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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古都)의 근대 : 식민지 시기 평양 부여 경주의 문학적 표상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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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명 기초연구지원인문사회& #40;창의주제연구& #41;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08-321-A00104
선정년도 2008 년
연구기간 1 년 (2008년 07월 01일 ~ 2009년 06월 30일)
연구책임자 황종연
연구수행기관 동국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공동연구원 현황 조연정(서울대학교)
차승기(성공회대학교)
박광현(동국대학교)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는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인 고도인 세 도시, 즉 평양, 부여, 경주라는 장소가 일본의 문화적 헤게모니 하에서 어떻게 새롭게 구획되고 재현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식민지시기에 이루어진 고도의 근대적 표상 작업은 현재의 관점에서 해석되고, 선택되고, 발명된 과거로서 전통의 창출과정을 증명하는 한 유력한 예이다. 본 연구는 찬란한 역사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고도가 근대에 새로운 장소로 재편되는 과정을 각종 지리지, 여행기, 문학텍스트를 통해 살펴볼 것이다.
    문화와 제국주의의 관련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공간에 대한 인식을 통해 통제의 작용을 검출하고, 지리공간과 문화공간의 구획방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탈식민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장소는 문화적 가치들이 서로 겨루는 갈등의 터전이 되면서 또한 그 가치들이 구체화되어 드러나는 재현의 현장이 된다. 식민지를 둘러싼 서사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거주와 이동, 정착과 여행의 배경에는 제국주의 권력하에 이루어진 근대 한국 지리의 재편과 그것을 둘러싼 투쟁의 역사가 깔려 있다. 본 연구는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하에 형성된 근대 한국의 공간 표상들을 검토하고 그것을 체계화시킨 이론을 모색함으로써 영토, 지리적 영역, 제국의 장소구획, 그리고 문화적 경합들을 텍스트의 맥락에서 검토할 것이다.
    공간과 장소의 형성은 이데올로기, 사회적 관계, 권력, 그리고 장소 정체성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공간과 장소의 발생적 근원을 묻는 일은 곧 근대인으로서 우리자신의 사회적, 문화적 출생지와 정체성을 묻는 일이기도 하다. 일본은 조선이라는 식민지 영토에 대한 지배력을 안정시키고 자신들의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조선의 고적과 유물 조사를 시도하였다. 그러한 활동이 구체화된 고적조사와 보존사업은 조선의 지리학적 공간을 제국의 통치질서에 맞게 재편하고자 한 것이면서 식민지로서의 이미지창출을 겨냥한 것이었다. 고적보존운동으로 구체화된 경주, 평양, 부여는 조선 역사의 고도로 간주되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 정책의 통제하에 편입됨으로써 피식민지 조선인의 새로운 정체성 형성이라는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다.
    조선의 장소에 대한 식민주의자들의 표상은 조선인들의 권리주장과 자주적인 해석의 시도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였고, 식민지 권력의 의도에 어긋나는 조선 형상의 자원으로 전용되기도 하였다. 평양, 부여, 경주 등의 고도는 식민지 권력의 통제와 식민주의 역사학의 영향 아래 있었지만, 조선의 작가들은 이러한 공간을 되받아서 전유하면서 ‘조선적인 장소’로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였다. 식민지시기에 일본과 조선이 발명한 각각의 고도에 대한 표상은 서로 다른 정치적 목적과 이해관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따라서 천년고도로 표상되는 평양, 부여, 경주는 지리적으로 현존하지만 동시에 근대인들의 각별한 환상과 욕망이 투여된 공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식민지 조선의 고도인 평양, 부여, 경주를 조사하고 여행한 일본과 조선의 지식인들의 지리지와 여행기는 이들 세 고도에 대한 미적인 표상을 대변하고 있다. 이 표상들은 공식적 기록이나 의례적인 기념비, 집단적 기억을 간직하고 있으나, 그 기억들은 또한 식민주의의 지배의 시각에서, 그리고 자아를 보호하고자 하는 탈식민주의의 저항의 시각에 의해 새롭게 쓰여지고, 다시 표상된다. 본 연구는 식민지시기 조선의 고도를 조사하고 여행하고 상상한 일본과 조선 지식인들의 여러 기록들을 폭넓게 검토함으로써, 고도의 표상창출 작업의 근본적인 조건을 되묻게 될 것이다. 특히 소설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여러 가지의 의미 있는 표상작업의 산물들을 본 연구는 다양한 범주 설정과 구획을 통해 포착하게 될 것이다.
    근대 한국의 고대 표상에서 주목할 점은 고대적인 것이 자기 정체성의 새로운 구축을 위해 재생되어야 할 긍정적 가치의 보고로 배치된 과정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과거의 왕국이 담보하고 있다고 상상한 특정한 자질과 영광은 근대 조선이 지녀야 할 이상적 상태를 확보한 과거로 자리잡았다. 평양, 부여, 경주라는 세 고도는 한국인을 규정하고 인식하는 데 핵심적인 표상으로 기능하였다. 조선의 고대는 경배와 찬미의 어조로 불려나왔고 조선인이 변별적인 민족이자 동시에 동방의 문명인이라는 자존의 근거가 되었다. 본 연구는 고대를 소환하여 재현하는 동기 및 방식과 관련하여 고도의 역사적 인식과 문학적 표상을 고찰하는 데 주력할 것이다. 근대조선의 역사적 기원이자 민족적 정체성의 출처로서 고구려, 백제, 신라 고도의 근대적 표상 사례들을 추출하고 분석하는 작업은 한국의 피식민지 경험의 맥락에서 만들어진 문화전통과 지리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기여할 것이다.
  • 기대효과
  • 본 연구팀은 ‘고도의 근대’라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하여 한국문학과 일본학 관련 연구자들이 모여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고 독회하면서 연구 대상의 체계화 작업을 수행해오고 있다. 이와 관련된 학제간의 보다 폭넓은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본 연구팀은 주제의식을 확장하고 심화하여 세미나, 콜로키움, 학술대회 등을 지속적으로 개최해 나갈 것이다. 이러한 학술적인 연구 모임들은 본 연구팀이 개발한 문화지리학적 관점을 바탕으로 한 문제의식에 기반하여, 이에 동의하거나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연구 성과의 심화와 확대에 기여하는 각 분과 연구자들과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도록 해 줄 것이다. 본 연구팀이 발굴한 연구 주제에 대해 공유하고 논쟁하는 학문적 장을 통해 개별 학문 분과를 넘어서 학제간 연구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시기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주로 역사와 시간을 중심축으로 해서 진행되어왔다. 문학사 기술이나 역사 서술에 나타난 시기 구분이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식민지시기를 역사와 시간을 축으로 해서 바라보는 거시적인 관점은 식민지시기 이후 한국 근대성의 형성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한계를 갖는다. 현재 한국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식민지시기의 올바른 이해를 통해 식민성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전통과 문화가 식민지시기에 어떻게 새롭게 구성되었으며, 그 속에서 근대문화의 중층성이 어떻게 발생했는가를 해명하는 작업으로부터 출발한다. 본 연구가 주목하고 있는 평양, 부여, 경주 등 고도에 대한 문화지리학적 분석은 식민지시기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식민성을 극복하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한국적인 곳’으로 간주되는 공간은 식민지시기 새롭게 발명되고 창안된 것들이다. 그것은 과거의 유산이면서 동시에 근대인에 의해 새롭게 발견되고 명명된 곳으로 식민지시기 이후 한국인의 공간감각을 형성하고 장소감을 자아내 한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크게 작용했다. 따라서 본 연구를 통해 식민지시기 한국적인 공간과 장소가 만들어진 메커니즘을 파악한다면, 과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통해 현재의 한국인의 모습을 바르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한국 사회의 진정한 탈식민성을 구축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한국문학, 일본학 등 관련 연구 분과의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데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본 연구를 수행하는 전임연구인력은 향후 한국의 인문학 연구 현장에서 괄목할만한 연구 업적을 쌓으면서 연구를 수행해 나갈 인력이다. 이 전임연구인력은 본 과제를 수행해나가면서 자신의 학문 분과의 주제를 더욱 심화․확대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본 연구팀에 참여하는 박사과정 연구보조원들은 단순히 연구보조원이라는 직책에서 벗어나 이 연구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지속적인 연구를 진행하는 데 일익을 담당할 것이다. 또한, 본 연구팀에 진행하고 있는 세미나, 콜로키움 등에 참여하는 젊은 연구자들과 대학원생들은 본 연구의 문제제기를 이어받아 더욱 생산적인 연구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문화지리학적 연구방법론의 검토와 수용을 통해 전임연구인력 이하 연구보조원, 대학원생들은 한국문학과 일본학이라는 개별 분과적 학문 영역을 넘어 새로운 연구 방법과 내용을 각 분과 학문 영역에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의 가장 큰 특징은 ‘고도’라는 공간에 대한 공간표상학과 문화지리학의 연구방법론을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하는 데 있다. 따라서 한국문학의 개별 분과의 폐쇄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기존 교육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학제로서의 교과과정을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최근 문화연구 분야 및 문화학이 인문학 분야의 새로운 학제로 부상함에 따라 공간표상학과 문화지리학의 연구방법과 연구내용은 이들 학문 영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물론 이와 같은 연구방법론이 한국문학과 일본학, 그리고 문화학 분야에서만 새로운 교과목의 개발이나 교과과정의 개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본 연구가 주목하고 있는 ‘표상’과 ‘지리학’이라는 키워드는 인문학 전반에 새로운 학문적 패러다임을 생산하는 데 있어 유용한 관점일 뿐만 아니라 미술, 영상미디어 등의 예술 분야의 교과과정의 개편과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
  • 연구요약
  • 근대 초기 일본은 국가 권력 기관을 중심으로 아시아 각 지역에 대한 지리학적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지리학의 제도화는 국가 경제 발전과 군사 등 국민국가 형성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철도원과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발간한 지역 안내서들은 그 자체로 근대적 이동 수단인 철도에 의한 조선의 공간 구획이 진행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러한 근대적 공간을 체험하기 위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관광을 유도하는 자료로도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근대적 공간 인식과 체험은 제국 일본인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최남선을 비롯한 당시 지식인들이 국토와 역사에 대해 인식하는 방법은 이처럼 안내서 등을 통한 지식이었고, 이러한 지식이 여행과 결합하여 새로운 심상지리의 공간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평양의 고적조사와 고적보존을 목적으로 발족된 ‘평양명승구적보존회’는 제국 일본의 식민지 조선 조사와 병행하여, 관광지로서의 평양에 대한 인식과 표상을 만들어 낸다. 일본인에 의한 역사 서술에서의 평양지의 구성은 유사 이래 일본과 조선의 관계를 설정하면서 조선의 타율성과 일본에의 의존도를 부각시킨다. 한편 신채호와 서북학회 등은 평양 중심의 역사를 서술하여 평양사=조선사로 인식하고 있으며, 민족사 서술에 나타난 고도 평양은 민족을 상상하는 축으로서 단군과 그 성적지를 제시하고 있다. 물론 지배의 시선에 의해 개발된 관광노선은 식민지 지식인들의 내면에도 기입되어 일종의 심상지리로 작동하게 된다. 일본인의 문학작품에서 평양은 전형적인 제국의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조선인의 문학작품에서는 전근대적인 세계의 표상과 새로운 문명의 약동을 함께 지니고 있는 복합적인 장소로 나타난다. 고도 평양이 표상된 문학작품에는 제국주의 권력 하에 이루어진 ‘조선’ 지리의 재편과 그것을 둘러싼 식민세력/피식민세력의 투쟁의 경험이 깔려 있다.
    백제 멸망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세간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있었던 부여는 식민지 시기 들어 백제 최후의 수도로 부활한다. 그것은 백제가 고대 일본에 문화를 전수하면서 동시에 일본의 강력한 무력에 의해 옹위되었다는 일본 측의 고대사 기록에 입각하여 부여가 고대 일본과 정치적 문화적으로 밀접했던 고도로서의 의미를 부여받는 동시에 부여고적보존회 및 오사카 긴타로 등이 그러한 부여의 이미지를 널리 알리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면서 가능해졌다. 더욱이 1939-1941년에 이르는 시기에 부여신궁을 조영하고 그것이 신도 개발 계획으로 확대되면서 부여는 명실상부하게 고대 일본과의 밀접한 교류의 기억을 간직한 내선일체의 영지로 정위되었으며, 그것은 당시 확대일로에 있었던 제국 일본의 판도 내에서 조선의 우월적 지위를 입증하는 징표처럼 간주되었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부여를 여행하고 또 그것을 문학작품을 통해 형상화하면서 백제의 기억을 소환하고 그것을 고대 일본과 관련시키는 데 몰두했다. 한편으로 그것은 백제의 문화적 우수성을 민족의 시원적 기억에 위치시키려는 인정과 전유의 전략이었다.
    일본의 역사 서술에서 경주는 무사도를 환치한 화랑도라는 긍정적 과거를 간직하고 있으며 임나일본부를 포함한 남선(南鮮) 역사의 핵심을 이루는 고장이었다. 그곳은 고대 일본과의 동질성을 간직한 일본의 시원적 공간, 즉 반도 내의 고대 일본으로 환기되었으며, 경주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역시 고대 일본과의 밀접한 관련을 발견하는 데 치중되었다. 이와 같이 일본의 동양사학이 표방했던 오리엔탈리즘에 대응하여 최남선 등은 역으로 고대 일본이 반도로부터의 도래인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이후에도 고대 일본이 이른바 ‘불함문화론’의 권역 내부에 있다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식으로 신라를 통해 조선사의 독립성을 주장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인들의 여행기 속에서 경주는 대개 경성과 대비되는 폐허이자 민족의 영광스러운 과거를 회고하게 하는 장소로 형상화되고 있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경주의 폐허를 통해 민족의 현실을 은유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경주를 종교적 순례를 위한 이상적 장소로 정위하는, 근본적으로는 경주를 제국의 로컬로서 편입하게 되는 방식이었다. 경주의 찬란한 과거를 강조할수록 더욱 강력하게 제국의 시선의 복속하게 되는 역설은 문학작품에 있어서도 대개 동일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다.
  • 한글키워드
  • 대중매체,공공영역,타자,주체,교육,문명개화,혼종성,정체성,기행문,순례,관광,자연,지역주의 지방성,오리엔탈리즘,향토,영토,도시,역사,국코,민족지,시간,장소,공간,경주(慶州),부여(夫餘),평양(平壤),고도(古都),젠더,헤게모니,지방지,지지(地誌),지도,심상지리,문화지리학,지리,교통,탈식민주의,식민주의,제국주의,제국,토착,민족주의,국민국가,국민,민족,근대성,이데올로기,재현/표상,환상,욕망,무의식,우생학,총력전,규율,자본주의,근대문학,모더니즘
  • 영문키워드
  • native province,orientalism,local histories,topography,map,imaginative geography,cultural geography,geography,transportation,postcolonialism,colonialism,Oreint,history,land,ethonography,imperialism,nativism,nationalism,nation-state,politic nation,ethnic nation,place,space, Kyungju,Buyeo,Pyeongyang,capital cities of ancient kingdoms,subjectivity,civilization and enlightenment,hybridity,identity,locality,tourism,travel writing,natural landscape,regionalism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인 고도인 세 도시, 즉 평양, 부여, 경주라는 장소가 일본의 문화적 헤게모니 하에서 어떻게 새롭게 이해되고 구획되고 재현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식민지시기를 통틀어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고도의 근대적 표상 만들기 작업은 현재의 관점에서 해석되고, 선택되고, 발명된 과거로서 전통의 창출과정을 증명하는 한 유력한 예이다. 식민지시기에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이 만들어낸 각각의 고도 표상은 주체구성을 둘러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경쟁의 일환으로 작동하기도 했다. 따라서 고도의 근대적 표상은 제국/식민지주의의 헤게모니를 배경으로 역사-지리-권력의 상호관계에서 역동적으로 산출되는 근대적 주체 구성의 복잡한 맥락을 분석할 수 있는 핵심적인 코드이다. 그 코드를 이해하는 것은 과거의 찬란한 역사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고도가 근대에 새로운 장소로 재편되는 과정을 각종 지리지, 여행기, 관광안내서, 문학텍스트 등을 통해 알아보는 작업을 통해 가능하다. 본 연구는 고대를 소환하여 재현하는 동기 및 방식과 관련하여 고도의 역사적 인식과 문학적 표상을 고찰하는 데 주력하였다. 식민지시기에 걸쳐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고대왕국은 근대조선의 역사적 기원이자 민족적 정체성의 출처로서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매체를 통해 표상되었다. 이들 고대 왕경(王京)의 표상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민족 구성원 사이에 공유되었고, 그 속에 존재하는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차이들을 넘어서는 민족적 공통성의 기표로 작동하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 고도의 근대적 표상 사례들을 추출하고 분석하는 작업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경주에 대한 전통적인 이미지는 일본 식민지 지배와 함께 결정적 변화를 맞는다. 세키노 다다시가 제출한 「조선건축조사보고」중의 경주 관련 항목은 특히 건축, 미술, 공예라는 측면에서 신라시대의 유물을 기술함으로써 신라예술이라는 관념이 가능함을 시사하고 아울러 그것과 동시대 중국 및 일본의 예술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경주의 신라 유물에 관한 세키노의 보고는 그 장소를 동양미술의 전당으로 표상하는 관행에 기초를 놓았다. 일본인 식민지주의자들은 신라를 가지고 마치 그들의 통제 하에 있는 당대 조선의 전형상처럼 취급했다. 당시의 일본인들에게 그곳은 있는 그대로의 경주라기보다 제국 일본의 정치적, 미적 관심에 따라 개발되고 해석되고 표상된 경주였다.
    근대 이후 평양은 국민국가, 동아시아 지역주의, 세계 질서 등 지정학적 세계 체제 변동 과정 속에서 그 위상을 달리해왔다. 평양은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 사이에서 그곳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주체의 위치, 관점, 욕망 등에 따라 고정되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으면서 ‘평양임’을 만들어갔던 것이다. 이효석의 「은은한 빛」은 근대 초기부터 제국 일본인과 식민지 조선인에 의해 고도, 전적지, 색향 등으로 표상되었던 평양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평양 토포필리아를 갖고 있는 식민/피식민 정주자의 목소리를 통해 당시 조선문화의 지정학적 위상을 새롭게 주조하고 있었다. 그것은 식민지 조선의 지방이자 제국 일본의 지방이라는 이중적 위계화가 중첩된 공간에 대한 인식과 표상 체계를 추인하는 듯하면서도 동일한 문법으로 그러한 인식과 표상 체계를 해체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부여는 백제 멸망 이후 오랜 세월 동안 망각된 고도였다. 부여라는 도시에 대한 근대적 이미지가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부역고적보존회가 재단법인화된 1929년을 전후한 상황이었다. 부여는 이제 경주나 평양에 맞서는 유서깊은 고도로 다시금 조명받고 있는 것이다. ‘내선융화’라는 당대의 시책조차도 넘어서 조선과 일본을 지극히 깊은 관련으로 맺어주는 장소로서 부여의 정체성을 다시금 만들어내는 것이다. 1939년 3월 총독부가 부여신궁 건립계획을 발표하면서 부여는 신도(神都)로 새롭게 탄생한다. 식민지 지식인들에게 부여를 새롭게 만드는 이 도시계획은 천 년이 넘도록 퇴락한 채 먼 옛날의 부귀영화만을 추억하고 있는 고도 부여가 소생하는 순간을 의미했으며, 동시에 그것은 일본 본토에도 단 하나밖에 없는 ‘신도’의 자격이 주어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 영문
  • Since the modern age, Pyongyang(平壤) has varied with its topology amid a process of change of a geopolitical world system such as a national country, regionalism of the East Asia, world order and others. Pyongyang wasn't fixed according to a position, a viewpoint, desire and others of a subject viewing and recognizing the place between imperial Japan and colonial Joseon and became to be made as "being Pyongyang". The 'Elegant light' of Lee, Hyo-seok is centered on the space called Pyongyang that was recognized and represented in familiar ways such as an ancient city, a battlefield and a hometown of gisaengs, etc. by imperial Japanese and colonial Korean since the early modern age and was making geopolitical topology of Joseon culture at the time through voice of colonial settlers having Pyongyang Topophilia. It seems to confirm a recognition and representation system on the space that dual hierachization such as a country of colonial Joseon as well as a country of imperial Japan is duplicated, and also had a possibility to dismantle such recognition and representation system with the same grammar. The Joseon, Joseon culture and Joseon literature in the latter half period of a colony always had a critical point that doesn't converge to Japan, Japan culture and Japan literature. The narrative of the ‘Elegant light’ of Lee, Hyo-seok suggests 'constitution' and 'climate' based on the individuality and originality of Joseon culture amid a behavior of a figure having Pyongyang Topophilia, and showed desire of a colonial Joseon intellectual who tries to newly reorganize the topology of Joseon in the world and Joseon in the East Asia in a geopolitical culture viewpoint.
    Buyeo was an ancient city that had been forgotten for a long time since a fall of Baekje. The image in Baekje and Buyeo, which are seen here and there until the 1920s, is the one in the declined ancient kingdom and is being automated to be indicated sentiment of remorse on one scene in the fallen history. What the modern image on a city called Buyeo started to be produced was a situation before and after 1929. Its important chance can be taken what Buyeo Ancient-family Preservation Association, which was established in 1915, was changed into a foundation in 1929. The introduction on Buyeo, which is observed in newspaper articles or travel sketches since then, is delivering intention of re-discovering Buyeo as a city equivalent to Gyeongju or Pyeongyang. Buyeo is being illuminated again as a historically ancient city of standing now against Gyeongju or Pyeongyang. As a place that makes Joseon and Japan have the extremely deep relationship beyond even the contemporary policy called 'Naeseonyunghwa內鮮融和-Japan and Joseon need to be reconciled).' it is what again makes identity of Buyeo. It is what newly casts a symbol of Buyeo through recognizing that it is difficult to be imagined except a place called Buyeo if there had been relationship something significant in history of both countries.
    As the government-general announces a plan for establishing Buyeo Shindo Shrine(扶餘神宮) in March of 1939, a situation comes to be varied completely. Buyeo, which was newly born as Shindo City(神都), is re-illuminated as a city that has brilliantly cultural heritage in the past, not a small town anymore where was forgotten. This urban plan, which newly makes Buyeo for intellects in the colonial times, implied the moment of being revived ancient-city Buyeo, which is recalled just wealth and prosperity in distant old days with being decayed for over 1000 years. At the same time, it also signified that the qualification of 'Shindo City(神都),' which there is just one even in the mainland Japan, is given to a regional city of Joseon.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경주에 대한 전통적인 이미지는 일본 식민지 지배와 함께 결정적 변화를 맞는다. 세키노 다다시가 제출한 「조선건축조사보고」중의 경주 관련 항목은 특히 건축, 미술, 공예라는 측면에서 신라시대의 유물을 기술함으로써 신라예술이라는 관념이 가능함을 시사하고 아울러 그것과 동시대 중국 및 일본의 예술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경주의 신라 유물에 관한 세키노의 보고는 그 장소를 동양미술의 전당으로 표상하는 관행에 기초를 놓았다. 일본인 식민지주의자들은 신라를 가지고 마치 그들의 통제 하에 있는 당대 조선의 전형상처럼 취급했다. 당시의 일본인들에게 그곳은 있는 그대로의 경주라기보다 제국 일본의 정치적, 미적 관심에 따라 개발되고 해석되고 표상된 경주였다.
    현진건의 「고도 순례-경주」에서 경주의 고적을 대하는 태도는 낭만적 예술가가 고대의 잔해를 접하는 태도에 근접해 있다. 그의 몽상과 동경 속에서 경주는 인간의 정열이 예술적으로 승화됨으로써 생겨난 세속 너머의 어떤 세계의 이미지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신라의 유물이라는 “시체”를 밟고 과연 “새로운 생명”이 솟아나고 있는가를 묻고 있다. 이것은 물론 자주국민로서의 생명을 잃어버린 당대 조선민족의 정치적, 문화적 갱생이 가능한가 하는 물음이다.
    반면 이태준의 「석양」에서 경주는 민족과 문화에 있어서 순일하다기보다 혼합적인 고대조선의 표지가 된다. 이태준은 미학상의 동양주의자답게 경주를 인도, 중국, 일본, 조선을 포괄하는 상상의 동양 속의 한 공간으로 정치(定置)한다. 또한 「석양」은 동양적인 것의 신생이라는 비전의 일단을 내보이고 있다. 이태준이 경주의 풍경과 애욕의 초월을 겹쳐 상상하고 있을 무렵 동양 또는 아시아는 일본제국주의의 정치적, 군사적 모험을 정당화하는 이념이었다. 이태준의 동양주의는 중일전쟁 이후 일본의 제국주의적 헤게모니의 갱신에 복무한 아시아의 이념과 은밀하게 타협하고 있다는 심증을 갖게 한다.
    근대 이후 평양은 국민국가, 동아시아 지역주의, 세계 질서 등 지정학적 세계 체제 변동 과정 속에서 그 위상을 달리해왔다. 평양은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 사이에서 그곳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주체의 위치, 관점, 욕망 등에 따라 고정되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으면서 ‘평양임’을 만들어갔던 것이다. 이효석의 「은은한 빛」은 근대 초기부터 제국 일본인과 식민지 조선인에 의해 고도, 전적지, 색향 등으로 표상되었던 평양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평양 토포필리아를 갖고 있는 식민/피식민 정주자의 목소리를 통해 당시 조선문화의 지정학적 위상을 새롭게 주조하고 있었다. 그것은 식민지 조선의 지방이자 제국 일본의 지방이라는 이중적 위계화가 중첩된 공간에 대한 인식과 표상 체계를 추인하는 듯하면서도 동일한 문법으로 그러한 인식과 표상 체계를 해체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효석의 「은은한 빛」의 서사는 평양 토포필리아를 가지고 있는 인물의 행위 속에서 조선문화의 개별성, 독창성의 근거로 ‘체질’과 ‘풍토’를 제시하면서 세계 속의 조선, 동아시아 속의 조선의 위상을 문화지정학적으로 새롭게 재편하고자 하는 식민지 조선 지식인의 욕망을 보여주었다.
    부여는 백제 멸망 이후 오랜 세월 동안 망각된 고도(古都)였다. 부여라는 도시에 대한 근대적 이미지가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부역고적보존회가 재단법인화된 1929년을 전후한 상황이었다. 이후로 신문기사나 기행문에서 엿보이는 부여에 대한 소개는 경주나 평양에 필적하는 도시로 부여를 재발견하고자 하는 의도를 전하고 있다. 부여는 이제 경주나 평양에 맞서는 유서깊은 고도로 다시금 조명받고 있는 것이다. ‘내선융화’라는 당대의 시책조차도 넘어서 조선과 일본을 지극히 깊은 관련으로 맺어주는 장소로서 부여의 정체성을 다시금 만들어내는 것이다.
    1939년 3월 총독부가 부여신궁 건립계획을 발표하면서 부여는 신도(神都)로 새롭게 탄생한다. 식민지 지식인들에게 부여를 새롭게 만드는 이 도시계획은 천 년이 넘도록 퇴락한 채 먼 옛날의 부귀영화만을 추억하고 있는 고도 부여가 소생하는 순간을 의미했으며, 동시에 그것은 일본 본토에도 단 하나밖에 없는 ‘신도’의 자격이 주어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부여를 내선일체의 영지이자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내선의 ‘피’의 친연성을 증명하는 장소로서의 신도로 건설하고자 했던 1940년대 초반의 움직임에 부응하는 작품으로 김동인의 장편역사소설 󰡔백마강󰡕을 들 수 있다. 민족의 비애를 불러일으키는 몰락한 고대왕국의 이미지와 일본과의 혈통적 친연성의 증거가 되는 고대국가의 이름 사이에서 백제라는 표상은 부유하고 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조선이라는 공간은 일본제국주의 하에서 중대한 변화를 겪었다. 조선의 영토에 대한 지배를 확립한 일본인들은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이익에 맞는 새로운 공간을 그 영토 위에 만들어냈다. 그래서 조선은 지리상의 독자적인 실재가 아니라 일본제국의 한 변방 지역이라는 위상을 가지게 되었고 경성을 비롯한 일본인 정착민 지구를 중심으로 식민지적 공간의 급속한 팽창을 보았다. 일본인의 이주 촉진, 철도, 항만, 도로 등 교통망의 신설, 통감부시기 이래의 구관조사와 고적조사, 1912년부터 조선 전역에 걸쳐 이루어진 토지조사, 1914년의 12부 24면의 행정구역 창설 등과 같은 일련의 관제사업이 추진된 결과, 조선은 종래에 그것이 가지고 있던 편제와 형세, 이미지와 연상물을 잃어버리기 시작했으며 식민지 통치의 목적에 맞게 측정, 통제, 표상이 가능한 공간으로 재편되었다. 이러한 조선의 재공간화는 과거에는 조선에 존재한 적이 없는 새로운 장소와 구역을 탄생시키기도 했지만 유서 깊은 장소에 새로운 형태와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일본인에 의한 고도의 재편과 표상은 조선인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그 역사적 장소에서 자기인식과 자기개조를 위한 새로운 상징을 찾고자 하는 시도를 조선인에게 가능하게 만든 동시에 그 성질과 판도를 제약한 조건이었다.
    식민지시기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주로 역사와 시간을 중심축으로 해서 진행되어왔다. 문학사 기술이나 역사 서술에 나타난 시기 구분이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식민지시기를 역사와 시간을 축으로 해서 바라보는 거시적인 관점은 식민지시기 이후 한국 근대성의 형성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한계를 갖는다. 현재 한국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식민지시기의 올바른 이해를 통해 식민성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전통과 문화가 식민지시기에 어떻게 새롭게 구성되었으며, 그 속에서 근대문화의 중층성이 어떻게 발생했는가를 해명하는 작업으로부터 출발한다. 본 연구가 주목한 평양, 부여, 경주 등 고도에 대한 문화지리학적 분석은 식민지시기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식민성을 극복하는 데 일조하였다고 자평한다.
    현재 ‘한국적인 곳’으로 간주되는 공간은 식민지시기 새롭게 발명되고 창안된 것들이다. 그것은 과거의 유산이면서 동시에 근대인에 의해 새롭게 발견되고 명명된 곳으로 식민지시기 이후 한국인의 공간감각을 형성하고 장소감을 자아내 한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크게 작용했다. 따라서 본 연구를 통해 식민지시기 한국적인 공간과 장소가 만들어진 메커니즘을 파악한다면, 과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통해 현재의 한국인의 모습을 바르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한국 사회의 진정한 탈식민성을 구축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본 연구는 한국문학, 일본학 등 관련 연구 분과의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데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본 연구를 최초에 수행한 전임연구인력은 주목할만한 연구 업적을 쌓으면서 관련 연구소의 전임연구원이 되었고, 그에 이어 전임연구인력직을 인계한 연구자도 한국문학 연구의 현장에서 괄목할 만한 연구를 수행해 나갈 인력으로 본 과제를 수행해나가면서 자신의 학문 분과의 주제를 더욱 심화․확대하였다. 그리고 본 연구팀에 참여하는 박사과정 연구보조원들은 이 연구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이미 한 편 이상의 논문을 작성하였거나 작성중이다.
    문화지리학적 연구방법론의 검토와 수용을 통해 전임연구인력 이하 연구보조원, 대학원생들은 한국문학과 일본학이라는 개별 분과적 학문 영역을 넘어 새로운 연구 방법과 내용을 각 분과 학문 영역에 제시하였다.
    본 연구의 가장 큰 특징은 ‘고도’라는 공간에 대한 공간표상학과 문화지리학의 연구방법론을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하는 데 있다. 따라서 한국문학의 개별 분과의 폐쇄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기존 교육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학제로서의 교과과정을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최근 문화연구 분야 및 문화학이 인문학 분야의 새로운 학제로 부상함에 따라 공간표상학과 문화지리학의 연구방법과 연구내용은 이들 학문 영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물론 이와 같은 연구방법론이 한국문학과 일본학, 그리고 문화학 분야에서만 새로운 교과목의 개발이나 교과과정의 개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본 연구가 주목하고 있는 ‘표상’과 ‘지리학’이라는 키워드는 인문학 전반에 새로운 학문적 패러다임을 생산하는 데 있어 유용한 관점일 뿐만 아니라 미술, 영상미디어 등의 예술 분야의 교과과정의 개편과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
  • 색인어
  • 고도, 평양, 부여, 경주, 공간, 장소, 시간, 근대성, 민족, 국민, 국민국가, 민족주의, 토착, 제국, 제국주의, 식민주의, 탈식민주의, 교통, 지리, 문화지리학, 심상지리, 지도, 지방지, 민족지, 역사, 도시, 영토, 향토, 지역주의 지방성, 자연, 관광, 순례, 기행문, 정체성, 혼종성, 문명개화, 교육, 주체, 타자, 근대문학, 모더니즘, 욕망, 환상, 재현/표상, 이데올로기, 헤게모니, 젠더
  • 연구성과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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