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자는 석사과정부터 현재까지 唐 中期 이후 藩鎭을 연구의 주제로 삼아 왔다. 그 중에서 특히 唐 王朝와 藩鎭의 관계를 중앙인 唐 王朝와 지방인 번진의 人的 교류를 통해 설명해 보고자 했다. 일반적으로 唐 中期 이후 번진은 왕조에 대해 反王朝的 半獨立的 태도를 보여 주었고, 이러한 번진 ...
본 연구자는 석사과정부터 현재까지 唐 中期 이후 藩鎭을 연구의 주제로 삼아 왔다. 그 중에서 특히 唐 王朝와 藩鎭의 관계를 중앙인 唐 王朝와 지방인 번진의 人的 교류를 통해 설명해 보고자 했다. 일반적으로 唐 中期 이후 번진은 왕조에 대해 反王朝的 半獨立的 태도를 보여 주었고, 이러한 번진에 의해 唐 王朝가 좌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연구자는 唐 王朝가 소위 ‘藩鎭體制’가 성립한 이후에도 장기간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唐 王朝와 藩鎭의 관계 속에 唐 王朝에 의한 藩鎭 통제의 메카니즘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연구자가 唐 中期 이후 藩鎭을 연구 주제로 삼은 이유가 되었다. 지금까지 唐 王朝와 번진의 관계를 파악하고자 했던 것은 번진을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唐 王朝와 번진의 관계를 파악하려 했던 이전의 연구들은 대부분 소위 ‘唐宋變革期’論爭과 관련해서 唐 王朝와 뒤를 이어 출현한 宋 王朝와의 차이와 宋代 이후 나타난 새로운 지배계층의 기원과 성장 배경을 설명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그 결과 唐과 宋, 두 왕조의 차이가 반영되어 唐代 번진에 대한 연구는 왕조에 대한 藩鎭의 저항과 독립성이 강조되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上供의 거부와 河朔三鎭의 반란과 같은 개별사건과 下剋上이나 假父子 관계와 같은 특수한 현상이 또한 주요한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이와 같은 연구 결과는 唐末 이후의 성격을 武人支配時代, 藩鎭支配時代로 규정하게 하였다. 때문에 唐代 藩鎭의 중요성은 강조되었던 반면 唐 王朝가 왕조를 유지하기 위해 실시하였던 노력들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작업은 그리 많지 않았다. 唐 王朝는 618년 건국되어 907년 五代 後梁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唐 王朝가 번진을 설치하였던 것은 府兵制가 붕괴되었던 玄宗 시기(720-750)로 변경을 중심으로 10개의 번진을 설치하면서 부터이다. 이러한 번진은 安史의 亂 이후(760년 경) 전국에 설치되어 소위 ‘藩鎭體制’가 성립하였다. 藩鎭은 唐 王朝가 무너진 군사제도를 재건하기 위해 실시된 새로운 군사제도였고, 번진체제가 성립한 이후에도 唐 王朝는 150여년이나 왕조가 유지되었다. 이러한 기간은 唐 王朝가 건국되고 번진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보다 길거나 거의 비슷한 기간이었다. 이러한 唐 王朝의 장기간에 걸친 존속의 이유는 번진의 저항과 독립성만을 강조한다면 설명하기가 힘들어 진다. 이는 唐 王朝가 왕조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唐 王朝가 지방을 통치하기 위해선 번진의 협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중앙과 번진의 관계를 새롭게 살펴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연구는 당 왕조와 번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변경지역에 있었던 번진의 對唐關係가 아닌 대외관계를 살펴 보려한다. 즉, 당시 번진이 대외관계를 독자적 세력으로서 수행해나가고 있는지 아니면 당 왕조를 대리하여 수행해나가고 있는지를 살펴복자 한다. 물론 이러한 연구를 통해 당 중기 이후 당 왕조의 대외정책의 기조를 부수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기대효과
唐 왕조 중기 이후의 대외관계는 초기와 비교해 보았을 대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이는 唐 중기 이후 성립된 소위 '번진체제'에 관심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번진체제 하에서 번진의 역할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당 왕조의 역할은 큰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그렇 ...
唐 왕조 중기 이후의 대외관계는 초기와 비교해 보았을 대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이는 唐 중기 이후 성립된 소위 '번진체제'에 관심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번진체제 하에서 번진의 역할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당 왕조의 역할은 큰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唐 왕조는 주변 지역에 강한 영향을 미쳤으며, 번진체제가 성립된 이후에도 초기의 우월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외교관련 기구를 설치하였다. 그렇지만 당 왕조는 번진의 협조를 통해 대외관계를 유지해 나가야만 했다. 이는 중기 이후 唐 왕조가 설치하였던 다양한 외교관련 기구를 번진의 절도사들이 兼職하고 있었던 것에서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押新羅勃海兩蕃使, 押奚契丹兩蕃使나 市舶使 등과 같은 기구가 모두 절도사에게 내려졌던 외교사무를 담당하는 직함이었다. 당시 절도사들은 외교관련 직함을 가지고 있던 외부의 국가나 세력과 관계를 담당했는데, 이 때 절도사가 외교업무를 처리해 나가는 과정이 과연 독자세력으로서 독립적 행위인지의 여부는 아직까지 명확하지 않다. 이러한 외교업무를 담당했던 기구 또는 직함에 대한 인식도 중국학계와 접촉대상지역이 되었던 지역의 학계사이에 많은 차이가 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押新羅勃海兩蕃使에 대한 시각이 차이는 뚜렸하다. 압신라발해양번사는 산동반도지역의 번진이었던 平盧淄靑藩鎭의 절도사가 겸직하고 있었고, 이 직함을 지닌 절도사는 신라와 발해와 관계된 무역 및 외교업무를 담당하였다. 이에 대해 중국학계는 唐 왕조가 지리적으로 신라나 발해와 인접한 평노치청번진에 외교업무를 위임한 것으로 보고 있는 반면, 한국학계는 평노치청번진이 기본적으로 唐 왕조에 저항하고 독립적인 태도를 강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 직함을 통해 독자적인 세력으로서 외교업무를 수행한 것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한다는 것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변경지역에 설치된 번진이 다양한 외교사무를 담당하는 직함을 가지고 담당했던 대외활동을 살펴보면 좀 더 객관적인 결과가 도출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연구요약
본 연구자는 박사학위 논문을 통해 唐 王朝와 번진의 관계를 번진에서 활약했던 막직관을 통해, 정확히 말하자면 唐 王朝가 번진 막직관을 대상으로 시행하였던 여러 규정들을 통해 양자의 관계를 새롭게 살펴 보았다. 논문에서는 唐 王朝가 막직관을 통해 번진을 견제하고, 막직관 ...
본 연구자는 박사학위 논문을 통해 唐 王朝와 번진의 관계를 번진에서 활약했던 막직관을 통해, 정확히 말하자면 唐 王朝가 번진 막직관을 대상으로 시행하였던 여러 규정들을 통해 양자의 관계를 새롭게 살펴 보았다. 논문에서는 唐 王朝가 막직관을 통해 번진을 견제하고, 막직관을 이용하여 지방행정을 수행함으로써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 때 번진은 唐 王朝가 지방을 통치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고, 이러한 양자의 관계에서는 기존의 주장처럼 번진이 보여주었던 왕조에 대한 저항과 독립성은 강조될 수 없는 것이었다. 연구자는 唐代 藩鎭의 성격을 反王朝的이고 半獨立性을 지닌 존재라기보다는 王朝를 대신하여 지방행정을 수행했던 존재라는 성격이 훨씬 강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부 번진에서 反王朝的이고 半獨立的인 경향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그것은 일부 번진에서 일정한 시기에 보이는 현상이기 때문에 이를 모든 번진에 적용하여 일반화시키기는 무리라 할 수 있다. 연구자는 이러한 번진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唐 中期 이후 번진과 번진이 수행했던 대외관계를 살펴보려 한다. 즉, 외교문제를 통해 번진과 唐 王朝의 관계를 살펴보려 하는 것이다. 對外關係를 통해 唐 王朝와 번진의 관계를 살펴보려는 이유는 번진체제가 성립한 이후 唐 王朝와 번진의 관계를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安史의 亂 이후 唐 王朝 全 地域에 번진이 설치되었다. 전통적인 번진체제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말한다면 唐 王朝는 번진에 둘러싸여 있고, 번진에 대해 간섭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對外關係는 王朝가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과연 그러했을까?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방식을 통해 주변 지역의 여러세력과 관계를 유지해나갔을까? 또한 대외관계를 살펴보려는 것은 이 주제에 대한 연구가 唐 初期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唐 中期 이후는 번진체제에 관심이 집중되어 대외관계에 대한 연구가 그리 많지 않았다. 계속해서 반복하지만 唐 王朝는 藩鎭體制가 성립하고도 150여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왕조로서 기능을 유지했다. 이는 내정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세력과 외교관계가 유지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安史의 亂 이후 唐 王朝의 對外關係를 변경지역의 번진과 관련해서 살펴보면 흥미로운 결과가 도출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번진의 번수는 보유하고 있는 다양한 使職을 통해 실질적으로 직무를 수행했다. 이를 테면 절도사라는 사직을 보유하여 군사를 담당하고, 觀察處置使라는 사직을 보유하여 일반 행정(民政)을 담당하였다. 번수들이 담당한 사직중에는 외교업무를 담당하는 직책도 있었는데, 이를 통해 唐 王朝를 대신하여 주변 지역과 외교활동을 수행하였다. 연구자는 이러한 사직을 보유한 번진의 장관들이 주변지역과 외교활동을 통해 이러한 활동이 독자적인 세력으로서 활동인지 아니면 唐 王朝를 대리한 활동인지를 살펴보면 唐 王朝와 번진의 관계를 파악하는 새로운 근거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唐 王朝는 대외 관계와 무역을 위해 변경지역에 이를 담당할 사직을 설치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 市舶使, 押蕃使, 市馬使, 印納使, 市珠玉使 등이 있다. 唐 王朝는 이러한 사직을 변경지역에 독자적으로 혹은 번수가 겸직하게 하여 설치하는 주변지역과의 사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들과 주변지역과 관계를 살피고 다시 唐 王朝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가고 있는지를 살펴보려한다.
The Tang(唐 )dynasty.,The frontier Fan Zhen(藩鎭),Foreign relations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국문
연구의 주제는 "唐代 邊境地域의 藩鎭과 對外關係(The frontier Fan Zhen(藩鎭) and Foreign relations in the Tang(唐 )dynasty.)"이다. 이는 당과 번진의 관계를 살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북방민족과 당의 관계를 다룬다. 中國의 역대 왕조들에게 변경 지역에 존재하고 있었던 이민족 ...
연구의 주제는 "唐代 邊境地域의 藩鎭과 對外關係(The frontier Fan Zhen(藩鎭) and Foreign relations in the Tang(唐 )dynasty.)"이다. 이는 당과 번진의 관계를 살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북방민족과 당의 관계를 다룬다. 中國의 역대 왕조들에게 변경 지역에 존재하고 있었던 이민족 사회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는 왕조의 안정과 연결된 중요한 문제였다. 국제적 왕조를 지향했던 唐에게도 이민족 문제는 마찬가지였다. 唐은 주변의 민족이 복속하면 府나 州로 편성하여 통치하는 기미지배를 실시하였다. 唐은 복속한 이민족 지배를 위해 설치하였던 주현은 내지의 주현과는 성격을 달리하였기 때문에 羈縻府州라 한다. 기미부주에는 복속민의 원래 거주지에 설치한 것과 복속민을 中國 內地로 이주시켜 설치한 2 유형이 있었다. 기미부주는 도독이나 자사 등에 임명된 唐에 복속하기 이전의 부족 수장들에 의해 통치가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이는 외형상 자치를 인정받은 것에 불과했다. 그들은 변경에 설치된 都督府나 都護府의 통제를 받았다. 변경지역에 설치된 羈縻府州는 王朝의 울타리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여 唐의 안정에 기여했다. 羈縻府州는 唐의 용병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여 군사적 대응을 하기도 했고, 국경에 空間의 형태로 존재하면서 외부로 부터 唐에 가해지는 위협을 1차적으로 감당하였다. 때문에 외부의 충격이 唐에 가해지려면 일정한 시간이 지나야 했다. 이처럼 기미부주는 唐의 적대세력이 가하는 군사적 문화적 제반 충격을 완화시켜주는 완충지대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羈縻體制가 唐의 對外關係史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거론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中國의 경우 唐 왕조와 북방민족의 관계를 설명하는 民族問題的 관점에서 주로 진행된 반면, 日本의 경우는 唐 王朝의 ‘世界帝國的’ 성격을 밝혀주는 기준으로서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기미체제에 대한 연구는 주로 唐 前期를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연구 시기의 편중성을 문제로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최근에 唐 中期이후 출현한 使職을 대외관계와 연결시킨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使職의 출현을 都護(都督)府에 의한 기미지배의 쇠퇴와 관련하여 설명하였던 연구는 많지 않다. 唐은 8세기 들어서면서 羈縻府州를 관리하던 都督府와 都護府가 쇠퇴하여, 이민족 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반면 王朝의 변경지역에서는 여러 민족이 크게 성장하여 唐을 압박하고 있는 형세였다. 8세기 들어 吐蕃, 回紇, 渤海 등은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 唐과 동등한 지위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이 처럼 주변 지역의 정세가 변화하여 唐을 압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변경 지역 이민족 관리는 이전에 비해 중요해질 수밖에 없었다. 筆者는 本 稿에서 8세기 이후 羈縻府州 관리체제의 변화를 살펴보려 한다. 특히 당시 변경에 설치되었던 변경방위기구인 藩鎭과 관련하여 살펴보려한다. 이를 통해 唐의 이민족 정책의 推移를 살피고, 이 과정에서 번진의 역할을 살펴보려한다. 더 나아가 藩鎭의 역할이 唐의 이민족 정책에서 어떠한 의의가 있는지도 살펴보려한다.
영문
I arranged to a research product on Tang dynasty's race policy in the the border. I mainly by jietushi(節度使) a concurrent position, investigated the Tang dynasty's foreign policy. Therefore, for understanding duhufu(都护府) management system and ...
I arranged to a research product on Tang dynasty's race policy in the the border. I mainly by jietushi(節度使) a concurrent position, investigated the Tang dynasty's foreign policy. Therefore, for understanding duhufu(都护府) management system and the changes in the area of the specific conditions of ethnic minorities. I'll be in the border areas during the Tang dynasty are divided into national policies in the northeast and northwest border area to examine.
연구결과보고서
초록
太宗 貞觀 4年(630) 唐 왕조와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東突厥이 唐의 공격을 받아 頡利可汗이 포로로 사로잡힘으로써 와해되었다. 그러나 돌궐이 붕괴하기 이전부터 다수의 이민족과 중국인이 당에 내속하였다. 貞觀 3年 唐으로 내부한 四吏와 귀환한 중국인이 120萬口에 달했다고 ...
太宗 貞觀 4年(630) 唐 왕조와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東突厥이 唐의 공격을 받아 頡利可汗이 포로로 사로잡힘으로써 와해되었다. 그러나 돌궐이 붕괴하기 이전부터 다수의 이민족과 중국인이 당에 내속하였다. 貞觀 3年 唐으로 내부한 四吏와 귀환한 중국인이 120萬口에 달했다고 할 정도로, 唐의 북쪽 변경에는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新唐書』「地理志」에 따르면 唐은 돌궐이 와해되면서 유입된 이민족 降戶들을 기미주를 설치하여 分置하고, 部落이 큰 것에는 都督府를 두고, 그 수령으로 都督, 刺史로 삼아 모두 세습할 수 있게 했다. 당시 기미주는 이민족의 원 거주지에 설치한 것과 唐의 境內에 설치한 것이 있었고, 그 수는 856개에 이르렀다. 唐은 羈縻體制 下에서 내속한 부족 수령의 지위를 인정하여 세습할 수 있도록 했다. 때문에 이민족 사회가 唐의 행정체제로 편입되었지만 원래 형태가 온전하게 유지된 것처럼 보인다. 唐과 羈縻府州의 관계는 세력의 크기, 친밀도 등에 따라 차이가 있었고, 羈縻府州는 內地의 州縣과 성격이 달랐다. 때문에 羈縻府州는 일반 州縣과 달리 지방행정이 아닌 이민족 정책의 일환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唐은 羈縻府州를 통해 변경지역을 안정시키고, 羈縻府州의 세력균형을 인위적으로 조정하고, 部族 間 결합을 저지함으로써 왕조에 위협적인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羈縻府州에는 원래 部族 首領이 도독이나 자사에 임명되었지만, 唐에서 임명한 都護나 都督의 통제를 받았다. 都護는 “기미부주를 撫慰하고 외부로부터 침입을 막아 편안케 하며, 간악함과 속임이 있는지 살펴 배반하고 떠나고자 하면 征討하였다”. 즉, 羈縻府州에 대한 보호와 감시가 도호의 임무였던 것이다. 이 때 당이 설치한 羈縻府州는 당 왕조와 왕조에 대항하거나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의 중간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이민족을 회유하거나 그들에게서 오는 위협을 막아내는 완충지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기미부주는 당 왕조를 방어하는 방어선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羈縻府州 관리 방식은 玄宗 開元 年間부터 변화가 나타났다. 현종 개원 년간에 들어서면서 이민족을 使職이라는 새로운 기구가 담당하기 시작했다. 개원 2년(714) 豊安軍使 判將軍으로 吐蕃과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전사했던 王海賓은 당시 九原太守와 按撫朔方諸蕃部落使를 兼하고 있었다. 그리고 開元 2年에 河西節度使로서 凉州都督을 兼하고 있었던 楊執一도 九姓使를 겸직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록들은 開元 年間부터 押蕃部落使와 같은 이민족 사무를 담당하는 使職이 임명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開元年間 초기부터 都督府가 담당하고 있던 이민족 사무가 押蕃落使나 九姓使와 같은 使職에게 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동북 변경 지역 역시 마찬가지였다. 開元 4年(716) 內附한 契丹과 奚를 처리할 때부터 도독부가 담당하고 있던 羈縻府州 관리체제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開元 2年 반란을 일으켰던 거란 (李)盡忠의 從父弟 (李)失活이 奚의 族長 李大酺와 더불어 모두 來降하자, 당은 松漠都督府를 復置하고 失活을 都督으로 삼아 松漠郡王에 封하고 左金吾衛大將軍을 除授하였다. 이어 그 府에 靜析軍을 설치하여 失活을 經略大使로 삼아 자사로 삼았던 8部族의 酋長을 통할하게 하였다. 한편으로는 장군 薛泰를 押蕃落使로 삼아 군대를 감독하고 按撫케하였다. 開元 4年의 契丹과 奚에 대한 동북 변경에서의 조치와 九姓 및 突厥降戶에 서북변경에서의 조치는 使職을 임명하여 降戶를 처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만, 두 임명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開元 2년 서북변경에서의 조치는 다른 지역의 도독을 徵召하여 處置降戶使에 임명하고 있지만, 楊執一이 임명되었던 處置降戶使, 九姓使 등은 기본적으로 都督이 本官으로서 使職을 兼職하는 형태였다. 이는 여전히 이민족 사무가 도독부가 주관하고 있는 것으로, 단지 이때 使職은 도독부에 소속된 하나의 기구와 같은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개원 4년의 동북 변경의 조치는 장군 薛泰를 도독부와는 상관없는 독자적 기구로 설치하였다. 이 조치가 관할하는 영주도독부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는 서북 변경의 조치와 연계해서 보면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두 사례는 唐 王朝의 이민족 정책이 都督府에서 使職으로 변화해 가는 과도기적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연구자가 신청한 연구 과제는 "唐代 邊境地域의 藩鎭과 對外關係(The frontier Fan Zhen(藩鎭) and Foreign relations in the Tang(唐 )dynasty.)"이다. 기미지배가 붕괴하였던 당 중기 이후 기존의 도독부체제가 이민족의 군사적 도발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자, 唐은 번진을 설치하 ...
연구자가 신청한 연구 과제는 "唐代 邊境地域의 藩鎭과 對外關係(The frontier Fan Zhen(藩鎭) and Foreign relations in the Tang(唐 )dynasty.)"이다. 기미지배가 붕괴하였던 당 중기 이후 기존의 도독부체제가 이민족의 군사적 도발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자, 唐은 번진을 설치하였다. 唐은 都督府體制가 붕괴하자 이를 대신하여 번진을 설치하여 변경의 방위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전의 도독부(또는 도호부)는 변경을 방위하는 군사적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지만, 주로 이민족 관리를 통해 唐의 기미지배체제를 실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반면 이를 대신했던 번진에 대해서는 주로 군사적 역할이 강조되었다. 번진은 변경 지역의 이민족의 동태에 대처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기 때문에, 군사기구임에도 불구하고 대이민족 사무는 번진의 중요한 역할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연구자가 신청한 연구 과제는 唐代 藩鎭史의 일환으로서 연구를 진행하면서, 한편으로 북방민족의 역사와도 연결시켜 연구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