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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한문산문의 성격과 의의에 관한 연구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박사후연수과정지원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05-037-A00136
선정년도 2005 년
연구기간 1 년 (2005년 11월 01일 ~ 2006년 10월 31일)
연구책임자 김우정
연구수행기관 한양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는 현재 한국 한문산문 연구가 안고 있는 현안이기도 한 실제 작품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통해 기왕에 비평사적 차원에서 기술된 내용을 확인하는 작업과 조선이라는 문화 환경 속에서 형성된 주체적이고 개성적인 면모를 확인하는 작업, 그리고 한문산문의 문예적 특성을 도출하는 과제 등에 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인식의 심화가 극한에 이르러 구조의 변용이 필연적으로 요구될 때까지 기왕에 정립된 문체는 자율성을 지닌 채 계승되는 것이 문학사의 常態라는 高橋和巳의 지적이나, 唐代 古文의 출현을 역사적․사회적․사상적 맥락 속에서 총체적으로 파악하였던 李澤厚의 견해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한문산문은 복합적이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古文의 실현태인 唐宋文이나 先秦文․秦漢文․復古文․擬古文 등은 각각 독특한 배경과 의미를 지니기도 하지만 상호교차적인 심미 체계와 가치를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典範의 설정과 관련하여 唐宋古文과 대척적인 위치에 놓인 秦漢古文은 흔히 擬古文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秦漢古文이 ‘진정한 고문’과는 다른 성격의 글이라는 인식이 은연중에 작동하고 있다. 秦漢古文을 표방한 작품 가운데 작가의 창조적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였거나 현실과 유리된 글이 적지 않다는 기왕의 지적을 통해 이러한 판단이 일정 정도 설득력을 지니고 있음이 확인된다. 작가의 창조성과 자연스러운 行文을 강조한 唐宋古文에 비해 텍스트성이 두드러진 秦漢古文이 擬古로 귀착될 가능성이 다분함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비록 秦漢古文이 擬古로 흐를 가능성이 높고, 또 결과적으로 그런 작품들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이는 개연성의 문제이거나 결과론일 따름이다. 秦漢古文이나 唐宋古文에 선행하는 전제인 ‘古文’의 개념과 범주에 대해서는 이미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져 왔거니와, 그것이 다양한 표현미의 차이를 넘어서는 강력한 이념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상기할 때, 秦漢古文 역시 접근 방식이 달랐을 뿐, ‘진정한 고문’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었음은 매한가지였다.
    최립의 경우, 진한고문파의 주요 텍스트인 ꡔ漢書ꡕ를 5천 번이나 읽었다는 과장 섞인 전언이 있을 만큼 복고적인 문풍을 지니고 있었지만, 韓愈‧歐陽修 등 唐宋諸家의 산문 또한 부단히 연찬했다. 또한 유몽인의 경우, “古文이 있는 줄은 알지만 今文이 있는 줄은 모르며, 唐 이하의 문장은 눈도 대지 않았다”고 자언하였을 정도로 秦漢文에 심취했지만, 그가 추구한 글은 복고문의 특징으로 흔히 거론되는 기이하고 난해한 문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독창성의 획득에 있었다. 한편 최립의 문장에 대해 “千年 이래의 絶調”라고 상찬했던 허균은 오히려 <文說>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스스로의 내적 규율에 기반한 文從字順한 글을 쓰겠다고 천명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조선중기의 산문이 비록 明代 復古派와 唐宋派로부터 일정 부분 빚지고 있다 할지라도 결코 일방적인 수용에 머무르지 않았으며 당시의 문화적 토양에 맞게 재해석하고 변용한 결과물임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당시 복고적 경향의 산문은 당송문 중심의 고문 논의 속에서는 당송문의 타당성을 설명하기 위한 안티테제(antithesis)-이때는 擬古라고 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겠다-로 기능했지만, 실제 창작에 있어서는 고문의 다른 양상-작가적 취향에 따라 先秦文과 唐宋文을 개성적으로 혼용한-을 보여주었던 셈이다. 조선후기의 고문론자 가운데 일부에서는 이러한 작품에 대해 模擬와 蹈襲으로 일관하였을 뿐 현실적인 의의가 없다고 비판하기도 하였지만, 이는 사실 당송고문이나 진한고문 모두의 문제이기도 한 텍스트성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달리 말해 고문의 지향점이 당송에 있건 진한에 있건, 또는 前텍스트의 전범성을 무효화하려는 것이건 간에 間텍스트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은 마찬가지라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古文 또는 古文辭가 지닌 텍스트적 성격이야말로 한문산문의 미적 특징에 대한 이해를 돕는 표지의 하나라 하겠다.따라서 이와 같은 텍스트성이 지닌 의미에 대한 탐구는 심오한 주제나 심대한 내용을 담은 작품을 중심으로 논의되어 온 기왕의 역사주의적․실증주의적 연구 성과를 비판적으로 검증함과 동시에 표현미를 통한 문학성의 해명이라는 과제에 답하는 것이기도 하다.
  • 기대효과
  • 조선중기의 산문이 진한과 당송을 넘나드는 주체적이고 복합적인 양상을 띠고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전기 이래로 누적된 글쓰기의 양태가 필연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단계에 접어들었으며, 당시의 문인들은 각각 자신의 사유와 취향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변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왕의 논의에서는 이와 같은 내재적 양상에 시선을 두기보다 조선후기에 제출된 몇몇 논평 자료를 근거로 그 의미를 단순화하거나 수용론적 관점에서 복고적 문풍 출현의 직접적 원인이 전후칠자 문장의 수용에 있었다고 기술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그 결과 조선 문단 내부의 자율적 요구와 심미적 차원의 문학성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은 채 당시 문단에서조차 그 이해와 평가가 크게 갈렸던 전후칠자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주관적 취향이 개입되어있는 비평 자료에 견인되어 편향된 해석을 낳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문제인식에서 출발한 본 연구는 당시 문단의 다양성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최립과 유몽인․허균의 산문론과 작품을 비교 고찰함으로써 조선중기 한문산문의 지형도를 보다 면밀하고 객관적으로 그려내고자 한다. 이는 문학에 있어서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이해라는 측면에서 중국 문학의 수용과정과 조선 문단 내부의 선택과 변용 양상을 해명하고, 비평사적 측면에서 조선 중․후기에 관류하는 산문론의 맥락을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함으로써 한국 한문산문에 대한 이해와 심도를 더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본 연구의 수행에서 기대되는 효과 및 활용방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 한문산문사 서술을 보다 구체화․정밀화한다. 조선시대 한문산문은 어느 일방에 귀속시킬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어 갔다. 이런 점에서 주소어록체와 연미한 당송문에 경도되었던 조선전기의 산문에서 벗어나 험벽기굴하고 고아한 글쓰기를 시도하였던 조선중기의 복고적 산문은 17세기 이후의 문단에 이론과 창작 양방면에서 신선한 자극을 던져주었으며, 다양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이와 같은 복고적 산문의 성취와 경계를 보다 선명하게 밝힘으로써, 한국 한문산문사의 구도를 보다 정치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작품에 대한 분석 작업을 통해 산문론의 이론적 구도를 비판적으로 검증 또는 확인한다. 현재까지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산문론의 여러 영역이 논의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작품 분석을 통해서야 구체적으로 실증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주목할만한 발군의 성취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받아왔던 조선중기의 작품을 주제․내용․문체․수사 등의 방면에서 탐구하고자 하는 본 연구의 결과물은 이론중심의 산문사 서술 태도를 보다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산문 연구방법론의 수립에 기여한다. 역사주의적․실증주의적 연구방법론이 주류를 이루는 한, 실제 작품 분석에서는 직관적․연역적인 추론에 머무는 한계를 노정하곤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 연구에서 적용될 표현미에 관한 탐구는 원류비평․인상비평의 한계를 극복하고 내용과 형식의 유기적으로 통합된 작품 분석의 실례를 제공함으로써 한문산문의 문학성의 소재를 파악하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 연구요약
  • 조선중기에는 산문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이론화 과정을 거치며 다양한 양상의 실천적 모색들이 수행되었다. 그 대표적 작가들에 관해서는 이미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본 연구가 그 가운데에서도 최립․유몽인․허균에 주목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른바 漢文四大家라는 모호하면서도 포괄적인 언명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이 시기를 대표할만한 작가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다양한 의견이 제기될 수 있다. 후대의 평가를 근거로 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 문단에서 지속적인 논쟁 대상이 되었던 최립 이외에 유몽인과 허균에 대해서는 정당한 대접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들이 정치적인 문제로 문단의 주목을 받을 기회 자체를 박탈당해 왔음을 상기한다면, 이와 같은 방법으로 대표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온당한 태도라 할 수 없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현재적 시각에 입각해 그 문학적 성취를 가늠할 수도 있겠는데, 이 경우 우리 민족의 삶의 양상과 의식을 우언과 풍자의 수법으로 기술한 유몽인이나 날카로운 현실 비판 정신과 자유분방한 작법을 보여준 허균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할 수 있겠지만, 사변적 경향이 두드러진 최립의 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들은 단지 한 시대에 공존했던 작가일 뿐만 아니라 직접 교유하며 문학에 관한 의견을 나눈 사이이기도 했다. 허균이 최립의 문장에 대해 존경심을 표한 것은 전술한 내용 이외에도 여러 자료에서 확인되는 바이거니와 유몽인 역시 선배인 최립을 상당히 의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이들의 산문이 각각 상이한 방향으로 표출되었다는 사실은 산문의 문학성을 바라보는 관점이 그만큼 다양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예라 하겠다. 본 연구는 바로 이와 같은 점에 착안하여 각각의 이론적 근거와 주장을 살펴보고 어떤 방식으로 실제 창작에 적용되었는가를 분석해 봄으로써 당시 산문의 성격과 산문사적 의의를 구명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최립․유몽인․허균의 문학론과 산문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작업과 문체와 수사를 중심으로 그 표현미적 특징을 구명하는 작업, 그리고 각각의 작품 속에 투영된 주제 의식과 사유 양상을 고찰하는 작업으로 나누어 진행될 예정이다.
    최립․유몽인․허균이 활동했던 시기는 명대 복고파의 이론과 작품이 본격적으로 소개․수용되던 때로, 복고파의 논리와 유사한 이론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창작의 영역까지 영향력을 발휘할만큼 성숙한 단계에 도달하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 있어서 당송문은 여전히 치밀한 학습과 연찬을 요구하는 주요 전범이었으며 이들은 바로 당송문을 누구보다 철저하게 학습하고 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자기화하는 데 성공한 문인이었다. 이들은 이와 같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그 관심 영역을 넓혀갔으며, 자신만의 개성적 문체를 실현하기 위한 실험적인 모색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이론을 면밀하게 비교 검토하는 작업이 요구되는 바, 각각의 이론을 고찰함과 아울러 조선후기 비평가들에 의해 제기된 논제들을 활용하여 그 이론적 특징과 비평사적 의의를 밝혀보고자 한다.
    작품 분석은 문체와 수사 등의 표현미에 대한 분석과 주제 의식과 사유 양상에 대한 고찰 등 두 가지 방면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한문학에 있어서 文類와 개념적 충돌을 빚는 문체는 작품의 문예적 성격과 관련하여 심중한 의미를 지닌다. 본 연구에서 논의될 문체는 전통적 한문산문 장르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文(sentence)이나 文章(composition)을 씀에 있어서 쓰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개개 문자언어의 표현 양식을 지칭한다. 문체론적 입장에서 볼 때 문학을 다른 예술장르와 구분 짓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그것이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예술이라는 점에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문체란 내용보다는 표현상의 선택의 문제로 이해되어져 왔고, 이에 따라 문체는 종종 ‘사상의 옷(dress of thought)’이나 ‘표현의 양식(manner of ezxpression)’으로 정의되기도 했다. 그러나 문체론은 단순히 형식에 국한된 논의가 아니며, 언어 표현적 방법을 통해 형식과 내용의 긴밀성에 접근해가는 통합적 연구방법론이다. 이런 점에서 문체론적 작품 분석은 한시 방면에서 작품의 심미적 특징과 관련하여 주목받는 風格 개념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고문이 지향한 문체 특징으로는 奇異․簡潔․古雅 등을 들 수 있는데, 성리학의 보편 사유와 작가의 개성이 반영되어 있음은 물론이려니와 ‘낯설게하기(defamiliarization)’, ‘탈자동화’, ‘함축’ 등의 문학적 장치와도 긴밀하게 관련된다.
    또한 한문산문은 비유법․의인법․반어법․동음이의어법․상징법․풍유
  • 한글키워드
  • 의고문,문체,유몽인,수사,조선중기,한문산문,고문,복고문,당송문,진한문,당송파,진한파,최립,허균
  • 영문키워드
  • criticism of proses,Wang Shizhen,Li Mengyang,Han Yu,Qinhan-gomun,Tangsong school,Qin-Han’s proses.,mid-choson,chinese Writings,prose,Choi Rip,Ryu Mongin,Her Kyun,Tangsong proses,Eugomun,Ou-Yang Xiu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한국 한문산문의 통시적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분절점인 조선중기, 특히 선조‧광해 연간 문단의 동향과 성격을 둘러싼 기왕의 논의를 반성적으로 검토하고 그 실제적 구현 양상을 살펴본 것이다.
    이 시기 문단의 특징은 古文辭, 즉 복고적 문풍의 등장으로 요약된다. 尹根壽와 崔岦에 의해 창도되고 유몽인과 허균 등에 의해 재해석된 복고적 문풍은 당시 중국 문단을 풍미하던 前後七子의 문론과 흡사하다. 이들이 전후칠자에 주목하였음은 그들 자신의 독서편력과 평론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더러 후대의 논평 역시 이러한 판단을 뒷받침하고 있다. 때문에 이들을 당송문 위주의 문체 특징을 보이는 조선전기 문장가들과 구별하여 하나의 유파로 묶고, 전후칠자 문장의 수용을 통해 의고파 또는 진한고문파가 성립되었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들 작가의 문장관과 작품 세계를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면 전후칠자의 영향이 생각만큼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으며 유파의 성립을 인정할만한 공통분모도 존재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중기는 진한 이전의 산문을 전범으로 삼는 복고적 문풍과 韓愈 柳宗元 歐陽修 蘇軾 등 당송 제가의 산문을 법식으로 삼는 당송고문이 본격적으로 분기하는 시기로, 典範의 설정과 적용, 자득과 모의, 내용과 형식, 문체와 수사 등에 관한 관심을 촉발시킴으로써 산문에 대한 인식과 지평을 넓혔다. 이들은 註疏語錄體와 軟美한 館閣文으로 대표되던 조선전기의 문풍과 구별되는 기굴하고 험벽한 선진문의 체식을 구현함으로써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들이 추구한 문체는 동시대의 문인인 許筠 張維 李植 등이 지향한 당송문 위주의 平易하고 直實한 문장과 확연히 다르다는 점에서 일종의 유파적 성격을 띠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개별 작가 단위로 들어가 그 이론과 실천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하나의 유파로 묶기에는 예외적인 면모들이 적지 않게 나타난다. 최립과 더불어 고문사를 창도했다고 평가받는 윤근수를 예로 들자면 李夢陽의 詩選集을 간행하고 王世貞의 [史記纂]을 본뜬 [史纂]의 간행을 추진하는 등 전후칠자의 작품에 심취했지만 실제 창작의 영역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반면 최립의 경우, 고문사를 가장 선명하게 실현한 작가로 평가받지만, 그 자신은 단 한 번도 전후칠자의 존재에 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의 작품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반고와 한유 문장에서 연원한 奇異하고 深晦한 작풍도 나타나지만 정연한 논리와 명료한 행문을 특징으로 하는 구양수 산문의 영향 또한 아울러 확인할 수 있다. 유몽인의 경우, 이 시기의 문인 가운데 가장 분명하고 활발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런데 그는 구양수와 소식 등 송대 고문가들의 문장이 지리하다고 비판하여 복고의 입장을 취했지만, 복고론의 주창자인 이몽양이나 왕세정 등에 대해서도 제가의 문장을 모의하고 표절한 데 불과하다고 혹평하였다. 허균의 경우, 유몽인과 달리 전후칠자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들의 작품을 탐독했다. 하지만 그는 명대를 대표하는 작가로서의 전후칠자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지 전후칠자의 복고론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당시 문단이 언뜻 보기에는 전후칠자의 복고적 문장관에 전적으로 힘입어 선진양한의 산문을 표준으로 하는 새로운 문체를 창출한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나름의 주체적 판단에 입각해 진한과 당송을 넘나드는 창조적이고 복합적인 문체를 구현하였던 것이다. 이는 곧 조선전기 이래로 누적된 글쓰기의 양태가 이 시기에 이르러 필연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당시의 문인들은 각각 자신의 사유와 취향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변용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문단 내부의 내재적 양상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중국의 문학사나 제한적인 논평 자료만을 근거로 복고적 문풍의 출현이 전후칠자의 수용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으로 단정한 기왕의 논의는 재론을 요한다.
  • 영문
  • This research critically examines existing discussions on the trends and characteristics of the literary circles of the mid-Choson period, especially in the reigns of Seonjo and Gwanghae-gun, and investigates their concrete aspects. This period was chosen because it was an important turning point in the diachronic development of literary Chinese prose in Korea.
    A characteristic of the literary circle of this era lay in the emergence of gomoonsa(古文辭, archaic prose), i.e., retroactive style of writing. This retroactive writing style, which closely resembled the literary theory of the former and latter seven masters who greatly influenced China's literary circles of the times, was advanced by Yun Geun-su(尹根壽) and Choi Rip(崔岦) and reinterpreted by Yu Mong-in(柳夢寅) and Heo Gyun(許筠). That these Korean literati focused on the former and latter seven masters can be verified through their reading list and commentaries. This can also be supported by references made by late-Choson critics. Hence the literati were classified by a group distinct from the early Choson writers whose writing style was characterized by proses of Tang and Song dynasties. Moreover, some were of the opinion that Imitative Classicism(擬古派) as well as Qin-Han Classicism(秦漢派) were established through the adoption of the writings of the former and latter seven masters. When these writers' views on writing style are examined in closer detail, however, it can be confirmed that the influence of the former and latter seven masters was not as great as was previously thought, nor could a point in common that could have led to the establishment of a literati school be found.
    For Example, Yun Geun-su, who is considered to have created archaic prose along with Choi Rip, became fascinated with the works of the former and latter seven masters by publishing an anthology of Li Meng-yang(李夢陽) and attempted to publish Sachan(史纂), which took after Shijizuan(史記纂) by Wang Shi-zhen(王世貞), but his efforts did not in fact lead to the sphere of creativity. Yu Mong-in was the most lucid and active in revealing his opinions among the literati of his days. Although he adopted a retroactive position because he criticized the composition of Song classicists such as Ouyang Xiu and Su Shi as being monotonous, he was also severely critical of Li Meng-yang and Wang Shi-zhen, who advocated the retroactive theory, for having imitated and plagiarized other writers' composition. Unlike Yu Mong-in, Heo Gyun was very positive in his evaluation of the former and latter seven masters and was an inveterate reader of their works. Heo Gyun, however, was interested in the former and latter seven masters as writers who represented the Ming period; he was not interested in the former and latter seven masters' retroactive theory.
    As mentioned above, the literary world may seem to have created a new literary style based on the prose of the pre-Qin and the two Han dynasties due entirely to the former and latter seven masters' retroactive view on writing. But in reality, the literary world of Joseon realized a creative and complex writing style that crossed over those from Qin-Han and Tang-Song dynasties based on its own subjective judgments. This signifies that the mode of writing accumulated since the first half of Joseon dynasty entered a stage that required change, which led to diverse modes of transformation by Choson literati of the time to suit their own individual thoughts and preferences. In this sense, we must revise past discussions which conclude that China's literary history was accepted as-is without changes to suit the internal aspects of Choson's literary world and that the emergence of the retroactive literary style was due to the acceptance of the former and latter seven masters based only on the limited materials on commentaries which appeared in the late Choson period.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한국 한문산문의 통시적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분절점인 조선중기, 특히 선조‧광해 연간 문단의 동향과 성격을 둘러싼 기왕의 논의를 반성적으로 검토하고 그 실제적 구현 양상을 살펴본 것이다.
    이 시기 문단의 특징은 古文辭, 즉 복고적 문풍의 등장으로 요약된다. 尹根壽와 崔岦에 의해 창도되고 유몽인과 허균 등에 의해 재해석된 복고적 문풍은 당시 중국 문단을 풍미하던 前後七子의 문론과 흡사하다. 이들이 전후칠자에 주목하였음은 그들 자신의 독서편력과 평론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더러 후대의 논평 역시 이러한 판단을 뒷받침하고 있다. 때문에 이들을 당송문 위주의 문체 특징을 보이는 조선전기 문장가들과 구별하여 하나의 유파로 묶고, 전후칠자 문장의 수용을 통해 의고파 또는 진한고문파가 성립되었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들 작가의 문장관과 작품 세계를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면 전후칠자의 영향이 생각만큼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으며 유파의 성립을 인정할만한 공통분모도 존재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중기는 진한 이전의 산문을 전범으로 삼는 복고적 문풍과 韓愈, 柳宗元, 歐陽修, 蘇軾 등 당송 제가의 산문을 법식으로 삼는 당송고문이 본격적으로 분기하는 시기로, 典範의 설정과 적용, 자득과 모의, 내용과 형식, 문체와 수사 등에 관한 관심을 촉발시킴으로써 산문에 대한 인식과 지평을 넓혔다. 이들은 註疏語錄體와 軟美한 館閣文으로 대표되던 조선전기의 문풍과 구별되는 기굴하고 험벽한 선진문의 체식을 구현함으로써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들이 추구한 문체는 동시대의 문인인 許筠, 張維, 李植 등이 지향한 당송문 위주의 平易하고 直實한 문장과 확연히 다르다는 점에서 일종의 유파적 성격을 띠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개별 작가 단위로 들어가 그 이론과 실천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하나의 유파로 묶기에는 예외적인 면모들이 적지 않게 나타난다. 최립과 더불어 고문사를 창도했다고 평가받는 윤근수를 예로 들자면 李夢陽의 詩選集을 간행하고 王世貞의 [史記纂]을 본뜬 [史纂]의 간행을 추진하는 등 전후칠자의 작품에 심취했지만 실제 창작의 영역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반면 최립의 경우, 고문사를 가장 선명하게 실현한 작가로 평가받지만, 그 자신은 단 한 번도 전후칠자의 존재에 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의 작품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반고와 한유 문장에서 연원한 奇異하고 深晦한 작풍도 나타나지만 정연한 논리와 명료한 행문을 특징으로 하는 구양수 산문의 영향 또한 아울러 확인할 수 있다. 유몽인의 경우, 이 시기의 문인 가운데 가장 분명하고 활발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런데 그는 구양수와 소식 등 송대 고문가들의 문장이 지리하다고 비판하여 복고의 입장을 취했지만, 복고론의 주창자인 이몽양이나 왕세정 등에 대해서도 제가의 문장을 모의하고 표절한 데 불과하다고 혹평하였다. 허균의 경우, 유몽인과 달리 전후칠자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들의 작품을 탐독했다. 하지만 그는 명대를 대표하는 작가로서의 전후칠자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지 전후칠자의 복고론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당시 문단이 언뜻 보기에는 전후칠자의 복고적 문장관에 전적으로 힘입어 선진양한의 산문을 표준으로 하는 새로운 문체를 창출한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나름의 주체적 판단에 입각해 진한과 당송을 넘나드는 창조적이고 복합적인 문체를 구현하였던 것이다. 이는 곧 조선전기 이래로 누적된 글쓰기의 양태가 이 시기에 이르러 필연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당시의 문인들은 각각 자신의 사유와 취향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변용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문단 내부의 내재적 양상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중국의 문학사나 제한적인 논평 자료만을 근거로 복고적 문풍의 출현이 전후칠자의 수용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으로 단정한 기왕의 논의는 재론을 요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의 수행에서 기대되는 효과 및 활용방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 한문산문사 서술을 보다 구체화, 정밀화한다. 조선시대 한문산문은 어느 일방에 귀속시킬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어 갔다. 이런 점에서 주소어록체와 연미한 당송문에 경도되었던 조선전기의 산문에서 벗어나 험벽기굴하고 고아한 글쓰기를 시도하였던 조선중기의 복고적 산문은 17세기 이후의 문단에 이론과 창작 양방면에서 신선한 자극을 던져주었으며, 다양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이와 같은 복고적 산문의 성취와 경계를 보다 선명하게 밝힘으로써, 한국 한문산문사의 구도를 보다 정치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작품에 대한 분석 작업을 통해 산문론의 이론적 구도를 비판적으로 검증 또는 확인한다. 현재까지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산문론의 여러 영역이 논의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작품 분석을 통해서야 구체적으로 실증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주목할만한 발군의 성취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받아왔던 조선중기의 작품을 주제, 내용, 문체, 수사 등의 방면에서 탐구하고자 하는 본 연구의 결과물은 이론중심의 산문사 서술 태도를 보다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산문 연구방법론의 수립에 기여한다. 역사주의적, 실증주의적 연구방법론이 주류를 이루는 한, 실제 작품 분석에서는 직관적, 연역적인 추론에 머무는 한계를 노정하곤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 연구에서 적용될 표현미에 관한 탐구는 원류비평, 인상비평의 한계를 극복하고 내용과 형식의 유기적으로 통합된 작품 분석의 실례를 제공함으로써 한문산문의 문학성의 소재를 파악하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 색인어
  • 尹根壽, 崔&#23718;, 柳夢寅, 許筠, 趙翼, 王世貞, 李夢陽, 何景明, 李攀龍, 韓愈, 柳宗元, 歐陽脩, 蘇軾, 散文, 古文, 古文辭, 擬古, 唱古, 復古, 先秦文, 秦漢文, 唐宋文, 文體, 修辭, 模擬, 自得, 前後七子, 唐宋八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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