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이전 시기에 치소가 위치한 성[치소성]은, 조선시기에 치소 역할을 한 성[읍성]과 이질적이었고, 일부 주현 및 특정 지역에 몰려 있는 읍성과 달리 치소성은 兩界와 南道 지역, 主縣과 屬縣의 구분 없이 일반적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치소성이 어떠한 방 ...
고려말 이전 시기에 치소가 위치한 성[치소성]은, 조선시기에 치소 역할을 한 성[읍성]과 이질적이었고, 일부 주현 및 특정 지역에 몰려 있는 읍성과 달리 치소성은 兩界와 南道 지역, 主縣과 屬縣의 구분 없이 일반적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치소성이 어떠한 방식과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고, 언제 성립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치소성의 형성과 관련하여 築城을 우선 주목하였다. 몽고 침략 이전 시기까지의 168건의 축성 사례를 검출한 후, 해당 축성이 어떠한 성격의 성을 축조하는지를 면밀히 검토하였다. 이 과정에서 읍명으로 된 城’의 축조 사례와 ‘城+군현명’ 사례가 해당 지역의 치소성 축조임을 규명하는 작업을 병행하였다. 이러한 연구 방법 등을 통해 고려 전기의 축성이 치소 역할을 하는 城의 축조에 집중되고 있었음을 밝힐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고려전기 축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당 시기에 치소성이 축성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손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축성은 전국적으로 고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행해지고 있어, 치소성의 형성을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즉 당시 축성 대부분은 양계 중에서도 신개척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치소성 축조를 통한 치소성 형성은 양계 신개척 지역에 국한되고 있었다. 기존 영역에서는 치소성이 형성되는 방식이 신개척 지역과 상이하였고, 이 때문에 축성 또한 신개척 지역에 집중되고 있었다.
신개척 지역에서는 해당 치소성의 신축을 통해 치소성이 형성되고 있었는데, 그 구체적인 방식은 ‘置邑築城’이었다. 즉 북진을 통해 새로이 확보된 영역에 州鎭을 설치하면서('置邑') 해당 치소성을 축조하였다('築城’). 양계 신개척 지역에서 ‘置邑築城’은 일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 결과 해당 주진에서 치소성이 형성되는 시기는 ‘置邑’ 시점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置邑築城’ 과정을 통해 신개척 지역 주진마다 치소성은 분포하고 있었다.
신개척 지역 전체로 볼 때, 치소성의 형성은 태조대 초반부터 문종 전반에 걸친 시기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置邑築城’ 당시에는 대개 鎭과 鎭城이 설치되는 것을 특징으로 하였다. 하지만 鎭은 ‘置邑築城’ 이후 개척한 영역의 안정화, 전략상의 이유 등으로 다수가 폐읍되거나, 州 등으로 개편되곤 하였고, 이에 따라 鎭城은 鎭의 향방에 따라 치소성의 지위를 잃거나 州城으로 변모하곤 하였다.
신개척 지역과 달리 기존 영역에서는 대개 통일신라시기에 치소가 위치한 성(신라 ‘郡縣城’)을 활용하여 치소성이 형성되었다. 삼국·통일신라시기 치소가 위치한 성은 일반적으로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신라 ‘郡縣城’은 고려 치소성으로 활용되었고,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기존 영역에서도 치소성은 일반적으로 분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신라 ‘郡縣城’과 별도의 기존 산성이 고려 치소성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한편 신라 ‘郡縣城’이 고려 치소성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나말여초 시기 지방사회가 무정부 상태에 놓여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서, 지역공동체는 자위적 성격의 지역공동체로 재편되었고, 호족층은 그러한 공동체를 주도하였다. 호족층은 대개 신라 ‘郡縣城’을 자위의 거점으로 삼아 지역사회를 안정시켰고, 또한 이를 매개로 해당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이에 따라 지역자위공동체의 거점으로 기능한 성은, 동시에 지배의 거점으로 호족층의 지배기구가 두어진 성이 되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본격적인 지방 지배를 도모하였지만, 나말여초 시기에 성립·재편된 지역자위공동체들은 고려 국가체제 내로 대부분 그대로 수용되었다. 그 결과 지역(자위)공동체는 존속하였고, 이와 맞물려 지역(자위)공동체를 주도한 호족층은 향리층으로 전환된 채, 공동체의 자위와 지배의 주체로 존속하였으며, 자위와 지배의 거점으로 기능해 온 성은, 국가에 공인된 채 향리의 독자적 집무소(邑司)가 위치한 성으로 전환되었다.
기존 영역의 경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고려 치소성이 형성되었기에, 그것의 형성 시점은 고려 정부에 의해 해당 성이 통제·공인받은 때였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置邑’이 단행된 때였다. 기존 영역에서 행정구역의 신설과 무관한 ‘置邑’은, 나말여초 시기에 형성·재편된 질서를 고려 국가의 지배질서 속에 정식으로 편입시키는 조치로, ‘置邑’ 당시에 지역공동체의 지배 거점으로 기능해 온 성은 고려 치소성으로 통제·공인되었을 것이다. 기존 영역에서 ‘置邑’이 단행된 시점은 高麗史 地理志에 등장하는 ‘高麗初’로 이해되는 바, 기존 영역에서 고려 치소성이 형성되는 시점은 ‘高麗初’였을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