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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시기 조선인 포로 문제에 대한 再論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신진연구자지원사업(인문사회)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06-332-A00021
선정년도 2006 년
연구기간 1 년 (2006년 07월 01일 ~ 2007년 06월 30일)
연구책임자 한명기
연구수행기관 명지대학교(서울캠퍼스)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는 1636년 일어난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조선의 민간인들이 입었던 피해, 그 중에서도 청군(淸軍)의 의해 자행된 포로 납치의 실상을 파악하고 그 같은 피해를 야기했던 원인과 이후의 '피로인(被擄人) 문제' 해결의 추이를 역사적으로 구명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최근의 남북관계에서는 6·25 한국 전쟁 이후 발생한 '국군 포로의 송환 문제', '납치자 문제' 등이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현안(懸案)으로 부각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북한과 일본의 관계에서도 이른바 '납치 문제'가 북일 국교 정상화의 걸림돌이 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일본은 이 문제를 이른바 '6자 회담'의 의제(議題)로까지 물고늘어질 태세를 보이고 있다. '납치자 문제'를 둘러싼 작금의 남북, 북일 관계의 흐름 속에는 분명 일정하게 정치적 의도가 게재되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납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시공을 초월하여 '전쟁 이후(post-war)'의 국가 사이의 원만한 관계 정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역사적 과업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기도 하다.
    이 같은 역사적 의미를 염두에 두고 조선시대로 눈을 돌렸을 때 병자호란 당시의 '피로인 문제'는 그 발생 규모나 속환(贖還) 과정의 동학(動學)이 조선사회에 미친 영향력의 크기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에게 사로잡혀, 심양(瀋陽)으로 압송되었던 피로인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1637년 인조의 항복으로 '성하지맹(城下之盟)이 이루어진 직후, 최명길(崔鳴吉)은 조선인 피로인의 수를 50만이라고 말한 바 있다. 같은 해 9월, 예조좌랑 허박(許博)은 피로인의 숫자를 수만이라고 했다. 나만갑(羅萬甲)은 훗날 심양의 인구 60만 가운데 상당수가 조선인이라고 하여 최명길이 제시한 수치의 가능성을 뒷받침한 바 있었다. 피로인의 수에 대해 좀더 정확히 따져 보아야겠지만 호란 당시 청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는 최소 수만에서 오십만으로 추정되는 엄청난 숫자였던 것이다.
    이처럼 엄청난 수의 인구가 포로로 끌려갔던 상황은 당시 조선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피로인 문제'와 관련된 기존의 연구를 통해 피로인의 대규모 유출은, 구체적으로 혈육끼리의 이산(離散)으로 말미암은 고통, 도망자의 처리를 둘러싼 조청(朝淸) 사이의 갈등, 속환(贖還) 과정에서 야기되는 경제적 제문제, 속환되어 돌아온 환향녀(還鄕女)와 본래 남편들의 이혼 문제 등 복합적인 정치적,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발생시켰다는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
    하지만 '피로인 문제'를 야기한 과정에서 조선의 지배층이 응당 져야했던 책임 소재에 대한 구명이나 속환 과정에서 발생한 정치적 파장 등에 대해서는 별다른 논구(論究)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히 청 태종(太宗)은 철수할 때 "피로인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탈출하는 자는 불문에 부치지만, 일단 청 영토로 들어갔다가 도주하는 자는 조선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는 약조를 인조에게 제시하여 다짐을 받아낸 바 있었다. 그리고 탈출했다가 도로 잡혀서 끌려왔던 피로인들은 청군에게 끌려가 발뒤꿈치를 잘리는 고통을 겪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도망쳐 온 피로인들을 도로 잡아 보내는 것은 전쟁 직후의 흉흉한 민심을 더욱 자극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나아가 '도망자 처리'를 비롯한 '피로인 문제'를 어떻게 다루느냐의 여부는 정치적으로도 대단히 민감한 것이었다. 즉 조정이 이 문제를 섣불리 다룰 경우, 전란의 고통에 신음하고 있던 당시 피지배층의 입장에서는 인조 정권의 '정당성'에 대해서까지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 인조는 1641년(인조 19), 도망쳐 온 피로인들을 돌려보내라는 청의 강요 때문에 민심이 흉흉해졌을 때, 유시문(諭示文)을 내려 "이번 일을 당한 백성들이 아무리 나를 꾸짖고 원망한다 해도 이것은 나의 죄이니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몸을 낮춘 바 있다.
    '자신의 죄'를 운운하면서까지 사태를 수습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에서 병자호란 이후 '피로인 문제'가 가지는 정치적 폭발력에 대한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필자는 바로 위와 같은 사실과 분위기를 염두에 두면서 병자호란 당시 '피로인 문제'를 재론(再論)하고자 한다. 요컨대 필자는 본 논문을 통해 병자호란 당시 '피로인 문제'의 발생과 해결 과정에서 나타나는 정치사적 의미를 탐구하고자 한다.

  • 기대효과
  • 일찍이 고구려 멸망 이후 한반도의 역대 국가들은 지정학적(地政學的) 불리함과 중국과 일본에 비해 현격히 약한 국가적 약체성(弱體性)을 극복하지 못하여 단속적(斷續的)으로 수난과 시련을 겪었다. 필자가 본고에서 다루려고 하는 '피로인 문제'의 비극성은 그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외관계사 연구는, 중일 사이에 끼여 있는 현실을 염두에 두고 한반도의 약체성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방안을 역사적으로 찾아내는 데 집중되어야 할 것이다. 그와 관련하여 필자의 의견을 좀더 부연하면 다음과 같다.
    이러한 문제 의식을 염두에 둘 때 필자가 가장 중시하는 시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6세기 후반부터 병자호란이 종료되는 17세기 초, 중반 무렵까지이다. 이 시기 조선왕조는 불과 40년이 채 안되는 기간 동안 무려 3차례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일본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맞이했던 왜란을 통해 조선왕조의 사회적 기반은 뿌리 채 흔들렸다. 뿐만 아니라 조선에 대한 '구원군'을 표방했던 명의 군사적 원조를 받으면서 전쟁이 끝난 뒤에는 그들의 입김과 영향력, 나아가 구체적인 '보답 요구'에 휘둘려야 했다. 그 귀결은 '명청교체(明淸交替)'라는 동아시아 질서의 대변동에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조선의 역량을 소모시키는 것이었다. 그에 따른 최종적인 결과가 바로 '오랑캐' 왕조 청에게 무릎을 꿇고 수십만의 생령(生靈)이 피로인이 되어야 했던 병자호란이었다.
    조선의 지배층은 왜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을 겪었음에도 1636년 병자호란을 겪어야 했는가? 왜 임진왜란 이후의 실패한 '피로인 정책'이 병자호란 이후에도 반복되었는가? 중국와 일본의 외압과 그들의 침략의 실체를 고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조선왕조 지배층의 외압과 침략에 대한 대응의 실패 원인과 그로 인한 비극의 실상을 고찰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한반도 주변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여전히 유동적이다. 바야흐로 '동북공정(東北工程)'을 둘러싼 중국과의 갈등이 수그러드는가 싶더니 '독도 문제'가 심각하게 재연되고 있다. 일본은 이제 독도 문제와 관련하여 '군사적 대응'까지도 노골적으로 운위하고 있다. 최근의 '독도 사태'는 미국의 개입과 압력에 의해 미봉되었지만 초강대국 미국과 지역(地域) 강국인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우리가 처한 불안한 위상은 명청교체기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다. '북핵(北核) 문제'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놓고 벌어지는 논란은 임진왜란∼명청교체 시기 명과 일본, 그리고 청 사이에서 타율적으로 '선택의 기로'에 내몰렸던 조선의 현실을 연상케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중국과 일본에 둘러싸인 '약소국'인 우리의 생존 전략은 무엇인가? 또 '통일 달성'이라는 궁극의 비원(悲願)은 물론이고 '동북공정'과 '독도 문제' 등 당장 눈앞에 다가온 난제들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 물론 적정한 경제력, 군사력 등 현실적인 대처 역량을 배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 과거 이들 두 나라와의 관계사(關係史)를 철저히 규명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 선인(先人)들이 취했던 대응을 세심하게 반추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이 같은 작업을 통해 우리는―아직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결코 말할 수 없는―중국과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관점'과 '논리'를 파악할 수 있다. 중국과 일본 양국의 지향과 동향(動向)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 같은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병자호란 당시 '피로인 문제'의 비극성에 대한 고찰은 중일 사이에 끼여 있는 우리가 얼마나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상기시켜 주는 중요한 과제가 될 수 있다.
    요컨대 필자는 병자호란 시기 '피로인 문제'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한반도의 약체성'을 극복하여 중일 사이에서 자존과 번영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교훈을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연구요약
  • 본 주제와 관련하여 일찍이 박용옥 교수가 선구적인 업적을 발표했고, 일본인 학자 모리오까가 집중적으로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두 사람의 연구 성과를 통해 피로인의 숫자, 피로인 송환을 둘러싼 조청(朝淸) 사이의 교섭 과정, 조선 피로인의 청국에서의 가격, 이른바 환향녀(還鄕女)와 사대부들의 이혼 문제 등이 구체적으로 규명되었다. 그것이다. 이 같은 성과들은 '피로인 문제'가 지니는 역사적 의의를 설명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언급한 두 분의 연구가 '피로인 문제'의 역사성을 밝히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피로인 문제'와 관련해서 해명해야 할 과제는 적지 않다.
    먼저 당시 청이 왜 그렇게 '포로 사냥'에 집착했는 지에 대한 원인을 구명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피로인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사 뿐 아니라 중국사 자체에 대한 일정한 이해가 필요하다라는 사실을 환기시켜 준다. 필자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1644년 입관(入關) 이전부터 후금(後金) 정권이 부족한 노동력의 충당을 위해 한인(漢人) 부로( 虜)들을 획득하는데 각별한 관심을 보였던 측면과 연결시켜 검토하고자 한다. 실제 후금은 이미 1621년(광해군 13) 조선 조정에 대해, 요동 지역의 한족(漢族)들 가운데 전란을 피해 조선으로 도주했던 자들을 송환하라고 요구한 바 있었거니와 병자호란 전후 시기 청조 정권이 처해 있던 사회경제적 배경에 대한 언급과 검토가 필요하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미야자키(宮崎市定), 미타무라(三田村泰助), 아배(安倍建夫), 이와미(岩見宏), 기시모토(安本美緖), 이시바시(石橋崇雄) 등으로 이어지는 일본인 연구자들이 내놓은 청대 사회경제사에 대한 연구 성과와 소노다(園田一龜), 가우치(河內良弘) 등이 내놓은 입관 이전의 관계사(關係史)에 대한 연구들을 적극적으로 학습, 활용하고자 한다.
    다음으로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병자호란 시기 엄청난 수의 피로인을 생기게 만든 중요한 원인이조선 측에 있었다는 점이다. 1636년 청의 '칭제건원(稱帝建元)을 받아들이는 여부를 놓고 벌였던 교섭이 결렬된 이후 청의 조선 침공은 이미 예견되고 있었다. 청에 대한 기미책(羈 策)을 통해 전쟁을 피하자고 주장했던 최명길은 "적의 기마대가 일단 압록강을 건널 경우, 체신(體臣)은 강화도로 들어가고, 도원수는 황주의 정방산성(正方山城)으로 퇴거할 것이니 청천강 이북의 열읍(列邑)은 적에게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안주성(安州城)은 형세 상 홀로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생령(生靈)이 어육(魚肉)이 될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었다. 실제 최명길이 예견했던 '시나리오'는거의 그대로 현실로 나타났다. 그 과정에서는 김자점(金自點)과 김경징(金慶徵)을 비롯한 조선군의 핵심 지휘부가 청군이 침략했다는 보고를 무시하고 그들과의 접전을 회피하여 청군 기마대가 서울을 유린하게끔 방조함으로써 피로인이 대규모로 발생하게 만들었던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필자는 이 같은 측면이 기존의 연구에서 전혀 다루어지지 않은 측면을 염두에 두고, 피로인 발생과 관련하여 조선 지배층의 책임 소재를 규명해 볼 생각이다.
    다음으로는 인조정권이 취한 '피로인 문제'에 대한 대책을 검토하고자 한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 조정은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피로인들을 송환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기울였다. 그것은 청 측에 '몸값'을 지불하고 피로인을 데려오는 속환(贖還)으로 구체화되었다. 하지만 심양에 억류되어 있던 혈육들을 속환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고, 또 실제 속환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실제로 고위 관료나 일부 부유층이 아니면 곤란했다. 특히 속환 과정에서 일부 부유한 관리들이 자신의 가족과 인척들을 빨리 송환하는데 급급하여 애초 정해진 속환가(贖還價)에 몇 배의 웃돈을 얹어주는 행태를 보이면서 속환가가 폭등하는 부작용을 낳았거니와 결국 막대한 속환가를 마련할 수 없었던 하층민들은 속환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여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 문제의 구체상을 좀더 정치하게 언급하면서 필자는, 시간이 흐르면서 속환 문제가 점차 '정부 차원의 대책'이 아닌 '개인의 문제'로 전환되어 가는 추세를 보이는 것에 주목하고자 한다. 즉 청은 피로인을 속환할 수 있는 기한을 호란 이후 10년으로 잡고, 피로들을 '자국민'으로 인식하고 있었거니와 이 기간이 지난 이후의 '피로인 문제'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실제 효종 연간 이후가 되면 정부 차원의 속환 시도는 중단되어 그 와중에 개인적으로 자신의 혈육을 찾아 청 내지로 잠입했던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거니와 그들이 청 관헌에게 체포되는 사건들이 발생하게 된다.
    마지막으로는 속환시킨 피로인들에게 정부가 구체
  • 한글키워드
  • 피로인 도망문제,병자호란,정묘호란,피로인,속환가,최명길,주화파,청 태종,질자 파견,청 실록,환향녀,피로인 대책,허박,심양,이신,공유덕,용골대,사행로,개시,소현세자,심관,명청교체,척화파,인조,속환,조선인 포로
  • 영문키워드
  • Erchen(: who submitted to Ching from Ming dynasty) ,Juhwapa,Chukhwapa,Choi Myung-gil,Pro-Ching policy,King Injo,Pyeongja horan (Manchu's invasion in 1636),Piroin (: captives who were arrested by Ching soldiers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병자호란 당시 수십만의 피로인이 발생한 것은 기본적으로 청의 과도한 ‘포로 욕심’ 때문이었다. 포로를 ‘피를 흘려 얻은 성과’로 인식하고 있던 청은 전쟁을 통해 획득한 포로를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중요한 인적 자원으로 여겼다. 그들이 특히 조선의 주회인 가운데 철장(鐵匠)을 비롯한 기술자들을 송환하라고 강력히 압박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병자호란 당시 대규모 피로인이 발생했던 또 다른 이유는 조선 측에도 있었다. 1636년 청과의 협상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 곧바로 청의 침략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음에도 그에 대한 별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던 것, 청의 침략이 발생했을 때 도원수 김자점을 비롯한 전방의 지휘관들이 도주하거나 접전을 회피하여 청군의 신속한 남하를 방조했던 것, 검찰사 김경징 등이 강화도에 들어갈 때 선박을 통제하여 자의적으로 서울 주민들의 입도(入島)를 제한했던 것, 막상 강화도로 들어간 뒤에는 청 수군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 대책을 거의 마련하지 않았던 것 등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피로인 발생을 야기한 근본적 책임은 물론 청의 침략에 있지만, 확연히 예측할 수 있었던 청군의 침략 가능성에 대비하지 못하고 유사시 지휘관으로서의 책임을 방기한 것 등은 분명히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조선은 이후 청과의 교섭을 통해 피로인들을 속환하기로 했지만 그것 또한 결코 만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막대한 속환가를 마련할 수 없었던 하층민들은 속환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여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또 속환 대상자들의 명단을 적은 성책(成冊)을 열람하는 과정에서 관인들의 부정이 개입되어 문제가 되기도 했다. 나아가 포로로 잡혀갔다가 탈출해 왔던 사람들, 또 정당한 속환 절차를 마치고 돌아왔던 사람들에 대한 보호 대책 등 정부의 후속 조처 또한 미흡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속환 문제는 점차 ‘정부 차원의 대책’이 아닌 ‘개인의 문제’로 전환되어 갔다.
    피로인에 대한 정부 차원의 관심이 현격히 줄어들게 되는 와중에 ‘안추원의 탈출 사례’와 같은 경우들이 나타났다. 26년 만에 청을 탈출했음에도 조선에 정착하지 못하고, 결국 청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안추원의 비극은 병자호란 시기 ‘피로인 문제’에 얽혀 있는 다양한 역사적 의미들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안추원의 ‘비극’은 역설적으로 좀더 다양한 관점에서 병자호란을 연구할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준다.
  • 영문
  • 병자호란 시기 조선인 포로 문제에 대한 再論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병자호란이 조선의 일반 백성들에게 남긴 상처와 고통은 참혹했다. 변변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하게 되면서 서울 이북 지역의 백성들은 청군의 ‘칼날’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다. ‘여염이 불타고 시체가 즐비한’ 참상과 아울러 수십만이 포로가 되어 청으로 끌려가는 참극이 빚어졌다.
    당시 수십만의 피로인이 발생한 것은 기본적으로 청의 과도한 ‘포로 욕심’ 때문이었다. 포로를 ‘피를 흘려 얻은 성과’로 인식하고 있던 청은 전쟁을 통해 획득한 포로를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중요한 인적 자원으로 여겼다. 그들이 특히 조선의 주회인 가운데 철장(鐵匠)을 비롯한 기술자들을 송환하라고 강력히 압박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대규모 피로인이 발생했던 또 다른 이유는 조선 측에도 있었다. 청의 침략이 발생했을 때 도원수 김자점을 비롯한 전방의 지휘관들이 도주하거나 접전을 회피하여 청군의 신속한 남하를 방조했던 것, 검찰사 김경징 등이 강화도에 들어갈 때 선박을 통제하여 자의적으로 서울 주민들의 입도(入島)를 제한했던 것, 막상 강화도로 들어간 뒤에는 청 수군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 대책을 거의 마련하지 않았던 것 등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속환은 이루어졌지만 막대한 속환가를 마련할 수 없었던 하층민들은 속환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여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또 속환 대상자들의 명단을 적은 성책을 열람하는 과정에서 관인들의 부정이 개입되어 문제가 되기도 했다. 나아가 포로로 잡혀갔다가 탈출해 왔던 사람들, 또 정당한 속환 절차를 마치고 돌아왔던 사람들에 대한 정부의 후속 조처 또한 미흡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속환 문제는 점차 ‘정부 차원의 대책’이 아닌 ‘개인의 문제’로 전환되어 갔다.
    피로인에 대한 정부 차원의 관심이 현격히 줄어들게 되는 와중에 ‘안추원의 탈출 사례’와 같은 경우들이 나타났다. 26년 만에 청을 탈출했음에도 조선에 정착하지 못하고, 결국 청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안추원의 비극은 병자호란 시기 ‘피로인 문제’에 얽혀 있는 다양한 역사적 의미들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안추원의 ‘비극’은 역설적으로 좀더 다양한 관점에서 병자호란을 연구할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준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병자호란에 대한 연구는 현재적 상황에서도 그 의미가 크다. 조선의 지배층은 왜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을 겪었음에도 1636년 병자호란을 겪어야 했는가 왜 임진왜란 이후의 실패한 '피로인 정책'이 병자호란 이후에도 반복되었는가 이와 관련해서는 중국과 일본의 外壓과 그들이 자행한 침략의 실체를 고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조선왕조 지배층이 외압과 침략에 대한 대응에 실패하게 된 내적 원인과 그로 인한 비극의 실상을 고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역사를 반추하는 것의 중요성을 떠올리는 이 순간에도 한반도 주변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여전히 유동적이다. 바야흐로 '東北工程'을 둘러싼 중국과의 갈등이 수그러드는가 싶더니 '독도 문제'가 심각하게 재연되고 있다. 일본은 이제 독도 문제와 관련하여 '군사적 대응'까지도 노골적으로 운위하고 있다. 최근의 '독도 사태'는 미국의 개입과 압력에 의해 미봉되었지만 초강대국 미국과 지역 강국인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우리가 처한 불안한 위상은 명청교체기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다. '북핵 문제'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놓고 벌어지는 논란은 임진왜란∼명청교체 시기 명과 일본, 그리고 청 사이에서 타율적으로 '선택의 기로'에 내몰렸던 조선의 현실을 연상케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중국과 일본에 둘러싸인 '약소국'인 우리의 생존 전략은 무엇인가 또 '통일 달성'이라는 궁극의 비원은 물론이고 '동북공정'과 '독도 문제' 등 당장 눈앞에 다가온 난제들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 물론 적정한 경제력, 군사력 등 현실적인 대처 역량을 배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 과거 이들 두 나라와의 관계사를 철저히 규명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 선조들이 취했던 대응을 세심하게 반추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이 같은 작업을 통해 우리는 중국과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관점'과 '논리'를 파악할 수 있다. 중일 양국의 지향과 동향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 같은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병자호란 당시 '피로인 문제'가 지닌 역사성을 제대로 고찰하는 것은 중일 사이에 끼여 있는 우리가 얼마나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상기시켜 주는 중요한 시금석이 될 수 있다.
  • 색인어
  • 병자호란, 정묘호란, 성하의 맹, 피로인, 속환, 속환가, 주회인, 심양, 국왕의 권위 실추, 인조, 소현세자, 봉림대군, 환향녀, 사대부들의 이혼 문제, 홍타이지, 용골대, 이신, 공유덕, 경중명, 강화도, 피로인 성책, 안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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