바리ꡕ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들 작가가 구상한 책은 상상 속에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마치 씨앗과 같이 가상적으로 존재하는 책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작가가 출판하는 책은 그의 머릿속에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가상의 책’을 모방하거나 복제한 것이 아니다. 가상의 책을 일종의 질문이라고 한다면, 현실의 책은 그것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라고 볼 수 있다.
졸라, 발자크 또는 지오노와 같이 방대한 양의 책을 쓰든지, 아니면 말라르메나 플로베르처럼 쓰고 고치는 작업을 반복하여 적은 양의 책을 쓰든지, 근대 작가들에게서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쉼 없는 글쓰기, 구도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끊임없는 손놀림은 과연 어디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의 ‘작품’과 ‘책’의 관계에 대한 분석은 ‘가상의 책’과 ‘현실의 책’의 관계, 그리고 근대 작가의 쉼 없는 글쓰기의 원동력을 규명하고자 하는 본 연구에 이론적 단초를 제공한다. 블랑쇼에 따르면 근대 작가는 가상의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작품’을 완성하고자 하지만 결국 작가가 쓰게 되는 것은 한 권의 ‘현실의 책’일 뿐이다. 인쇄되어 돌아온 자신의 책을 보는 순간 작가는 작품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허망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는 다시 작품에 손을 대고, 작업을 계속하면서 운이 좋다면 이번에는 작품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다. 이렇게 그는 한 책 속에서 현실화 하려고 했던 것을 파괴하고, 다른 책 속에서 또 다시 시도한다. 그러나 블랑쇼는 작가가 현실화 하고자 했던 것, 즉 ‘작품’은 결국 영원히 완성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작가는 끊임없이 만들고, 파괴하고, 다시 만들 수밖에 없는 숙명에 처한 것이다. ‘가상의 책’은 ‘현실의 책’을 무한히 가능하게 하는, 작가로 하여금 끊임없이 글을 쓰게 만드는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