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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성과 추. 근대에서 추의 구조적 변화의 양상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학문후속세대양성_학술연구교수& #40;인문사회& #41;
연구과제번호 2008-358-A00107
선정년도 2008 년
연구기간 3 년 (2008년 09월 01일 ~ 2011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조경식
연구수행기관 한신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오늘날 아름다움과 추에 대해서 논의를 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진, 선, 미의 통일성과 절대적 이념들의 기반이 뿌리 채 흔들리고, 모든 가치가 상대화 되어버린 포스트모던의 시대에서 아름다움과 추의 개념은 먼지 쌓인 구시대의 유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계에서 아름다움과 추의 범주는 실제로 완전히 쓸모없고 통용성을 상실한 것일까? 현대 사회에서는 아름다움과 추를 더 이상 논하지 않는가? 일상생활에서의 체험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성별을 불문하고 자기연출을 통해서 “아름답게 꾸미기”위해 서로 경쟁하며, 특정 그룹의 사람들은 아름다움 혹은 추를 통해서 자신들의 독특한 사회적, 정신적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아름다움과 추의 범주는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 사회적 차원에서도 여전히 통용되어 예컨대 시 행정당국은 혐오스럽고 추한 것을 보지 않으려 하고 보이지 않게도 하려 한다. 광고, 패션, 장신구, 자동차, 건축 등 제반 산업분야는 분명히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심지어는 추를 독특한 심미적 아이디어로 이용하기조차 한다. 이렇듯 아름다움과 추는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특정 현상과 연관되어 실현되는 경우 외에도 세계를 판단하는 가치적 범주로 이용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고전적 세계관을 가진 혹자는 현대를 ‘추한 시대’로 간주하면서 암흑의 세기인 “14세기의 재판(再版)”(Helga Zepp-LaRouche)이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의 세계에서 아름다움과 추의 범주는 여전히 유효하다.
    아름다움이 예전부터 예술과 철학의 핵심 주제로 끊임없이 논의되고 천착되고 실현되어 온 반면, 추는 예나 지금이나 다루어지기는커녕 대부분 그에 대해 침묵하거나 기피하는 대상일 뿐이다. 그 까닭은 추에는 사람으로 하여금 멀리하고 부정해야 할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좀 더 현학적으로 말하자면 아름다움이 원하고 소유하고 싶은 그 무엇을 갖고 있다면, 추는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는 대상인데, ‘나’에게 “동화될 수 없는 타자성 ”(Menninghaus)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추는 가까이 다가오면 즉각적으로 피하거나 밀쳐내고 싶고 힘으로 없애고 싶은 대상이다. 추는 즉시 부인하고 싶은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이때 그것은 단순한 부인이 아니라 부인하도록 강제하는 그 무엇인가를 갖고 있다. 그런 까닭에 추의 연구는 다른 주제를 다루는 연구와는 달리 부정적 선입견을 불식시키는 일환으로 추에 대한 연구의 당위성을 스스로 변호해야 하는 우회로를 거쳐야 한다. 『추의 미학』을 집필한 로젠크란츠 역시 서문에서 추를 다루어야만 하는 당위성에 대해서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 바 있다.
    추는 일단 모든 부정적인 현상을 포괄하는 부정성 자체로 이해될 수 있다. 추는 추를 포괄적인 부정성으로 보는 태도는 정당한 것인가? 좀더 구체적으로 추는 무엇으로 정의되고 있으며,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는 것인가? 추의 연구가 오랜 학문의 역사에서도 극히 드문 현상이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그 추에 대한 연구 시도가 분명 시대착오적인 것일 수는 없다. 추가 특정 가치나 현상에 대한 판단과 연계되어 있는 한, 시대와 사회가 바뀜에 따라 추 역시 변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을 띤다. 즉 추의 변화와 부침에는 예술과 사회의 특정한 변화를 전제한다. 이점을 알아보는 것 역시 이 연구의 목적이다.
    오늘날 학문의 흐름을 보면 지금까지 간과되어 왔거나 새로운 조명이 필요한 문제 영역을 학제를 넘어선 문화학이란 영역에서 다루고 있다. 이때 문화학은 다루고 있는 대상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논의의 틀로 대상을 바라보게 만들며 새로운 결과도 가능하게 한다. 예컨대 문화학의 커다란 주제 중의 하나는 “기억과 망각”으로, 이 문화학의 패러다임은 문화를 문화적 기억과 망각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분석하게 만들면서 그 결과 문화 현상에 대한 새로운 결과들을 도출해 낸다. 그것은 역사, 텍스트, 예술, 매체에 대한 새로운 면을 부각시키면서 나아가 혁명이나 전쟁의 문화의 창조적 역할을 상기시킨다. “근대성과 추”라는 본 연구 역시 일종의 문화학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연구는 지금까지 간과되어 왔던 추의 문제를 예술, 역사와의 관계에서 새롭게 조망하게 만들 것이고. 지금까지 아름다움에 경도되어 왔던 예술에 관한 논의를 추의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보게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새로움은 세계를 다른 시각으로도 바라볼 수 있는 학문적 자유의 표현이고 지금까지 아름다움과 이성의 우위 속에서 파묻혀 간과되어 온 타자성을 표면으로 부상시키는 시도의 표현이다.


  • 기대효과
  • “근대성과 추”에 관한 연구는 추가 어떤 예술적, 역사적 맥락에서 점차 심미적인 대상범주로 부상하는지를 분석한다. 이 연구는 따라서 한편으로는 추에 관한 역사적 의미론을 다루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추의 범주화에 관한 새로운 논의의 장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이에 이 연구는 학문적으로 지금까지 국외에서 분석되지 않은 추에 관한 담론의 구조적인 변화를 추적할 것이며, 국내에서는 추에 관한 논의의 이론적 길잡이의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추가 어떤 맥락에서 근대/현대에서 심미적 범주로 자율성을 획득하게 되는지 보여 줄 것이다. 여기서 참고로 추에 관한 국내외의 연구동향을 살펴보면 그것은 다음과 같다.
    추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는 외국에서도 극히 드물다. 그 중에서도 연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역사적인 흐름 속에서 추에 관한 텍스트들의 내용을 요약, 소개하는 입문서 정도이다. 예컨대 외스터를레의 다음의 저작은 이런 연구의 흐름에 대표격이다(Entwurf einer Monographie des aesthetischen Haesslichen. in: Zur Modernitaet der Romantik, hg. v. D. Baensch, Stuttgart 1977, S. 217-297). 추가 구체적인 학문의 대상으로 천착되지 않고 그에 관한 피상적인 역사적 논의만이 소개되고 있는 까닭은 추가 가지고 있는 거의 무한한 정도의 포괄적인 의미영역에서 비롯하는 현상이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로서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추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의 장을 마련한 로젠크란츠의 『추의 미학』이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독일 관념주의적 노선에서 출발한 추에 대한 분석과 범주화의 시도이며, 따라서 추와 예술, 사회와의 관계를 분석하는 “근대성과 추”라는 본 연구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본 연구의 분석 대상이 될 뿐이다. 그 밖에 추에 관한 논의는 구체적으로 특정 작가의 작품에서 이루어지거나 - 이에 대해서는 연구가 많은데 그것은 주로 악이나 공포 등과 같은 추의 하위 범주에 관한 내용들이다 - 아니면 특정 시기에 있어서 특정한 추에 관한 논의가 있다. 후자의 경우는 중세 시대에 형태적 추로서의 추의 형태에 대한 연구(Formosa deformitas. Bonn 1976)나 18세기의 무시무시한 추의 범주를 다룬 첼레의 저작(Angenehmes Grauen. Hamburg 1987), 독일 관념주의 미학 전통에서 추가 범주화되기 어려운 까닭을 밝힌 풍크의 저작 등이 있다(Die Aesthetik des Haesslichen, Berlin 1983). 그 밖에도 추의 심미적 형상화 가능성을 논의하는 융(Schoener Schein der Haesslichkeit oder Haesslichkeit des schoenen Scheins, Frankfurt a. M., 1987), 연극에서 악의 형상화 문제를 다룬 사프란스키(Das Boese oder das Drama der Freiheit, Frankfurt a. M. 2001)가 있으며, 아름다움과 악의 연관관계를 다룬 비간트의 글(Die Schoenheit und das Boese, Muenchen 1967)도 있다. 물론 이 저작들이 추에 관한 연구 전부가 아니다. 그러나 추에 관한 체계적 연구는 찾아 보기 극히 힘들 정도이다. 국내에서 추에 관한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추의 하위 범주인 악에 관해서는 특정 작가들을 대상으로 한 개별 논문에서 많이 다루어졌다. 예컨대 「악의 문학적 형상화 연구」(뷔히너와 현대문학 2002)가 그러한데, 여기서는 각각 괴테, 보들레르, 클라이스트, 고골/도스또옙스키가 다루어진다. 이런 연구 상황에서 근대 18, 19세기에서 추가 변화하는 경과를 문학, 미학, 예술 현실과의 관련에서 구조적으로 살펴보는 본 연구는 의미가 있다. 그것은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제의 예술 현실에서 부침하는 추의 의미론적 변화를 추적해 보는 시도이며 이로써 현대에서 추의 부상에 대한 의미론적 해명이 이루어질 것이다. 나아가서 “근대성과 추”를 다루는 본 연구는 국내 예술계와 비평계에 지금까지 천착되지 않은 추의 영역을 이론적인 면에서 밝혀줌으로써 새로운 소통과 판단의 준거틀을 제공할 수 있으며, 또한 추가 예술 창작과 디자인 분야에서 새로운 관점과 추동력이 되게끔 자극을 줄 수 있다. 교육에서 이 연구의 결과물이 활용될 수 있는 쓰임은 아주 다양하다. 일례로 이 연구의 결과물은 예술 이론 교육뿐만 아니라 예술 창작 교육에 도움이 되어 학생들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고의 형성에 일조를 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 문화학, 미학, 문학 교육에 있어서도 새로운 수업 대상으로서 그 활용성은 대단히 크다.
  • 연구요약
  • “근대성과 추”에 관한 연구는 근대에서의 추의 구조적 변화 과정을 분석한다. 고대나 중세 에서 추가 형태적으로는 무형이나 기형, 정신적으로는 모든 부정성, 즉 죄, 악을 뜻하기 때문에 기피의 대상이었다면 -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도 언급되고 있는데, 에토스에서 벗어나 정신적으로 악에 빠져있고 그것이 외화된 형태적으로 추한 인간은 그리스인들에게는 비극의 품위에도 걸맞지 않은 존재였다. - 그 상황은 18세기부터, 즉 사회의 구조적 변화가 일어난 근대부터 변화하기 시작한다. 사회가 분업화하고 전문화되어감에 따라 전근대의 진, 선, 미의 통일적인 세계는 해체되기 시작하고, 예술은 진과 선을 떠나서 오직 아름다움과 추의 범주에 따라 상상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다. 예술은 아름다움/추를 기반으로 한 자율성을 토대로 자신의 영역을 예술 외적인 현실과 구분하고, 예술 외적인 세계는 오직 소통의 대상으로 소재를 빌려오는 대상으로 국한된다. 예술적 소통이 허구와 가상을 바탕으로 한 임의적인 세계에 기초해 있기에 설사 모방과 미메시스의 차원에서 현실을 차용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토대로 표현된 예술 세계는 예술의 자기준거적인 구성물로서 독자적인 의미영역을 갖게 된다. 여기서 비로소 추는 독자적인 예술의 영역으로, 예술적 행위의 대상으로 심미적인 것으로서의 위상을 갖기 시작한다. 이러한 근대에서 추는 세 단계의 변화의 양상을 보인다.
    1) 첫 번째 단계는 추에 관한 심미적 논의가 촉발된 근대 초기이다. 레싱은 「라오콘」에서 시간예술인 문학에서 추의 심미적 형상화 가능성을 인정했고, 고트쉐트는 연극의 잔인한 장면에서 발생하는 “즐거운 전율”을 미학적 문제로 고찰하기 시작한다. 실러는 예술의 자율성을 주장하면서 전통적으로 추의 범주인 “비천하고 천박한 형태의 사용”을 허락하며, 슐레겔은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 예술”의 경향성을 추로 해석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런 논의는 문학내적인 담론 차원에서 이루어지며, 철학 담론에서는 아름다움이 여전히 추에 대해 우위를 지킨다.
    2) 두 번째 단계는 이와 같은 상황이 반전을 이룬 19세기 중반 무렵이다. 미학자들은 바로 사회의 산업화와 도시화, 빈민화의 과정에서 “추한 현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이 현실을 미학의 범주로 받아들여야할 당위성을 느낀다. 이전의 미학 논의가 아름다움/숭고의 대립쌍으로 이루어지고 추는 숭고의 하위범주로 다루어진 반면, 이때부터 진정 추는 아름다움의 반대극으로 논의해야 할 대상이 된다. 이런 “추한 현실”에 대한 인식에서 추를 존재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하는 당위성은 미학에서 추의 범주화로 이어진다. 추는 이제 심미적 현상일 뿐만 아니라 현실의 일면이며 존재자의 본질적 모습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추한 현실’, 추의 존재론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나아가서 추는 이제 어떤 관점에서 미학의 필연적인 대상으로 다루어지고 있나? 그에 대한 미학자들의 논의는 어떻게 전개되고 있을까? 이런 질문의 끝에는 로젠크란츠의 『추의 미학』이 있다. 그러나 『추의 미학』에서도 추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나 입장은 분명히 나타난다. 추에 관한 논의에서 추는 부정적 아름다움으로서 구체적으로 범주화가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여전히 필연적으로 극복되어서 아름다움으로 회귀해야할 것이었다. 여기에는 도덕적 자유를 토대로 한 아름다움과 추의 이분법이 그 이론적 배경에 깔려있다. 그러나 전통의 모든 가치를 전도시킨 니체에게서 이런 미학 노선은 그 근원에서부터 회의된다. 추가 구조적으로 변화하는 세 번째 단계는 이렇게 해서 니체에게서 시작된다.
    3) 이 단계에서 도덕적 자유와 그에 맞물려 있는 아름다움은 더 이상 절대적인 가치가 되지 못한다. 선/악의 범주가 회의됨으로써 추의 정신적 연관인 악은 니체에게서 상대화되고 그에 따라 이제 추는 긍정적인 의미로 심미적 대상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한다. 그렇다면 니체는 담론 차원에서 정신적 추인 악을 어떻게 상대화 시키고 있는 것인가? 그의 예술관은 아름다움/추가 아닌 어떤 대안을 제시하고 있을까? 나아가서 ‘추하고 퇴폐적인 병든 예술’로 폄하된 아방가르드는 세기말/세기 초 문화의 주도적 흐름으로서 전통의 아름다움의 범주를 부정하고 전투적이고 실천적인 “추한 예술”을 생산한다. 여기서 ‘아름다운 추’는 대체 전통적인 추의 범주와 어떤 상이성을 보이고 있으며, 어떻게 합리화되고 예술의 범주로 승화되고 있을까?
  • 한글키워드
  • 부정적 아름다움,로젠크란츠,매체,레싱,기형,무형,형태,악,거짓,죄,정신,추의 미학,자유,도덕,헤겔,흥미로움,슐레겔,예술의 자율성,쉴러,난파선,고트쉐트,추,즐거운 전율,추한 현실,변증법,근대,추한 예술 ,아방가르드,가치전도,니체
  • 영문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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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고대와 중세에서 추는 미에 반대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미가 진, 선과 일치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에 추는 거짓, 악덕과 연계되어 예술의 표현대상이 될 수 없었다. 추는 기껏해야 우스꽝스러운 희극에서 조소나 조롱의 대상으로나 표현될 수 있는 부정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이렇듯 추를 금기시 하는 예술의 담론과는 별개로 실제의 예술에서 추는 극히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추는 교훈을 주기 위한 수단인 "즐거운 전율"이라는 감정의 격발과 연관하여 혹은 "이상화"될 수 있는 심미적 표현방식에 준거하여 예술의 표현대상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함에 따라 실제의 예술에서 표현된 것이었다. 추가 예술에서 독자적인 심미적 범주로 자리 잡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심미성이 - 그로부터 파생되는 예술의 대상에 대한 즐거움이 - 예술의 목적이 되는 예술의 자율성이라고 하는 예술프로그램이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실러의 미학이론들이 바로 그런 예술프로그램들인데, 더 결정적인 것은, 프리드리히 슐레겔이 진단하고 있는 바와 같이, 더 이상 미가 아닌 "흥미로움"을 지향하는 "현대 예술"의 경향성으로, 이제 흥미로움을 추구하는 예술은 추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띠게 된다. 쉴러에게 있어서 예술의 목적이 도덕적 개선이 아니라 심미적 자율성에 기초한 ‘즐거움’이었던 까닭에 저열하고 추한 것을 다루는 정도는 훨씬 완화됐지만, ‘인간 총체성의 형성’이라는 예술의 ‘규정적 이념’은 추로의 쏠림을 막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과는 달리 프리드리히 슐레겔이 추를 현대문학의 특성으로 파악하지만 그 역시 그 가능성과 방향성을 이론적으로 열어놓았을 뿐, 추의 본격적인 논의는 시도하지 않았다.
    추가 본격적으로 논의되는 시기는 바로 19세기 중엽, 근대화의 부정적인 현실이, 즉 추한 현실이 도처에서 관찰될 때이다. 예술의 모방 대상인 현실 세계가 근대화로 인해 산업화, 도시화, 프롤레타리아화 되어감에 따라 추한 모습을 띠게 되고 이에 예술 역시 그런 부정적인 모습을 가지게 된다.‘구역질',‘혐오'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부정적인 미"로서의 추는 이제 더 이상 부인될 수 없는 현실의 모습이자 예술 자체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런 추한 현실에 직면해서 미는 더 이상 타당성을 요구할 수 없었고, 추의 다양한 현상들은 여러 미학자들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범주화되기에 이른다. 바이쎄를 비롯한 대부분의 미학자들은 이때 추의 부정적 이념을 편협하게 정신적인 것으로만 파악하는 단점을 보인다. 즉 이들은 추의 정신적인 계기를 유령적인 것과 사악한 것과 악마적인 것의 속임수로 생각한 것이다. 이들과는 달리 로젠크란츠는 추의 다양한 - 정신적, 형태적 - 현상들을 체계적으로 범주화하여 그 목록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헤겔의 영향 하에서 추에 독자적인 심미성을 부여하지 못하고 미의 부정성으로, 미에 의존적인 것으로 파악하며, 결국에는 미로 회귀하는 변증법으로 해소시킴으로써 사고의 한계를 보여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세기말 니체는 선/악의 이분법에 기초한 전통 도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과 삶에 대한 적대성을 이유로 그것을 폐기하고, 생기와 삶을 위한 도덕, 즉 도덕적 자연주의를 전개한다. 니체에게는 선/악의 이분법에 맞물려 있는 미/추의 이분법도 당연히 더 이상 통용성을 갖지 못한다. 그 대신에 예술은 이제 생기와 삶을 위한, 즉 도취와 자극의 강화를 위한 새로운 심미성을 요구받기에 이른다. 아방가르드는 이점에서 니체의 미학프로그램이 요구한 것과 유사성을 보인다. 다다, 미래파, 초현실주의의 전개양상은 모두 전통의 미/추 이분법에 근거한 전통예술을 부인하고 새로운 심미성을 비이성적인 것, 무질서, 기계, 폭력, 무의식, 히스테리, 섹슈얼리티 등에서 찾으며 이것들은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바로 추에 다름 아니었고, 추가 바로 새로운 심미성으로 찬양된 것이었다. 특히 초현실주의는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사회와 전통 예술이 부정하고 터부시한 모든 금기들을 공공연하게 도발적으로 깨뜨리고 예술을 통해 사회적 앙가주망을 통해 의식의 "혁명"을 시도한다. 이 "초현실주의의 혁명"을 예술작품에 국한시켜보면 그들은 천재적 예술가를 부정하고 집단적으로 작업하며, 형식과 내용에 상응하게 양식의 통일을 꾀하는 대신 무의식의 과정에서 혹은 집단적 히스테리 속에서 우연하게 만들어진 서투름과 졸렬함의 작품을 완성하며, 정확성과 개연성을 부인하는 기괴하고 무엇으로 정의할 수 없는 형상들 심지어는 공허함과 부패와 죽음과 범죄를 수단으로 굳어있는 인간의 의식을 깨뜨리려고 했다. 이에 초현실주의에서 나타난 작품들 모두는 추의 작품들이고 이 초현실주의에서 추의 승리, 추한 미학프로그램을 언급할 수 있게 된다.
  • 영문
  • In der Antike und dem Mittelalter wird das Haessliche als Gegensatz des Schoenen verstanden. Da das Schoene mit dem Wahren und dem Guten zu identifizieren ist, darf das Haessliche, das mit Unwahrem und Laster in Verbindung gesetzt wird, nicht als Gegenstand der Kunst begriffen werden. Aber in der Praxis der Kunst, anders als in Diskursen der Kunst, in denen es tabuisiert wird, erscheint es in sehr verschiedenen Gestalten. Das laesst sich auf das "angenehme Grauen", das es im Innern des Menschen hervoruft, oder auf dessen aesthetische Behandlungweise zurueckzufuehren, welche das Obszoene und das Frevelhafte des Haesslichen verminderen kann. Dadurch wird in der Moderne das Haessliche zu einer selbstaendigen, aesthetischen Kategorie der Kunst und dazu traegt das Programm der aesthetischen Autonomie, z.B. von Friedrich Schiller, entschieden bei. Denn dadurch alles, was die aesthetische Lust bewirken kann, einschliesslich des Haesslichen, gewinnt die Moeglichkeit, zum Gegenstand der Kunst zu werden. Friedrich Schlegel, der die Tendenz der modernen Kunst zum "Interessanten" diagnostiziert, geht einen Schritt weiter und behauptet, dass die "interessante moderne Kunst"nicht umhin koenne, das Haessliche auszudruecken.
    Der Zeitpunkt, in dem das Haessliche ueberhaupt zum Gegenstand sowohl der Diskussion als auch der kuenstlerischen Gestaltung wird, ist gerade Mitte 90er Jahre, wo mit der Modernisierung der Gesellschaft die Industrialisierung und die Verstaetterung vor sich gehen, aus der das Proletariat in den Vordergrund der Geschichte auftritt, und Kriminalitaet, Ephidemie, Alkohlismus, Armut und Elend zur herrschenden Wirklichkeit werden. Da die Kunst auf die Mimesis der Wirklichkeit abzielt, muss sie sich mit dieser haesslichen Wirklichkeit auseinandersetzen und diese zu ihrem Gegenstand machen. Verschiedene Phaenomen des Haesslichen werden von manchen Aesthetikern kategorisiert. Dabei stellt man eindeutig heraus, dass die meisten von ihnen, vor allem Weisse, das Haessliche bloss als etwas Geistiges begreifen, und darunter das Gespenstistisch, das Boeshafte und das Daemonische verstehen. Anders als diese kategoriesiert Rosenkranz zwar verschiedene Phaenomen des Haesslichen nicht nur aus seinem geistigen, sondern auch seinem formellen Aspekt systematisch, und vervollstaendigt einen Kodex des Haesslichen. Aber er spricht unter dem Einfluss seines Lehres, Hegels, dem Haesslichen die aesthetische Selbstaendigkeit nicht zu, indem er es als Negativitaet des Schoenen versteht, seine Abhaengigkeit von dem Schoenen betont und zuletzt es durch das Komische zum Schoenen aufhebt.
    Am Ende des 19. Jahrhunderts negiert Nietzsche traditionelle Morallehren, die auf der Dichotomie "gut und boese" beruhen, aufgrund deren ideologischen Charakters und deren Lebensfeindlichkeit, entwickelt eine neue Morallehre fuer das Leben und die Lebenskraft, naemlich "den moralischen Naturalismus". Es wird offenbar, dass auch die Dichotomie "schoen und haesslich", die unabdingbar mit derselben "gut und boese" angeschlossen ist, selbstverstaendlich keine Geltung in Anspruch nehmen darf. Indem die Dichotomie schoen/haesslich keine Geltung mehr hat, wird das Haessliche in einem anderen Augenmerk beobachtet, naemlich in bezug auf dessen Wirkung auf die Lebenskraft. Unter dem Einfluss von Nietzsche tritt die Avantgarde zu Anfang 20. Jahrhunderts auf, negiert alle Grundlagen der Gesellschaft, die den Weltkrieg ermoeglichten, vor allem die schoene traditionelle Kunst. Unter seinen Stroemungen verkuendet der Surrealismus sogar die "surrealistische Revolution", mit der explosiven Kraft des aesthetisch Haesslichen "eine Bewusstseinskrise allgemeiner und schwerwiegendster Art auszuloesen", welche eine andere Wirklichkeit herbeifuehren soll. Somit erfahren das Haessliche und dessen aesthetische Programm eine volle Anerkennung, dessen Selbstverstaendlichkeit als das echt Aesthetische heutzutage nicht mehr ins Zweifel gezogen wird.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고대와 중세에서 추는 미에 반대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미가 진, 선과 일치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에 추는 거짓, 악덕과 연계되어 예술의 표현대상이 될 수 없었다. 추는 기껏해야 우스꽝스러운 희극에서 조소나 조롱의 대상으로나 표현될 수 있는 부정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이렇듯 추를 금기시 하는 예술의 담론과는 별개로 실제의 예술에서 추는 극히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추는 교훈을 주기 위한 수단인 “즐거운 전율”이라는 감정의 격발과 연관하여 혹은 “이상화”될 수 있는 심미적 표현방식에 준거하여 예술의 표현대상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함에 따라 실제의 예술에서 표현된 것이었다. 추가 예술에서 독자적인 심미적 범주로 자리 잡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심미성이 - 그로부터 파생되는 예술의 대상에 대한 즐거움이 - 예술의 목적이 되는 예술의 자율성이라고 하는 예술프로그램이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실러의 미학이론들이 바로 그런 예술프로그램들인데, 더 결정적인 것은, 프리드리히 슐레겔이 진단하고 있는 바와 같이, 더 이상 미가 아닌 “흥미로움”을 지향하는 “현대 예술”의 경향성으로, 이제 흥미로움을 추구하는 예술은 추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띠게 된다. 쉴러에게 있어서 예술의 목적이 도덕적 개선이 아니라 심미적 자율성에 기초한 ‘즐거움’이었던 까닭에 저열하고 추한 것을 다루는 정도는 훨씬 완화됐지만, ‘인간 총체성의 형성’이라는 예술의 ‘규정적 이념’은 추로의 쏠림을 막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과는 달리 프리드리히 슐레겔이 추를 현대문학의 특성으로 파악하지만 그 역시 그 가능성과 방향성을 이론적으로 열어놓았을 뿐, 추의 본격적인 논의는 시도하지 않았다.
    추가 본격적으로 논의되는 시기는 바로 19세기 중엽, 근대화의 부정적인 현실이, 즉 추한 현실이 도처에서 관찰될 때이다. 예술의 모방 대상인 현실 세계가 근대화로 인해 산업화, 도시화, 프롤레타리아화 되어감에 따라 추한 모습을 띠게 되고 이에 예술 역시 그런 부정적인 모습을 가지게 된다.‘구역질',‘혐오'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부정적인 미"로서의 추는 이제 더 이상 부인될 수 없는 현실의 모습이자 예술 자체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런 추한 현실에 직면해서 미는 더 이상 타당성을 요구할 수 없었고, 추의 다양한 현상들은 여러 미학자들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범주화되기에 이른다. 바이쎄를 비롯한 대부분의 미학자들은 이때 추의 부정적 이념을 편협하게 정신적인 것으로만 파악하는 단점을 보인다. 즉 이들은 추의 정신적인 계기를 유령적인 것과 사악한 것과 악마적인 것의 속임수로 생각한 것이다. 이들과는 달리 로젠크란츠는 추의 다양한 - 정신적, 형태적 - 현상들을 체계적으로 범주화하여 그 목록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헤겔의 영향 하에서 추에 독자적인 심미성을 부여하지 못하고 미의 부정성으로, 미에 의존적인 것으로 파악하며, 결국에는 미로 회귀하는 변증법으로 해소시킴으로써 사고의 한계를 보여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세기말 니체는 선/악의 이분법에 기초한 전통 도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과 삶에 대한 적대성을 이유로 그것을 폐기하고, 생기와 삶을 위한 도덕, 즉 도덕적 자연주의를 전개한다. 니체에게는 선/악의 이분법에 맞물려 있는 미/추의 이분법도 당연히 더 이상 통용성을 갖지 못한다. 그 대신에 예술은 이제 생기와 삶을 위한, 즉 도취와 자극의 강화를 위한 새로운 심미성을 요구받기에 이른다. 아방가르드는 이점에서 니체의 미학프로그램이 요구한 것과 유사성을 보인다. 다다, 미래파, 초현실주의의 전개양상은 모두 전통의 미/추 이분법에 근거한 전통예술을 부인하고 새로운 심미성을 비이성적인 것, 무질서, 기계, 폭력, 무의식, 히스테리, 섹슈얼리티 등에서 찾으며 이것들은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바로 추에 다름 아니었고, 추가 바로 새로운 심미성으로 찬양된 것이었다. 특히 초현실주의는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사회와 전통 예술이 부정하고 터부시한 모든 금기들을 공공연하게 도발적으로 깨뜨리고 예술을 통해 사회적 앙가주망을 통해 의식의 “혁명”을 시도한다. 이 “초현실주의의 혁명”을 예술작품에 국한시켜보면 그들은 천재적 예술가를 부정하고 집단적으로 작업하며, 형식과 내용에 상응하게 양식의 통일을 꾀하는 대신 무의식의 과정에서 혹은 집단적 히스테리 속에서 우연하게 만들어진 서투름과 졸렬함의 작품을 완성하며, 정확성과 개연성을 부인하는 기괴하고 무엇으로 정의할 수 없는 형상들 심지어는 공허함과 부패와 죽음과 범죄를 수단으로 굳어있는 인간의 의식을 깨뜨리려고 했다. 이에 초현실주의에서 나타난 작품들 모두는 추의 작품들이고 이 초현실주의에서 추의 승리, 추한 미학프로그램을 언급할 수 있게 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근대성과 추에 관한 연구는 추가 어떤 예술적, 역사적 맥락에서 점차 심미적인 대상범주로 부상하는지를 분석했다. 이 연구는 따라서 한편으로는 추에 관한 역사적 의미론을 다루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추의 범주화에 관한 새로운 논의의 장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이 연구는 학문적으로 지금까지 국외에서 분석되지 않은 추에 관한 담론의 구조적인 변화를 추적하여, 국내에서는 추에 관한 논의의 이론적 길잡이의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추가 어떤 맥락에서 근대/현대에서 심미적 범주로 자율성을 획득하게 되는지 보여준다. 나아가서 본 연구는 국내 예술계와 비평계에 지금까지 천착되지 않은 추의 영역을 이론적인 면에서 밝혀줌으로써 새로운 소통과 판단의 준거틀을 제공할 수 있으며, 또한 추가 예술 창작과 디자인 분야에서 새로운 관점과 추동력이 되게끔 자극을 줄 수 있다. 교육에서 이 연구의 결과물이 활용될 수 있는 쓰임은 아주 다양하다. 일례로 이 연구의 결과물은 예술 이론 교육뿐만 아니라 예술 창작 교육에 도움이 되어 학생들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고의 형성에 일조를 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 문화학, 미학, 문학 교육에 있어서도 새로운 수업 대상으로서 그 활용성은 대단히 크다.
  • 색인어
  • 미, 추, 비극, 숭고, 즐거운 전율, 심미성, 예술의 자율성, 프리드리히 쉴러, 프리드리히 슐레겔, 첼레, 레씽, 흥미로움, 현대예술의 경향성, 대도시화, 범죄, 추의 범주, 로젠크란츠, 바이쎄. 니체, 아방가르드, 초현실주의, 카다브르 엑스퀴, 악마적인 것, 진선미의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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