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인 고도인 세 도시, 즉 평양, 부여, 경주라는 장소가 일본의 문화적 헤게모니 하에서 어떻게 새롭게 구획되고 재현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식민지시기에 이루어진 고도의 근대적 표상 작업은 현재의 관점에서 해석되고, 선 ...
본 연구는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인 고도인 세 도시, 즉 평양, 부여, 경주라는 장소가 일본의 문화적 헤게모니 하에서 어떻게 새롭게 구획되고 재현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식민지시기에 이루어진 고도의 근대적 표상 작업은 현재의 관점에서 해석되고, 선택되고, 발명된 과거로서 전통의 창출과정을 증명하는 한 유력한 예이다. 본 연구는 찬란한 역사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고도가 근대에 새로운 장소로 재편되는 과정을 각종 지리지, 여행기, 문학텍스트를 통해 살펴볼 것이다.
문화와 제국주의의 관련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공간에 대한 인식을 통해 통제의 작용을 검출하고, 지리공간과 문화공간의 구획방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탈식민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장소는 문화적 가치들이 서로 겨루는 갈등의 터전이 되면서 또한 그 가치들이 구체화되어 드러나는 재현의 현장이 된다. 식민지를 둘러싼 서사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거주와 이동, 정착과 여행의 배경에는 제국주의 권력하에 이루어진 근대 한국 지리의 재편과 그것을 둘러싼 투쟁의 역사가 깔려 있다. 본 연구는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하에 형성된 근대 한국의 공간 표상들을 검토하고 그것을 체계화시킨 이론을 모색함으로써 영토, 지리적 영역, 제국의 장소구획, 그리고 문화적 경합들을 텍스트의 맥락에서 검토할 것이다.
공간과 장소의 형성은 이데올로기, 사회적 관계, 권력, 그리고 장소 정체성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공간과 장소의 발생적 근원을 묻는 일은 곧 근대인으로서 우리자신의 사회적, 문화적 출생지와 정체성을 묻는 일이기도 하다. 일본은 조선이라는 식민지 영토에 대한 지배력을 안정시키고 자신들의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조선의 고적과 유물 조사를 시도하였다. 그러한 활동이 구체화된 고적조사와 보존사업은 조선의 지리학적 공간을 제국의 통치질서에 맞게 재편하고자 한 것이면서 식민지로서의 이미지창출을 겨냥한 것이었다. 고적보존운동으로 구체화된 경주, 평양, 부여는 조선 역사의 고도로 간주되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 정책의 통제하에 편입됨으로써 피식민지 조선인의 새로운 정체성 형성이라는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다.
조선의 장소에 대한 식민주의자들의 표상은 조선인들의 권리주장과 자주적인 해석의 시도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였고, 식민지 권력의 의도에 어긋나는 조선 형상의 자원으로 전용되기도 하였다. 평양, 부여, 경주 등의 고도는 식민지 권력의 통제와 식민주의 역사학의 영향 아래 있었지만, 조선의 작가들은 이러한 공간을 되받아서 전유하면서 ‘조선적인 장소’로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였다. 식민지시기에 일본과 조선이 발명한 각각의 고도에 대한 표상은 서로 다른 정치적 목적과 이해관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따라서 천년고도로 표상되는 평양, 부여, 경주는 지리적으로 현존하지만 동시에 근대인들의 각별한 환상과 욕망이 투여된 공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식민지 조선의 고도인 평양, 부여, 경주를 조사하고 여행한 일본과 조선의 지식인들의 지리지와 여행기는 이들 세 고도에 대한 미적인 표상을 대변하고 있다. 이 표상들은 공식적 기록이나 의례적인 기념비, 집단적 기억을 간직하고 있으나, 그 기억들은 또한 식민주의의 지배의 시각에서, 그리고 자아를 보호하고자 하는 탈식민주의의 저항의 시각에 의해 새롭게 쓰여지고, 다시 표상된다. 본 연구는 식민지시기 조선의 고도를 조사하고 여행하고 상상한 일본과 조선 지식인들의 여러 기록들을 폭넓게 검토함으로써, 고도의 표상창출 작업의 근본적인 조건을 되묻게 될 것이다. 특히 소설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여러 가지의 의미 있는 표상작업의 산물들을 본 연구는 다양한 범주 설정과 구획을 통해 포착하게 될 것이다.
근대 한국의 고대 표상에서 주목할 점은 고대적인 것이 자기 정체성의 새로운 구축을 위해 재생되어야 할 긍정적 가치의 보고로 배치된 과정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과거의 왕국이 담보하고 있다고 상상한 특정한 자질과 영광은 근대 조선이 지녀야 할 이상적 상태를 확보한 과거로 자리잡았다. 평양, 부여, 경주라는 세 고도는 한국인을 규정하고 인식하는 데 핵심적인 표상으로 기능하였다. 조선의 고대는 경배와 찬미의 어조로 불려나왔고 조선인이 변별적인 민족이자 동시에 동방의 문명인이라는 자존의 근거가 되었다. 본 연구는 고대를 소환하여 재현하는 동기 및 방식과 관련하여 고도의 역사적 인식과 문학적 표상을 고찰하는 데 주력할 것이다. 근대조선의 역사적 기원이자 민족적 정체성의 출처로서 고구려, 백제, 신라 고도의 근대적 표상 사례들을 추출하고 분석하는 작업은 한국의 피식민지 경험의 맥락에서 만들어진 문화전통과 지리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기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