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화폐, 은행제도, 장기채와 공채 등 금융과 보험과 같은 신용을 기초로 전개된 상업거래는 물질생활과 시장경제, 자본주의라는 층위에서 제일 상층을 차지하는 자본주의의 핵심요소이다. 이러한 신용에 토대를 둔 거래가 어느 정도 활성화되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
근대적 화폐, 은행제도, 장기채와 공채 등 금융과 보험과 같은 신용을 기초로 전개된 상업거래는 물질생활과 시장경제, 자본주의라는 층위에서 제일 상층을 차지하는 자본주의의 핵심요소이다. 이러한 신용에 토대를 둔 거래가 어느 정도 활성화되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18세기 이후 상업발달의 질적 지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기준이다. 본 연구에서는 18세기 이후 개성상인을 중심으로 발행, 유통되었던 어음과 환이 구체적 유통실태를 고찰하였다. 대상인을 중심으로 유통되었던 어음과 환은 19세기이후 일반 상거래에 매우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18세기 환거래는 서울, 전주, 강경, 강릉 등 대도시 중심이었지만, 19세기 환거래는 해주, 연안, 서흥, 경상도의 함안, 경기의 인천등 소규모 읍으로까지 확대되고 있었다. 환규모는 대체로 200냥에서 1,500냥 사이였다. 환은 주로 대상인들 사이에 유통된 신용환표이지만, 어음은 중소상인과 소생산자 사이에 널리 유통되었다. 그러므로 어음액면의 크기는 환액면의 크기보다 영세한 것이 보통이다.
어음, 환은 일반 상거래 뿐만 아니라, 임금지불, 여행시 경비지출, 국제교역의 결제수단, 매관매직시의 지불수단, 조세상납 및 국가재정운용에서도 활용되고 있었으며, 심지어 죄수들의 속전납부나 강탈한 재물의 보관수단으로도 활용되고 있었다. 이처럼 신용화폐의 유통은 매우 일반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음과 환이라는 신용화폐 유통의 일반화는 당연히 어음의 할인이나, 이를 담보로 한 금전대출업무를 담당하는 어음교환소의 출현을 필연화한다. 이와 같은 기능을 담당한 곳은 조선 최고의 상인들이었던 육의전 역인청이었다. 육의전 역인청에서는 어음의 교환, 할인, 담보대출 등, 비록 은행이라는 간판을 달지 않았지만, 은행의 업무를 실질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어음의 할인, 교환에 종사하는 거간층도 당시 서울에는 수백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또한 개항이후 외국 돈을 교환해주는 환전객주도 출현하였다. 개항이후 달러나 마르크, 엔화에 대한 교환시세도 형성되고 있었으며, 이 교환시세는 수시로 변동하였다. 외국 화폐의 교환은 서울뿐만 아니라 남한강 상류인 제천지역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전국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바츨라프가 언급하듯이, 이와 같은 신용에 기초한 거래는 "한반도 전역에 걸쳐 이미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뛰어난 재정조직, 그리고 여인숙 주인연합회의 훌륭한 부기능력"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더구나 "여행객이 규칙을 어기거나 돈을 악용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는 언급에서 보듯이 전근대 사회의 공동체적 유대를 기초로 행해진 신용거래는 근대적 금융기관인 은행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