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의 과제는 러시아 문예학자, 문화학자인 바흐찐, 삐치고르스키, 리하초프, 로트만, 토포로프, 안티페로프 등에 의해 현대 문예학의 중요한 방법론으로 정립된 ‘크로노토프(Chronotope)’의 개념('문학텍스트에 묘사된 시간과 공간의 예술적 이미지')과 그 장르형성 ...
본 연구의 과제는 러시아 문예학자, 문화학자인 바흐찐, 삐치고르스키, 리하초프, 로트만, 토포로프, 안티페로프 등에 의해 현대 문예학의 중요한 방법론으로 정립된 ‘크로노토프(Chronotope)’의 개념('문학텍스트에 묘사된 시간과 공간의 예술적 이미지')과 그 장르형성 기능에 근거하여 구 유고권 모더니즘 소설에 구현된 인간의 이미지, 작자의 태도와 세계관, 민족 고유의 에토스를 분석하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될 작가는, 발칸반도에 모더니즘이 도래하기 시작한 1890년대 이후부터 포스트모더니즘이 유입되는 1970년대 이전까지 왕성하게 활동한 세르비아(스탄코비치, 치피코, 우스코코비치), 크로아티아(레스코바르, 쉬무노비치, 나조르, 크를레쟈), 슬로베니아(찬카르), 보스니아(안드리치, 셀리모비치) 작가들이다. 이들의 소설에 나타나는 '경계/위기(危機)', '농촌', '도시', '이주'의 크로노토프(세르비아), '환멸', '목가(牧歌)', '민속', '묵시(黙示)'의 크로노토프(크로아티아), '변혁'의 크로노토프(슬로베니아), '소외'와 '풍자(諷刺)'의 크로노토프(보스니아)는 각 민족이 처한 역사적, 지리적, 정치적, 사회문화적 콘텍스트의 예술적 굴절로서 나타난다. 사실주의 소설의 크로노토프에 비해, 모더니즘 소설에서는 서사의 초점이 주인공의 내면으로 이동함으로써 심리주의의 경향이 강화되고, 성장과 체험의 크로노토프 대신 개인의 변화무쌍한 의식과 복잡다단한 사회 현상들이 뒤얽힌 상징적, 심리적 크로노토프가 대두된다. 아울러,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모더니즘 소설이 동시대 서유럽 소설과 대등한 크로노토프 형식을 갖추고 있는 반면, 세르비아 소설의 경우에는 서유럽 문화와의 교류 부족으로 인해 모더니즘 기에 이르러서야 사실주의적 크로노토프가 뒤늦게 나타나는 아나크로니즘적 경향이 특징적이다. 보스니아 소설에서는 정체된 고유한 정치적, 사회적 상황 때문에 특정한 크로노토프('소외, 풍자')가 사실주의와 모더니즘 기를 통틀어 동일하게 유지, 강화되는 모습이 관찰된다. 보스니아의 독특한 풍자적 크로노토프는 예술적 유행보다는 사회 현실 변화에 더 민감하게 반응해야 했던 보스니아 문학의 속성을 예증한다. 이상 살펴본 크로노토프적 특수성은 유고 모더니즘 소설을 그들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과도 비교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가 된다. 나아가 유고 제 민족의 모더니즘 소설에 포화된 크로노토프의 다면적 함의는 그들 각각의 민족적 보편 심리와 무의식, 민족적 에토스를 추정할 수 있는 단초를 준다. 발칸반도에 산포하는 다양한 민족적, 종교적 요소가 이 지역 주민들의 정체성 및 정신적, 심리적 지형도를 총체적으로 규정하듯이, 그 다질적인 문학적 크로노토프는 그들의 고유한 정서와 사상, 습속을 비추는 거울이다.
여러 갈래 중에서 모더니즘 소설이 분석 대상으로 선택된 이유는, 첫째, 유고문학에서는 그 태동시점부터 현재까지 문학의 근대화가 쟁점화 될 때마다 모더니즘의 문제가 중심으로 부상해 왔기 때문이다. 구 유고권 사실주의 소설과 모더니즘 소설의 특징은 각각 구심성(Centripetality)과 원심성(Centrifugality)의 은유로 표현될 수 있는데, 이 지역의 사실주의 소설이 발칸 문화의 지방주의(provincialism), 전통주의(traditionalism), 보수, 민족, 의무, 통일성, 동양적 가치를 대변한다면, 모더니즘 소설은 세계화, 아방가르드, 혁신, 개인, 자유, 다원성, 서구적 가치를 표상한다. 발칸 반도의 근대화 이후로 유고 문단의 항구적 테마는 사실주의 vs. 모더니즘의 논쟁이다. 전간기의 사실주의 작가와 모더니즘 작가의 논쟁, 유고사회주의연방 성립 후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쉬르레알리즘 논쟁, 20세기 말 유고사회주의연방 해체 무렵의 전통주의 문학과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논쟁 모두는 본질적으로 사실주의와 모더니즘 논쟁의 연장선상에 자리한다. 따라서 유고 문학의 핵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중심축에 해당하는 모더니즘 문학에 대한 고찰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둘째, 1990년대 초 유고연방의 해체를 전후하여 포스트공산주의, 포스트이데올로기즘 담론의 결정체로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 역시 본질적으로는 모더니즘 문학의 변주(version)이므로 현재 발칸반도 내외에서 활동하는 유고연방출신 포스트모던 작가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모더니즘적 모태를 이해하는 것이 선결적 과제로서 요청되기 때문이다. 유고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은 모더니즘 소설과의 단절이 아닌 완만한 연장선상에 자리하면서, 사회 혼돈과 가치 변화 속에서 정신적 위기를 경험하는 동시대인들의 의식을 예술적으로 개념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