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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시간의 이해와 冊曆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전문연구인력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05-075-A00004
선정년도 2005 년
연구기간 2 년 7 개월 (2006년 02월 01일 ~ 2008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한정수
연구수행기관 대진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중단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전근대 시기 왕조국가를 운영하는 근간은 제도와 교육, 형률, 군사, 도량형, 농업, 조세수취 등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사람들이 어떻게 그러한 근간이 되는 모든 면에 대해 시간을 맞추고 행동하였는가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기준 시간이 무엇이고, 여기에 대한 이해와 동의가 이루어졌는가, 그리고 그 시간에 따른 政令이 반포되어 시행되어졌는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본다면 본 연구의 분석 대상이 되는 고려왕조의 시간에 대한 이해에서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고려왕조가 시간과 책력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음은 다음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첫째, 고려는 농업국가였기 때문에 時候의 정확한 파악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시간과 시후를 연결하고 해당 때에 맞는 時令인 月令을 반포함으로써 농사에 전력을 다하게 하고 수확을 늘리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월령은 중국적 기후환경 속에서 형성된 것이었기 때문에 고려의 환경에 맞는 시후와 시간, 그리고 시령이 필요하였다.
    둘째, 고려왕조에서는 군주의 정치력을 해와 달, 그리고 별의 움직임, 각종 자연현상과 관련시켜 이해하는 경향이 컸다. 특히 일식과 월식에 대해서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따라서 시간의 흐름과 천문의 현상을 정확히 예측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게 되었다. 이것이 觀象授時의 기본 정신이었으며, 冊曆은 이를 해결해주는 하나의 키 역할을 하였다.
    셋째, 『고려사』역지의 서문을 쓴 정인지가 고려의 역에 대해 원의 『수시력』이용 이전과 이후에도 고려왕조가 당의 徐昻에 의해 822년에 편찬된 『선명력』을 이용한 데 불과하고 이를 고려왕조 내내 이용하려 하였기 때문에 일월식 등이 잘못 추정되는 오류가 발생하였다고 말한 것도 이같은 선상에서였다. 그렇다면 고려왕조에서도 책력과 그 역법이 갖고 있는 오류 가능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왕조가 『선명력』과 그 외의 책력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밝힐 필요가 있는 것이다.
    넷째, 고려시대는 다양한 시간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통과의례의 시간 기준, 吉禮 제의 및 세시풍속의 날짜와 그 주기성에 대한 이해, 외교 사절단의 왕복시기에 대한 기준, 농사의 때에 대한 파악, 정령의 반포 및 시행시기에 대한 이해, 인사 및 조세 수취의 시기 등이 그것이다. 이를 위한 시간 기준은 정확해야 했으며 그에 따라 정상적인 사회운영이 가능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염두에 둔다면 왜 고려왕조가 시간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 책력을 수용하거나 혹은 독자적으로 만들어 시간을 계산하고 일월식의 교식을 정확하게 추정하고자 했는가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또 이를 기준으로 고려사회가 어떻게 정치운영 틀로서의 時令을 구상하고 농상의 권장을 위한 使民을 할 수 있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유교적 정치이념 가운데 하나의 원리인 使民以時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천명을 받은 聖人君主로서의 君主觀을 수식하기 때문이다.
    고려왕조에서 기준으로 삼고 이용한 시간이 태음태양력에 기초한 책력만이 아니라 다른 다양한 시간 개념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고려사회는 특정 정치이념에 의해 경도된 사회가 아닌 보다 다원화된 사회였기 때문이다. 불교나 도교, 다양한 신앙, 자연 변화의 관찰과 기록 등등이 다양한 시간 기준의 한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분석도 필요하다 하겠다.
    따라서 본 연구과제인 ꡒ고려시대 시간의 이해와 책력ꡓ에서는 이러한 이해 위에서 고려시대 군주를 비롯한 사회 구성원들이 어떻게 시간을 이해하였고 이를 어떠한 기준으로 나누어 이용했는가를 살펴보는데 목적을 두고자 한다. 이는 고려왕조에서는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여 시간을 나누고 있었는가와 이를 사회운영에 어떻게 반영하였는가를 분석하려는 시도이다. 이 연구를 통하여 고려시대 사회운영원리의 기초단위로서의 시간에 대한 전반적 이해를 도모하고 그것이 고려시대 생활사 및 정치사상 등과 어떻게 상호작용하였는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 기대효과
  • 우리 역사에서 자주적 역법의 성립이라 일컬어지는 세종대 『칠정산내편』의 편찬과 해시계와 물시계 등을 이용한 시간측정에 이르기까지 고려시대나 조선 초 시간의 정확한 측정과 책력의 편찬 노력은 계속되어왔다. 그러나 고려시대와 관련해서는 전모를 알려줄 자료의 부족으로 정확한 시간의 이해와 이용에 대해 구체적 파악이 어려웠다. 본 연구에서 시도한 것은 바로 이점을 고려시대 시간 관련 자료의 종합 정리로 찾아내어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 토대로 본 연구의 기대효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려시대 시간의 이해와 책력”이라는 주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예상 기대효과의 하나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고려시대 사람들의 ‘시간관념’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 시간관념에도 다양한 시간의 요소가 들어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점심, 저녁, 아침, 오전, 오후, 밤과 낮, 하루, 한달, 보름, 상순, 중순, 하순, 월초, 월중, 맹춘, 맹하, 맹추, 맹동, 입춘과 같은 대략적 시간과 정확한 시각이 시간관념의 한 부분을 이룬다. 임신과 출산, 생일 및 관례와 혼례, 그리고 죽음에 대한 것도 시간관념의 요소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본 연구 주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시간관념”은 고려시대 생활사 연구를 더욱 진전시킬 수 있는 동인이 될 수 있을 것이며, 고려시대 사회상을 살펴보는데 하나의 틀을 제공하리라 본다.
    둘째, 한편 고려시대 일치된 시간의 이용은 일시적으로 갖추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기나 지역마다, 신분층마다 시간관념이 다른 면이 컸던 데에서 점차 차이를 줄여 나갔을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시계가 없는 상황에서 동일하게 맞춘다는 것은 고려시대만이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차이를 줄이는 것이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각 지방마다 일치하지 않았던 시각과 시간을 맞추고 그에 따라 군주의 정치력이 행해진다는 것은 결국 도량형이나 언어의 통일이라는 것과 함께 실질적 사회의 통일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본 연구를 진행하면서 얻을 수 있는 고려시대 시간정보의 자료에 대한 종합정리로 그 내용과 과정에 대한 추정을 해 나갈 수 있다고 전망된다.
    셋째, 본 연구를 통하여 풍속사가 갖는 중요한 의미 중의 하나로 시간을 주목할 수 있다고 본다. 가령 정확한 시계가 없었던 전근대 사회에서 춘분이나 추분, 하지나 동지의 날을 계산하여 정한 뒤 여기에 중요한 제천의례나 국가적 俗節로 정하여 의례와 잔치를 벌여 하나의 대략적 기준으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동지 팔관회나 한식, 상원 연등회 등의 행사와 그 관심의 깊이는 이를 말해준다.
    본 연구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기대효과를 이상과 같이 정리하였는데, 결국 고려시대사만이 아니라 과학사나 일상 생활사, 풍속사, 사회사, 사상사 등의 각 분야에 시간이라는 일정한 통계 자료를 줄 수 있다는 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 본 연구를 수행한 뒤 그 성과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먼저 언급할 수 있는 것이 고려시대 시간의 기록정보를 데이터 축적을 통해 고려시대 시간의 문화사 혹은 시간과 일상생활사라는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발하는데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치, 사회, 경제, 일상사 등 각 분야별 “고려시대 시간의 문화사”만이 아니라 “한국사 속 시간의 문화사”로 확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둘째, 고려시대 시간 기록 정보를 통하여 전근대 역사 속에서 이용되는 다양한 시간의 의미를 추적 정리할 수 있으리라 본다. 각각의 시간에서 행해지는 행사와 의미부여의 내용을 추적함으로써 시간과 관련한 역사 사전의 편찬에 활용될 수도 있다고 본다.
    셋째, 역사의 시간 기록 정보와 관련하여 태음태양력을 사용한 전근대 사회의 시간을 오늘날의 태양력의 시간으로 치환시킴으로써 역사정보의 정확성을 기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이상의 내용을 토대로 하면서 연구 성과를 다양한 층을 대상으로 하는 대중서로도 만들어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가제목 : 한국사 속 시간의 유전자 지도)
  • 연구요약
  • 전근대 시기 왕조국가를 운영하는 근간은 제도와 교육, 형률, 군사, 도량형, 농업, 조세수취 등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사람들이 어떻게 그러한 근간이 되는 모든 면에 대해 시간을 맞추고 행동하였는가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기준 시간이 무엇이고, 여기에 대한 이해와 동의가 이루어졌는가, 그리고 그 시간에 따른 政令이 반포되어 시행되어졌는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왕조가 시간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 책력을 수용하거나 혹은 독자적으로 만들어 시간을 계산하고 일월식의 교식을 정확하게 추정하고자 했는가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또 이를 기준으로 고려사회가 어떻게 정치운영 틀로서의 時令을 구상하고 농상의 권장을 위한 使民을 할 수 있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왕조에서 기준으로 삼고 이용한 시간이 태음태양력에 기초한 책력만이 아니라 다른 다양한 시간 개념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고려사회는 특정 정치이념에 의해 경도된 사회가 아닌 보다 다원화된 사회였기 때문이다. 불교나 도교, 다양한 신앙, 자연 변화의 관찰과 기록 등등이 다양한 시간 기준의 한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분석도 필요하다 하겠다.
    아직까지 고려시대와 관련한 시간의 이해와 그 실상, 그리고 책력의 이용에 대한 연구는 미흡한 실정이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의 경우 현재 시간과 일상생활, 혹은 농사와 관련한 時候와 占候, 시간측정과 역법에 대한 연구 성과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더구나 중국이나 대만, 일본에서는 이미 과학사와 정치사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천문역법과 시간의 이해에 대한 성과가 나오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이해 위에서 고려시대 군주를 비롯한 사회 구성원들이 어떻게 시간을 이해하였고 이를 어떠한 기준으로 나누어 이용했는가를 살펴보는데 목적을 두고자 한다. 이는 고려왕조에서는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여 시간을 나누고 있었는가와 이를 사회운영에 어떻게 반영하였는가를 분석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연구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방법과 내용에 대해 분석하고자 한다.
    첫째 고려사회에서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고려시대의 시간은 시간을 어떻게 측정하고 이를 분할하였는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없이 단편적 사료로 남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전모를 살펴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 고려시대의 문집과 묘지명, 비문 등에는 편린이지만 시간 기록이 비교적 정확하게 남아 있다. 따라서 단편적 시간기록을 가능한 한 모두 모아 일정한 기준에 의해 분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모은다면 연표의 성격을 갖는 하나의 자료가 완성될 수 있다. 또한 각 왕대별 연중 행사력을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려시대의 시간기록은 물론 날짜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대부분이겠으나 일정한 때의 기후나 자연 현상을 표현하는 형태로 기록된 경우들도 있다. 가령 뻐꾸기가 운다거나, 개구리가 운다거나, 찌르라미가 운다거나, 복숭아꽃이나 살구꽃 등이 핀다든가 하는 기록 형태이다. 이러한 형태의 것을 모은다면 하나의 자연력으로 정리될 수 있다.
    한편으로 현재 천문 관측과 천문현상, 별자리 및 일월식 등과 관련해서는 어느 정도 정리되어 있다. 왕조사회에 있어서 시간을 정리한 책력에 대해 천상을 살펴 인간사회의 때와 관련시켜 정한다고 하는 敬授人時 혹은 觀象授時라고 하는 만큼 이러한 기록을 적극 활용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위의 내용들은 일정한 시간을 기준으로 정리된 것이지만 시간의 길이로 남겨져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와 달리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24절기가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러한 24절기나 한식이나 단오 등과 같은 歲時, 길례 및 잡사의 제사 및 행사날은 구체적 날짜 표기가 없는 경우도 있으나 역시 중요한 시간 정보가 될 수 있다.
    결국 이를 통해 고려시대와 관련한 문헌자료에 나타난 시간 기록 정보를 종합 정리함으로써 시간 기록 방식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으리라 본다.

    둘째, 첫 번째 단계에서 수행한 시간 기록 정보의 종합 결과를 토대로 하면서 실제 고려에서 어떻게 시간을 측정하였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에 대한 정보를 일차적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은 시간과 책력을 관장한 관서와 그 역할에 대한 검토이다. 고려시대 天文․曆數․測候․刻漏의 일을 관장한 기관은 고려 초 太卜監과 太史局에서 시기에 따라 명칭변경은 있지만 書雲觀이라 할 수 있다. 이 관서에는 실무의 일을 맡는 관직으로 掌漏․視日․司曆․監候․司辰의 관원이 있었으며, 태복감에는
  • 한글키워드
  • 시보(時報),책력(冊曆),시간의 기록,이십사절기(二十四節氣),서운관(書雲觀),역법(曆法),농사력(農事曆),자연력(自然曆),일관(日官),잡과(雜科),왕도정치(王道政治),천인감응론(天人感應論),농시(農時),시령(時令),월령(月令),예기(禮記),기곡(祈穀),수시력(授時曆),선명력(宣明曆),속절(俗節),태음력(太陰曆),경수인시(敬授人時),관상수시(觀象授時)
  • 영문키워드
  • Timetables ,The Time Keeping,Prayer(a Giyang/祈禳 service),a Philosophy considering Agriculture as a Significant Priority(重農理念),The rule of virtue politics(王道政治),The theory on respondency of Heaven-Man(天人感應論),Rituals of Praying for Rich Harvests(Gigok/祈穀 rituals),Weolryeong(月令),Agricultural Calendars(農事曆),natural Calendars(自然曆),Agricultural Timetables(農時),Calendar(冊曆),Solar and Lunar Calendars(太陰太陽曆)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고려는 송·요·금 등과 실리적으로 사대조공 등의 국제관계를 설정하면서도 원간섭기와는 달리 고려 스스로 천하의 한 축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고려는 이에 따라 고려-금 간의 양국 위상이 정립되기 전 여진 등의 북방 종족을 번(蕃)으로 보기도 했고 또 팔관회적 질서를 구축하기도 하였다. 비록 형세상 금의 우월을 인정하는 사대조공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그동안의 고려-금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고려의 북진정책과 자주, 군신관계에 따른 사대조공, 국왕책봉이라는 주제가 중심이 되는 한편, 대금외교정책 및 횡선사(橫宣使), 무역관계 그리고 동북아시아 국제정세 속 고려 등을 밝히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실제 사절왕래의 시기와 내용을 분석하는 데에는 미흡한 면이 있었다.
    여기서는 바로 이러한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고려와 금 간에 오고갔던 사절단의 파견 및 도착이라는 왕래 시기의 주기성을 중심으로 그 내용과 특징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고려에서 요에 보낸 사행의 명목은 모두 30여종에 달하였고, 요에서 고려에 보내진 사절은 국왕 및 태자 책봉 등을 비롯하여 17종에 달하였다. 그런데 이 가운데 정기적으로 오간 사절단을 보면, 몇 가지로 정리된다. 고려에서 요에 보낸 정기 사행은 하정사, 하절사, 진방물사, 사하생신사, 사횡선사 등이었고, 요에서 고려에 보낸 정기 사행은 하생신사, 횡선사 등이 중심이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생신사 관련 양국의 사행은 다른 정기사행과는 다른 내용이 있었다. 즉 고려 국왕의 생일에 맞춰 고려에 도착하거나 혹은 이에 대한 감사 사절이 곧바로 출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횡선사의 경우 대개 6월에 요의 사절이 도착하였지만 그에 대한 답빙 차원의 사절은 대개 11월로 맞춰져 보내졌다는 점이다.
    따라서 생신 및 횡선 관련 사절의 왕래 시기와 주기성에 대한 배경과 그 의미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였다. 고려를 중심으로 분석한 결과이기는 하나 여기서는 6월 및 11월에 행해진 고려의 국가행사 등이 그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보고자 하였다. 말하자면 6월의 경우 태조 휘신도량으로 인한 국왕의 제향 및 봉은사행이나 국왕의 보살계 행사, 도목정사 중 권무, 조운의 운송 시한 등이 주목되었다. 11월의 경우 국가행사는 중동팔관회를 정점으로 12월 도목정사, 이듬해 정월 정단, 상원연등에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이러한 행사와 물산의 집중, 교역 수요 등이 발생하여 생신 및 횡선 관련 사절이 이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본 것이다. 고려는 금의 정월 하례 때의 경우 사하생신사, 사횡선사, 진헌사, 하정단사 등 4종류의 사신단 대략 도합 100여명 이상의 사절단이 금에 들어갔다. 이들은 사신으로서의 역할과 함께 교역을 통한 이익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본 연구에서는 고려와 금의 사절파견이 사대조공책봉이라는 정치위상을 중심으로 하는 관계 설정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각도의 ‘사행무역’이 전개됨으로써 이를 매개로 한 고려-남송-서하-금의 교역망이 형성되고 그 속에서 사절 파견이 정형화되는 특징을 찾을 수 있었다.
  • 영문
  • In 1141 (the twentieth year from the accession to the throne of Injong and the second year of Hwangtong, the name of the era of Geum (Jin dynasty)), Injong was first invested by Geum. In July of the same year, the relationship of investment and tribute between Goryeo and Geum was virtually made by the employment of Hwangtong and diplomatic intercourse of missions between them was regularized.
    In this study, by examining the realities of the diplomatic intercourse of missions between Goryeo and Geum, I seek to consider its periodicity and find the meanings of it. In particular, I pay attention to the backgrounds and meanings of the times and periodicity of the missions concerning birthday and special royal edict (Hoengseon). Although the analysis is made centering on Goryeo, I think that the backgrounds of it were national ceremonies of Goryeo in July and November.
    In brief, the result of this study is the following. The diplomatic intercourse of missions between Goryeo and Geum was not made unilaterally in the political aspect of toadyish tribute and investment. The courtesy of diplomatic missions between Goryeo and Geum followed the system of Yo (Liao Dynasty), but various foreign trades accompanying diplomatic missions were officially developed in considering the interests of Goryeo and Geum. The network of trade of Goryeo-Southern Song-Western Xia-Geum was made centering on them and the dispatch of diplomatic missions was regularized.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고려와 금국 간에 오고간 정기 사절 왕래의 내용 정리를 통해 양국간 사절왕래의 주기성을 고찰하고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찾아보고자 한 것이다.
    고려에서 요에 보낸 사행의 명목은 모두 30여종에 달하였고, 요에서 고려에 보내진 사절은 국왕 및 태자 책봉 등을 비롯하여 17종에 달하였다. 그런데 이 가운데 정기적으로 오간 사절단을 보면, 몇 가지로 정리된다. 고려에서 요에 보낸 정기 사행은 하정사, 하절사, 진방물사, 사하생신사, 사횡선사 등이었고, 요에서 고려에 보낸 정기 사행은 하생신사, 횡선사 등이 중심이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생신사 관련 양국의 사행은 다른 정기사행과는 다른 내용이 있었다. 즉 고려 국왕의 생일에 맞춰 고려에 도착하거나 혹은 이에 대한 감사 사절이 곧바로 출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횡선사의 경우 대개 6월에 요의 사절이 도착하였지만 그에 대한 답빙 차원의 사절은 대개 11월로 맞춰져 보내졌다는 점이다.
    따라서 생신 및 횡선 관련 사절의 왕래 시기와 주기성에 대한 배경과 그 의미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였다. 고려를 중심으로 분석한 결과이기는 하나 여기서는 6월 및 11월에 행해진 고려의 국가행사 등이 그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보고자 하였다. 말하자면 6월의 경우 태조 휘신도량으로 인한 국왕의 제향 및 봉은사행이나 국왕의 보살계 행사, 도목정사 중 권무, 조운의 운송 시한 등이 주목되었다. 11월의 경우 국가행사는 중동팔관회를 정점으로 12월 도목정사, 이듬해 정월 정단, 상원연등에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이러한 행사와 물산의 집중, 교역 수요 등이 발생하여 생신 및 횡선 관련 사절이 이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본 것이다. 고려는 금의 정월 하례 때의 경우 사하생신사, 사횡선사, 진헌사, 하정단사 등 4종류의 사신단 대략 도합 100여명 이상의 사절단이 금에 들어갔다. 이들은 사신으로서의 역할과 함께 교역을 통한 이익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본 연구에서는 고려와 금의 사절파견이 사대조공책봉이라는 정치위상을 중심으로 하는 관계 설정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각도의 ‘사행무역’이 전개됨으로써 이를 매개로 한 고려-남송-서하-금의 교역망이 형성되고 그 속에서 사절 파견이 정형화되는 특징을 찾을 수 있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연구결과
    본 연구는 고려시대의 시간 이해와 책력이라는 연구과제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고려-금간 사절단 파견의 양상에 일정한 시간적 주기가 있음을 착목하여 분석한 것이다. 즉, 고려와 금국 간에 오고간 정기 사절 왕래의 내용 정리를 통해 양국간 사절왕래의 주기성을 고찰하고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찾아보고자 한 것이다. 특히 정기 사행 가운데 생신 및 횡선 관련 사절의 왕래 시기와 주기성에 대한 배경과 그 의미를 주목하였다.
    고려에서 금으로 보내진 정기 사행 중 하절사를 제외한 진방물사, 하정사, 사하생일사, 사횡선사 등은 거의 비슷한 시기인 11월을 중심으로 집중되고 있는 특징이 나타난다. 금에서 보낸 정기 사행이라 할 하생신사의 경우는 11월(금에서는 9월 파견), 횡선사의 경우는 6월(금에서는 4월 파견)에 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진방물사, 하정사, 사하생일사, 사횡선사 등은 위에서는 다루지 못하였으나 날짜를 달리하여 출발한 경우가 많았다.
    금에서 파견된 횡선사가 6월에 집중된 이유는 금과 고려 양측의 이해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굳이 6월이 양측에서 동의되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이해관계가 성립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왕조에서 6월에 행해지는 연례행사는 크게 3가지였고 나머지 한 가지로는 조운과 관련된 것을 주목할 수 있다. 첫째는 대략 6월 2일을 기준으로 한 봉은사에서의 태조 제향이고, 두 번째는 왕이 6월 15일에 궁궐에서 보살계를 받고 보살계도량을 행하는 행사가 있었다. 세 번째로는 고려의 인사행정의 하나인 ‘권무(權務)’였다. 네 번째로 여길 수 있는 것이 조세와 공물 등에 대한 조운 시기이다. 따라서 이 시기 많은 재물의 수요가 있어 각 지방에서 물산이 올라온다고 볼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진귀한 물품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6월에 집중된 횡선사 파견은 고려 왕실과 신료들에게 큰 선물이 되었으리라 보며, 반대로는 횡선사를 포함한 사절단 역시 나름대로의 교역을 취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고려에서의 사횡선사는 11월을 중심으로 보내지고 있었다. 11월은 농한기이기도 하지만 고려왕조 최대의 행사라 할 팔관회 등이 있고, 12월 도목정사를 앞두고 각종 국내외 물산이 모여든다는 점 등이 주목된다는 것이다. 이때 모여든 물산을 중심으로 예물이 준비되었고, 11월을 중심으로 사하생신사 등을 포함한 진방물사, 하정사, 사횡선사 등의 고려의 사절들은 금으로 들어갈 때 상당한 물품 교역을 시도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각 사신단은 서하의 경우와 비슷하게 40명 안팎으로 구성되었고 2-3일간 교역을 허락받았을 것이다. 이같은 교역을 통해 고려의 사절단들은 금으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챙기기도 하였다.
    결국, 고려와 금의 사절 왕래 중 금의 하생일사와 이에 대한 고려의 사하생일사, 그리고 금의 횡선사와 사횡선사 등의 파견 시기가 일정하게 정해진 배경이 양국간의 정치외교적 관계를 포함한 다른 요소 즉 교역이라는 면이 큰 작용을 했다고 보여진다는 것이다. 즉, 고려왕조에는 11월과 6월을 중심으로 많은 국내외 물산이 모이는 시점이었으므로 이 시기를 매개로 한 고려 및 송 상인과 북방민족 간의 교역이 이루어졌고, 금의 수도에 들어간 고려의 사절들 12월 및 정월 하례 때를 중심으로 사절무역 등을 적절히 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활용방안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본 연구는 고려시대의 사료에 나타난 시간성을 분류하고 그 과정에서 고려-금 간 사절 왕래의 특징을 찾아 이를 분석한 것이다.
    고려시대의 경우 조선시대와 비교할 때 사료가 극히 적은 편이지만 본 고에서 시도했듯이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했을 때 지금까지와는 다른 고려시대의 성격을 찾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시간기록에 대한 이해는 사건의 발생 및 기록 시점이라는 측면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간 것이 세시풍속과 관련한 이해였다. 그러나 이들 시각은 나름의 의미는 있지만 왜 그 시대 사람들이 그러한 행위를 되풀이하고 있는가에 대한 분석의 틀을 제공해 주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점에서 사건의 기록 시점과 되풀이되면서 주기성을 보이고 있는 기록의 특징을 주목하고 이를 분석하는 것으로서 고려사의 연구방법에 있어서도 일종의 통계처리가 가능하다는 이해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본다. 즉 생활사만이 아닌 정치외교사 등에 있어서도 이러한 시간 분석이 필요하다는 연구시각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본 연구의 결과는 고려시대 교역사 및 국제관계사에 있어 활용될 수 있다. 특히 다원적 국제질서가 지배적이었던 시기와 중국 중심
  • 색인어
  • 칭신봉표(稱臣奉表), 사대조공(事大朝貢), 사절왕래(使節往來), 하생신사(賀生辰使), 사하생신사(謝賀生辰使), 횡선사(橫宣使), 사횡선사(謝橫宣使), 주기성(週期性), 사행무역(使行貿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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