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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에도시대 말기 일본 대중문화 속의 호랑이 사냥 연구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09-327-A00590
선정년도 2009 년
연구기간 1 년 (2009년 11월 01일 ~ 2010년 10월 31일)
연구책임자 최경국
연구수행기관 명지대학교& #40;서울캠퍼스& #41;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일본에는 호랑이가 살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인이 호랑이 체험을 하려면 한반도로 올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인이 한반도에서 처음 만나본 호랑이는 놀랍고도 무서웠을 것이고 그래서 일본의 초기 호랑이에 대한 기록은 신적인 존재로서 경외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일본이 귀족문화에서 무사의 문화로 이전함에 따라 무사들의 용맹함을 보여주는 데는 그 무서운 호랑이를 퇴치하였다는 이야기가 효과가 있었을 것이고 그에 따라 한반도의 호랑이는 퇴치의 대상으로 변질되었다.
    특히 임진왜란을 통해서 많은 일본의 무사들이 한반도로 들어왔고 호랑이를 체험하게 된다. 한반도로 건너온 왜장들이 호랑이를 잡는 것은 무사의 위용을 떨침과 동시에 호피와 호랑이 고기를 얻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내는 충성경쟁이기도 하였다.
    또한 많은 일본 무사들이 자신의 무용을 자랑하기 위해 호랑이 사냥을 선전하게 된다. 이러한 기록들은 수필이나 무사의 집안 기록에는 남아있지만 문학작품으로는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에도시대에는 이러한 무사들의 호랑이 사냥이 그다지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에도시대 말기에 가면 갑자기 많이 그려지게 된다.
    하지만 임진왜란 연구에서 호랑이 사냥은 거의 다루어져 있지 않았다. 최근의 단행본 北島万次『加藤清正 : 朝鮮侵略の実像』(吉川弘文館, 2007)에서도 전혀 없고 佐竹申伍『加藤淸正』(PHP硏究所, 1996), 安藤英男 編『加藤淸正のすべて』(新人物往來社, 1993)와 같은 단행본에서도 ‘호랑이 사냥으로 유명한 가토 기요마사’과 같은 서술어는 몇 군데에서 보이지만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않고 있다. 또한 임진왜란과 가토 기요마사를 다룬 연구에서도 가토 기요마사의 호랑이 사냥을 다룬 논문은 없다.
    일본 호랑이를 연구하는 분야에서는 졸고 「일본 호랑이 그림의 계보」『일본연구』(韓國外國語大學校 日本硏究所, 제22호, 2004. 6), 「일본문학에 나타난 호랑이의 수용」『일어일문학연구』(韓國日語日文學會, 제51집 2권, 2004. 11), 「우타가와 구니요시의 무사그림과 호랑이 사냥」『일본연구』(韓國外國語大學校 日本硏究所, 제40호, 2009. 6)가 있는 정도이다. 이런 점에서 본 연구는 독창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분명한 사실적 근거 없이 만들어진 우키요에나 소설 등의 호랑이 사냥 이야기로 인해 일본인들에게 호랑이를 퇴치한 무사로서 유명해진 가토 기요마사의 허구를 살펴보고 그의 영웅 만들기에 이용된 호랑이 사냥의 실태를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 기대효과
  • 일본에서의 호랑이는 단순한 동물 호랑이가 아니라 한반도나 한국인을 상징한다. 임진왜란을 통해서 한반도에서 호랑이 사냥을 한 무사들이 많이 있었으나 그들이 전부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일부는 영지 안에서만 무용담으로서 전해졌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가토 기요마사는 에도시대 말기에 호랑이를 퇴치한 인물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 후 오랫동안 영웅이 아니었다. 에도시대 내셔널리즘이라고 할 수 있는 국학의 융성과 함께 가토 기요마사가 영웅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러나 도쿠가와막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가토 기요마사의 영웅화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족을 멸망시킨 도쿠가와씨로서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토 기요마사를 영웅시하는 움직임은 에도시대 1739년의『常山紀談』에서 처음 시작된다. 그러나 1841년 덴포(天保) 개혁의 철퇴를 맞게 된다. 하지만 이에 의해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실명을 쓰지 못하지만 다른 역사적 인물로 가장하면서 수면 하에서 가토 기요마사의 영웅화가 계속되게 된다.
    본 연구는 역사의 필요성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영웅의 허구를 가토 기요마사를 통해서 추적해 나가고자 한다. 그리고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내셔널리즘이 만들어내는 허상을 증명하겠다. 또한 이 연구결과를 일본에서 발표함으로서 내셔널리즘이 역사의 진실을 얼마나 왜곡하는지를 알릴 예정이다.
    몇몇 일본 연구자들과 이야기를 할 때 가끔 가토 기요마사의 호랑이 사냥이 역사적으로는 없는 이야기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실제 연구된 논문은 한 편도 없다. 내셔널리즘이란 이처럼 객관적인 사실을 추구하는 연구자의 눈조차 흐려놓는다. 역시 이 분야는 한국인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보다 철저하게 객관적인 자료를 충분히 망라해야 한다.
  • 연구요약
  • 먼저 호랑이 사냥이 문학작품, 우키요에와 같은 그림, 예능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본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다다츠네(忠恒) 부자는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창원에서 호랑이 사냥을 행하고 두 마리의 호랑이를 잡아 고기와 뼈를 히데요시에게 보낸다. 이 내용은 그림 <島津家朝鮮虎狩絵巻>(1巻 江戸時代19世紀 42×684cm 紙本着色 九州国立博物館所蔵)에 그려져 있다. 이와 유사하게 병풍으로 그려진 <高麗虎狩図屏風>, 그리고 이 부자의 호랑이 사냥은 薩摩琵琶歌의 <虎狩>에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 호랑이 사냥을 예능화 시킨 호랑이춤(虎舞)가 있다. 호랑이춤은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가 주류이다.
    그리고 에도시대 말기에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나 영웅으로서 다시 그려지는 가토 기요마사에 대하여 연구한다.
    호랑이 사냥 이외에도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을 도왔다고 하는 다케우치노 수쿠네(武内宿禰)가 한반도를 침략하러 가는 그림에도 실제로 그려진 인물은 가토 기요마사를 그린다. 이처럼 신화적 사실을 임진왜란으로 대입시키고 일본인의 한반도 침략을 가토 기요마사라는 한 인물로 상징하게 하였다. 즉 가토 기요마사를 한반도 침략을 표상하는 영웅으로서 그린 것이다.
    1853년 柳亭種秀編 玉蘭斎貞秀畵『和漢英雄百人一首』의 한 장면을 보면 그림 옆에 “清政朝臣 일본의 영웅. 자국을 나서서 멀리 三韓의 땅에 이르고 漢土에 까지 멀리 그 이름을 떨치고, 惡虎를 물리쳐서 모든 군사들에게 모범을 보인 일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으므로 첫 번째 그림으로 이를 경축한다”라고 쓰여 있다. 가토 기요마사의 호랑이 사냥은 이미 기정사실화 되었다.
    게다가 요시토라(芳虎)의 <佐藤正清化物退治ノ圖>를 보면 가토 기요마사가 온갖 괴물들을 다 물리치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이 괴물퇴치(化物退治)는 도쿠가와 시대에는 별로 볼 수 없는 그림이지만 명치시대에 들어가면 괴물뿐 아니라 큰 뱀을 퇴치하는 이야기까지 등장한다. 가토 기요마사를 영웅시하는 분위기가 점점 더 높아지자 점점 더 많은 영웅담이 추가되는 것을 볼 수 있다.
  • 한글키워드
  • 에도시대,도요토미 히데요시,우키요에,호랑이 사냥,임진왜란,국학,가토 기요마사
  • 영문키워드
  • Ukiyoe,Kiyomasa Kato,Korean Tiger Hunt,Edo Reriod,Kokugaku,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Hideyoshi Toyotomi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일본은 호랑이가 서식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진왜란(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을 통해서 직접으로 한반도에서 호랑이를 접한 무장들이 많이 생겨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Toyotomi Hideyoshi)는 일본무장들에게 호랑이 고기를 보내도록 명령한다.

    그런데 일본 무장의 호랑이 사냥 이야기는 임진왜란 후 백여년 동안 일본 문예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던 호랑이 사냥 기사가 18세기부터 갑자기 기록되기 시작하여 막부 말기에 이르면 여러 기록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1739년의『常山紀談(Josankidan)』에는 가토 기요마사(Kato Kiyomasa)의 호랑이 퇴치담이 수록되어 있다.

    가토 기요마사의 호랑이 퇴치담은 이 기록이 처음이다. 그런데 도쿠가와시대(The Era of Tokukawa) 말기로 가면 이 이야기가 크게 유행한다. 많은 우키요에에서도 그려졌다. 예를 들면 우타가와 구니요시(Utagawa Kuniyoshi)의「和藤内虎狩之図(Tiger Hunting of Watonai)」는『国性爺合戦(The War of Kokusebya)』의 주인공 와토나이의 이름을 빌었지만 그림을 보면 여러 가지 요소로서 기요마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쿠가와시대에는 막부의 검열 때문에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무사를 직접 그릴 수 없었기 때문에 이름은 다른 이름을 썼지만 그림으로 알아볼 수 있게 그렸다. 구니요시의 그림책『和漢英雄画伝(The Heros Illustration of China and Japan)』에는 가토 기요마사의 실명을 써서 호랑이 퇴치 공적을 기리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위와 같은 일본인에게 있어서 호랑이 사냥의 의미를 살펴보고 특히 도쿠가와시대 말기부터 다수 생산되는 호랑이 사냥 이야기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그중에서도 가토 기요마사의 경우는 도쿠가와시대 말기에서 명치시대 초기에 집중적으로 많은 우키요에(Ukiyoe)와 그림책(Ehon)에 그려졌다.

    기요마사의 한반도 침략을 상징하는 호랑이 사냥이 이 시기에 확대 재생산되는 일은 일본의 내셔널리즘 고양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 내셔널리즘의 표상으로서의 호랑이 사냥에 대한 연구는 당시 일본인의 대외인식(특히 조선)을 살펴볼 수 있다.
  • 영문
  • There were no tigers in Japan. However, through the Japanese Invasion of Chosun in 1592, a lot of Japanese samurai saw tigers in the Korean peninsula for the first time directly. Toyotomi Hideyoshi ordered his samurai to "Bring the tiger`s meat". However, the story of the samurai`s tiger hunting hasn’t appeared in Japanese art or literature. Afterwards, in the 18th century, tiger hunting articles were written suddenly. In 1793, the story of Kato Kiyomasa, who repelled a tiger, was written in Josankidan. This is the first case which was written about Kato Kiyomasa`s hunting in the end of the Tokukawa era. At the time, this story was vogue and many Ukiyoe were drawn in Edo. For example, the tiger hunting of Watonai was written by Utagawa Kuniyoshi. He borrowed the name from the main hero of the War of Kokusebya, whose name is "Watonai." This fact can be found if one were to see the picture made by Kiyomasa. This picture includes much information. Because of inspection by the officials at the end of the Tokukawa era, it was impossible to draw a historical samurai`s picture along with his name, so the Japanese painter drew a historical samurai`s picture with a virtual name. In The Hero`s Illustration of China and Japan, it uses Kato Kiyomasa`s real name and praises his achievements about tiger hunting. In this study, I`ll talk about the meaning of tiger hunting to the Japanese—especially at the end of the Tokukawa era, which produced many stories about tiger hunting. One of these stories is about Kato Kiyomasa, from the end of the Tokukawa era to the early years of the Meiji era and many Ukiyoe and Ehon were depicted in them. The tiger hunting, which symbolized the Japanese Invasion, were drawn a lot in this era. This was meant to enhance Japanese Nationalism. As the symbol of Japanese Nationalism, the study of tiger hunting could gain Japanese recognition from foreign countries at the time—especially Chosun.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도쿠가와시대로 접어들면 바로 전 시대에 임진왜란을 겪으므로 해서 직접적으로 한반도에서 호랑이를 접한 사람들이 많이 늘어난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자신의 몸보신을 위해 호랑이 고기를 원했던 듯하다. 그런데 임진왜란 후 백여년 동안 일본 문예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던 호랑이 사냥 기사가 18세기부터 갑자기 기록되기 시작하여 막부 말기에 이르면 여러 기록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을 일본의 문학작품, 우키요에 등 대중문화 속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羅山文集』(1662)에서는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가 조선에서 호랑이를 잡은 이야기, 1734년『窓の須佐美追加』에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부하가 호랑이를 잡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1739년의『常山紀談』에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의 호랑이 퇴치담이 수록되어 있다.
    가토 기요마사의 호랑이 퇴치담은 이 기록이 처음이다. 그런데 도쿠가와시대 말기로 가면 이 이야기가 크게 유행한다. 많은 우키요에에서도 그려졌다. 예를 들면 우타가와 구니요시(歌川国芳, 1799~1861)의「和藤内虎狩之図」는『国性爺合戦』의 주인공 와토나이의 이름을 빌었지만 그림을 보면 여러 가지 요소로서 기요마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쿠가와시대에는 막부의 검열 때문에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무사를 직접 그릴 수 없었기 때문에 이름은 다른 이름을 썼지만 그림으로 알아볼 수 있게 그렸다. 구니요시의 그림책『和漢英雄画伝』에는 가토 기요마사의 실명을 써서 호랑이 퇴치 공적을 기리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위와 같은 일본인에게 있어서 호랑이 사냥의 의미를 살펴보고 특히 도쿠가와시대 말기부터 다수 생산되는 호랑이 사냥 이야기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그중에서도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의 경우는 도쿠가와시대 말기에서 명치시대 초기에 집중적으로 많은 우키요에와 그림책(絵本)에 그려졌다.
    기요마사의 한반도 침략을 상징하는 호랑이 사냥이 이 시기에 확대 재생산되는 일은 일본의 내셔널리즘 고양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 내셔널리즘의 표상으로서의 호랑이 사냥에 대한 연구는 당시 일본인의 대외인식(특히 조선)을 살펴볼 수 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일본에서의 호랑이는 단순한 동물 호랑이가 아니라 한반도나 한국인을 상징한다. 임진왜란을 통해서 한반도에서 호랑이 사냥을 한 무사들이 많이 있었으나 그들이 전부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일부는 영지 안에서만 무용담으로서 전해졌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가토 기요마사는 에도시대 말기에 호랑이를 퇴치한 인물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 후 오랫동안 영웅이 아니었다. 에도시대 내셔널리즘이라고 할 수 있는 국학의 융성과 함께 가토 기요마사가 영웅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러나 도쿠가와막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가토 기요마사의 영웅화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족을 멸망시킨 도쿠가와씨로서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토 기요마사를 영웅시하는 움직임은 에도시대 1739년의『常山紀談』에서 처음 시작된다. 그러나 1841년 덴포(天保) 개혁의 철퇴를 맞게 된다. 하지만 이에 의해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실명을 쓰지 못하지만 다른 역사적 인물로 가장하면서 수면 하에서 가토 기요마사의 영웅화가 계속되게 된다.
    본 연구는 역사의 필요성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영웅의 허구를 가토 기요마사를 통해서 추적해 나가고자 한다. 그리고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내셔널리즘이 만들어내는 허상을 연구한다.
    본 연구에 의해 얻어진 성과는 한국학술진흥재단의 등재학술지인 한국외대 일본연구소의 [일본연구] (제48호 2011년 6월 30일 발간예정)에 게재할 예정이다.
  • 색인어
  • 호랑이 사냥, 가토 기요마사, 임진왜란, 도쿠가와시대, 대외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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