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용서의 모델들과 문제점
엔라이트 모델에 의하면 용서는 상처 입은 사람이 가해자에 대한 원한, 부정적 평가, 그리고 냉담한 태도를 버리고, 그 대신 그에게 동정심, 너그러움, 심지어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엔라이트 모델은 용서에 이르는 네 단계와 스무 ...
1. 용서의 모델들과 문제점
엔라이트 모델에 의하면 용서는 상처 입은 사람이 가해자에 대한 원한, 부정적 평가, 그리고 냉담한 태도를 버리고, 그 대신 그에게 동정심, 너그러움, 심지어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엔라이트 모델은 용서에 이르는 네 단계와 스무 개의 이정표를 제시했다. 이 단계들은 피해자가 자신의 상처와 가해자의 입장을 인지적으로 재구성, 즉 다르게 보는 과정이다. 워딩톤의 모델은 용서안하기(unforgiving)의 상태에서 용서하기의 상태로 바뀌는 과정이다. 피해자가 자신이 입은 상처, 그 상처에 대한 반응, 가해자의 상해 동기, 그리고 상처의 결과 등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원한, 고통, 증오심, 적대감, 분노 등의 감정을 경험하게 되고 이런 경험들이 용서안하기의 상태를 만들어 준다. 워딩톤은 공감을 용서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고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공감이 없으면 용서하기 힘들다고 주장한다. 엔라이트와 워딩톤의 공헌은 용서에 이르는 단계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데 있다. 또한 그들이 각각 강조하는 인지적 재구성 작업과 공감은 용서의 과정에서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두 모델은 용서하는 사람의 자아, 즉 상처 입은 자아는 인지적 재구성 작업과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부재하다는 것을 간과했다.
2. 상처, 수치심, 그리고 치료
전통적으로 용서는 죄의 용서였다. 죄의 용서는 가해자에게 초점을 둔 접근이며 용서의 문제를 한 개인의 행위로 보는 관점이다. 수치심은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감정이기 때문에 죄책감보다 더 고통스럽다. 수치감은 낮은 자존감, 무가치함, 무능력을 동반하기 때문에 죄책감보다 더 고통스러우며 이런 모습이 드러날까 두려워 늘 민감해야 한다. 코헛(Heinz Kohut)의 입장에서 보면 대인관계에서 생긴 상처는 피해자에게 수치심을 준다. 피해자는 자아구조에 심각한 흠(defect)이 생겼다는 경험과 함께 내적 공허감, 위협감, 부족함, 노출공포를 갖게 한다. 수치스런 자아는 자기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강한 자기 방어적 태도를 취한다. 외부의 부정적 평가에 민감해지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피한다. 수치스런 자아는 인지적 재구성을 힘들게 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을 힘들게 한다. 수치스런 자아는 늘 자신의 흠 있고 손상된 모습을 감추는데 급급할 뿐이다. 수치심의 치료는 안정된 공간에서 좋은 대상 경험을 통해 시작된다. 코헛의 입장에서 피해 입은 사람의 수치스런 자아는 자아의 상태를 공감적으로 조율하고 이해할 수 있는 자기대상(selfobject)과의 관계를 통해 치료된다. 코헛은 치료는 해석이 아니라 환자가 자기대상을 이용하여 긍정적 경험을 내면화함으로 일어난다고 본다. 이 내면화는 환자의 내적 나쁜 대상을 좋은 대상으로 바꿔 준다. 이 과정에서 환자는 한 대상에 대한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며 그것을 받아들일 수 능력도 생긴다. 이것이 바로 클라인(Melanie Klein)의 입장에서 본 치료이다. 좋은 대상 경험은 환자 자신이 살아 있는 느낌(feeling real)을 경험케 해준다.
3. 수치감의 치료에서 본 용서
치료와 돌봄을 통해 피해자의 수치심이 치료되면서 위니컷(Donald Winnicott)이 말하는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 능력”(ability to concern)이 생긴다. 좋은 대상을 통한 돌봄과 치료는 피해자에게 은총과 선물로 경험되면서 자신도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이것이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의 바탕이 된다. 대상관계이론의 입장에서 보면 용서는 용서 대상이 변했기 때문에, 즉 가해자가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기 때문에 가능해 지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사람이 그 대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짐으로 가능해 진다. 여기서 대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능력이란 클라인에 의하면 한 대상을 나쁜 면과 좋은 면이 동시에 있는 대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용서는 워딩톤이나 엔라이트가 주장하는 대로 공감을 통해 가해자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긍정적 감정으로 전환시킴으로 가능해 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용서는 가해자의 부정적 모습과 긍정적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길 때 가능해 진다. 치료 즉 훼손된 존재에 대한 돌봄과 배려는 피해자로 하여금 내적인 긍정적 자원과 연결시켜 준다. 상해는 피해자로부터 그의 내적 긍정적 자원을 차단시켰지만, 돌봄 받은 피해자는 자신의 내면 혹은 과거의 긍정적 자원과 다시 연결할 수 있게 됨으로 아직도 원한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할 수 있는 자원들을 동원할 수 있게 된다. 이 자원들 가운데도 삶의 긍정적 경험들, 자신도 과거에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용서받은 경험, 한 인간을 인류애로 포용하는 능력 등이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