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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後期 小品文과 養生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07-327-A00508
선정년도 2007 년
연구기간 1 년 (2007년 12월 01일 ~ 2008년 11월 30일)
연구책임자 김성진
연구수행기관 부산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조선후기 한문학의 질적 변화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던 晩明小品을 가장 먼저 받아들여 자기화한 조선의 문인은 허균이라고 할 수 있다. 허균의 문학적 전환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표적인 전거는 그의 독서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閑情錄󰡕과 그의 尺牘인데, 閑情이라는 말부터가 그러하거니와 󰡔한정록󰡕의 대부분 항목이 攝生과 治農의 경우처럼 養生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또한 허균은 「任老人養生說」이라는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박지원의 아들인 박종채는 조선후기 소품체산문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열하일기󰡕가 莊佛二家에 넘나든 것이 많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는 󰡔莊子󰡕의 우언적 표현기법을 사용했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莊子󰡕의 篇章이기도 한 養生이 小品文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정조가 박지원처럼 소품문에 경도된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삶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말한 ‘强作雅態’나 허균이 그의 書名으로 삼은 ‘閑情’이란 근세이전 동아시아인의 정신적 지향의 한 축을 이루었던 道仙的 경향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바, 이는 결국 조선후기 지식인들이 養生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養生은 현대적으로 말하면, 곧 ‘건강관리’이다. 無病長壽야말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모두의 공통적인 관심사이기도 하다. 더구나 이전처럼 의료기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상황에서는 자신과 가족의 건강을 전통적인 양생법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양생이 儒家에서 이단시하던 道家에 뿌리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황이나 이이와 같은 대표적인 유학자들의 문집에서조차도 양생에 대한 이들의 관심을 드러내는 시문이 적지않게 발견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소품체산문가인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에 보면 ‘養生家’라는 말이 보인다. 그가 말한 ‘양생가’라는 말이 ‘佛家’라는 말과 대응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양생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덕무 자신도 양생에 적지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을 뿐 아니라, 관련서적들 역시 많이 섭렵하고 있었다. 이들 서적명은 󰡔閒情錄󰡕에서도 산견된다. 뿐만 아니라 이들 서적은 조선후기 소품체 산문과 직접적인 영향관계에 있는 이른바 公安派와 景陵派의 문학, 稗官雜記 등과도 일정한 함수관계가 있다. 그리고 養生은 小品體 散文의 실체를 파악함에 있어 중요한 고리가 되는 明代 山人들의 생활상과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晩明의 공안파 문학은 동양의 문예부흥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당시의 동아시아 사상계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으며, 그 연장선상에 있는 우리나라의 소품류의 문학 역시 당시의 조선사회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생은 道敎와 관련해서만 연구되고 있을 뿐이다. 또한 개별작품에 반영된 구체적인 생활의 모습보다는 의학사상이나 체조동작의 연구 차원에서만 다루어지고 있을 뿐, 소품체 산문과 관련해서는 전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조선후기의 소품체산문과 중국 晩明의 소품과를 잇는 여러 가지의 요소들에 대한 연구 역시 태부족한 실정이다.
    본 연구는 기존 연구의 이와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시도되는 것이다. 이와 아울러, 점차 침체되고 있는 인문학 연구가 활력을 찾기 위해서는 연구의 주제나 내용이 일반 대중과 호흡을 함께 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인식의 바탕위에서 국학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시도되는 것이기도 하다.
  • 기대효과
  • 본 연구는 구체적인 삶의 양상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그 주제 역시 현대인들의 관심사이기도 한 때문으로 인문학 연구의 새로운 방향 설정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 특히 한국학은 다른 실용학문과 달리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그 어떤 시대, 어떤 문학작품들보다도 당대인의 삶의 양태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소품문의 경우, 과거에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에 대한 현대인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데 있어 가장 유용한 문학작품들이기도 하다.
    전세계적으로 대체의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소품문과 양생의 관계를 살펴보려는 본 연구는 한국학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제고하는 데 매우 유용할 것으로 보인다.
  • 연구요약
  • 본 연구는 조선후기 소품문이 양생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서유구의 [葆養志]나 허준의 [東醫寶鑑], 신돈복의 [丹學指南] 등처럼 專著를 통해 체계적으로 자신의 양생관과 수련방법을 제시한 경우가 아니라도 일반 시문을 통해 생활속에서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양생 수행을 살펴볼 수도 있다.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와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일기류나 잡록, 서한문 등에서는 이론이 아닌 일상생활에서의 구체적인 양생법이 기록되어 있을 수 있다.
    본 연구는 조선후기 소품문에 미친 양생관을 그 연구범위는 조선후기의 소품체산문가의 산문 작품과 이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晩明 공안파의 일기류, 서독류, 잡록류 등을 주된 연구 범위로 한다. 우리의 소품체 산문은 이규보와 같은 고려후기의 문장가, 허균과 같은 조선중기의 문장가 등에도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심노숭이나 김조순 등처럼 김려와 직간접적 문학적 교유를 맺은 사람, 박지원의 주변 인물들 역시 그 영향권 안에 있는 사람으로 보아 이들 역시 연구의 범위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李贄, 袁宏道 3형제, 晩明의 16小品體 名家 등의 시문 역시 보조자료로 이용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경우, 그들의 양생법 그 자체보다는 우리나라의 소품체산문가와의 영향관계를 구명하는 단서를 찾는 것이 주된 목적이 된다.
    󰡔四庫全書總目提要󰡕의 雜家, 小說家 부분에 들어있는 책들의 해제 역시 소품체산문과 관련해서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소품체를 道佛的 성향을 띤 문학으로 이해하는 당시의 조류를 파악하면 양생과 소품문과의 영향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만명소품과 우리의 소품체산문의 성행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소동파가 道家的 성향을 띠고 있는 문인이라는 점 역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안파 이외에도 사고전서 편찬과정에서 筆記小說類로 분류된 명말청초의 잡록류 저술 역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 한글키워드
  • 만명소품,양생,조선후기,소품문,공안파
  • 영문키워드
  • Gonanpa,rhe late period of chosun dynasty,manmyung sopum,literary sketches,regimen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조선후기 소품문과 이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만명소품이 道佛的 성향을 띠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무병장수는 시대와 종교, 사상을 막론하고 인류의 보편적인 욕망이요 관심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인데, 동아시아에서 이러한 무병장수에 대한 바람을 집약한 것이 養生이고 이 養生에 대한 지혜와 관심이 집약되어 있는 것이 도교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소품가인 연암의 <<열하일기>>에 대해 <<莊子>>의 영향을 말한 이도 있거나와, <<莊子>>에 「養生主」라는 편장이 있다는 것 역시 고려해 볼 만하다.
    영정년간에 소품문이 시대적 풍기를 이루기 전, 일찍부터 袁宏道의 문학을 접한 허균은 그의 말년에 袁宏道 외에도 陳繼儒, 田藝衡, 凌迪知, 黃汝亨, 屠隆, 徐渭 등의 문학을 접한 바 있는데, 허균은 지금도 난치병에 속하는 소갈증으로 고생을 하였다. 허균이 󰡔閑情錄󰡕을 편찬하면서 굳이 ‘攝生’이라는 항목을 둔 것도 어쩌면 이러한 자신의 病歷 때문일지도 모른다.
    허균은 <<한정록>>을 엮은 후, 吳寧野의 <<書憲>> 袁宏道의 <<甁花史>>(원래의 書名은 <<甁史>>)와 <<觴政>>, 陳繼儒의 <<書畫金湯>> 등을 부록의 끝에 붙여두었다. 袁宏道의 <<甁史>>에는 陳繼儒가 題를 달기도 하였는데, 이 <<甁史>>는 何鏜이 지은 <<古今遊名山記>>와 함께 조선후기 소품가들이 즐겨 읽은 대표적인 晩明小品이었다.
    허균에 의해 袁宏道의 소품문이 소개된 이후 문체반정기 이전까지, 南九萬 金錫冑 任埅 趙亨期 金昌協 朴泰輔 金鎭圭 李宜顯 李夏坤 申靖夏 金履萬 南克寬 趙龜命 李麟祥 등이 袁宏道의 문학을 접했음이 이들의 시문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이들이 袁宏道의 문학을 접했다고는 하지만, 이들 모두가 袁宏道의 문학에 탐닉했던 것은 아니다. 임방이 ‘그 학문은 瞿曇을 宗으로 하고 그 문장은 莊周를 근원으로 하고 있으니 대저 우리 儒家에서 따르는 六藝에서 유래한 것은 아니다’ ‘베개를 세우고 졸음을 막는 수단으로 삼겠다’고 밝힌 바처럼, 이들의 인식과 수용은 극히 제한적이었던 것이다.
    이와 달리, 金履萬은 어려서부터 袁宏道의 소품문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북경에 가는 사람에게 일부러 부탁해서 전집을 구입한 후 7,8년 동안 항상 옆에 두고 눈에서 袁宏道의 책을 뗀 일이 없다고 할 정도로 원굉도의 문학에 탐닉했다. 김이만은 어려서는 <<甁史>>를 통해, 그리고 중년에는 <<名山記>>에 실려 있는 袁宏道의 遊記를 통해 그의 문학세계를 접했다고 한다. 조선후기의 소품가를 대표하는 박지원과 이덕무와 마찬가지로 <<甁史>>와 <<名山記>>가 袁宏道의 문학에 심취하는 경로가 된 것이다.
    허균이 <<한정록>>을 편하면서 「攝生」이란 편장을 따로 두고 이와는 별도로 袁宏道의 <<甁史>>와 陳繼儒의 <<書畫金湯>>을 부록 뒤에 붙인 것으로도 알 수 있듯, 이들에게 있어서의 接花와 藝木, 그리고 명산의 탐방은 단순한 기호가 아닌 일종의 養生法이었다. 陳繼儒는 󰡔太平淸話󰡕에서 一人獨享之樂의 예로 焚香⋅試茶⋅洗硯⋅鼓琴⋅澆花⋅對花⋅潄泉⋅支杖⋅嘗酒⋅看山⋅臨帖⋅刻竹 등을 들었는데, 이처럼 澆花와 對花, 그리고 看山을 내용으로 하는 󰡔甁史󰡕와 󰡔名山記󰡕는 養生法의 하나인 治心을 위한 지침서였던 것이다.
    徐有榘(1764-1845)의 <<林園十六志>> 「葆養志」도 朝鮮後期 小品과 養生과의 관계를 살피는 데 있어 빠뜨릴 수 없는 문헌이다. <<임원십육지>>를 저술한 서유구의 <<楓石鼓篋集>>의 각편의 끝에 이덕무와 성대중 등의 評語가 부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서유구는 이덕무의 <<蜻蛉國志>>에 서문을 쓰기도 했던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 소품문과 양생의 관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대표적인 저술이기 때문이다. 또한 문체반정을 시행하면서까지 소품문을 제재해야 할 정도로 소품문이 시대의 풍기를 이루던 바로 그 시기에 <<임원십육지>>가 저술되었고, <<林園十六志>> 역시 <<甁史>>와 <<名山記>>처럼 澆花와 對花, 그리고 看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策問에 ‘古董書畵’라는 문구를 써서 문체반정의 빌미를 제공하고 소품문에 대한 전방위적 제재를 불러일으키게 한 당사자인 남공철은 梅⋅菊⋅松⋅竹 외에 벽오동과 파초, 작약 등 수십종의 화초와 수목으로 둘러싸인 정자에서 아취로운 삶을 즐겼는데, <<임원십육지>>는 이러한 삶에 필요한 소양은 물론 양생법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 영문
  • need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조선후기 소품문과 이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만명소품이 道佛的 성향을 띠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무병장수는 시대와 종교, 사상을 막론하고 인류의 보편적인 욕망이요 관심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인데, 동아시아에서 이러한 무병장수에 대한 바람을 집약한 것이 養生이고 이 養生에 대한 지혜와 관심이 집약되어 있는 것이 도교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소품가인 연암의 <<열하일기>>에 대해 <<莊子>>의 영향을 말한 이도 있거나와, <<莊子>>에 「養生主」라는 편장이 있다는 것 역시 고려해 볼 만하다.
    영정년간에 소품문이 시대적 풍기를 이루기 전, 일찍부터 袁宏道의 문학을 접한 허균은 그의 말년에 袁宏道 외에도 陳繼儒, 田藝衡, 凌迪知, 黃汝亨, 屠隆, 徐渭 등의 문학을 접한 바 있는데, 허균은 지금도 난치병에 속하는 소갈증으로 고생을 하였다. 허균이 󰡔閑情錄󰡕을 편찬하면서 굳이 ‘攝生’이라는 항목을 둔 것도 어쩌면 이러한 자신의 病歷 때문일지도 모른다.
    허균은 <<한정록>>을 엮은 후, 吳寧野의 <<書憲>> 袁宏道의 <<甁花史>>(원래의 書名은 <<甁史>>)와 <<觴政>>, 陳繼儒의 <<書畫金湯>> 등을 부록의 끝에 붙여두었다. 袁宏道의 <<甁史>>에는 陳繼儒가 題를 달기도 하였는데, 이 <<甁史>>는 何鏜이 지은 <<古今遊名山記>>와 함께 조선후기 소품가들이 즐겨 읽은 대표적인 晩明小品이었다.
    허균에 의해 袁宏道의 소품문이 소개된 이후 문체반정기 이전까지, 南九萬 金錫冑 任埅 趙亨期 金昌協 朴泰輔 金鎭圭 李宜顯 李夏坤 申靖夏 金履萬 南克寬 趙龜命 李麟祥 등이 袁宏道의 문학을 접했음이 이들의 시문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이들이 袁宏道의 문학을 접했다고는 하지만, 이들 모두가 袁宏道의 문학에 탐닉했던 것은 아니다. 임방이 ‘그 학문은 瞿曇을 宗으로 하고 그 문장은 莊周를 근원으로 하고 있으니 대저 우리 儒家에서 따르는 六藝에서 유래한 것은 아니다’ ‘베개를 세우고 졸음을 막는 수단으로 삼겠다’고 밝힌 바처럼, 이들의 인식과 수용은 극히 제한적이었던 것이다.
    이와 달리, 金履萬은 어려서부터 袁宏道의 소품문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북경에 가는 사람에게 일부러 부탁해서 전집을 구입한 후 7,8년 동안 항상 옆에 두고 눈에서 袁宏道의 책을 뗀 일이 없다고 할 정도로 원굉도의 문학에 탐닉했다. 김이만은 어려서는 <<甁史>>를 통해, 그리고 중년에는 <<名山記>>에 실려 있는 袁宏道의 遊記를 통해 그의 문학세계를 접했다고 한다. 조선후기의 소품가를 대표하는 박지원과 이덕무와 마찬가지로 <<甁史>>와 <<名山記>>가 袁宏道의 문학에 심취하는 경로가 된 것이다.
    허균이 <<한정록>>을 편하면서 「攝生」이란 편장을 따로 두고 이와는 별도로 袁宏道의 <<甁史>>와 陳繼儒의 <<書畫金湯>>을 부록 뒤에 붙인 것으로도 알 수 있듯, 이들에게 있어서의 接花와 藝木, 그리고 명산의 탐방은 단순한 기호가 아닌 일종의 養生法이었다. 陳繼儒는 󰡔太平淸話󰡕에서 一人獨享之樂의 예로 焚香⋅試茶⋅洗硯⋅鼓琴⋅澆花⋅對花⋅潄泉⋅支杖⋅嘗酒⋅看山⋅臨帖⋅刻竹 등을 들었는데, 이처럼 澆花와 對花, 그리고 看山을 내용으로 하는 󰡔甁史󰡕와 󰡔名山記󰡕는 養生法의 하나인 治心을 위한 지침서였던 것이다.
    徐有榘(1764-1845)의 <<林園十六志>> 「葆養志」도 朝鮮後期 小品과 養生과의 관계를 살피는 데 있어 빠뜨릴 수 없는 문헌이다. <<임원십육지>>를 저술한 서유구의 <<楓石鼓篋集>>의 각편의 끝에 이덕무와 성대중 등의 評語가 부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서유구는 이덕무의 <<蜻蛉國志>>에 서문을 쓰기도 했던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 소품문과 양생의 관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대표적인 저술이기 때문이다. 또한 문체반정을 시행하면서까지 소품문을 제재해야 할 정도로 소품문이 시대의 풍기를 이루던 바로 그 시기에 <<임원십육지>>가 저술되었고, <<林園十六志>> 역시 <<甁史>>와 <<名山記>>처럼 澆花와 對花, 그리고 看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策問에 ‘古董書畵’라는 문구를 써서 문체반정의 빌미를 제공하고 소품문에 대한 전방위적 제재를 불러일으키게 한 당사자인 남공철은 梅⋅菊⋅松⋅竹 외에 벽오동과 파초, 작약 등 수십종의 화초와 수목으로 둘러싸인 정자에서 아취로운 삶을 즐겼는데, <<임원십육지>>는 이러한 삶에 필요한 소양은 물론 양생법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영정년간에 소품문이 시대적 풍기를 이루기 전, 일찍부터 袁宏道의 문학을 접한 허균과 晩明小品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 蘇東坡의 문학적 세례를 받고 소품적 풍기를 띤 작품들을 많이 지은 고려후기의 이규보 묘하게도 지금도 난치병에 속하는 소갈증으로 고생을 하였다. 허균이 󰡔閑情錄󰡕을 편찬하면서 굳이 ‘攝生’이라는 항목을 둔 것도 어쩌면 이러한 자신의 病歷 때문일지도 모른다. 허균 이후 袁宏道의 문학에 심취했던 김이문과 이덕무 역시 평생 병으로 고생을 하였다. 김이문의 문집에 藥을 소재로 한 시문이 많이 있는 것과 이덕무가 많은 의서를 섭렵하고 그의 <<이목구심서>>에 治病에 관한 글이 많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허균에 의해 袁宏道의 소품문이 소개된 이후 문체반정기 이전까지, 南九萬 金錫冑 任埅 趙亨期 金昌協 朴泰輔 金鎭圭 李宜顯 李夏坤 申靖夏 金履萬 南克寬 趙龜命 李麟祥 등이 袁宏道의 문학을 접했음은 이미 밝혀진 바 있으나, 김이문이 袁宏道의 문학에 탐닉했던 것은 본 연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밝혀진 사실이다. 김이만의 생몰연대(1683-1758)를 감안할 때 이는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김창협 역시 원굉도의 문집을 소장하고 있었고 그 주변 문인들이 이를 빌려본 것은 확인할 수 있지만, 임방이 ‘그 학문은 瞿曇을 宗으로 하고 그 문장은 莊周를 근원으로 하고 있으니 대저 우리 儒家에서 따르는 六藝에서 유래한 것은 아니다’ ‘베개를 세우고 졸음을 막는 수단으로 삼겠다’고 밝힌 바처럼, 이들의 인식과 수용은 극히 제한적이었던 것이다.
    이와 달리, 金履萬은 어려서부터 袁宏道의 소품문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북경에 가는 사람에게 일부러 부탁해서 전집을 구입한 후 7,8년 동안 항상 옆에 두고 눈에서 袁宏道의 책을 뗀 일이 없다고 할 정도로 원굉도의 문학에 탐닉했다. 김이만은 어려서는 <<甁史>>를 통해, 그리고 중년에는 <<名山記>>에 실려 있는 袁宏道의 遊記를 통해 그의 문학세계를 접했다고 한다. 조선후기의 소품가를 대표하는 박지원과 이덕무와 마찬가지로 <<甁史>>와 <<名山記>>가 袁宏道의 문학에 심취하는 경로가 된 것이다. 본 연구결과를 토대로 <<甁史>>와 <<名山記>>, 그리고 <<林園十六志>> 「葆養志」의 인용서목 등을 통해 조선후기 소품가들의 독서편력을 살펴본다면, 이들의 문학적 변화를 역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허균이 <<한정록>>을 편하면서 「攝生」이란 편장을 따로 두고 이와는 별도로 袁宏道의 <<甁史>>와 陳繼儒의 <<書畫金湯>>을 부록 뒤에 붙인 것으로도 알 수 있듯, 조선후기 소품가들에게 接花와 藝木, 그리고 명산의 탐방은 단순한 기호가 아닌 일종의 養生法이었다. 陳繼儒는 󰡔太平淸話󰡕에서 一人獨享之樂의 예로 焚香⋅試茶⋅洗硯⋅鼓琴⋅澆花⋅對花⋅潄泉⋅支杖⋅嘗酒⋅看山⋅臨帖⋅刻竹 등을 들었는데, 이처럼 澆花와 對花, 그리고 看山을 내용으로 하는 <<甁史>> <<名山記>>는 養生法의 하나인 治心을 위한 지침서였던 것이다.
    <<임원십육지>>를 저술한 서유구의 <<楓石鼓篋集>>의 각편의 끝에 이덕무와 성대중 등의 評語가 부기되어 있고, 서유구가 이덕무의 <<蜻蛉國志>>에 서문을 쓰기도 했던 것을 감안할 때, <임원십육지>>가 갖는 의미도 결코 작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임원십육지>>가 저술된 시기나 <<임원십육지>>의 내용이 <<甁史>>와 <<名山記>>처럼 澆花와 對花, 그리고 看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 색인어
  • 조선후기, 소품문, 만명소품, 양생, 섭생, 병화사, 명산기, 고동서화, 임원십육지, 임원경제지, 袁宏道, 공안파, 남공철, 보양지, 허균, 이덕무, 박지원, 김이문, 장자, 열하일기, 도불적 성향, 陳繼儒, 田藝衡, 凌迪知, 黃汝亨, 屠隆, 徐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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