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중국의 중세 불교미술사의 한 장르로서, 10-14세기의 불사리장엄을 종합적으로 고찰한 국내에서의 첫 연구이다. 이 시기의 사리장엄에 대해서는 국내외의 연구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연구는 새로운 미술사의 영역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사리장 ...
본 연구는 중국의 중세 불교미술사의 한 장르로서, 10-14세기의 불사리장엄을 종합적으로 고찰한 국내에서의 첫 연구이다. 이 시기의 사리장엄에 대해서는 국내외의 연구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연구는 새로운 미술사의 영역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사리장엄구는 불교 미술품 중에서도 가장 수준높은 공양자들에 의해서 후원을 받아 제작되었기 때문에, 당시 미술 양식과 공예 제작기술을 잘 반영하고 있다. 또한 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들은 출토지와 제작연대가 확실한 경우가 많아서, 중국 중세 미술의 기준작이 되는 예들이 많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리장엄구에 대한 연구는 당시 불교미술 및 공예, 불교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본 연구에서는 중국 북방 유목민족들의 왕조인 요, 금대의 사리장엄구, 중원 지역 한족의 왕조인 북송대의 사리장엄구, 강남지역으로 이동했던 한족의 남송대 사리장엄구, 몽골인의 왕조인 원대 사리장엄구, 중국 서남부에 위치한 대리국의 사리장엄구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지역별, 시대별 사리장엄 방식의 특징으로 자세하게 고찰하였다.
현재까지 출토된 요대의 사리장엄구 및 관련 유물은 모두 74건에 달하며, 금대의 사리장엄구 및 관련 유물은 모두 15건이다. 요대에는 당대 오대산 불교와 시대의 법사리신앙의 영향을 받으면서 사리신앙이 발전하였다 특히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나 불정존승다라니경과 같은 법사리신앙의 발달, 의궤의 다라니를 새긴 경당의 매납, 팔대영탑 및 밀교 존상들의 표현 등이 독특한 양식이다. 또한 요나라의 흥종이나 도종은 사리장엄과 탑 건립을 크게 후원하여, 왕실 발원 사리장엄구가 많은 점도 주목된다.
북송대의 사리장엄구 및 관련 유물은 현재까지 38건이 알려져 있는데, 지역마다 형식이 조금씩 다른 탑형사리장엄구가 사리장엄구로 등장하며, 도자기와 유리기, 칠기가 주요 사리장엄구의 소재로 사용되는 점이 특색이다. 또한 금은기가 사리장엄구의 주요 소재로 사용되는 앞 시대인 당대나, 동시대의 요대와는 달리, 칠기, 도자기, 유리기가 사리장엄구의 주요 소재로서 등장한다. 이러한 칠기와 도자기의 사용 빈도 증가는 동시대 공예 기법의 발달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요대와 북송대와는 달리, 남송대의 사리장엄구는 현재 5건만이 알려져 있어서 사리장엄의 예가 급격하게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양적 쇠퇴는 아직까지 남송대의 불탑 조사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북송말부터 송나라의 황실에서 불교보다 도교를 우위에 두는 종교 정책을 시행한 점과 깊은 관계가 있다. 특히 휘종 연간의 훼불 정책들은 북송말 남송초의 사리장엄의 쇠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 중세기에 서북쪽에 위치했던 서하와 서남쪽에 위치했던 대리국은 각각 별도의 이민족 국가로서, 사리장엄에서도 지역적 특색이 많이 보여 주목된다. 대리국시대의 사리장엄구는 현재까지 7건 정도가 알려져 있는데, 불상과 범문인전 등이 다량으로 발굴되며, 금강저와 같은 밀교법구도 종종 공양품으로서 발견된다. 이러한 예들은 인도와 티벳, 동남아시아 지역의 불교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일 가능성이 있다. 한편 서하의 사리장엄구는 불탑 이외의 구체적인 사리장엄의 예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독특한 복발탑식의 불탑 형태나 탑내 출토품으로 전하는 범문인전 등의 존재로 보아, 인도나 티벳계 불교 미술의 영향을 찾아 볼 수 있다.
몽골인들에 의한 이민족 왕조인 원나라에서도 불교를 받아들였으며, 원나라 세조는 새로운 수도 북경을 건설할 때에 요나라의 탑에서 진신사리를 발굴하여 공양한 후, 새로운 탑을 세웠다. 이때 세워진 북경 백탑사의 백탑은 중국에서는 최초로 네팔,티베트의 복발탑 형식을 따른 탑이다. 여러 원대 문헌기록에 의하면, 이 탑의 내부에는 각종 만다라와 밀교 도상, 향탑 등을 봉안했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탑 내부가 조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문헌기록의 사실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원대부터 본격적으로 네팔, 티베트계 불교 미술 양식이 전래되면서, 기존의 사리장엄 방식도 크게 변화된 것으로 추정되며, 명청대의 사리장엄구 형식으로 발전한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