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투는 18-19세기 영국 상류층의 중요한 문화 중의 하나였다. 싸움을 통해 법적인 분쟁을 해결하는 관습은 중세 때부터 이어져 온 것이지만 ‘명예와 용기’를 위한 결투문화는 영국에 1570년대에 도입되었고 17세기 초 광범위한 문화로 정착되었다.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 ...
결투는 18-19세기 영국 상류층의 중요한 문화 중의 하나였다. 싸움을 통해 법적인 분쟁을 해결하는 관습은 중세 때부터 이어져 온 것이지만 ‘명예와 용기’를 위한 결투문화는 영국에 1570년대에 도입되었고 17세기 초 광범위한 문화로 정착되었다.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 치세동안 결투는 억압되다가 명예혁명 이후 다시 유행되기 시작해 18세기 말에는 절정에 달했다. 결투는 중간층에서도 일어났지만 대부분 상류층에서 발생하였다. 이는 당시 상류층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 상류층이 존중한 가치는 명예와 용기로 요약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당시 상류층의 남자는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man of honour)’이었고 결투는 이 명예가 침해되었을 때 당연히 취해야하는 행동이었다. 주로 상류층은 자신이 ‘거짓말쟁이’이라고 불렸을 때 이를 명예에 대한 가장 큰 모욕으로 간주하였다. 이는 상류층의 가장 큰 덕목이었던 정직성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결투는 또한 상류층의 용기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는 문화였다. 생명을 걸어야 하는 결투에 임함으로써 그들은 용기를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다. 자신의 명예를 침해한 자에게 결투를 청하는 것은 명예를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며, 자신이 비겁자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특히 모욕을 준 상대방이 결투에 능한 자로 알려져 있을 경우 결투신청은 필수적이었다. 이 경우 결투 신청의 회피는 비겁한 자로 간주되어 그의 명예에 치명적인 손상을 주기 때문이었다. 도전을 받은 자 역시 결투를 피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용기를 증명하고자 하였다. 도전받은 자가 때로 남의 명예를 침해한 사실과 잘못을 마음속으로 인정하였다 하더라도 그는 결투 전까지 사과하려고 하지 않았다. 결투전의 사과나 해명은 목숨이 두려워서 결투를 피하려했다는 오해를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류층은 명예와 용기라는 가치에 생명까지 담보하면서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가 도나 안드류(Donna Andrew)의 언급처럼 “명예, 사회적 인정, 우월의식은 상류층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18세기 말 절정에 달했던 이러한 상류층의 결투 문화는 1842년 이후 급격히 감소하였고, 1852년을 마지막으로 영국에서는 결투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면 상류층의 ‘신사도’(the code of honour)라 불리던 이 결투 문화가 종식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일부 역사가들은 결투를 금지한 실증법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18세기 후반 결투를 신청하는 것이나 이에 응하는 것, 또한 결투에 입회를 서는 것은 처벌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생명을 건 결투를 행하는 자들이 실증법의 처벌을 중하게 여겼을 가능성이 적었고, 처벌 역시 가벼웠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부족하다. 또한 결투의 종식은 근대국가와 시민사회의 산물로 보는 해석도 있다. 엘리아스에 따르면 결투는 폭력과 범법, 그리고 정부의 사법권에 대한 도전으로 비추어졌다. 결투는 정부의 사법적 판단보다는 개인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정부의 권위를 무너뜨릴 위험성이 있었다. 이러한 해석은 결투가 주로 행해졌던 런던에서 결투를 금지하기 위한 경찰의 노력이 매우 제한적이었고 처벌받은 사람들도 매우 적었다는 사실에서 그 정당성이 적다. 결투의 종식은 결투가 의미하고 있던 의미 그 자체의 변화와 그리고 결투를 통해 얻고자 한 명예에 대한 사회적 인식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세기 초 결투는 폭력이며, 질서와 평화에 대한 거침돌이라는 인식이 만연되면서 결투는 명예의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명예의 손상을 가져오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결투의 종식은 명예와 용기에 대한 새로운 개념의 등장과 상류층의 새로운 가치와 미덕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본 연구는 결투문화의 쇠퇴와 18-19 영국사회의 상류층의 미덕 변화와의 관계를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명예의 회복과 용기의 표현이 왜 더 이상 결투를 통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인가? 결투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명예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인가? 상류층에 명예와 용기보다 더 중시되는 덕목이 생긴 것은 아닌가? 본 연구는 이러한 질문들에 답해보고자 한다.
기대효과
1) 학문적 기여 이 연구는 영국사에서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기존학자들이 간과한 틈새를 연구한다는 점에서 기존 연구를 보완하는 작업이다. 결투 문화의 쇠퇴를 통해 어떻게 영국사회가 시민사회로 옮겨가는지를 살펴봄으로써 한 사회의 문화적 변화의 메 ...
1) 학문적 기여 이 연구는 영국사에서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기존학자들이 간과한 틈새를 연구한다는 점에서 기존 연구를 보완하는 작업이다. 결투 문화의 쇠퇴를 통해 어떻게 영국사회가 시민사회로 옮겨가는지를 살펴봄으로써 한 사회의 문화적 변화의 메커니즘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외에도 이 연구는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아니한 결투의 문화적 사회적 의미를 소개한다는 점에서 학문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2) 사회적 기여 본 연구는 인문학 연구이므로 특성상 연구결과를 사회적으로 활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의 주제는 여러 가지 이유로 폭력이 미화되고 폭력적 대결국면이 심한 우리나라의 문화적 특성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선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즉 노동운동이나 대중운동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폭력성을 법이나 제도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와 미덕을 통해 개선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통찰력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3) 교육과의 연계 활용 방안 본 연구는 이후 문화사적 주제를 연구하는 대학원 학생들에게 중요한 참고가 될 것으로 보인다. 결투는 영국에서만 일어난 현상이 아님으로 서양의 다른 나라의 결투에 대한 연구는 대학원 학생들의 학위 논문 주제로 이용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본 연구를 위해 구입된 사료들은 대학원생의 원사료 해석 능력 즉 원사료의 분석, 비판 능력을 배양하는데 사용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연구요약
(1) 서론 서론에서 본 연구는 결투가 상류층 문화 연구에 중요한 주제임을 밝히고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에 대한 분석을 해보고자 한다. 특히 지금까지의 연구가 결투의 원인에 집중된 만큼 원인에 대한 주장을 세밀히 분석하여 연구의 성과와 한계를 지적하고자 한다 ...
(1) 서론 서론에서 본 연구는 결투가 상류층 문화 연구에 중요한 주제임을 밝히고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에 대한 분석을 해보고자 한다. 특히 지금까지의 연구가 결투의 원인에 집중된 만큼 원인에 대한 주장을 세밀히 분석하여 연구의 성과와 한계를 지적하고자 한다. 그리고 본 연구는 결투에 대해 반대하는 논리의 발전과 역사적 상황에 대한 연구가 가지는 의미를 고찰할 것이다.
(2) 결투의 기원과 18-19세기 상황 결투가 중세적 기원을 지닌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본 연구는 중세 기사들이 사법적 판단을 위해 향한 결투와 근대 결투와의 비교를 통해 그 계통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또한 결투가 프랑스적 전통에서 유해한 것인 만큼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전파된 과정을 파악하고자 한다. 또한 18-19세기 영국에서 결투가 얼마나 많이 일어났으며, 어떠한 사회적 파정을 야기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3) 명예와 상류층 결투에 대한 반대 논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신사층이 명예를 얼마나 존중했으며, 어떠한 이유로 명예훼손을 당했으며, 이를 회복하기 위한 수단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특히 ‘거짓말쟁이’라는 비난이 가지는 의미를 세밀히 분석할 것이다. 또한 당시의 법정이 명예 훼손의 보상을 해결할 수 없었던 이유를 살펴볼 것이다.
(4) 명예회복의 개념변화: 폭력에서 미덕으로 결투라는 폭력은 명예회복의 수단이 아니라는 동시대 반론의 분석을 통해 결투에 대한 공공의 여론이 약화되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명예는 존중되어야 하는 중요한 자산이지만 이는 결투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논리의 수용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5) 명예에서 법과 종교로 결투의 종식은 명예의 개념변화가 아니라 명예에 대한 가치판단의 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후기 결투 반대론자들은 명예는 존중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할 교만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종교적 입장에서 명예를 보았고 명예를 악마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또한 결투를 통한 명예회복은 법에 대한 존중을 거부하는 것으로서 법치적 시민사회의 가치로 존속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음을 살펴볼 것이다.
(6) 결론
한글키워드
폭력의 정당화,상류층,명예의 회복,문명화과정,시민사회,종교적 가치,미덕,폭력,용기,기사도,권총에 의한 결투,결투,칼에의 결투
영문키워드
justification of violence,civil society,civilizing process,religious values,duel,viloence,satisfaction of honour,virtue,duel by sword,duel by pistol,upper class,the code of 'honour',courage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국문
1. 들어가는 말 결투는 16말 이탈리아로부터 잉글랜드에 도입되었다. 17세기 초 유행하던 결투는 17세기 중반 잉글랜드 혁명기와 공화정 시기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지만 왕정복고 이후 다시 유행하게 되었으며 18세기에 절정을 보였다. 그러나 결투는 18세기 말과 19 ...
1. 들어가는 말 결투는 16말 이탈리아로부터 잉글랜드에 도입되었다. 17세기 초 유행하던 결투는 17세기 중반 잉글랜드 혁명기와 공화정 시기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지만 왕정복고 이후 다시 유행하게 되었으며 18세기에 절정을 보였다. 그러나 결투는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급격한 쇠퇴를 보였고,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잉글랜드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명예를 위한 결투의 성장과 쇠퇴 과정은 상류층의 가치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이다. 2. 명예, 용기 그리고 결투 16세기 후반에 발달한 궁정예절을 통해 영국의 상류층은 정체성을 서로 확인 해주고 또 확인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타인으로부터 예절법칙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동을 접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가치와 정체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고 믿었다. 용기는 이를 회복하는 자질이었으므로 그들은 생명을 담보한 결투를 통해 신사로서의 자질을 다른 사람에게 증명하고자 하였다. 3. 17세기 결투반대운동 제도적으로 막으려 했으나 불가능했고, 반대논리 또한 결투가 근본적으로 성행한 이유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4. 17세기 결투반대운동 18세기는 상류층의 가치와 태도가 근본적인 변화를 보인 시기이다. 신사들은 여전히 명예를 존중했지만 그 명예를 성취하는 수단의 대한 생각은 바뀌었다. 18세기 신사들에게는 남성성이 아니라 정중함과 친절이 자신의 명예를 보장해주는 미덕이었다. 특히 이러한 시각의 변화에는 기독교적 가치관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5. 결투 문화의 변화와 쇠퇴 이 같은 변화는 결투의 형태에서의 폭력성의 감소로 나타났을 뿐 아니라 결투 그 자체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형태에서의 변화는 폭력성이 적어지는 방향으로 바뀌었고, 결투 자체에 대한 시각이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6. 나가는 말 결투는 법과 제도가 아니라 예절 개념의 변화를 통해 길들여진것이다.
영문
The Taming of the Duel: Anti-duelling Campaigns in the 17th and 18th century England.
The culture of the duel arrived in England in the 1570s. Except the civil war and the interregnum period, it became a popular cuture in the upper-class society th ...
The Taming of the Duel: Anti-duelling Campaigns in the 17th and 18th century England.
The culture of the duel arrived in England in the 1570s. Except the civil war and the interregnum period, it became a popular cuture in the upper-class society throughout the 17th and 18th century. It showed a dramatic decline in the early 19th century. No duel was heard from the mid-19th century. The growth and decline of the duel of honour is an important indication to show how the value of the upper class devloped, as it had existed exclusively in the upper class society. The English upper-class men used to give or to be given their identity through the courtsey and civility. When they met an improper courtsey they thought their honour or their reputatiion or their value as gentlemen was questioned. As a gentleman he was expected to show his value and reputation by edndangering his life. The skill of fencing was not a consideration in issuing a challenge for a duel. By a duel they thouht they could show their courage or defend their honour. Critics of duelling in the Jacobean period attempted to discourage the duel without success as they failed to understand what caused the duelling culture. However, the 18th century critics rightly forcused the empitiness of the ourward civility. The valued the inner civility which was based on the politeness and sincerity. They did not deny the importance of honour for gentlemen. However, they argued the true honour was nothing to do with the external civility. Therefore, the duel was caused by the mistaken notion of honour. This anti-duelling logic went along wtith the Christian ethics and the absolute monarchy. This explains why the way the dule was conducted changed to the direction of limited violence, end eventually the end of the duelling culture.
연구결과보고서
초록
명예를 위한 결투의 성장과 쇠퇴 과정은 상류층의 가치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이다. 16세기 말과 17세기의 잉글랜드 상류층은 자신의 명예를 가장 소중한 자산으로 삼고 있었다. 특히 16세기 후반에 발달한 궁정예절을 통해 그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
명예를 위한 결투의 성장과 쇠퇴 과정은 상류층의 가치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이다. 16세기 말과 17세기의 잉글랜드 상류층은 자신의 명예를 가장 소중한 자산으로 삼고 있었다. 특히 16세기 후반에 발달한 궁정예절을 통해 그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서로 확인 해주고 또 확인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타인으로부터 예절법칙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동을 접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그것을 심각한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경우 신사들은 어떤 비용을 치르고서라도 자신의 신사로서의 자격을 증명해야 될 필요가 있었다. 생명을 담보한 결투는 위태로워진 자신의 신사로서의 자질을 다른 사람에게 증명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신사는 자신의 싸움 기술이 아니라 용기를 통하여 자신의 신사로서의 자질을 증명할 수 있었다. 17세기 중반 잉글랜드 혁명기와 공화정 시기에는 결투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지만 왕정복고 이후 다시 유행하게 되었으며 18세기에 절정을 보였다. 그러나 결투는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급격한 쇠퇴를 보였고,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잉글랜드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결투의 쇠퇴는 결투를 막으려는 법적․제도적 조치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지속적인 단속과 처벌에도 불구하고 결투가 그토록 오래 지속되었다는 것은 법이나 제도가 큰 역할을 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투가 죽음을 담보하는 행동임을 생각할 때 결투에 임하는 자들이 법적 제재를 두려워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따라서 결투의 쇠퇴는 결투의 등장 원인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18세기는 상류층의 가치와 태도가 근본적인 변화를 보인 시기이다. 신사들은 여전히 명예를 존중했지만 그 명예를 성취하는 수단의 대한 생각은 바뀌었다. 16, 17세기의 신사들에게 자신들의 명예와 명성을 지키는 수단으로 용기를 보여주는 것이 매우 중요했지만 18세기 신사들에게는 남성성이 아니라 정중함과 친절이 자신의 명예를 보장해주는 미덕이었다. 특히 이러한 시각의 변화에는 기독교적 가치관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폭력이 아니라 친절함으로 자신의 명예를 성취할 수 있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결투의 형태에서의 폭력성의 감소로 나타났을 뿐 아니라 결투 그 자체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결투는 법과 제도가 아니라 개념변화를 통해 길들여졌다.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연구 결과 다음의 결론을 내릴 수 있다. 1, 결투는 16세기 이탈리아로부터 영국에 도입되었으며 상류층의 궁정예법과 관련된 문화이다. 2. 상류층 남성은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타인으로부터의 정중한 대우에서 찾고자하였으며, 그렇지 못한 행동은 자신의 지위와 가치 ...
연구 결과 다음의 결론을 내릴 수 있다. 1, 결투는 16세기 이탈리아로부터 영국에 도입되었으며 상류층의 궁정예법과 관련된 문화이다. 2. 상류층 남성은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타인으로부터의 정중한 대우에서 찾고자하였으며, 그렇지 못한 행동은 자신의 지위와 가치에 대한 의문의 제기로 수용되었다. 3. 신사는 결투로서 자신의 가치에 제기된 의문에 대답하고자 하였다. 4. 결투 반대 운동은 법적, 제도적 조치가 아니라 예절의 개념에 대한 의문제기에 집중했다. 5. 결투반대 운동은 외적 형식에 근거한 궁정 예절은 진정항 의미의 예절이 아니라 진정한 겸손과 내면에서 나오는 참된 예정을 강조하였다. 외적예절에 의한 명에훼손이라는 것은 거짖된 개념이며, 진전한 명예는 외적 형태의 예절에 의해, 즉 타인에 의해 주어지는것이 아니다고 강조하였다. 6 그들은 결투의 억제를 통해 예정 개념을 바꾸고, 예절 개념의 변화를 통해 결투를 억제하려고 하였다. 7. 결투 반대운동은 결투 형태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폭력성과 사망율의 감소를 가져 왔고 궁극적으로는 결투의 종말을 가져왔다.
한 사회계층의 문화 변화는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6-18세기 상류층 문화인 결투의 변화과정은 이러한 영국 상류층의 예절과 명예에 대한 가치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 연구결과의 활용방안은 다음과 같다. 1. 이 연구는 특 정 계층의 문화와 그 그 계층이 가지는 정체성과의 관계를 파악하는 메카니즘을 제시하고 있다. 2, 연구결과를 통해 문화의 변화는 경제나 제도나 법보다는 가치관의 변화속에서 볼 수 있는 연구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활용방안
이 연구결과는 이후의 문화사 연구에 기초로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사려된다.
색인어
결투, 명예, 예절, 명성, 모욕, 폭력, 친절, 상스, 이탈리아, 영국, 잉글랜드, 16세기, 17세기, 18세기, 칼, 권총, 궁정에절, 정중함, 친절, 상류층 문화, 신사, 결투의 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