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도 선도연구자 연구지원 사업에 본 연구자가 신청하고자 하는 주제 '朝鮮前期 漁箭의 所有問題와 魚物流通'은, 조선전기 어업의 실태를 漁箭의 소유문제를 중심으로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펼쳐지던 이 시기 어물의 유통실태를 전국적인 차원에서 규명하여 보려는 작업이다. 어물 ...
2005년도 선도연구자 연구지원 사업에 본 연구자가 신청하고자 하는 주제 '朝鮮前期 漁箭의 所有問題와 魚物流通'은, 조선전기 어업의 실태를 漁箭의 소유문제를 중심으로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펼쳐지던 이 시기 어물의 유통실태를 전국적인 차원에서 규명하여 보려는 작업이다. 어물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의 지형을 무대로 전개된 우리 역사에서, 위로는 국왕을 비롯한 관인·지배층에서 아래로는 민인 대중에 이르기까지 전근대 선인들의 식생활의 주요 구성 요소이었다. 국가의 공물 수취체계에서 각종 어물이 상세한 규정 속에서 체계적인 공납의 대상으로 설정되어 있던 실정은 이 같은 식생활 여건을 잘 반영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관련 자료의 극소한 형편과 연구자들의 관심 부족으로, 조선전기 어물유통 분야는 이제까지 수 십여 년 전에 이루어진 선학 몇 분의 개척적이고 개설적인 연구를 제외하면 그 실태조차 파악이 제대로 되어있지 못한 형편이다. 따라서 조선전기의 상업사를 구체적인 상품을 사례로 하여 그 생산여건과 교환의 조건, 나아가 유통체계를 규명하여 재구성하려 할 때, 어물의 생산과 유통에 대한 실태 분석은 곡물이나 면직물류와 더불어 그 일차적인 분석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물품이다. 본 연구는 이 같은 연구사상의 필요성에서 조선전기 어물의 생산과 유통의 실태를 그 생산수단이던 어전의 소유문제를 중심으로 정리하면서 규명하여 보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 작업은 단순히 조선전기 어물의 생산과 유통에 대한 실태 분석의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 연구자가 장기과제로 설정하여 추진하고 있는 조선전기 사회구성에서 상업사의 규명 작업과, 상업사를 통한 이 시기 사회경제구성 및 그 성격의 규명이라는 포괄적인 연구주제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기대효과
조선전기는 상업사상 정체와 자급자족의 시기가 아니라, 집권국가의 정책방침 하에서 상업과 상인의 활동이 각기 그 내적인 진전을 거듭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의 경제구성을 상업과의 관련에서 파악하게 될 때 정리하게 되는 이 같은 역사상은, 이 시기 국가의 어업정책 ...
조선전기는 상업사상 정체와 자급자족의 시기가 아니라, 집권국가의 정책방침 하에서 상업과 상인의 활동이 각기 그 내적인 진전을 거듭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의 경제구성을 상업과의 관련에서 파악하게 될 때 정리하게 되는 이 같은 역사상은, 이 시기 국가의 어업정책과 어물유통 부문에서도 마찬가지로 펼쳐지고 있었다. 즉 집권국가의 억말책 속에서 국초 어전의 사점을 금지하며 어물의 생산과 유통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제한을 강화시키고자 하였으나, 그것이 민간의 사적인 어물생산이나 유통 그 자체에 대한 억압이나 금지일 수는 없었다. 따라서 국내경제의 변동과 긴밀하게 연계되는 가운데, 15∼16세기에 걸쳐 어물의 생산과 유통 부문에서도 어전에 대한 소유권이 강화되고 이에 대한 권세가의 사점이 확대되었고, 이에 따라 어물의 유통 또한 당대 국내상업의 발달 현상과 더불어 확대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자가 구상하고 있는 조선전기 어물의 생산체계와 유통과정에 대한 정리 작업이 제대로 마무리된다면, 그간 오랫동안 연구의 공백으로 남아있던 조선전기의 漁業史 나아가 상업을 중심으로 한 이 시기 사회경제상의 복원에 일조할 수 있으리라 본다. 본 연구자는 조선전기 상업에 대한 이와 같은 연구결과를 장차 고려 이전 나아가 조선후기 상업과 연계시킴으로써, 전근대 우리 나라 사회경제사를 상업사의 영역에서 通史的 체계를 통해 재구성해 보려는 장기 계획을 설정하고 있다. 우리 나라 상업의 역사를 국가·농업과의 관련에서 또 사회사상·신분제·정치운영구조와 연관하여 유기적 총체적으로 살핌으로써, 그 계기성과 발전성을 실증에서 정리하고 이를 이론화하려는 작업이 되겠다.
연구요약
반도의 지형 속에서 전개된 우리 역사에서 어업은 그 역사의 출발과 함께 시작되었다. 원시 사회 이래 어로 활동이 주요한 식자원 공급의 한 경로였음은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 출토되는 작살이나 어망추 등을 통하여 어렵지 않게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약탈경제 단계 ...
반도의 지형 속에서 전개된 우리 역사에서 어업은 그 역사의 출발과 함께 시작되었다. 원시 사회 이래 어로 활동이 주요한 식자원 공급의 한 경로였음은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 출토되는 작살이나 어망추 등을 통하여 어렵지 않게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약탈경제 단계의 어업을 넘어, 생산경제의 일환으로 시작된 어업은 삼국시기 이래 그 자료에서 확인되는 漁梁(漁箭) 어업에서 그 시초를 찾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定置의 漁具를 인위적으로 시설한 漁梁 어업 단계에 가서 비로소 생산수단에 대한 노동력의 투여, 그리고 그 생산물에 대한 계획적인 관리와 시장경제를 상대로 한 교환의 설계가 본격 가능하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삼국시기 이래의 어량 어업은 고려에 들어 일반화하며, 특히 그 말기에 어량에 대한 왕실·권세가·특권층의 私占 세태가 토지사점 문제와 더불어 크게 문제되고 있는 데에서 보듯이, 이 시기 어업생산과 유통의 중심 형태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같은 어량에 근거한 어물의 생산과 유통은 조선 왕조에 들어 일층 진전되면서 집권적 국가질서의 표방에 따라 국가적인 차원에서 재편성되고 있었다. 이후 조선후기에 들어 조선술의 발달과 어로 기술의 혁신, 어물 가공기술의 개발 등에 힘입어 近海를 어장으로 하는 어업생산의 획기적 발전이 있기까지, 沿海의 어전에 근거한 어업생산은 어물생산의 거의 유일하고 안정적인 형태로 전개되고 있었다. 본 연구는 이처럼 전근대 어업의 일반 형태였던 어전을 생산수단으로 하는 어물의 생산과 유통의 실태를 조선전기에 초점을 두고 규명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작업의 방향과 내용은 크게 조선왕조의 개창과 더불어 이들 어전에 대한 국가정책이 어떤 방향에서 정립되고 있었는지를 정리함으로써 이 시기 유통어물의 생산기반을 규명하는 작업을 한 축으로 하고, 이의 해명에 기초하여 어전에서 생산된 어물이 전국적으로 어떻게 유통되고 있었는지를 밝혀 보고자 한다. 따라서 본 연구는 어물의 생산과 유통이라는 관점에 국한된 연구라기 보다는, 조선 왕조의 개창 이후 펼쳐진 경제정책의 일반 방향 위에서 어업정책이 어전의 소유문제를 둘러싸고 어떻게 펼쳐졌는지를 구명하고, 나아가 상업정책의 일환으로서 생산 어물의 유통과정에 국가가 어떤 관리와 통제정책을 구사하였는지, 그리고 이러한 국가정책 하에서 민간의 어물생산과 유통은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는지를 밝히는 방향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연구는 집권국가의 질서를 재천명하며 수립된 조선왕조의 경제정책을 상업정책과 그 실제라는 측면에서 정리해 내는 작업이 될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어물의 생산과 유통과정을 통해서 이 시기 국내상업의 실체를 규명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를 통해 중세기 우리 나라 상업의 실태를 상품의 생산과 유통이라는 차원에서 어물을 사례로 재구성하되, 이를 국가의 경제정책 일반에 대한 배려 위에서 수행하는 작업인 것이다.
한글키워드
상업,어물,이권재상론,어업,어전,어물유통,억말론,상업정책
영문키워드
Commercial Policy,Commerce,Circulation of Fish,Being of Benefit to the Upper,Restraining Commerce,Fishing Industry,Yeojeon(漁箭),Fish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국문
1. 15세기의 어전정책과 어전경영 이 연구는 15세기에 조선 왕조가 고려 말의 어전문제를 개혁해 내면서 펼쳤던 어전정책의 추이와 그에 따른 어전경영의 실태를 규명한 논문이다. 건국 이후 조선 왕조는 고려말 이래 만연해 있던 권세가의 魚箭私占을 혁파하고 이를 빈민에 ...
1. 15세기의 어전정책과 어전경영 이 연구는 15세기에 조선 왕조가 고려 말의 어전문제를 개혁해 내면서 펼쳤던 어전정책의 추이와 그에 따른 어전경영의 실태를 규명한 논문이다. 건국 이후 조선 왕조는 고려말 이래 만연해 있던 권세가의 魚箭私占을 혁파하고 이를 빈민에게 3년 단위로 분급하는 어전정책을 수립하였다. 유교 전래의 이념에 따라 어전을 ‘共有’의 영역으로 설정하고, 백성들의 占有와 자유로운 어물생산을 허용하였던 것이다. 조선 정부는 전국의 어전을 국가에서 운용하는 官魚箭과 백성들의 私魚箭으로 편제하고 있었다. 그 중 사어전으로부터는 어전세로 생산량의 1/10에 해당하는 어물을 수취하였는데, 이 어전세는 이후 연산조에 1/3 규모로 증가하고 있었다. 관어전은 연해지방의 수령이 백성들을 동원하여 어전을 조성하고, 그 수확어물을 공납이나 지방재정으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경영하였다. 반면 사어전은 백성들이 스스로 어전을 만들어 어물을 생산하고, 그 일부를 어전세로 납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15세기 후반 이후에는 권세가, 상인층이 빈민 명의로 어전을 장악하여, 어물생산과 유통에 따르는 이익을 독점하는 경향이 다시 대두하고 있었다.
2. 조선전기의 어물유통과 어전사점 이 연구는 조선전기에 펼쳐진 어물유통과 그 확대의 사정, 16세기에 들어 다시 성행하고 만연해 갔던 어전사점의 추세를 규명한 논문이다. 조선전기 어물은 전국에서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상품으로 유통되고 있었다. 이 시기 최대의 어물시장은 한양과 그 인근의 京江(곧 한강)이었고, 도성시장에서의 판매를 목적으로 전국의 어물이 도성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도성의 어물시장은 魚物廛이 주도하였으며, 지방에서는 어물선상과 행상들이 상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성종조 이후 특히 16세기에 들어 어물유통은 일층 확대되고 있었다. 공납제의 변동에 따라 어물의 貿納(공물을 시장에서 구입하여 납부하는 행위)이 성행하고, 지방에서 場市가 널리 보급되면서부터였다. 어전사점을 금지하였던 국초의 魚箭政策은 16세기에 본격화된 권세가, 상인층의 합법적인 折受와 불법적인 私占으로 인해 무너지고 있었다. 어물유통의 확대에 따라 어전의 자산으로서의 가치가 증대되고, 토지 이외의 생산수단을 장악함으로써 유통경제를 활용한 독점이익을 노린 권세가, 상인 세력의 어전투자가 증가한 결과였다.
영문
1. The Policy and Management of Weir(魚箭) in 15th Century Chosun Dynasty This paper studied the change of weir policy and management followed by the change which Chosun Dynasty carried out, reforming the weir problems of the late Korea Dynasty in fift ...
1. The Policy and Management of Weir(魚箭) in 15th Century Chosun Dynasty This paper studied the change of weir policy and management followed by the change which Chosun Dynasty carried out, reforming the weir problems of the late Korea Dynasty in fifteenth century. After Chosun Dynasty, from the foundation of Chosun on, made a revolutionary destruction of private possession of weir(魚箭私占) by the privileged class which was spread since the late Korea Dynasty, the government established the weir policy that the weir would be given to the poor every three years. Chosun set up the weir as a domain of public ownership according to Confucianism and allowed the people to own it and to produce fishes freely. Chosun government divided the weir into two different types; the one is state official weir(官魚箭) and the other private people's weir(私魚箭). The government, between these, received a tenth of produced fishes from private people's weir by weir tax. Later in King Younsan(燕山君) ages, the weir tax increased from a tenth to a third. In case of state official weir, the local administrators of coastal regions developed weirs through the mobilization of people and managed the weirs in a way of using the produced fishes as tributes or local finances. Private people's weir, on the contrary, was developed by the people themselves. The people produced fishes and paid some portion of those fishes for a tax. The privileged class and merchants, however, overwhelmed weirs by using the names of the poor since the late fifteenth, got to monopolized the profit of producing and circulating fishes.
2. Trade of Fish and Private Possession of Weir(魚箭) in the early Chosun Dynasty This paper studied not merely the Trade of Fish and the expansion of that in the early Chosun but also the change of the private possession of weir which got to be spread again since sixteenth century. Fish was been trading as a merchandise all over the country through many routes in the early Chosun dynasty. The biggest fish market of this period was Hanyang(漢陽) and Han river(京江) of its environs. Fish of all country was gathered into Hanyang for the purpose of selling in the market of Hanyang. While the fish markets of Hanyang were lead by chartered-fish market(魚物廛), shipping traders and traveling peddlers dealt in fish local areas. Trade of fish had been enlarged since reign of king Seongjong(成宗), especially when sixteenth century started. It was because Moonap(貿納; buying tributes in markets and paying) was prevalent followed by the change of tribute system and local markets(場市) were spread in local areas. The weir policy of the early Chosun dynasty which prohibited private possession of weir was collapsing owing to legal distribute for privileged class and merchants as well as illegal private possession of weir. The result was brought about owing to two reasons. The one was because the value of weir as assets increased by the expansion of trade of fish. The other was because the privileged class and merchants who were pursuing monopoly, using trade economy, invested in fish market except for lands.
연구결과보고서
초록
1. 15세기 조선의 어전정책과 어전경영 이 연구는 15세기에 조선 왕조가 고려 말의 어전문제를 개혁해 내면서 펼쳤던 어전정책의 추이와 그에 따른 어전경영의 실태를 규명한 논문이다. 건국 이후 조선 왕조는 고려말 이래 만연해 있던 권세가의 魚箭私占을 혁파하고 이를 ...
1. 15세기 조선의 어전정책과 어전경영 이 연구는 15세기에 조선 왕조가 고려 말의 어전문제를 개혁해 내면서 펼쳤던 어전정책의 추이와 그에 따른 어전경영의 실태를 규명한 논문이다. 건국 이후 조선 왕조는 고려말 이래 만연해 있던 권세가의 魚箭私占을 혁파하고 이를 빈민에게 3년 단위로 분급하는 어전정책을 수립하였다. 유교 전래의 이념에 따라 어전을 ‘共有’의 영역으로 설정하고, 백성들의 占有와 자유로운 어물생산을 허용하였던 것이다. 조선 정부는 전국의 어전을 국가에서 운용하는 官魚箭과 백성들의 私魚箭으로 편제하고 있었다. 그 중 사어전으로부터는 어전세로 생산량의 1/10에 해당하는 어물을 수취하였는데, 이 어전세는 이후 연산조에 1/3 규모로 증가하고 있었다. 관어전은 연해지방의 수령이 백성들을 동원하여 어전을 조성하고, 그 수확어물을 공납이나 지방재정으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경영하였다. 반면 사어전은 백성들이 스스로 어전을 만들어 어물을 생산하고, 그 일부를 어전세로 납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15세기 후반 이후에는 권세가, 상인층이 빈민 명의로 어전을 장악하여, 어물생산과 유통에 따르는 이익을 독점하는 경향이 다시 대두하고 있었다.
2. 조선전기의 어물유통과 어전사점 이 연구는 조선전기에 펼쳐진 어물유통과 그 확대의 사정, 16세기에 들어 다시 성행하고 만연해 갔던 어전사점의 추세를 규명한 논문이다. 조선전기 어물은 전국에서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상품으로 유통되고 있었다. 이 시기 최대의 어물시장은 한양과 그 인근의 京江(곧 한강)이었고, 도성시장에서의 판매를 목적으로 전국의 어물이 도성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도성의 어물시장은 魚物廛이 주도하였으며, 지방에서는 어물선상과 행상들이 상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성종조 이후 특히 16세기에 들어 어물유통은 일층 확대되고 있었다. 공납제의 변동에 따라 어물의 貿納(공물을 시장에서 구입하여 납부하는 행위)이 성행하고, 지방에서 場市가 널리 보급되면서부터였다. 어전사점을 금지하였던 국초의 魚箭政策은 16세기에 본격화된 권세가, 상인층의 합법적인 折受와 불법적인 私占으로 인해 무너지고 있었다. 어물유통의 확대에 따라 어전의 자산으로서의 가치가 증대되고, 토지 이외의 생산수단을 장악함으로써 유통경제를 활용한 독점이익을 노린 권세가, 상인 세력의 어전투자가 증가한 결과였다.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이 연구는 애초 '조선전기의 어전정책과 어물유통'을 주제로 하여 수행되었다. 그러나 연구완료 후 결과논문을 학회에 투고하는 과정에서, 400매에 이르는 논문의 분량 때문에 하나의 논문으로 게재가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리하여 애초의 연구주제를 조금 세분 ...
이 연구는 애초 '조선전기의 어전정책과 어물유통'을 주제로 하여 수행되었다. 그러나 연구완료 후 결과논문을 학회에 투고하는 과정에서, 400매에 이르는 논문의 분량 때문에 하나의 논문으로 게재가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리하여 애초의 연구주제를 조금 세분하여 1. '15세기 조선의 어전정책과 어전경영', 2. '조선전기의 어물유통과 어전사점' 이라는 두 편의 논문으로 분단하여 관련 전문 학술지에 게재하게 되었다. 향후 이 연구결과를 조선전기 개별 상품의 교환과정과 그 유통구조를 해명하여 조선전기 상업사를 재구성하는 본 연구자의 장기 연구계획의 일부로 편성하여, 연구 단행본으로 출간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