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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일제 시기의 덕천서원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08-327-A00190
선정년도 2008 년
연구기간 1 년 (2008년 11월 01일 ~ 2009년 10월 31일)
연구책임자 오이환
연구수행기관 경상국립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남명학의 연구는 1980년대 이래로 급속히 성장하여 양적으로 이미 상당한 성과가 축적되어져 있다. 그것들은 남명 조식의 저술 내용을 분석하여 그 문학적 가치나 조식 자신의 사상 혹은 남명학파의 역사적 의미를 규명하는 데 비중이 두어져 왔고, 남명학파에 속한 인물들에 관한 개별적 연구도 병행되어져 왔다. 그 가운데서 본인은 주로 남명학의 전체 역사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작업에 종사해 왔다. 이제 그러한 작업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 일제시기 이후의 현대 부분 등 몇 가지 과제만을 남겨두고 있다.
    남명학파는 인조반정 이후로 사실상 소멸되었기 때문에, 그 이후의 역사는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남명 사상의 계승을 중심으로 한 강우(대체로 지금의 경상남도) 지역 사림의 사상사적 동향을 다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인이 발표한 선행 논문들은 남명학의 성립에서부터 철종 및 고종 시기까지를 중심 주제로서 다루었으며, 이번 연구는 그것에 이어 일제 시기의 덕천서원을 중심으로 한 강우 지역 유림의 동향을 탐구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연구의 의의는 우선적으로 조선조 유학의 전성기로 일컬어지는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기까지, 즉 명종·선조·광해군 기간 동안 한국사상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가 인조반정으로 말미암아 갑자기 정치적으로 소외되어 역사의 그늘에 가려지고 왜곡된 한 학파의 실상을 총체적으로 구명해 내는 데 있다. 어떤 의미로는 그러한 소외된 학파의 연구를 통해 한국 유학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의 제시가 가능하리라고 본다. 또한 이러한 연구는 근자에 중시되어져 가고 있는 지방사 연구의 사상사적 측면으로서도 의의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남명학의 전체 역사에 대한 연구가 아직 충분히 규명된 적이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서 남아 있다는 점이다.
  • 기대효과
  • 일제시기의 덕천서원을 중심으로 한 경남지역 및 전국 유림의 동향을 대상으로 하는 이와 같은 연구는 과거 학계에서 다루어진 적이 없는 새로운 것이다. 이 연구는 남명학의 전체 역사 가운데서 결락된 현대사의 한 부분을 메워줄 것이며, 사상사를 비롯한 한국학의 여러 분야 연구에 활용될 수 있다.
  • 연구요약
  • 본 논문에서 다루어지게 될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대원군 시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남명 조식을 주벽으로 하는 사액서원들은 모두 훼철되었다. 서원 철폐령에 의해 조식과 관련된 서원이 모두 훼철된 사태가 강우 지역의 유림에 준 충격은 컸다. 특히 덕산 일대에 세거해 온 남명 본손들은 이러한 사태의 근본 원인이 조식의 문인들 중 인조반정에 의해 처형된 광해기의 산림 정인홍과 기축옥사 이후 서인 측과의 당쟁을 격화시키는 데 주요한 계기를 마련했던 덕천서원 배향자 최영경에게 있다고 보았다.
    일제시기에 접어들어 강우 사림의 구심점을 마련하기 위해 덕천서원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덕천서원의 재건과 그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들, 특히 배향 문제와 허목에 의해 지어진 조식의 신도비, 즉 덕산비의 제거 문제를 중심으로 일제 시기 강우 유림의 동향을 분석하는 데 주안점을 둘 것이다. 그러나 그 외의 일제시기 남명학과 관련된 사실들에 대해서도 포괄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그러한 것으로는
    ⑴ 조식 부인의 본관이 남평 조씨로부터 창녕 조씨로 변경되어 남평 조씨를 창녕조씨시중공파라 하여 대동보에 포함시키게 됨으로서 조식 내외가 동성동본끼리 혼인한 것으로 왜곡된 사실로 말미암아 조용상을 비롯한 조식의 후예들이 대동보 편찬에 참여하지 않고서 따로 파보를 만들게 된 것,
    ⑵ 김해의 훼철된 신산서원 터에다 조식 당시의 거처인 산해정을 재건하게 된 과정,
    ⑶ <덕천원생록>에다 주석을 달아 <덕천서원청금록>이라는 제목의 서적으로서 간행하게 된 일,
    ⑷ 조식 연원의 인물들이 공동으로 편찬한 <진양지>가 이 시기에 처음 간행됨으로 말미암아 발생하게 된 분규,
    ⑸ 진주 및 산청 지역에 중국에서 시작된 공자교운동의 조선 본부인 道統祠와 培山書堂이 설립된 경위와 이 두 기구의 상호관계
    등이 있다.
  • 한글키워드
  • 배향,파보,산해정,덕산비,진양지
  • 영문키워드
  • memorial service,Sanhae-jeong pavilion,Jinyangji,clan register,Deoksan-bi monument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1871년에 덕천서원이 훼철된 이후 1916년에 河載華 등 유림은 그 터에다 덕천서원 강당이었던 경의당을 중건할 것을 결의하고, 이듬해에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하재화는 傍祖인 河沆을 포함한 5현을 뒤이어 건립될 사우에 배향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본손 측의 입장은 曺植 도학의 정통성은 吳健과 鄭逑가 계승하였으므로, 재건된 서원에는 훼철 이전의 崔永慶을 대신하여 이 두 사람을 배향해야 하며, 만약 이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조식만을 獨享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다.
    1926년 초에 조씨 문중은 許穆이 지은 조식 신도비, 즉 德山碑를 절단하여 파묻는 사태를 일으켜 또 한 차례 큰 물의를 야기하였다. 덕산비 사건의 직접적 계기는 의령의 二宜亭에서 1905년 가을에 중간된 허목의 문집 <記言>에서 원래 別集에 들어있었던 「答學者」가 당시 편집에 참여했던 유림의 지적에 의해 일단 삭제되었다가 후일 그 문중 인사인 許巑에 의해 슬그머니 다시 포함하여 간행 시판된 데 있었다.
    조씨 문중의 지도자 曺庸相이 생전에 주력했던 사업 중에는 선대의 계보를 바로잡는 문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조용상은 譜所에 여러 차례 서신을 보내어 김해의 남평조씨를 대동보에 포함시키지 않을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주도 하에 曺彦亨의 두 아들 植과 桓의 자손은 1915년에 별도로 <昌寧曺氏文貞忠順衛公派譜>(乙卯派譜)를 간행하여, 대동보로부터 독립한 파보를 성립시키게 되었다.
    진주 일대는 한국 공자교운동의 중심이 된 곳이다. 오늘날 국내의 공자교운동은 李炳憲이 1922~23년에 걸쳐 세운 培山書堂이 그 중심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그보다 앞서 1917년 道統祠에 대해 중국 曲阜에 있는 孔敎總會로부터 孔敎支會의 허가가 주어진 것이 최초였다. 그런데 1918년 무렵 도산서원 측이 통문을 보내어, 도통사 측이 공자를 봉안하면서 주자와 안자만을 배향한 것이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이 통문은 1920년 이병헌이 배산서당 설립 건으로 궐리를 방문했을 때 전달되었고, 궐리 측의 답신 형태로 도산통문에 대한 전폭적인 공감을 표명하는 회답을 받아 돌아왔다. 그리하여 결국 도통사의 공교지회로서의 지위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고, 그 지위는 이황 종손 이충호를 대표자로 하여 1919년 정월부터 건설 작업이 시작된 배산서당으로 교체되었다.
  • 영문
  • Since Dukcheon-Seowon was abolished in 1871, the site was left uncared for near half century. After the land census by the colonial government, it was incorporated to the government assets, and it could not be preserved even as a site. With this as a momentum, the Confucians, leaded by Ha Jae-Hwa, decided in 1916 to reconstruct Gyeonguidang, and the completion was celebrated in next year. Ha suggested to hold memorial service for five disciples, according to their master Cho Shik in the shrine which would be constructed soon after. But Cho's descendants asserted either to serve Oh Geun and Cheong Gu instead of Choi Yong-Gyeong the former co-worshiper or Cho Shik only. In the background of their assertion, there lies a paranoia that Choi's service had been the indirect causes of Dukcheon-Seowon's abolishment.
    In early 1926, the Cho's descendants gave rise to the enormous public criticism once more by cutting and burying up Duksanbi, the monument at the entrance of Cho Shik's tomb written by Heo Mok. The direct momentum for the Duksanbi case was that "An answer for the Scholars" which was originally included in the Gieon, a collection of Heo Mok's works, was eliminated for a while by the criticism of the editors of new edition but afterwards secretly included again and sold out.
    Among the tasks that Cho Yong-Sang, the leader of the Cho, devoted himself through his life was the problem to correct the genealogy of his ancestors. Cho Yong-Sang asked several times to the editors of the genealogical table to eliminate the Nampyeongs from the table, but it couldn't be realized. Since then, the descendants of Cho Eon-Hyong finally materialized in 1915 a sect table which was independent from the whole genealogical table.
    Jinju and it's vicinity was the place that became the center of the religious movement of Korean Confucianism. Although it is nowadays considered that the religious movement of Confucianism was started in Baesan-Seodang, founded by Lee Byeong-Hon, there was the earlier movement that in 1917 the status of the Korean branch of religious Confucianism was conferred to Dotongsa from Qufu China. But in 1918, The head of Dosan-Seowon sent the circular that criticized Dotongsa in several aspects. It was to check Dotongsa which appeared suddenly with the authority of the branch to leave out Dosan-Seowon which had hold the traditional authority in Yeongnam district. The circular was delivered to Jueli by Lee Byeong-Hon when he visited there in April 1920. And he returned with the reply of Jueli that expressed full sympathy. Thus the status of Dotongsa as the branch of the religious Confucianism brought to an end and it was substituted to Baesan-Seodang which had begun to be construct from the January of 1919.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1871년에 덕천서원이 훼철된 이후 1916년에 河載華 등 유림은 그 터에다 덕천서원 강당이었던 경의당을 중건할 것을 결의하고, 이듬해에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하재화는 傍祖인 河沆을 포함한 5현을 뒤이어 건립될 사우에 배향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본손 측의 입장은 曺植 도학의 정통성은 吳健과 鄭逑가 계승하였으므로, 재건된 서원에는 훼철 이전의 崔永慶을 대신하여 이 두 사람을 배향해야 하며, 만약 이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조식만을 獨享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다.
    1926년 초에 조씨 문중은 許穆이 지은 조식 신도비, 즉 德山碑를 절단하여 파묻는 사태를 일으켜 또 한 차례 큰 물의를 야기하였다. 덕산비 사건의 직접적 계기는 의령의 二宜亭에서 1905년 가을에 중간된 허목의 문집 <記言>에서 원래 別集에 들어있었던 「答學者」가 당시 편집에 참여했던 유림의 지적에 의해 일단 삭제되었다가 후일 그 문중 인사인 許巑에 의해 슬그머니 다시 포함하여 간행 시판된 데 있었다.
    조씨 문중의 지도자 曺庸相이 생전에 주력했던 사업 중에는 선대의 계보를 바로잡는 문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조용상은 譜所에 여러 차례 서신을 보내어 김해의 남평조씨를 대동보에 포함시키지 않을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주도 하에 曺彦亨의 두 아들 植과 桓의 자손은 1915년에 별도로 <昌寧曺氏文貞忠順衛公派譜>(乙卯派譜)를 간행하여, 대동보로부터 독립한 파보를 성립시키게 되었다.
    진주 일대는 한국 공자교운동의 중심이 된 곳이다. 오늘날 국내의 공자교운동은 李炳憲이 1922~23년에 걸쳐 세운 培山書堂이 그 중심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그보다 앞서 1917년 道統祠에 대해 중국 曲阜에 있는 孔敎總會로부터 孔敎支會의 허가가 주어진 것이 최초였다. 그런데 1918년 무렵 도산서원 측이 통문을 보내어, 도통사 측이 공자를 봉안하면서 주자와 안자만을 배향한 것이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이 통문은 1920년 이병헌이 배산서당 설립 건으로 궐리를 방문했을 때 전달되었고, 궐리 측의 답신 형태로 도산통문에 대한 전폭적인 공감을 표명하는 회답을 받아 돌아왔다. 그리하여 결국 도통사의 공교지회로서의 지위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고, 그 지위는 이황 종손 이충호를 대표자로 하여 1919년 정월부터 건설 작업이 시작된 배산서당으로 교체되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일제시기의 덕천서원을 중심으로 한 경남지역 및 전국 유림의 동향을 대상으로 하는 이와 같은 연구는 과거 학계에서 다루어진 적이 없는 새로운 것이다. 이 연구는 남명학의 전체 역사 가운데서 결락된 현대사의 한 부분을 메워줄 것이며, 사상사를 비롯한 한국학의 여러 분야 연구에 활용될 수 있다.
  • 색인어
  • 덕천서원, 배향, 파보, 덕산비, 공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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