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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농주의와 왕정의 개혁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신진연구자지원사업(인문사회)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09-332-A00021
선정년도 2009 년
연구기간 11 개월 (2009년 08월 01일 ~ 2010년 06월 30일)
연구책임자 박윤덕
연구수행기관 충남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경제학의 아버지” 아담 스미스가 근대 경제학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손”에 시장을 맡겨야 한다는 그의 이론은 최초의 체계적인 경제 이론이었을 뿐만 아니라, 막 산업혁명을 시작했지만 여전히 기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주장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는 일견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을 제외하면, 그가 국부론을 출간하기 전 3년 동안 프랑스에 체류하면서 중농주의자 케네(François Quesnay)로부터 "자유방임주의" 경제사상을 전수받았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는 이는 별로 없다. 몽테스키외와 볼테르가 영국에 체류하면서 로크의 정치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아 프랑스에 계몽사상을 꽃피웠다면, 아담 스미스는 프랑스에서 수입한 경제 사상을 토대로 “고전경제학”을 정립했던 것이다.
    따라서 현 금융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여전히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담 스미스의 경제사상뿐만 아니라 그 원조라 할 수 있는 “중농주의”를 역사적 차원에서 심도 있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또한 중농주의는 서양근대사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꼭 짚고 넘어가야할 주제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의 수립에 결정적인 단계를 이루는 이른바 “이중혁명”, 즉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의 발생과 진행을 이해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혁명 전 프랑스에서 억압적이고 비효율적인 절대주의 체제의 개혁을 요구하는 일군의 엘리트 집단이 형성되었을 때, 중농주의는 계몽사상과 함께 그들의 이론적 무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국내 역사학계에서는 프랑스혁명의 기원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계몽사상에만 주목했지, 중농주의는 경제 문제에 국한된 개혁 방안의 하나로 취급하면서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단지 경제학계에서 극소수의 연구자들만이 관심을 보였을 뿐이다. 이러한 연구의 부재는 심각한 학문적 공백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유용한 정보와 교훈을 줄 수 있는 역사적 선례를 모른 채 하며 내팽겨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본 연구는, 첫째, 1750년대 이후 나타난 중농주의의 이념이 무엇이며, 당대 유럽을 풍미했던 계몽사상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그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서 어떤 정책적 수단들을 고안해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우선 케네를 비롯해서 미라보,메르시에, 구르네, 르트로느, 튀르고, 뒤퐁 드 느무르 등 중농주의자들의 저작을 분석․고찰할 것이다.
    둘째, 그들의 경제 이념과 정책이 구체제의 절대왕정에 어떻게 반영되고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라베르디, 튀르고, 칼론 등에 의해서 추진되었던 일련의 개혁 조치들을 두루 고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만도 별도의 연구가 필요한 방대한 주제이기 때문에, 그 개혁 조치들의 구체적인 내용과 진행 과정을 상세하게 고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차후의 연구 과제로 넘어가는 징검다리로서, 절대왕정이 고수했던 중상주의와 1750년대 새로이 등장한 중농주의가 마주쳤던 주요 대립 지점들을 파악하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중농주의가 추진하고자 했던 개혁 조치들이 절대왕정의 운명에 어떤 작용을 가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프랑스혁명의 진로를 결정했는지 추적해보고자 한다.
  • 기대효과
  • 본 연구는 여러 각도에서 관심을 유발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기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우선, 학문적 차원에서 보았을 때, 국내에 기존의 연구 성과가 사실상 전무하다시피 한 주제에 대한 연구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더구나 주제 자체가 사상사적인 차원에서나 시대사적인 차원에서나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중농주의가 절대주의 체제 아래서 정치적 담론으로서 중요한 함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농주의가 확산되면서 현실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각계의 반응들을 고찰한다면 18세기 프랑스 나아가 18세기 유럽의 정치․사회․경제 상태에 대한 한층 더 입체적인 진단이 가능할 것이다.
    또한 이 주제에 대한 연구는 많은 후속 연구들을 촉발할 수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1760~1780년대에 진행된 프랑스 왕정의 개혁 작업들을 “경제적 자유주의의 관철”이라는 일관된 맥락에서 파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 후반 농업경제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식량폭동을 경제적 자유주의에 대한 반대라는 입장에서 재조명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주제는 사상사나 정치사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사의 영역에서도 그 파장을 확인할 수 있는 복합적인 연구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큰 틀에서 보면, 이러한 작업들은 프랑스혁명의 진행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계층 간의 정치적 동맹과 대립이 부르주아의 신분상승 기회 축소, 농민층의 계층분화, 도시 민중계급의 실업과 빈곤화 등 18세기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사회경제적 변화뿐만 아니라 중농주의가 제시한 경제적 자유주의에 대한 수용 여부에 따라 갈라지는 사회적 대립선에 의해 이미 상당 부분 규정되어 있었다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결론이 사료의 뒷받침을 받아 설득력을 갖게 된다면 프랑스혁명의 기원 문제와 관련된 기존의 논의들을 새롭게 활성화시킬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연구 주제는 현 경제위기의 해소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경제력 집중과 그에 따른 사회경제적 양극화 등 한국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문제로서 진지한 성찰을 요구하는 주제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일회적인 연구에 그쳐서는 안 될, 현실 문제에 대한 학문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도록 깊은 성찰과 활발한 논쟁을 필요로 하는 주제임에 틀림없다. 당장 실용적인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닐지라도 이 연구의 결과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의미의 파장은 적지 않을 것이다.
  • 연구요약
  • 이 주제의 현재적 의미와 연구 목표를 고려할 때,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필수적으로 포함해야 할 것이다.
    첫째, 중농주의의 핵심적 이념에 대한 고찰이다. 케네는 자유 경쟁이 보장된 시장에서 개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투다보면 전체 사회를 위해 최상의 경제적 성과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가정했는데,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물욕(passion)을 “자연적인 질서(ordre naturel)”로 간주된 “정치적 틀(cadre politique)” 안에 자리매김 하고, 마치 이성의 빛이 인간을 계몽하는 것처럼 물욕이 개인들을 움직이게 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학문적 모색의 과정에서 생산, 노동, 임금, 계급, 자본, 가치, 자유방임, 시장 등 정치경제학의 핵심적 이념과 분석 도구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사실 그의 이론은 경제 문제에 대한 성찰을 넘어 인간 본성에 관한 철학적 성찰을 통해 계몽사상과 연결되는 광범위한 사상적 기반 위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따라서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전제 조건들을 토대로 한 중농주의의 경제 이론에만 매달리지 말고, 18세기 중반의 정치적․사상적 풍토라는 폭넓은 맥락에서 중농주의를 고찰해야 할 것이다.
    둘째, 케네와 그의 동료들이 중농주의의 핵심적 이념은 공유했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다 똑같은 생각만 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루이 16세의 첫 번째 재상 역할을 했던 튀르고나 구르네는 케네와 달리 제조업과 상업도 농업과 마찬가지로 부(富)를 생산하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앞에서 열거한 여러 중농주의자들의 저작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서 그들 사이에 합치된 견해가 무엇이며, 각자가 독특하게 주장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러한 차이가 중농주의 경제 이론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고찰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중농주의를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폄하하는 잘못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18세기 후반의 정치적 상황에서 중농주의가 제시한 경제 이념의 역사적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그 공격 대상이었던 중상주의 보다 구체적으로 콜베르주의(Colbertisme)와 사안별로 각각의 주장과 논리를 비교․고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콜베르의 경제 정책을 추종하고 있던 정부 관료들뿐만 아니라 지배 엘리트 계층의 반응은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던 왕정과 지배 엘리트 사이에서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중농주의가 불러일으켰던 관심과 반향 또한 적지 않았으며, 그러한 경제 이념이 현실화되었을 때 가져올 파장 또한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살롱과 신문 등을 통해 확대되고 있던 “공론 영역”에서 중농주의는 계몽사상과 함께 주요한 토론 주제였다는 점 또한 잊지 말아야 할 대목이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정치적 담론으로서 중농주의가 갖는 역사적 역할과 의미가 제대로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농주의의 경제 정책들이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고찰하는 문제가 남는다. 중농주의의 개혁 실험은 7년 전쟁이 프랑스의 참패로 막을 내린 1763년과 그 이듬해에 단행된 “곡물 거래 자유화” 조치로 시작되었고,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1774년과 1787년에 재무총감이었던 튀르고와 칼론에 의해 재개되었다. 사실 이 개혁 조치들 하나하나가 모두 개별 논문의 주제가 될 만큼 중요한 문제들이다. 이 개혁 조치들은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 요인들이 중첩적으로 작용하는 복잡한 상황과 미묘한 정치적 역학 관계 속에서 추진되었기 때문에, 하나의 논문에서 그 내용과 진행 상황을 모두 파악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중농주의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린다는 차원에서 중농주의의 개혁 실험들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되짚어 보는 것은 학문적으로 의미 있는 작업일 뿐만 아니라 현재적 관점에서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된다.
    중농주의의 개혁 방안들을 차용했던 왕정의 개혁 조치들은 언제나 미완에 그치고 말았다. 특권계급의 반발과 때로는 민중의 저항 앞에서 개혁 조치들은 철회되거나 유예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왕정은 개혁 목표를 제시하면서 민중의 평등에의 열망,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불평등에 대한 격렬한 증오심을 증폭시켰지만 실질적인 성과를 가져오지 못한 채 혁명에 그 개혁자의 역할을 넘겨주고 말았던 것이다.
  • 한글키워드
  • 중농주의,시장,경제적 자유주의,자유방임,자본주의,아담 스미스,프랑수아 케네
  • 영문키워드
  • market,Francois Quesnay,Physiocracy,laissez-faire,economic liberalism,Adam Smith,capitalism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1750~60년대 프랑스에서 등장한 새로운 경제 사상인 중농주의에 대해 조사 연구하고, 그 경제 사상이 프랑스 절대왕정의 개혁 정책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음을 밝혔다. 논문 초록에서 이미 밝혔듯이, 케네를 중심으로 한 중농주의자들은 곡물거래의 자유화를 통해 농업경제의 활성화를 모색하고 국부를 증진하고자 했다. 그들이 제시했던 정책의 효과는 "곡물 거래 자유화 → 곡가 상승 → 농업 투자 확대 → 농업 생산 증가 → 세원확대로 인한 세수 증대"였지만, 이는 불가피하게 민중의 희생을 요구했던 것이다. 민중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가격통제를 포함해서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곡물 시장에 개입하던 기존의 관행을 철폐함으로써 지주와 부농의 이익을 보장했지만, 민중의 불만을 야기했던 것이다. 따라서 중농주의가 제시했던 경제적 자유화 조치는 민중 반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1763년 베르탱, 1775년 튀르고, 1787년 칼론이 추진했던 곡물거래 자유화 조치는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자유의 이념이 "민중"이라는 장애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모든 시민들에게 자유와 평등을 허용하고 보장하는 혁명이 필요했던 것이다.
  • 영문
  • The article <Physiocracy and Reform of the Monarchy> tried to study the economic thought, so-called "Physiocracy" and proved that it became the theoretical base of the French Monarchy's reform policies. The physiocrats, disciples of Francois Quesnay, demanded liberalization of the grain commerce for the development of the agriculrural economy and the national wealth. The effect of the policy are "the liberalization of commerce → augmentation of the grain price → the increase of agrarian investments → the increase of agricultural production → the augmentation of national wealth and income." But the policy sacrified the poor people, and so finally it failed.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18세기 중반부터 곡물의 상업화 및 경제 문제에 관한 관심이 크게 증가하였다. 이른바 “현명한 관리(sage ménagement)”에 관한 기고문들이 󰡔경제잡지(Journal OEconomique)󰡕에 실리는가 하면, 상업 연구에 관심을 가진 문필가들이 상무성에서 일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1750년대 말부터 미라보 후작(Marquis de Mirabeau), 뒤퐁 드 느무르(Dupont de Nemours), 메르시에 드 라 리비에르(Mercier de la Rivière), 보도 신부(abbé Baudeau) 등이 케네(François Quesnay)를 중심으로 회합하여, 새로운 경제 사상을 연구․전파하였다. 정적(政敵)들에 의해 “사교 집단(secte)”라 불린 이들의 경제사상은 1760년대부터 권력의 정점에까지 영향을 미쳐 절대주의의 개혁 정책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게 되었는데, “경제 철학(philosophie économistes)” 또는 중농주의(physiocratie; 그리스 합성어로 ‘자연의 힘’을 의미함)로 규정되었다. 이들이 제시한 화두인 “경제적 자유”는 이후 프랑스 정치의 핵심적 문제가 되었다.
    1763년 7년 전쟁에서의 패전으로 유럽뿐만 아니라 대양의 패권을 영국에 내어준 직후 프랑스 왕정은 재무총감 베르탱(Bertin)의 주도로 일련의 개혁 조치를 단행하는데 그 핵심은 곡물거래의 자유화를 통해 농업경제의 활성화를 모색하고 국부를 증진하는 것이었다. 민중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가격통제를 포함해서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곡물 시장에 개입하던 기존의 관행을 철폐하고 경제적 자유를 허용한 것이었다. 정책 입안자들이 예상했던 효과는 “곡물 거래 자유화 → 곡가 상승 → 농업 투자 확대 → 농업 생산 증가 → 세원확대로 인한 세수 증대”였지만, 이는 현실적으로는 민중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기대했던 효과를 반감시킬 만큼 강력하고 끈질긴 민중의 반발이 결국 개혁을 좌절시켰다. 1770년 개혁 조치는 철회되었다.
    루이 16세의 초대 재무총감이 된 튀르고(Turgot)는 1775년 다시 곡물 거래 자유화 조치를 통해서 프랑스의 부국강병을 시도했지만, 이른바 “밀가루 전쟁”으로 그 뜻을 접어야 했다. 곡가 앙등에 불만을 품은 민중이 봉기하고, 이를 제압할 수 없었던 지방 정부들이 개혁 조치의 철회를 요청하자 정부도 어쩔 수 없었다. 중농주의가 정치적 함의는 프랑스의 위정자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다. 국부의 원천인 농업 경제를 크게 증진할 수 있는 광대한 국토와 노동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 파산 위기에 몰린 재무총감 칼론(Calonne)은 1787년 2월 명사회에 제출한 「재정개선계획」에 또 다시 곡물거래 자유화 조치를 포함시켰다. 그러나 1788년의 흉작과 혁명적 위기 속에서 칼론의 경제 개혁은 성공할 수 없었다. 1789년 입각한 네케르(Necker)가 다시 한 번 수레바퀴를 뒤로 돌렸다. 이렇게 곡물 거래 자유화를 통한 농업 경제 활성화는 혁명 때까지 프랑스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는 국내에 기존의 연구 성과가 사실상 전무하다시피 한 주제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더구나 주제 자체가 사상사적인 측면에서나 시대사적인 측면에서나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 있는 작업이다. 중농주의가 절대주의 체제 아래서 정치적 담론으로서 중요한 함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농주의가 확산되면서 현실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각계의 반응들을 고찰함으로써 18세기 프랑스 나아가 18세기 유럽의 정치․사회․경제 상태에 대한 한층 더 입체적인 진단이 가능했다.
    또한 본 연구는 많은 후속 연구들을 촉발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1760~1780년대에 진행된 프랑스 왕정의 개혁 작업들을 "경제적 자유주의의 관철"이라는 일관된 맥락에서 파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 후반 농업경제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식량폭동을 경제적 자유주의에 대한 반대라는 입장에서 재조명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주제는 사상사나 정치사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사의 영역에서도 그 파장을 확인할 수 있는 복합적인 연구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큰 틀에서 보면, 이러한 작업들은 프랑스혁명의 진행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계층 간의 정치적 동맹과 대립이 부르주아의 신분상승 기회 축소, 농민층의 계층분화, 도시 민중계급의 실업과 빈곤화 등 18세기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사회경제적 변화뿐만 아니라 중농주의가 제시한 경제적 자유주의에 대한 수용 여부에 따라 갈라지는 사회적 대립선에 의해 이미 상당 부분 규정되어 있었다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결론이 사료의 뒷받침을 받아 설득력을 갖게 된다면 프랑스혁명의 기원 문제와 관련된 기존의 논의들을 새롭게 활성화시킬 것이다.
  • 색인어
  • 중농주의(physiocratie), 케네(Fran&ccedil;ois Quesnay), 경제적 자유(libert&eacute; &eacute;conomique), 자유방임(laissez-faire), 상업(commerce), 민중(peu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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