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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고려전기 축성의 특징과 치소성의 형성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우수논문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07-325-A00024
선정년도 2007 년
연구기간 1 년 (2007년 12월 01일 ~ 2008년 11월 30일)
연구책임자 최종석
연구수행기관 서울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고려시기-정확히 고려말 이전- 치소가 위치한 성[치소성]은 조선시기에 치소 역할을 한 성[읍성]과 이질적이었고, 치소성의 분포 양상 역시 읍성과 상이하였다. 즉 읍성은 대개 평지에 축조되거나 평지와 구릉을 연결하여 쌓는 등 기본적으로 평지를 토대로 축조되었다. 이와 달리 치소성은 평지에 연접한 높지 않은 산에 위치하고 있었다. 또한 읍성은 외관청이 위치한 성으로 지방관이 파견된 주현에만 설치된 반면, 고려시기의 치소는 향리층의 집무소인 읍사를 의미하였고, 치소성은 주현과 속현 구분 없이 설치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읍성은 일부 주현에만 설치되어 있었고, 이러한 읍성들조차 하삼도와 강원도 연해 지역 및 북쪽 국경 지대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와 달리 치소성은 주현과 속현, 양계와 남도 지역의 구분 없이 일반적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이처럼 조선시기 읍성 및 그 분포 양상과 뚜렷이 구분되는 고려시기 치소가 위치한 성 및 그 분포가 어떠한 방식과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고 언제 성립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본고의 연구 목표이다. 그리고 본 연구는 고려 치소성의 공간적 특징과 분포 양상을 검토한 '고려시기 治所城의 분포와 공간적 특징'(역사교육95, 2005), '조선초기 城隍祠의 立地와 治所'(동방학지131, 2005)의 후속 작업의 성격이 짙다. 이들 연구에서는 치소가 위치한 성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고려시기 치소가 위치한 성이 지닌 역사적 성격을 어느 정도 규명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성의 형성 과정을 검토하지 못한 결과 고려 치소성을 구조적이고 정태적으로 이해하는 데 그치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이와 같은 기존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의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고려 치소성의 형성 문제에 대한 검토를 통해 고려 치소성의 역사적 성격을 보다 명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기대효과
  • 본 연구의 기대 효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삼국·통일신라 시기 치소가 위치한 성에 대한 연구 활성화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본 연구는 고려 치소성의 존재 및 분포 양상을 통일신라 시기 치소가 위치한 성과 밀접하게 연관하여 검토하고 있어, 삼국·통일신라 시기 치소가 위치한 성에 대한 본격적 연구의 필요성을 환기시키고 있다. 문헌을 통해 당시 치소가 일반적으로 분포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고['고려시대 '治所城' 연구'(최종석,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7) 참조], 각종 성에 대한 지표, 발굴 보고서가 양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국·통일신라 시기 치소가 위치한 성에 대한 체계적 검토는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에 본 연구를 계기로 하여 문헌과 고고학적 성과를 결합하고 더 나아가 고려시기 치소성과 연관지으면서 이 시기 치소가 위치한 성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고려시기 축성의 역사적 성격을 보다 심도 깊게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몽고 침입 이전까지 국가적 규모의 축성은 양계 신개척 지역의 치소성 축조에 집중되고 있었고, 기존 영역의 축성은 지역(공동체) 단위 내에 수축의 형태로 진행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축성 양상은 좀 더 규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지만, 이 시기 축성의 양상이 고려말 이후 시기 그리고 삼국, 통일신라시기와 상이한 점은 비교적 분명하다 하겠다. 이러한 축성 양상이 어떠한 사회적 구조에서 비롯되었는지는 본 연구와 관련하여 검토되어야 할 사항이다.
    셋째, 축성에 대한 이해는 당시 방어 체계를 좀 더 깊이 있게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축성은 방어 체계와 밀접하게 연관하여 이루어지고 있었을 것이기에, 어떤 성격의 성이 주로 축조되었는지를 이해하게 되면, 해당 시기 방어 체계가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는지를 좀 더 심도 깊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나말여초 시기 호족 및 호족 중심의 지역자위공동체에 대한 보다 심화된 검토의 계기가 될 것이다. 호족과 지역자위공동체는 공통적으로 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그 중에서도 대개 치소 역할을 해 오던 성을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기왕에 나말여초 시기 호족 및 지역(자위)공동체에 대한 연구는 적지 않게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이들이 근거한 성에 대한 이해는 대단히 미흡한 편이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아울러 지역공동체가 근거한 성을 통일신라시기 치소가 위치한 성과 연관하여 살펴봄으로써, 나말여초 시기 지역자위공동체의 대두로 대변되는 사회 변동을 통일신라시기와의 연속과 단절의 측면에서 새롭게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 연구요약
  • 고려말 이전 시기에 치소가 위치한 성[치소성]은, 조선시기에 치소 역할을 한 성[읍성]과 이질적이었고, 일부 주현 및 특정 지역에 몰려 있는 읍성과 달리 치소성은 兩界와 南道 지역, 主縣과 屬縣의 구분 없이 일반적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치소성이 어떠한 방식과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고, 언제 성립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치소성의 형성과 관련하여 築城을 우선 주목하였다. 몽고 침략 이전 시기까지의 168건의 축성 사례를 검출한 후, 해당 축성이 어떠한 성격의 성을 축조하는지를 면밀히 검토하였다. 이 과정에서 읍명으로 된 城’의 축조 사례와 ‘城+군현명’ 사례가 해당 지역의 치소성 축조임을 규명하는 작업을 병행하였다. 이러한 연구 방법 등을 통해 고려 전기의 축성이 치소 역할을 하는 城의 축조에 집중되고 있었음을 밝힐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고려전기 축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당 시기에 치소성이 축성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손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축성은 전국적으로 고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행해지고 있어, 치소성의 형성을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즉 당시 축성 대부분은 양계 중에서도 신개척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치소성 축조를 통한 치소성 형성은 양계 신개척 지역에 국한되고 있었다. 기존 영역에서는 치소성이 형성되는 방식이 신개척 지역과 상이하였고, 이 때문에 축성 또한 신개척 지역에 집중되고 있었다.
    신개척 지역에서는 해당 치소성의 신축을 통해 치소성이 형성되고 있었는데, 그 구체적인 방식은 ‘置邑築城’이었다. 즉 북진을 통해 새로이 확보된 영역에 州鎭을 설치하면서('置邑') 해당 치소성을 축조하였다('築城’). 양계 신개척 지역에서 ‘置邑築城’은 일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 결과 해당 주진에서 치소성이 형성되는 시기는 ‘置邑’ 시점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置邑築城’ 과정을 통해 신개척 지역 주진마다 치소성은 분포하고 있었다.
    신개척 지역 전체로 볼 때, 치소성의 형성은 태조대 초반부터 문종 전반에 걸친 시기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置邑築城’ 당시에는 대개 鎭과 鎭城이 설치되는 것을 특징으로 하였다. 하지만 鎭은 ‘置邑築城’ 이후 개척한 영역의 안정화, 전략상의 이유 등으로 다수가 폐읍되거나, 州 등으로 개편되곤 하였고, 이에 따라 鎭城은 鎭의 향방에 따라 치소성의 지위를 잃거나 州城으로 변모하곤 하였다.
    신개척 지역과 달리 기존 영역에서는 대개 통일신라시기에 치소가 위치한 성(신라 ‘郡縣城’)을 활용하여 치소성이 형성되었다. 삼국·통일신라시기 치소가 위치한 성은 일반적으로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신라 ‘郡縣城’은 고려 치소성으로 활용되었고,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기존 영역에서도 치소성은 일반적으로 분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신라 ‘郡縣城’과 별도의 기존 산성이 고려 치소성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한편 신라 ‘郡縣城’이 고려 치소성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나말여초 시기 지방사회가 무정부 상태에 놓여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서, 지역공동체는 자위적 성격의 지역공동체로 재편되었고, 호족층은 그러한 공동체를 주도하였다. 호족층은 대개 신라 ‘郡縣城’을 자위의 거점으로 삼아 지역사회를 안정시켰고, 또한 이를 매개로 해당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이에 따라 지역자위공동체의 거점으로 기능한 성은, 동시에 지배의 거점으로 호족층의 지배기구가 두어진 성이 되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본격적인 지방 지배를 도모하였지만, 나말여초 시기에 성립·재편된 지역자위공동체들은 고려 국가체제 내로 대부분 그대로 수용되었다. 그 결과 지역(자위)공동체는 존속하였고, 이와 맞물려 지역(자위)공동체를 주도한 호족층은 향리층으로 전환된 채, 공동체의 자위와 지배의 주체로 존속하였으며, 자위와 지배의 거점으로 기능해 온 성은, 국가에 공인된 채 향리의 독자적 집무소(邑司)가 위치한 성으로 전환되었다.
    기존 영역의 경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고려 치소성이 형성되었기에, 그것의 형성 시점은 고려 정부에 의해 해당 성이 통제·공인받은 때였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置邑’이 단행된 때였다. 기존 영역에서 행정구역의 신설과 무관한 ‘置邑’은, 나말여초 시기에 형성·재편된 질서를 고려 국가의 지배질서 속에 정식으로 편입시키는 조치로, ‘置邑’ 당시에 지역공동체의 지배 거점으로 기능해 온 성은 고려 치소성으로 통제·공인되었을 것이다. 기존 영역에서 ‘置邑’이 단행된 시점은 高麗史 地理志에 등장하는 ‘高麗初’로 이해되는 바, 기존 영역에서 고려 치소성이 형성되는 시점은 ‘高麗初’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 한글키워드
  • 지역자위공동체,治所城,‘置邑築城’,신라 ‘郡縣城’
  • 영문키워드
  • Chiso-sŏng(治所城),Shilla Kunhyŏn-sŏng(신라 ‘郡縣城’),Chiŭp-Chuksŏng(‘置邑築城’),local community for self-def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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