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일찍부터 수박 등을 무예로 익혔으며, 전국시대에 그것을 戲樂으로 만들어 즐겼는데, 당시에 그것을 角抵라고 불렀다. 한대 이후에 서역계통의 유희, 즉 다양한 도구와 동물을 이용한 곡예나 가면극이 추가되면서 각저잡희가 더욱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특히 ...
중국에서 일찍부터 수박 등을 무예로 익혔으며, 전국시대에 그것을 戲樂으로 만들어 즐겼는데, 당시에 그것을 角抵라고 불렀다. 한대 이후에 서역계통의 유희, 즉 다양한 도구와 동물을 이용한 곡예나 가면극이 추가되면서 각저잡희가 더욱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특히 漢代에 로마와 이집트, 페르시아인들이 중국에 와서 환상적인 묘기를 연출하였고, 이후에도 서역 출신의 幻人들이 중국에 계속 유입되어 백희잡기를 공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중국의 백희잡기는 서역인들에 의하여 우리나라에도 전래되었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다양한 백희잡기의 그림을 통하여 입증할 수 있다. 인도에서 불교행사를 거행할 때에 백희잡기를 공연하였고, 이러한 전통은 서역과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전래되어 계승되었다. 통상 백희잡기를 공연할 때에 반주로 사용되는 음악을 散樂이라고 불렀고, 그와 더불어 歌舞도 함께 곁들여졌다. 따라서 서역에서 유래된 백희잡기가 중국을 거치거나 직접 우리나라에 전래되면서 동시에 서역의 歌舞와 더불어 散樂에 사용된 서역의 악기도 함께 전래되는 것이 상례였다. 서역지방에서 유행한 蘇莫遮를 중국에서 乞寒戱라고 불렀다. 고구려인들은 이것을 수용하여 吉簡이라고 명명하였고, 다시 일본에도 전해주어 舞樂 高麗樂의 하나가 되었다. 또한 고구려에 서역 疏勒國의 가무인 保曾呂久世利와 加利夜須曲이 전래되었는데, 후에 일본에서 이것을 합하여 長保曲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밖에 고구려에서 서역에 위치한 安國의 歌舞와 康國의 胡旋舞를 수용하였음이 확인된다. 통일신라시기에 신라에서 서역의 가무를 수용하였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자료가 최치원의 「鄕樂雜詠」이다. 이것은 5수로 구성되었는데, 이 가운데 月顚, 大面, 束毒, 狻猊가 바로 서역에서 전래된 가무였다. 월전은 서역의 于闐國(Khotan)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것은 거기에서 전래된 가무라고 할 수 있다. 大面은 역신을 쫓아내는 驅儺舞의 일종을 묘사한 시인데, 이것 역시 서역에서 유래된 가면가무희였고, 일본에 전해져서 納蘇利라고 불리웠다. 한편 束毒은 서역지역에 위치한 粟特(Soghd)지역의 가무였고, 그것은 일본에 전해져서 朱禿․宿德이라고 불렀다. 마지막으로 산예는 서역계통의 사자춤을 묘사한 시이다. 이밖에 신라에서 서역의 蘇莫遮를 수용하여 蘇志摩利라고 불렀고, 이것은 일본에 전해져서 고려악의 하나로 편입되었다. 서역의 가무 뿐만 아니라 악기도 전래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5현비파와 篳篥을 들 수 있다. 5현비파는 중국 新疆省 쿠차지역의 4세기 단계 키질벽화에 보이고, 5세기 중엽에 중국을 거쳐 고구려에 전래되었다. 이후 그것은 신라에 전래되어 曲頸의 4현비파(당비파)와 구분되어 향비파로 불리웠다. 한편 서역 龜玆國에서 창조한 필률(피리)은 4세기에 중국에 전래되고, 5세기 중엽에 고구려에 전래되었으며, 이후 신라와 백제를 거쳐 일본에까지 전래되어 널리 애용되었다. 고려시대에 구멍이 7개인 필률을 9개인 당나라의 필률과 구별하여 향필률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삼국의 필률은 일본에 전해져서 舞樂의 하나인 右方樂, 즉 고려악의 반주악기로 널리 사용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최치원은 서역에서 직접 또는 중국을 거쳐 전래된 가무를 ‘鄕樂’이라고 불렀는데, 신라인들이 서역에서 전래된 음악을 唐樂과 대비되는 신라 고유의 음악으로 인식했음을 반증한다. 이는 신라인이 서역에서 유래한 여러 가지 가무와 음악을 자신들의 문화 속에 용해하여 이제 당악과 구별된 그들 나름의 독특한 가무와 음악을 창출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서구문화에 밀려서 자기화된 문화를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오늘날의 현실에서 국제문화를 포용하여 새로운 문화를 재창조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고대의 우리 선조들에게 시사받는 바가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