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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한국 고대 서역문화의 수용에 대한 고찰-百戱 歌舞의 수용을 중심으로-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우수논문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07-325-A00018
선정년도 2007 년
연구기간 1 년 (2007년 12월 01일 ~ 2008년 11월 30일)
연구책임자 전덕재
연구수행기관 경주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문화는 타 문화와의 교류를 통하여 정교하고 고차원적인 것으로 향상․발전해 나간다. 문화의 전파와 移植을 통하여 새로운 문화가 창출되고, 또 그것은 다른 문화와의 접촉과 교류를 통하여 또 다른 문화로 대체되는 것이 상례이다.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한 민족의 순수한 문화란 존재하지 않으며, 한 문화의 원류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제요소들을 시․공간적으로 종합 고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 문화는 타 문화와의 접촉을 통하여 변용되는 반면에 그 문화의 담당자에 의하여 규제되는 자율성, 독자성의 일면도 함께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타 문화와 구별되는 주체성과 독특성이 강조되기도 한다. 바로 문화의 양면성(이중성) 때문에 민족문화 사이의 공통성과 상이성이 발생하게 되며 한 문화의 형성․발전과정을 타 문화와의 연관성 속에서 고찰해야 하는 당위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본 논고는 이와 같은 관점에 입각하여 고대 우리나라와 서역 사이의 문화교류상을 규명한 것이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고구려인들이 즐긴 여러 놀이, 즉 百戱가 많이 전한다. 특히 장천 1호분의 百戱伎樂圖에 다수의 西域人이 등장하여 고구려에서 百戱雜技와 아울러 서역문화를 함께 수용하였음을 알려준다. 백희잡기는 고구려를 거쳤거나 또는 중국에서 직접 신라와 백제에도 전해졌고, 나아가 삼국을 통하여 일본에도 전래되었다. 최치원의 「鄕樂雜詠」 5首를 통하여 통일신라에도 역시 서역의 가무․백희가 널리 수용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琵琶와 篳篥(피리)을 비롯하여 다양한 서역의 악기들도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 고대에 수용된 서역문화는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계승되어 전통문화의 원류를 형성하였다. 기존에 隋唐代 문헌에 등장하는 高麗伎와 고분벽화에 보이는 고구려의 악기, 춤에 관한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고, 최근에 서역과 중국, 한국의 문화교류와 연관시켜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보이는 백희잡기를 조명한 연구가 제출되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고대의 음악과 악기 및 춤, 그리고 백희잡기에 대해서는 대강의 이해가 가능해졌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에서 백희잡기와 연관된 음악(특히 散樂)이나 歌舞 등의 교류 양상까지 치밀하게 천착하였다고 보기 어렵고, 또한 서역에서 유래된 악기나 歌舞에 대한 체계적인 검토 없이 우리나라 고대 음악과 서역음악을 단순 비교하는 것에 머물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서역지방의 음악과 악기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가 필요할 것이고, 나아가 魏晉南北朝時代에 중국에서 서역의 음악문화를 적극 수용하여 새로운 중국음악을 정립시킨 사실에 대한 정밀한 검토가 요청된다. 필자는 본 논고에서 古代에 우리나라에 전래된 서역의 百戱雜技와 歌舞, 樂器 등을 집중적으로 검토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서역의 문화를 수용한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과 전래의 고유문화를 적절하게 융합하여 우리 나름의 독특한 새로운 문화를 재창조한 실상을 적극 부각시키고자 의도하였다.
  • 기대효과
  • 서역지방은 바로 서양과 동양을 잇는 실크로드의 중계지역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동․서양의 문화가 함께 공존하는 특징을 지녔다. 그러한 성격의 서역문화는 중국을 통하거나 또는 직접 한반도에 전해졌고, 다시 해상을 통하여 일본에까지 전래되었다. 한반도의 고대인들은 중국인을 통하거나 직접 서역인들을 통하여 서역문화를 수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문화를 재창조하였는데, 대표적인 사례로서 신라인이 서역의 음악을 수용한 후에 그것을 중국의 음악과 대비하여 신라 고유의 음악을 지칭하는 鄕樂이라고 불렀던 사실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고대인들이 외국의 문화를 수용할 때에 매우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자세를 견지하였음을 시사해주는 것으로서 주목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향후 본 논고는 고대인들이 서역을 비롯한 외국의 문화를 어떠한 태도로 수용하고 소화하였는가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연구로서 학계의 주목을 받을 것이며, 나아가 우리나라 고대문화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데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본 논고에서 고대인들이 즐긴 백희잡기 및 가무, 악기 등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검토하였다. 그런데 백희잡기는 오늘날 서커스와 연예오락, 우스꽝스러운 흉내내기를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때문에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 그리고 귀족과 서민을 망라한 모든 사람들이 즐겼다. 따라서 본 논고의 결과는 바로 고대인들이 즐긴 놀이문화와 아울러 일상 생활의 면모를 일부나마 복원하는 데에 일조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으며, 향후 고대 생활사 연구의 진전에 커다란 디딤돌이 되리라고 기대하는 바이다. 그리고 고대에 서역에서 전래된 다양한 백희잡기와 음악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계승․발전되었다. 고려시대에 연등회나 팔관회와 같은 불교행사, 그리고 여러 연회나 儺禮에서 당악과 더불어 서역에서 유래된 백희잡기와 가무가 자주 공연되었다. 조선시대에 성리학이 보급되면서 서역에서 유래된 백희잡기와 가무의 공연은 크게 위축되었지만, 그러나 본산대놀이, 산대잡극, 가면극, 꼭두각시놀이로 그 전통이 계승되어 민중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이와 같은 전통연희의 역사를 감안하건대, 고대 서역문화의 수용과 계승을 해명한 본 논고는 향후 우리나라 전통연회의 원류 및 그 발전과정을 살필 때에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리라고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본 논고를 집필하면서 고대 일본의 高麗樂에 대한 연구가 절실하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고대 일본의 高麗樂은 雅樂의 일종인데, 일반적으로 노래와 춤이 동반된 것을 歌舞(우타마이)라고 부르고, 반주에 맞추어 노래 없이 춤을 추는 것을 舞樂(부가쿠)이라고 부른다. 舞樂은 모두 대륙에서 전래된 것들로 구성되었는데, 크게 중국 및 인도에서 전래된 무악을 左方樂 또는 唐樂으로 분류하였고, 한반도에서 전래된 무악을 右方樂 또는 高麗樂(三韓樂)이라고 분류하였다. 이 가운데 우리와 관련이 깊은 것이 바로 右方樂, 즉 高麗樂이다. 이것은 삼국시대부터 일본에 전래된 백제악, 신라악, 고구려악, 그리고 발해악을 기초로 하여 정비된 舞樂인데, 초기에는 삼국의 무악을 각기 공연하며 전수하다가 헤이안시대인 9세기 전반에 삼국 및 발해의 음악을 총합하여 ‘高麗樂’을 구성하였다고 알려졌다. 앞으로 고려악을 세밀하게 분석한다면, 龜玆 등의 서역에서 전래된 가무나 악기 등이 고구려나 신라, 백제에서 크게 성행하였고, 또 그것들이 다시 각각의 나라별로 토착화과정을 거친 다음에 일본에 전래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보다 더 풍부한 정보를 흭득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나아가 고려악에 관한 연구는 향후 아시아 전체의 문화 전파 및 수용 양상에 관한 연구를 활성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할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 논고는 고대 사학계에서 고대 일본 고려악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한 선구적인 연구성과로서 주목을 받을 것으로 사료된다.
  • 연구요약
  • 중국에서 일찍부터 수박 등을 무예로 익혔으며, 전국시대에 그것을 戲樂으로 만들어 즐겼는데, 당시에 그것을 角抵라고 불렀다. 한대 이후에 서역계통의 유희, 즉 다양한 도구와 동물을 이용한 곡예나 가면극이 추가되면서 각저잡희가 더욱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특히 漢代에 로마와 이집트, 페르시아인들이 중국에 와서 환상적인 묘기를 연출하였고, 이후에도 서역 출신의 幻人들이 중국에 계속 유입되어 백희잡기를 공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중국의 백희잡기는 서역인들에 의하여 우리나라에도 전래되었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다양한 백희잡기의 그림을 통하여 입증할 수 있다. 인도에서 불교행사를 거행할 때에 백희잡기를 공연하였고, 이러한 전통은 서역과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전래되어 계승되었다. 통상 백희잡기를 공연할 때에 반주로 사용되는 음악을 散樂이라고 불렀고, 그와 더불어 歌舞도 함께 곁들여졌다. 따라서 서역에서 유래된 백희잡기가 중국을 거치거나 직접 우리나라에 전래되면서 동시에 서역의 歌舞와 더불어 散樂에 사용된 서역의 악기도 함께 전래되는 것이 상례였다. 서역지방에서 유행한 蘇莫遮를 중국에서 乞寒戱라고 불렀다. 고구려인들은 이것을 수용하여 吉簡이라고 명명하였고, 다시 일본에도 전해주어 舞樂 高麗樂의 하나가 되었다. 또한 고구려에 서역 疏勒國의 가무인 保曾呂久世利와 加利夜須曲이 전래되었는데, 후에 일본에서 이것을 합하여 長保曲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밖에 고구려에서 서역에 위치한 安國의 歌舞와 康國의 胡旋舞를 수용하였음이 확인된다. 통일신라시기에 신라에서 서역의 가무를 수용하였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자료가 최치원의 「鄕樂雜詠」이다. 이것은 5수로 구성되었는데, 이 가운데 月顚, 大面, 束毒, 狻猊가 바로 서역에서 전래된 가무였다. 월전은 서역의 于闐國(Khotan)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것은 거기에서 전래된 가무라고 할 수 있다. 大面은 역신을 쫓아내는 驅儺舞의 일종을 묘사한 시인데, 이것 역시 서역에서 유래된 가면가무희였고, 일본에 전해져서 納蘇利라고 불리웠다. 한편 束毒은 서역지역에 위치한 粟特(Soghd)지역의 가무였고, 그것은 일본에 전해져서 朱禿․宿德이라고 불렀다. 마지막으로 산예는 서역계통의 사자춤을 묘사한 시이다. 이밖에 신라에서 서역의 蘇莫遮를 수용하여 蘇志摩利라고 불렀고, 이것은 일본에 전해져서 고려악의 하나로 편입되었다. 서역의 가무 뿐만 아니라 악기도 전래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5현비파와 篳篥을 들 수 있다. 5현비파는 중국 新疆省 쿠차지역의 4세기 단계 키질벽화에 보이고, 5세기 중엽에 중국을 거쳐 고구려에 전래되었다. 이후 그것은 신라에 전래되어 曲頸의 4현비파(당비파)와 구분되어 향비파로 불리웠다. 한편 서역 龜玆國에서 창조한 필률(피리)은 4세기에 중국에 전래되고, 5세기 중엽에 고구려에 전래되었으며, 이후 신라와 백제를 거쳐 일본에까지 전래되어 널리 애용되었다. 고려시대에 구멍이 7개인 필률을 9개인 당나라의 필률과 구별하여 향필률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삼국의 필률은 일본에 전해져서 舞樂의 하나인 右方樂, 즉 고려악의 반주악기로 널리 사용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최치원은 서역에서 직접 또는 중국을 거쳐 전래된 가무를 ‘鄕樂’이라고 불렀는데, 신라인들이 서역에서 전래된 음악을 唐樂과 대비되는 신라 고유의 음악으로 인식했음을 반증한다. 이는 신라인이 서역에서 유래한 여러 가지 가무와 음악을 자신들의 문화 속에 용해하여 이제 당악과 구별된 그들 나름의 독특한 가무와 음악을 창출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서구문화에 밀려서 자기화된 문화를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오늘날의 현실에서 국제문화를 포용하여 새로운 문화를 재창조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고대의 우리 선조들에게 시사받는 바가 적지 않다.
  • 한글키워드
  • 歌舞,西域,散樂,高麗樂,鄕樂雜詠,角抵,百戱雜技,篳篥(피리),蘇莫遮
  • 영문키워드
  • the Western regions(西域),Gakjeo(角抵) games,Somakcha(蘇莫遮),5-string Bipa instrument,pilryul(篳篥) flute.,Goryeo music(高麗樂),Sanak(散樂) music,Songs and Dances(歌舞),All forms of Entertainment and techniques(百戱雜技),Local Music and Lyrics(鄕樂雜詠: Hyangak Jaby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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