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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낙론계 학맥의 전개와 변모양상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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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명 학문후속세대양성& #40;박사후국내연수& #41;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06-351-A00002
선정년도 2006 년
연구기간 1 년 (2006년 09월 01일 ~ 2007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조성산
연구수행기관 성균관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18세기 초반 湖洛論爭을 통해서 형성된 老論 洛論系는 '洛'이라는 말에서 보이듯 서울·경기라는 지역적 특수성이 전제가 된 학파 개념이었다. 서울·경기지역은 조선 중기 이래로 정치권력을 독점해 왔고, 특히 18세기 이후에는 주요 사상·문화 담론들을 양산해 냈다. 특히, 본 연수과제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노론 낙론 세력은 집권층으로 18·19세기 정치권력을 독점해 가면서 주요 국가정책과 문화논의들에 긴밀하게 관여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노론 낙론계에 대한 연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들에 대한 명확한 규명이 이루어진다면 18세기 조선의 많은 정책과 문화 논의들이 어떠한 사상적 배경 속에서 나왔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정국 변동에 대한 이해도 함께 풍부해질 수 있다.
    역사학, 철학, 한문학, 미술사학 등에서 낙론계 인물들에 대한 종합적·개별적 연구가 현재
    적지 않게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들에서 공통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다양한 개성
    을 갖는 낙론계 인물들을 일반화하여 이해한다거나, 아니면 필요한 논리에 따라 낙론계 인물들
    의 개별적 입장을 부조적으로 끌어내는 방법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는 낙론
    계 개별 인물들과 학맥에 대한 종합적 연구가 미진했던 데에서 그 주요 원인을 찾아야 할 것
    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낙론계 인물들의 학맥과 그 사상적 성향을 범주화
    하여 밝혀보는 일이 필요하다. 낙론계 사상은 고정적이거나 단일하지 않았다. 그것은 계속
    해서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었다. 그 구체적인 형성의 과정을 밝혀봄으로써 낙론계 인물들
    의 사상적 지도를 시기별로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18세기 집권층 노론의 사유 지
    도를 새롭게 그려보는 일이며, 나아가 이들을 구조적이고 계기적으로 파악하는 일이다. 본
    연구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18세기 후반 北學思想과 19세기 勢道政權의 사상적·문화적 정
    체성도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연구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현전하는 낙론계 주요 인물들의 문집들과 관련 자료들을 일람하고 이들 사이에서의 주요 논제들과 학문적 경향을 추출한다. 그럼으로써 낙론계 인물들을 일률적이고 평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파악한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크게 시기와 학맥별로 학문적 경향이 어떻게 변화 발전해갔는가에 주목하고자 한다.
  • 기대효과
  • 1) 湖洛論爭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심화할 수 있다. 단순한 추상적인 心性論爭일 뿐이라고 치부되어왔던 18세기 湖洛論爭이 결코 단순한 철학 논쟁이 아니라 현실적 고민 속에서 나온, 엄연히 역사적 의의를 갖는 논쟁이라는 점을 구체적으로 증명해 낼 수 있다. 이를 통해 철학적인 心性論爭을 역사학적 영역에서 다루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호락논쟁을 통해서 파급되었던 낙론계 인물들의
    사상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그 사상적 지도를 그려봄으로써 이 논쟁이 가져다 준 사상계 변동의 계기를 밝혀볼 수 있다.

    2) 18세기 노론 낙론계 사상의 구조적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본 연구는 18세기 정치·사상사의 구조적 이해에 커다란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한다. 집권층 노론으로서 사상계와 정치 분야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노론 낙론계 학맥의 변모양상이 밝혀짐으로써 낙론계의 사상적 특성들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낙론계 내의 다양한 사상적 스펙트럼이 드러날 수 있다.

    3) 北學思想과 東道西器論 등 18·19세기 사상 조류들의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본 연구를 통해서 18세기 낙론계 학맥의 인적·사상적 계보가 밝혀진다면 북학사상이 나오게 되었던 사상적 계기들이 좀더 분명하게 제시될 수 있다. 북학파가 과연 낙론계 전체 속에서 어떠한 위상을 차지하였는지를 밝혀봄으로써, 북학사상이 당시 사상계에서 돌출적인 현상이었는지, 아니면 내적인 축적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었는지 하는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 그리고 18세기 낙론계 학맥을 정리함으로써 19세기 開化論, 東道西器論, 衛正斥邪論, 內修外攘論 주창자들이 어떠한 사상적 계보 속에서 등장했는지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4) 영·정조대와 세도정권기 정치사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본 연구는 영·정조대 노론 정치사상의 전개와 당대 정치사를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특히, 영조대 攻洪黨과 扶洪黨, 정조대 時派와 僻派의 대결에는 각각 洛論과 湖論이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되고 있다. 본 연구를 통해 이점이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본 연구는 19세기 세도정권기 집권층의 정치사상을 이해하는 데에도 좋은 논거들을 제시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세도
    정권을 이루는 가문은 대부분 18세기 낙론계의 후예들이었으며, 따라서 18세기 이들 정치사상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5) 역사학·문학·철학 방면의 연구성과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각 분야가 가지고 있는 이해의 간극을 좁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역사학·문학·철학 분야의 연구성과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각 분야의 이해 간극을 좁히는 '학제간' 연구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낙론계는 문학과 철학 논의를 매우 풍부히 발전시켰으므로 그들의 사상적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논의에 대한 이해가 필수 불가결하다. 본 연구에서는 이들의 사상·문학 논의들을 세밀히 분석하여 각기 다르고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사상 현상들이 사실은 같은 논리적 구조 속에서 진행되어 왔다는 점을 밝혀 보고자 한다.

    6) 낙론계 학맥에 대한 구조적이고 계기적인 파악이 가능해진다.낙론계 인물들은 그 범위가 넓어 통일적인 이해와 파악이 힘들었다. 그러한 이유로 사상사와 정치사에서 이들 인물들에 대한 정합적인 이해는 상당히 어려운 점이 있었다. 가령 시기와 사승관계에 대한 명확한 해명 없이 인물들이 인용됨으로써 신뢰성도 그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본 연수과제를 통해 이러한 점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가능할 수 있다.

    7) 낙론계 인물들의 주요 문집과 호락논쟁 관련 자료들의 집성이 가능해진다. 낙론계 주요 인물들의 문집들 중 상당수는 아직 많은 연구자들에게 상세히 소개되지 않았다. 이들 문집들 속에는 호락논쟁과 당시 시대적 문제의식들을 담고 있는 많은 사실들이 실려있다. 이들 자료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미세한 철학적 문제들과 다양한 문화적 쟁점들을 발굴하여 학계에 소개할 수 있다. 또한 개인 문집은 아니지만 호락논쟁을 정리한 관련 자료들도 상당수 남아있다. 이들 자료들을 적극 발굴하여 소개함으로써 당대 일반 지식인층에서 호락논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고, 이해하고자 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 연구요약
  • 18세기 낙론계 학맥은 크게 세 번의 단계를 거쳐 발전해갔다. 첫째는 17세기 후반∼18세기 초 金昌協(1651∼1708)·金昌翕(1653∼1722)을 중심으로 낙론계 학맥이 형성되는 단계였고, 둘째는 신임옥사 이후 18세기 중엽 李縡(1680∼1746)를 중심으로 낙론계 학맥이 확립되는 단계, 셋째는 1755년 乙亥獄事 이후 18세기 후반 낙론계 학맥이 본격 분화되면서 정치적 관련성이 심화되는 단계였다. 이후 낙론계는 北學論을 거쳐 19세기에는 內修外攘論, 開化論, 東道西器論, 衛正斥邪論 등으로 분화되었다. 시기별로 낙론계는 독특한 학풍과 학문적 위상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이유로 낙론계 인물들은 서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일률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본 연구는 이들 학파와 인물들의 개별적 특성들을 18세기 중요 쟁점별로 분류 정리하고자 한다.

    (1) 17세기 후반∼18세기 초 農淵門下와 洛論系 學脈의 形成
    李端相·宋時烈·趙聖期를 통해서 서울·경기지역과 호서지역 서인들의 사상적 영향
    을 동시에 받았던 洛論系의 宗匠 金昌協·金昌翕 형제는 많은 제자들을 두었다. 김창협,
    김창흡 문하의 인물들이 갖는 면면들과 정치·사상적 행적들, 경세학과 대외관을 통해서
    이 시기 사상계의 동향을 살펴볼 수 있다. 우선, 김창협 문하의 인물들을 살펴보면 인척
    관계, 이후 소론이 되는 인물들, 중인층 등 다양한 성향의 제자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이
    러한 김창협 단계에서의 인맥구성은 김창흡 단계에 도달하면 다소 변화되는 양상을 보였
    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점차 학맥도 전일한 모습을 보여갔던 것이다. 이들에게서 보이는
    공통된 특징들은 문장가, 경학가의 면모들이 전반적으로 보이며, 또한 훗날 정치에 적극
    가담하는 인물들도 다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뚜렷한 경세가의 면모를 갖춘 이는
    없었다. 경세학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인물들은 없었던 것이다.
    경세학이 부족하다는 것은 이들 학풍이 해결해야만 하는 숙제였으나 신임옥사 이후 노론
    학계에 만연했던 의리론 위주의 학풍은 이것과 서로 배치되는 측면이 있었다. 경세학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은 다음 세대인 洪啓禧와 北學派에서 나오게 되었다.

    (2) 18세기 초∼중엽 洛論系 學脈의 전개와 사상적 동향
    18세기 초반에서 중엽은 辛壬獄事 이후 노론 내에서 의리를 정립하는 문제가 시급했
    으므로 낙론계 내에서도 강경한 의리론이 우세를 점해가던 시기였다. 신임옥사는 낙론
    내에서의 도통 계승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18세기 초∼중엽 낙론계 학맥은 이재에 의
    해서 계승되었다. 이때는 신임옥사 이후 노론 의리론이 강경화되면서 학문적 분위기 또
    한 그러한 방향으로 재편되었다. 이재가 {小學}과 같은 기본적인 수양서를 중시여기고
    상수, 도수와 같은 것을 배격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이재의 제자들 가운데 상
    당수는 노론 의리론과 대명의리론을 적극 수호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들 가운데 상
    당수는 18세기 후반 攻洪派와 僻派쪽으로 기울기도 하였다. 한편, 이재 학맥 이외에도 어
    유봉과 박필주가 주변에서 나름의 학맥을 구성하고 있었다.

    (3) 18세기 후반 洛論系 學脈의 분화와 時僻分岐
    1755년 을해옥사로 소론이 정계에서 물러나면서 노론의 辛壬義理는 거의 관철되었다.
    그 과정에서 신임의리 하에 공고히 결집했던 노론의 정치사상계는 분화의 조짐들을 보이
    기 시작했다. 이 시기 중요한 갈등의 요인으로 등장했던 것 가운데 하나가 한 세대 전에
    일어났던 湖洛論爭이었다. 18세기 후반, 호락논쟁은 壬午義理 문제와 노론 강경파와 온건
    파의 갈등, 攻洪派와 扶洪派, 時派와 僻派의 갈등 등과 연결되면서 정국의 중요한 변수로
    떠올랐다. 18세기 후반의 낙론계 학맥의 구성과 사상적 동향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
    서 부침을 거듭했다. 18세기 초반과 중엽이 신임의리 문제로 인해 내적 갈등이 잠재해
    있던 시기라면 18세기 후반은 이러한 문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지면서 다양한 학
    문적 욕구, 정치적 변수들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18세기 후반 호락논쟁이 본격적으로 '정
    치화'의 길로 들어서는 것은 이러한 시대 분위기와 깊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다. 18세기
    후반 낙론 학맥의 분화와 시벽분기는 노론 세력의 분화과정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며, 19
    세기 세도정권이 어떠한 과정에서 등장하였는가에 대한 중요한 배경이 될 수 있다.
  • 한글키워드
  • 홍대용,호락논쟁,북학파,실학,홍계희,박필주,어유봉,이의현,벽파,시파,민우수,김원행,이재,김창흡,김창협,호론계,낙론계,임성주,박지원,김종수,김종후,김양행
  • 영문키워드
  • Hong Gye-hee,the Party of Expediency(Sip'a),Min Woo-su,Im Sung-ju,Kim Won-heang,Kim Chang-hup,Kim Chang-hyup,Ho School,Nak School,Horak Debate,Practical Learning,Pak Pil-ju,Eo You-bong,Yi Eui-hyun,the Party of Principle(Py p'a),Hong Dae-yong,Pak Ji-won,Kim Jong-su,Kim Yang-haeng,Kim Jong-hu,Northen Learning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초기 농연 학맥에서 형성된 낙론 학맥은 辛壬獄事, 庚申處分, 辛酉大訓, 乙亥獄事, 壬午禍變, 華陽書院廟庭碑 시비 등 많은 정치적 사건들을 거치면서 호락논쟁과 함께 그 학맥, 학풍의 성격을 달리해 갔다. 호락논쟁이 학술 논쟁에서 정치적인 영역으로 이동해 가면서 낙론 학맥도 중요한 변화를 겪어야 했다. 그 변화의 과정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김창협 학맥은 문학, 성리학 분야에서 특장을 보였으며, 훗날 소론계에 가담하는 인물들도 있었다. 아직 학맥이 정형화되기 이전이라 상대적으로 다양한 면모들이 보였다. 김창흡 학맥도 문학, 성리학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이 많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신임옥사를 겪으면서 학풍이 보수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는 사실이다. 신임옥사가 노론 학계에 끼친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보수화 경향으로 인해 어유봉, 박필주와 같이 소론과 관련되거나, 적극적인 반탕평론을 전개하지 않았던 인물들은 낙론 학맥을 계승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연 문하에 직접 있지 않았던 이재가 학맥을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이재는 심성론에 있어서는 호론과 명확한 차이를 보였지만, 현실관에 있어서는 송시열의 그것을 계승하였으므로 호론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이는 신임옥사 이후 의리론 일변도의 노론 학풍과 관련이 깊다. 하지만 점차 노론 의리가 정계에 관철되면서 의리론 일변도의 학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학문 경향들이 서서히 낙론계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재의 제자들은 대부분 의리론에 충실하였지만 그 안에서 제한적으로나마 경세론에 관심 갖는 이들도 등장하였다. 경세론에 대한 관심은 磻溪隨錄을 통해서 주로 표출되었다. 이것은 낙론계 학풍에 있어 작지만 중요한 변화였다.
    18세기 후반 낙론계 학맥은 攻洪-扶洪의 갈등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며 전개되었다. 1755년 乙亥獄事 이후 노론의 의리는 대부분 관철되면서 낙론 학계는 신임의리에서 일정 부분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이에 따라 다양한 정치적 입장과 학문 경향들이 등장하였다. 이는 당시 학맥의 분화를 설명하는 데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낙론 학맥은 크게 김원행과 민우수 학맥으로 분화되었다. 김원행 학맥은 낙론 심성론을 고수하였고 부홍-시파적 입장에 가까웠다. 문하에는 홍대용이 이용후생학을 중시하는 학문경향을 가지고 있었고, 박윤원은 보수적인 낙론 학맥을 대표하였다. 또한 황윤석 같은 지방의 인재들도 상당수 있었다. 한편, 민우수 학맥은 노론 의리론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공홍-벽파적 성향을 띠었고 호론계와도 긴밀하게 연대하였다. 그들에게서 특징적인 것은 심성론에 있어서도 호론에 접근하는 모습을 띠었다는 점이다.
    이로써 보건대, 낙론 학맥은 일률적이지 않았으며 개개 인물들도 각기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낙론계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졌던 학문적, 정치적 맥락은 세밀히 살펴 볼 때 중요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호락논쟁 또한 각 시대마다 사회적 맥락이 달랐으며, 후대로 갈수록 정치적인 색채를 짙게 띠어갔다. 학맥의 변모양상을 살펴봄으로써 낙론계 인물들의 사상사적 위치도 좀더 선명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 영문
  • Study on Aspect of Transformation of Nak School in the 18th Century

    Cho, Sung-San

    The disciples of Kim Chang-hyeop·Kim Chang-heup from the latter half of the 17th century to the beginning of the 18th century had established academic tradition of the early Nak school. Kim Chang-hyeop's disciples had been characterized in the field of literature·Neo-Confucianism, afterwards some figures from that had joined Soron faction. Kim Chang-heup's disciples had had many of them leave brilliant achievements in the scope of literature·Neo-Confucianism, however what seems interesting to us is that they went through the Calamity of Noron literati of 1721·1722 and happened to take on a sudden conservative atmosphere in their academic tradition. As a result of this type of conservative trend, other figures who were closely related to Soron and were not actively involved with the movement of Anti-Policy of Impartiality had great difficulty in succeeding to Nak school. Under these circumstances, Yi Jae, who had not been under the instruction of Kim Chang-hyeop·Kim Chang-heup, happened to lead Nak school.
    The view of Yi Jae, in light of theory on the nature of the mind, was clearly differentiated from that of Ho school, however he succeeded to realistic view of Song Shi-yeol, which was not much difference from that of Ho school. It is closely related to the academic tradition of Noron that was consistently lead only by Eui-ri centered basis. However Noron's Eui-ri gradually came to realize, thereby an academic trend which tried to get away from that was centered upon only Eui-Ri theory happened inside Nak school. Most of disciples of Yi Jae were faithful with Eui-ri theory, however some came to start to pay interest to the administrative theory whether or not it was limited. The interest paid to the administrative theory was mostly expressed through Ban-gye-surok. That was not a big change, but an important one in the academic tradition of Nak school.
    Nak school in the latter half of the 18th century had developed in closer relation with conflict between Gong-hong and Bu-hong conflict and division of Sipa(Party of Expediency) and Byeokpa(Party of Principle). Ever since outbreak of the Calamity of Soron literati of 1755, Noron's Eui-ri was mostly accomplished in the political world, therefore the academic world of Nak school would be able to be free from Eui-ri theory in a way, which gave birth to various academic trends thereafter. This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parts which can explain division of the Nak school. Nak school in those times largely divided into disciples of Kim Won-haeng and that Min Woo-soo. Kim Won-haeng’s disciples stuck to that of Nak theory on the nature of the mind, rather closer to the position of Bu-hong and Sipa. On the other hand, Min Woo-soo's disciples took on a tendency of Gong-hong and Byeokpa with it closely connected to Ho school. They also seemed to get near to Ho school's side from the aspect of theory on the nature of the mind.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초기 농연 학맥에서 형성된 낙론 학맥은 辛壬獄事, 庚申處分, 辛酉大訓, 乙亥獄事, 壬午禍變, 華陽書院廟庭碑 사건 등 많은 정치적 사건들을 거치면서 호락논쟁과 함께 그 학맥․학풍의 성격을 달리해 갔다. 호락논쟁이 학술 논쟁에서 정치적인 영역으로 이동해 가면서 낙론 학맥도 중요한 변화를 겪어야 했다. 그 변화의 과정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김창협 학맥은 문학․성리학 분야에서 특장을 보였으며, 훗날 소론계에 가담하는 인물들도 있었다. 아직 학맥이 정형화되기 이전이라 상대적으로 다양한 면모들이 보였다. 김창흡 학맥도 문학․성리학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이 많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신임옥사를 겪으면서 학풍이 보수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는 사실이다. 신임옥사가 노론 학계에 끼친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보수화 경향으로 인해 어유봉․박필주와 같이 소론과 관련되거나, 적극적인 반탕평론을 전개하지 않았던 인물들은 낙론 학맥을 계승하는 데 어려움을 가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연 문하에 직접 있지 않았던 이재가 학맥을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이재는 심성론에 있어서는 호론과 명확한 차이를 보였지만, 현실관에 있어서는 송시열의 그것을 계승하였으므로 호론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이는 신임옥사 이후 의리론 일변도의 노론 학풍과 관련이 깊다. 하지만 점차 노론 의리가 정계에 관철되면서 의리론 일변도의 학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학문 경향들이 서서히 낙론계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이재의 제자들은 대부분 의리론에 충실하였지만 그 안에서 제한적으로나마 경세론에 관심 갖는 이들도 등장하였다. 경세론에 대한 관심은 󰡔磻溪隨錄󰡕을 통해서 주로 표출되었다. 이것은 낙론계 학풍에 있어 작지만 중요한 변화였다.
    18세기 후반 낙론계 학맥은 攻洪-扶洪의 갈등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며 전개되었다. 1755년 乙亥獄事 이후 노론의 의리는 대부분 관철되면서 낙론 학계는 신임의리에서 일정 부분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이에 따라 다양한 정치적 입장과 학문 경향들이 등장하였다. 이는 당시 학맥의 분화를 설명하는 데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낙론 학맥은 크게 김원행과 민우수 학맥으로 분화되었다. 김원행 학맥은 낙론 심성론을 고수하였고 부홍-시파적 입장에 가까웠다. 문하에는 홍대용이 이용후생학을 중시하는 학문경향을 가지고 있었고, 박윤원은 보수적인 낙론 학맥을 대표하였다. 또한 황윤석 같은 지방의 인재들도 상당수 있었다. 한편, 민우수 학맥은 노론 의리론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공홍-벽파적 성향을 띠었고 호론계와도 긴밀하게 연대하였다. 그들에게서 특징적인 것은 심성론에 있어서도 호론에 접근하는 모습을 띠었다는 점이다.
    이상에서 보건대, 낙론 학맥은 일률적이지 않았으며 개개 인물들도 각기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낙론계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졌던 학문적, 정치적 맥락은 세밀히 살펴 볼 때 중요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호락논쟁 또한 각 시대마다 사회적 맥락이 달랐으며, 후대로 갈수록 정치적인 색채를 짙게 띠어갔다. 학맥의 변모양상을 살펴봄으로써 낙론계 인물들의 사상사적 위치도 좀더 선명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 湖洛論爭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심화할 수 있다. 단순한 추상적인 心性論爭일 뿐이라고 치부되어왔던 18세기 湖洛論爭이 결코 단순한 철학 논쟁이 아니라 현실적 고민 속에서 나온, 엄연히 역사적 의의를 갖는 논쟁이라는 점을 구체적으로 증명해 낼 수 있다. 이를 통해 철학적인 心性論爭을 역사학적 영역에서 다루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호락논쟁을 통해서 파급되었던 낙론계 인물들의 사상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그 사상적 지도를 그려봄으로써 이 논쟁이 가져다 준 사상계 변동의 계기를 밝혀볼 수 있다. 2) 18세기 노론 낙론계 사상의 구조적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본 연구는 18세기 정치·사상사의 구조적 이해에 커다란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한다. 집권층 노론으로서 사상계와 정치 분야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노론 낙론계 학맥의 변모양상이 밝혀짐으로써 낙론계의 사상적 특성들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낙론계 내의 다양한 사상적 스펙트럼이 드러날 수 있다. 3) 北學思想과 東道西器論 등 18·19세기 사상 조류들의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본 연구를 통해서 18세기 낙론계 학맥의 인적·사상적 계보가 밝혀진다면 북학사상이 나오게 되었던 사상적 계기들이 좀더 분명하게 제시될 수 있다. 북학파가 과연 낙론계 전체 속에서 어떠한 위상을 차지하였는지를 밝혀봄으로써, 북학사상이 당시 사상계에서 돌출적인 현상이었는지, 아니면 내적인 축적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었는지 하는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 그리고 18세기 낙론계 학맥을 정리함으로써 19세기 開化論, 東道西器論, 衛正斥邪論, 內修外攘論 주창자들이 어떠한 사상적 계보 속에서 등장했는지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4) 영·정조대와 세도정권기 정치사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본 연구는 영·정조대 노론 정치사상의 전개와 당대 정치사를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특히, 영조대 攻洪黨과 扶洪黨, 정조대 時派와 僻派의 대결에는 각각 洛論과 湖論이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되고 있다. 본 연구를 통해 이점이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본 연구는 19세기 세도정권기 집권층의 정치사상을 이해하는 데에도 좋은 논거들을 제시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세도 정권을 이루는 가문은 대부분 18세기 낙론계의 후예들이었으며, 따라서 18세기 이들 정치사상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5) 역사학·문학·철학 방면의 연구성과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각 분야가 가지고 있는 이해의 간극을 좁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역사학·문학·철학 분야의 연구성과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각 분야의 이해 간극을 좁히는 '학제간' 연구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낙론계는 문학과 철학 논의를 매우 풍부히 발전시켰으므로 그들의 사상적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논의에 대한 이해가 필수 불가결하다. 본 연구에서는 이들의 사상·문학 논의들을 세밀히 분석하여 각기 다르고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사상 현상들이 사실은 같은 논리적 구조 속에서 진행되어 왔다는 점을 밝혀 보고자 한다. 6) 낙론계 학맥에 대한 구조적이고 계기적인 파악이 가능해진다.낙론계 인물들은 그 범위가 넓어 통일적인 이해와 파악이 힘들었다. 그러한 이유로 사상사와 정치사에서 이들 인물들에 대한 정합적인 이해는 상당히 어려운 점이 있었다. 가령 시기와 사승관계에 대한 명확한 해명 없이 인물들이 인용됨으로써 신뢰성도 그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본 연수과제를 통해 이러한 점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가능할 수 있다. 7) 낙론계 인물들의 주요 문집과 호락논쟁 관련 자료들의 집성이 가능해진다. 낙론계 주요 인물들의 문집들 중 상당수는 아직 많은 연구자들에게 상세히 소개되지 않았다. 이들 문집들 속에는 호락논쟁과 당시 시대적 문제의식들을 담고 있는 많은 사실들이 실려있다. 이들 자료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미세한 철학적 문제들과 다양한 문화적 쟁점들을 발굴하여 학계에 소개할 수 있다. 또한 개인 문집은 아니지만 호락논쟁을 정리한 관련 자료들도 상당수 남아있다. 이들 자료들을 적극 발굴하여 소개함으로써 당대 일반 지식인층에서 호락논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고, 이해하고자 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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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락논쟁, 낙론계, 호론계, 김창협·김창흡, 이재, 김원행, 민우수, 시파, 벽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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