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퓌론주의와 근세 철학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학문후속세대양성_학술연구교수& #40;인문사회& #41;
연구과제번호 2007-358-A00026
선정년도 2007 년
연구기간 3 년 (2007년 09월 01일 ~ 2010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황설중
연구수행기관 원광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16세기 이후 서구 근세 철학의 주요한 특징은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고대 퓌론주의의 논변 이론의 지평 위에서 움직였다는 데에 있다. 일단 퓌론주의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자 근세 철학은 그것의 영향권 밖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었다. 근세 철학은 어떤 식으로든 고대 퓌론주의자들이 제기한 (특히 인식론과 관련한) 문제들을 처리해야 하였다. 퓌론주의에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간에 근세 철학의 화두 가운데 하나는 “퓌론주의와 어떤 관계를 설정할 것인가?”하는 것이었다. 퓌론주의에 대한 특정한 응답과 태도가 바로 그 철학의 정체성을 드러내 주는 지표가 되었다. 근세 철학의 전개는 포프킨의 표현을 빌자면 퓌론주의로 가는 신작로(新作路)였던 셈이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를 통해서 근세 철학자들은 고대 회의주의가 지니고 있는 무소불위의 위력을 더욱 실감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것의 인력(引力) 안으로 점점 빨려 들어갔다. 이런 측면에서 고대 퓌론주의야말로 근세 철학의 전개에 있어 ‘의심’의 드라마를 이끌고 나간 주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16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동안 근세 철학의 고유한 문제틀의 형성과 해결 방식은 퓌론주의와의 투쟁의 유산이며, 그런 투쟁 속에서 퓌론주의를 일정 부분 인정하게 되는 과정의 소산이다. 고대 회의주의가 부활하고 그것이 근세 시대의 지적이며 종교적인 문제들에 적용된 것이야말로 근세 철학의 발흥에 결정적인 것이었다. 요컨대 근세 철학과 퓌론주의는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제 피할 수 없는 문젯거리로서 등장한 ‘퓌론주의와의 관계 설정’의 과제 앞에서 근세 철학자들은 어떤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제각각 자신의 철학과 관련하여 퓌론주의를 변호하든가 아니면 퓌론주의를 반박해야 했다. 그리고 이런 대립은 종국에는 근세 철학자들로 하여금 “과연 퓌론주의의 논변 이론이 효력을 미치는 범위는 어디까지인가?”를 탐색하도록 만들었다. 회의주의를 계승하려는 혹은 극복하려는 모든 근세 철학의 기획은 퓌론주의의 논변을 가로 지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근세 철학의 고유한 특질과 이론의 발전적 흐름을 온전히 파악하려면, 근세 철학자들이 퓌론주의를 사이에 두고 벌인 팽팽한 경쟁과 긴장의 이중주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연구자는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에 의해 집대성된 퓌론주의야말로 근세 철학의 주요한 특징과 이론적 발전의 필요성을 통찰할 수 있는 하나의 핵심적인 통로라고 생각한다. “근세 철학이 퓌론주의와 맺고 있는 관계”가 바로 연구자의 주제이다. 구체적으로 연구자는 한편으로는 퓌론주의를 대표적으로 변호하려 했던 시도로서 프랑스 신앙주의와, 다른 한편으로는 (퓌론주의를 자체 내에 품음으로써) 퓌론주의의 도전을 극복하려 했던 정점에 선 근세 철학의 시도로서 독일 관념론을 탐구하고자 한다. 퓌론주의를 변호하거나 극복하려는 대표적인 양 극단의 기획을 동시에 살펴봄으로써 연구자는 “퓌론주의와 근세 철학이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합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시각을 획득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고대 퓌론주의에 대한 근세 철학의 대응을 고찰함으로써 연구자는 퓌론주의의 현재성 생명성과 철학적 중요성을 부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장되다시피 한 헬레니즘 철학에 대한 관심도 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퓌론주의와 근세의 신앙주의가 맺고 있는 관계를 탐구함으로써 연구자는 소위 ‘이성의 시대’에 어떻게 (얼핏 이성과는 대립되는) ‘신앙의 시대’가 버젓이 병존하고 각축을 벌일 수 있었는가?”를 해명하려 한다. 신앙주의는 퓌론주의의 철학적 의심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반신앙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저항력을 기를 수 있었다. 퓌론주의와 신앙주의의 밀월 관계는 회의주의에 대한 극복의 맥락에서만 근세 철학사를 해독하는 작업이 매우 일면적임을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연구자는 퓌론주의를 반박하려는 시도가 관심의 초점이 되었던 “17세기 이후에도 어떻게 신앙주의가 근세 철학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전형적인 단서를 확보하려 한다.
    ‘퓌론주의에 대한 관계 설정’에서 흄이 던져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칸트와 헤겔이 이룩한 이론의 발전 과정은 (흄 철학뿐만 아니라) 칸트의 비판 철학과 헤겔의 사변 철학의 고유한 특성을 규정짓는 결정적인 지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퓌론주의에 대한 대응의 난점을 극복해 가는 일련의 연속적인 과정으로서 칸트와 헤겔 철학을 구명(究明)함으로써, “왜 흄에서부터 칸트를 거쳐 헤겔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는가?”하는 철학적 전개의 필연성을 연구자는 분명하게 제시하고 싶다.
  • 기대효과
  • (1) 무엇보다 본 연구는 철학적 회의주의에 대한 총체적인 시각뿐만 아니라 회의주의와 관련된 논의에서 하나의 준거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근세 철학사의 진행 과정을 통해 철학적 회의주의에 대한 대응 방안이 모색될 수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회의주의 일반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적지 않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회의주의는 철학사에서 항상 등장했고 앞으로도 등장할 수밖에 없는 형식적 보편성의 위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이론이 발생하게 된 시대적 제약을 넘어서서 광범위한 적용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퓌론주의에 대한 근세 철학의 상이한 대응방식의 고찰은 각각의 대응방식에 대한 부분적인 분석을 넘어서서 회의주의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을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회의주의와 관련된 논의에서 하나의 준거점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연구의 성과는 회의주의 일반에 대한 범위와 타당성에 대한 효력 조건의 추출로까지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2) 우리나라에서는 완전히 사장되어 버린 고대의 회의주의, 특히 퓌론주의에 대한 철학적 중요성과 현재성을 환기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연구자가 수행할 퓌론주의와 근세 철학 간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회의주의와 관련된 논의에 있어서 고대 퓌론주의의 논변이론들이 지니고 있는 철학적 중요성과 그것들의 광범위한 적용가능성을 인지하도록 만들 수 있다. 사실상 보편적이고 가장 정치한 수준에서 회의주의의 이론은 고대 퓌론주의자들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이후의 모든 회의주의의 이론 형태들은 고대 퓌론주의 논변이론의 반복이나 변형태라고 볼 수 있다. 퓌론주의자들의 회의적 논변형식들이 철학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그것들이 단순히 회의주의의 논의를 위한 주석적 참고의 기능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철학적 지식 일반의 정초 가능성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퓌론주의를 둘러싸고 벌어진 근세 철학 간의 공방은 오히려 퓌론주의의 물음의 현재적 유효성을 보여줄 것이다. 퓌론주의의 논변이론(뿐 아니라 헬레니즘 시대의 경쟁적인 다른 철학 학파들)은 국내에서 전혀 주목받고 있지 못하며, 이것은 (적어도 회의주의의 이론에 대한 논의와 관련하여) 상당한 지적인 손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퓌론주의를 두고 근세 철학들 간에 형성된 대립 관계에 대한 검토는 이런 손실에 대한 자각뿐 아니라 퓌론주의자들이 제기한 인식론적 난제에 대한 철학적 의의를 상기시켜 줄 것이다.
    (3) 퓌론주의를 변호하거나 반박하려는 근세 철학의 시도는 정점에 이른 근세 철학들의 기획과 핵심적인 개념들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퓌론주의에 대한 관계 설정’이라는 구체적인 문제의식을 통해 근세 철학을 들여다봄으로써 그 철학들이 지니고 있는 여러 개념들이 회의주의를 극복하려는 시도와 관련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학문적 동기에 대한 이해는 이 철학들을 단순히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수준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지식의 정초 가능성 여부를 둘러싼 긴급한 처방의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런 구체적인 주제 하의 담론의 확보는 신앙주의자뿐만 아니라 흄과 칸트 헤겔 철학이 지닌 사유 구조를 좀 더 명시적으로 포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말하자면 ‘퓌론주의에 대한 대응’이라는 문제틀로 근세 철학을 분석함으로써 “왜 근세 철학이 흄과 칸트를 거쳐 헤겔의 사변 철학으로 전진해야 했는가?”에 대한 철학사적 진행의 필연성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4) 연구자는 퓌론주의에 대한 대응을 살펴보는 가운데 회의주의자들의 이론에 관한 간략한 역사뿐 아니라 근세 철학 일반의 특징에 관하여 정리된 서술을 할 것이다. ‘퓌론주의에 대응하는 근세 철학의 이론적 발전’이라는 틀로 근세 철학의 흐름을 파악한 작품은 발견하기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본 연구는 회의주의와 근세 철학을, 특히 흄과 칸트와 헤겔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안내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연구자는 퓌론주의자들이 제기한 특정한 철학적 물음들에 대한 답변이 어떤 형태로 변환되어 갔는가를 해명함으로써, 퓌론주의와 관계를 맺고 있는 근세 철학 각각의 이론 형태에 매몰되지 않는 폭넓은 시야를 제공할 수 있다. 연구자는 본 연구가 “어떻게 철학적 문제가 전승되어 가고 해결되어 가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전범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근세 철학의 전반적인 흐름에 관한 또 다른 관점에서의 개설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 연구요약
  • 몽테뉴로부터 샤롱을 거쳐 파스칼과 베일로 이어지는 철학자들은 -엄격히 말하면 근세의 신앙주의자들은- 고대 퓌론주의자들이 구사한 철학적 의심의 기술(技術)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변호한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그들이 내세운 신앙주의(fideism)에 의하면, 신앙을 향한 갈구(渴求)는 먼저 우리 인간이 사물의 본성과 관련하여 얼마나 무지(無知)한가를 뼈저리게 인지하는 데서 출발한다. 일견 신앙과 대립적인 것으로 보이는 회의적 논변들을 이용하여 오히려 신앙을 변호하였다는 점에서 근세의 신앙주의자들은 퓌론주의자와 특히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와 깊은 유대를 맺고 있다. 그들은 퓌론주의자들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사실상 신앙주의자들에게는 퓌론주의자가 자리 잡고 있는 이론적 수준과 동일한 수준에서 퓌론주의의 논변을 극복하려는 시도는 헛수고라는 반성적 전제가 깔려 있다. 지식의 왕국에서는 퓌론주의자의 감시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했기 때문에, 근세의 신앙주의자들은 신앙에서 돌파구를 찾았던 것이다.
    그런데 신앙주의는 퓌론주의의 함정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전무(全無)하다는 점이 인식론적으로 밝혀질 경우에만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만약 퓌론주의의 공격에 견뎌낼 수 있는 최소한의 인식론적 방어망이 가능하다면, 즉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어떤 것을 인간의 능력에서 확보할 수 있다면, 신앙을 향한 도약은 순탄치 않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신앙주의는 퓌론주의에 대한 종결점이 아니라 오히려 “퓌론주의에 대한 이론적 대응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본격적인 인식론적 물음의 장(場)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데카르트를 위시하여 근세를 대표하는 (합리론과 경험론의) 철학자들은 퓌론주의가 더 이상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최후의 궁극적인 지점을 인식론에서 확보하려는 작업에 매달렸다. “절대적으로 확실한 지식의 토대를 확보할 수 있는가?”라는 근세 철학의 기본적인 문제틀은 아그리파의 트로펜의 공격을 방어하려는 맥락과 떼어 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이 퓌론주의를 원용한 궁극적인 이유도 결국은 퓌론주의를 극복하거나 지양하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사유에서건 감각에서건) 지식의 가장 확실한 토대를 찾으려는, 적어도 흄 이전의 근세 철학자들의 시도는 퓌론주의를 극복하기는커녕 아그리파의 트로펜에 의해 난파당한다. 아그리파의 트로펜을 격퇴하려는 근세 철학의 기획이 오히려 아그리파의 회의적 논변형식들의 손쉬운 공격대상으로 전락한 주요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보편적인 범주들로 구성된 퓌론주의의 논변형식들의 추상적 수준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데에 있다. 퓌론주의 논변의 철학적 진의를 천착하지 못한 채 독단적으로 대응함으로써 근세 철학은 곧바로 퓌론주의에 의해 되치기를 당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 점에 근세 철학들이 근원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비판 받는 하나의 주된 요인이 놓여 있다. 퓌론주의에 대해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퓌론주의에 대한 무시나 왜곡이 아니라) 먼저 퓌론주의가 난공불락이 된 원인과 그것의 철두철미한 학문적 의심의 수준에 관한 자각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점이 비로소 흄에 의해 밝혀졌다. 그리고 이런 반성은 칸트와 헤겔에 의해 생산적으로 계승되었다.
    칸트와 헤겔은 퓌론주의에 대하여 일방적인 승리를 획득할 수 없음을 흄과 더불어 깨달았다. 그들은 퓌론주의에 대한 완전한 극복의 가능성이란 전무(全無)하며, 따라서 퓌론주의자들이 지배하는 일정한 영역을 인정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근세 철학사를 통해 자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특정한 조건 하에서 퓌론주의가 갖는 효력을 인정한 까닭은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퓌론주의의 효력 범위를 제한할 수 있고 나아가 퓌론주의를 (부분적으로) 무력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초점은 철학적 의심의 제거가 아니라, 인식론에서 결코 극복할 수 없는 “퓌론주의의 트로펜이 철학에서 담당하는 역할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데로 옮겨 갔다. 그들의 철학은 비록 그 방식은 달랐지만, 퓌론주의에 대한 대응과 관련하여 그들 이전의 근세 철학이 지닌 한계를 경험하고 난 후 퓌론주의와 이론적 공존을 모색하려 했던 매우 그럴 듯한 시도로 간주될 수 있다.
  • 한글키워드
  • 이율배반,물자체,본질,현상,사변 철학,퓌론주의,아그리파,파스칼,선험 철학,독단주의,헤겔,흄,베일,칸트,경험론,신앙주의,판단중지,트로펜,비판 철학,회의주의,몽테뉴,아에네시데모스,섹스투스 엠피리쿠스,변증법
  • 영문키워드
  • Antinomy,Tropen,Critical Philosophy,Speculative Philosophy,Kant,Empiricism,Hume,Bayle,Pascal,Montaigne,Fideism,Transcendental Philosophy,Scepticism,Dogmatism,Hegel,Apperance,Thing in itself,Dialectics,Essence,Suspension of Judgement,Sextus Empiricus,Agrippa,Aenesidemus,Pyrrhonism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16세기 이후 서구 근세 철학의 주요한 특징은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고대 피론주의의 논변 이론의 지평 위에서 움직였다는 데에 있다. 일단 피론주의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자 근세 철학은 그것의 영향권 밖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었다. 근세 철학은 어떤 식으로든 고대 피론주의자들이 제기한 문제들을 처리해야 했다. 피론주의에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간에 근세 철학의 화두 가운데 하나는 "피론주의와 어떤 관계를 설정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피론주의에 대한 특정한 응답과 태도가 바로 그 철학의 정체성을 드러내 주는 지표가 되었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를 통해서 근세 철학자들은 고대 회의주의가 지니고 있는 무소불위의 위력을 더욱 실감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것의 인력(引力) 안으로 점점 빨려 들어갔다. 이런 측면에서 고대 피론주의야말로 근세 철학의 전개에 있어 ‘의심’의 드라마를 이끌고 나간 주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16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동안 근세 철학의 고유한 문제틀의 형성과 해결 방식은 피론주의와의 투쟁의 유산이며, 그런 투쟁 속에서 피론주의를 일정 부분 인정하게 되는 과정의 소산이다. 요컨대 근세 철학과 피론주의는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본 연구의 주제는 바로 "피론주의가 근세 철학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고찰이다. 거의 모든 근세 철학자들은 회의주의의 파탄을 모면하고 철학의 굳건한 토대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본 연구에서는 피론주의를 대표적으로 변호하면서 피론주의를 극복하려 했던 시도로서 프랑스 신앙주의와, 다른 한편으로는 피론주의의 도전에 대한 가장 정치한 시도로서 독일 관념론을 탐구하고자 한다. 피론주의를 물리치기 위해 몽테뉴와 칸트, 헤겔이 시도한 철학적 기획은 피론주의를 극복하려는 가장 대표적이면서도 전형적인 근세 철학의 이론들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이 연구는 인식론과 관련하여 근세 철학의 가장 특징적인 면을 드러내 줄 수 있고, 인식론 일반과 관련해서도 생산적인 시사점을 마련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피론주의를 극복하려는 양 극단의 기획(신앙주의와 관념론)을 동시에 살펴봄으로써 "피론주의와 근세 철학이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합적으로 조망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 영문
  • It is now apparent that the ancient pyrrhonism was established as a permanent feature on the intellectual map of modern Europe at the time of Montaigne. The rediscovery and the reassimilation of the Sextus Empiricus writings had an significant impact on the development of modern philosophy, and in especial The Essays of Montaigne did. This book made modern thinkers recognize the power of pyrrhonian argumentations. Among many traditional fideists Montaigne was remarkable in the topicalization of philosophical ground in fideism using by ancient pyrrhonian argumentations. Entirely depending on pyrrhonists, he showed the reason why we could not know the real nature of things and why we had to take the position of faith. The Essays suggested that the question of "how the age of faith was coexistent in the so-called the age of reason" could not be sufficiently explicated without referring to pyrrhonism. Above all, it pointed out the way of solving a difficult philosophical problem, "what is an appropriate relation to pyrrhonism ", "how we overcome skepticism ". I think that we can not appreciate the philosophical significance of Montaigne's thought unless we consider that he had modern philosophers pay attention to the outside of knowledge in responding to sceptical challenge.

    It is needless to say that Kant was trying to overcome scepticism. Hume disclosed a scandal of philosophy and universal human reason. According to him, we could have only high probable knowledge, never absolutely necessary and universal one. How to remove the scandal of philosophy was the difficult business of the critique of reason itself. Hume awakened Kant from his dogmatic slumber. But above all, it were pyrrhonian antinomies that awakened kant from his dogmatic rest and philosophy from its dogmatic slumber. Antinomies are the apparent conflicts between thesis and antithesis. Both stand in opposition with equally plausible principles of pure reason. Antinomies are philosophical conflicts that cannot be avoided and solved in principle by any dogmatic assertions. By the way, these were the philosophical skills that the ancient pyrrhonists contrived to make an attack against dogmatists who claimed to discover the truth. So, Kant had to build a theory invulnerable not only to Hume's modern scepticism but also to ancient pyrrhonism. This defence network was the so-called transcendental philosophy of Kant. Kant answered Hume with his transcendental idealism and empirical realism. And he refuted pyrrhonists by solving antinomies. They are, in fact, the mistake of extending what holds merely for appearances to things in themselves. In short, false illusions. But pyrrhonists are not likely to be satisfied with the Kant's response to scepticism. It was Hegel who got pyrrhonist's revenge on Kant. Hegel thought that Kant failed to take the core of pyrrhonian scepticism sufficiently into account. Seeing Kant's failure, Hegel recognized that a philosopher must solve the contradiction of logical concepts to overcome pyrrhonism.

    Kant was proud of solving the problem of pyrrhonism. But Hegel don't agree with Kant. For Kant didn't find the way how to treat the contraction of concepts. Hegel recognizes the theoretical core of pyrrhonian argumentations by trancendental Kant philosophy. The most important thing to overcome the pyrrhonian challenge is to observe the movement of concepts themselves and to describe the 'Aufhebung' of opposite concept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피론주의는 헬레니즘 시대를 지나 로마 제국까지 지속되고 번성하였지만 기독교와 영지주의(靈知主義)가 부상하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기독교의 권위가 너무 강해서 피론주의는 독자적으로 존립할 수 없었으며, 중세 시대 전반에 걸쳐 피론주의의 존재는 아주 미미하였다. 이 고대의 회의주의가 철학적 관심의 주된 대상으로 다시 떠오른 때는 르네상스 시기이다. 후기 르네상스에 들어서면서 고대 피론주의는 헬레니즘 시대에서 그것이 원래 누렸던 것보다 더한 전성기를 누렸으며 더욱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피론주의에 대한 철학적 관심을 촉발시킨 직접적인 요인은 종교개혁이었다. 종교적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는 신학적 관심으로부터 시작된 진리 기준의 문제가 점차 철학적 지평으로 이전할 수 있었던 실질적인 계기는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저작의 (우연한) 발견과 번역에 있었다. 1562년 앙리 에스티엔느에 의해 최초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피론주의의 개요』가 라틴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고, 1591년에는 영어 번역본이 간행되었다. 이렇게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저작들이 16세기 후반기에 들어서서 본격적으로 번역되고 출판되자, 종교적 지식의 기준에 대한 정당화를 둘러싸고 벌어진 싸움은 곧 고대 피론주의자들이 주제화했던 지식 일반의 정초 가능성 문제와 연결되어 철학적 공박으로 확대되었다. 이 외에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일어난 피론주의의 부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요인은 몽테뉴가 저술한 『수상록』에 있었다. 『수상록』의 중심부에 놓여 있고 이 책의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레이몽 스봉의 변호」에서 몽테뉴는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피론주의를 완전히 흡수해서 “얼마나 이 고대의 회의주의가 인간의 지성으로는 풀 수 없는 인식론적 난제들을 던져 주었는가?”를 설득력 있게 개진하였다. 「레이몽 스봉의 변호」의 영향 하에서 샤롱이나 까뮈와 같은 일군(一群)의 새로운 피론주의자들이 생겨났으며, 17세기 초에는 소위 ‘피론주의자의 위기’가 조성되었다.
    16세기 이후 서구 근세 철학의 주요한 특징은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고대 피론주의의 논변 이론의 지평 위에서 움직였다는 데에 있다. 일단 피론주의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자 근세 철학은 그것의 영향권 밖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었다. 근세 철학은 어떤 식으로든 고대 피론주의자들이 제기한 (특히 인식론과 관련한) 문제들을 처리해야 했다. 피론주의에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간에 근세 철학의 화두 가운데 하나는 “피론주의와 어떤 관계를 설정할 것인가?”하는 것이었다. 피론주의에 대한 특정한 응답과 태도가 바로 그 철학의 정체성을 드러내 주는 지표가 되었다. 근세 철학의 전개는 포프킨의 표현을 빌자면 피론주의로 가는 신작로(新作路)였던 셈이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를 통해서 근세 철학자들은 고대 회의주의가 지니고 있는 무소불위의 위력을 더욱 실감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것의 인력(引力) 안으로 점점 빨려 들어갔다. 이런 측면에서 고대 피론주의야말로 근세 철학의 전개에 있어 ‘의심’의 드라마를 이끌고 나간 주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16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동안 근세 철학의 고유한 문제틀의 형성과 해결 방식은 피론주의와의 투쟁의 유산이며, 그런 투쟁 속에서 피론주의를 일정 부분 인정하게 되는 과정의 소산이다. 포프킨은 “고대 회의주의가 부활하고 그것이 근세 시대의 지적이며 종교적인 문제들에 적용된 것이야말로 근세 철학의 발흥에 결정적인 것이었다”고 단정 짓고 있다. 요컨대 근세 철학과 피론주의는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제 피할 수 없는 문젯거리로서 등장한 ‘피론주의와의 관계 설정’의 과제 앞에서 근세 철학자들은 어떤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제각각 자신의 철학과 관련하여 피론주의를 변호하든가 아니면 피론주의를 반박해야 했다. 그리고 이런 대립은 종국에는 근세 철학자들로 하여금 “과연 피론주의의 논변 이론이 효력을 미치는 범위는 어디까지인가?”를 탐색하도록 만들었다. 회의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지식을 정초하려는 모든 근세 철학의 기획은 피론주의의 논변을 가로 지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근세 철학의 고유한 특질과 이론의 발전적 흐름을 온전히 파악하려면, 근세 철학자들이 피론주의를 사이에 두고 벌인 팽팽한 경쟁과 긴장의 이중주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자면 근세 철학을 통찰할 수 있는 틈은 바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에 의해 집대성된 피론주의인 것이다. 피론주의에 대한 근세 철학자들의 대표적인 대응 작업을 살펴보려는 본 연구는 근세 철학의 인식론적 특징을 다각도로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회의주의와 관련하여 인식론과 관련해서도 전체적인 대응의 지도를 마련할 수 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근세 철학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는 관건으로서 "피론주의와 근세 철학이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연구자의 탐구는 다음과 같은 "학문적 가치 및 학문의 균형 발전, 학문적 파급 효과 및 교육과의 연관성"을 가질 것으로 기대된다.
    (1) 철학적 회의주의로서 피론주의에 관한 연구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국내에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아가 피론주의와 근세 철학이 맺고 있는 매우 긴밀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이 관계를 체계적으로 천착한 연구는 별로 없다. 피론주의에 대한 근세 철학의 대응을 고찰함으로써 본 연구는 피론주의의 현재성 생명성과 철학적 중요성을 부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장되다시피 한 헬레니즘 철학에 대한 관심도 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아펠과 알버트 간에 벌어진 최근 논쟁은 여전히 피론주의의 도전과 대응이 생산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2) 피론주의와 근세의 신앙주의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연구는 소위 ‘이성의 시대’에 어떻게 (얼핏 이성과는 대립되는) ‘신앙의 시대’가 버젓이 병존하고 각축을 벌일 수 있었는가 "를 해명해 줄 수 있다. 신앙주의는 피론주의의 철학적 의심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반신앙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저항력을 기를 수 있었다. 피론주의와 신앙주의의 밀월 관계는 회의주의에 대한 극복의 맥락에서만 근세 철학사를 해독하는 작업이 매우 일면적임을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이 연구는 피론주의를 반박하려는 시도가 관심의 초점이 되었던 "17세기 이후에도 어떻게 신앙주의가 근세 철학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었는가 "에 대한 전형적인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3) ‘피론주의에 대한 관계 설정’에서 흄이 던져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칸트와 헤겔이 이룩한 이론의 발전 과정은 (흄 철학뿐만 아니라) 칸트의 비판 철학과 헤겔의 사변 철학의 고유한 특성을 규정짓는 결정적인 지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피론주의에 대한 대응의 난점을 극복해 가는 일련의 연속적인 과정으로서 칸트와 헤겔 철학이 구명(究明)될 때, "왜 흄에서부터 칸트를 거쳐 헤겔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철학적 전개의 필연성이 분명하게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4) ‘피론주의의 도전에 대한 대응’의 관점에서 근세 철학을 바라볼 경우, 근세 철학사에서 지속되어 온 주요 쟁점들을 새롭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준거점을 얻을 수 있다. 근세 철학을 관통하는 ‘피론주의에 대한 관계 설정’의 관점에서 근세 철학을 분석하고 정리해 냄으로써, 본 연구는 근세 철학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참고서로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5) 피론주의에 대해 정점에 이른 근세 철학의 대응책은 회의주의 일반의 논의에서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할 수 있다. 피론주의에 대한 상이한 철학적 대응들을 비교하고 조망함으로써 회의주의와 연계된 모든 논의에 있어서, 특히 인식론에 있어서 생산적 대화를 위한 하나의 지침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 연구는 회의주의 논변 형식들의 일반적인 효력 조건을 밝혀줄 수 있을 것이다.
  • 색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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