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소설의 소재적 차원에서 영화가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소설 텍스트 안에서 영화는 소재로서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지, 그 소재적 쓰임의 효과와 의미는 어떠한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 연구의 목적이다. 달리 말해, 소설은 자신의 이야기 안에 영화 ...
이 연구는 소설의 소재적 차원에서 영화가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소설 텍스트 안에서 영화는 소재로서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지, 그 소재적 쓰임의 효과와 의미는 어떠한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 연구의 목적이다. 달리 말해, 소설은 자신의 이야기 안에 영화라는 또다른 이야기 양식을 어떻게 끌어들이고 또 담아내고 있는지, 소설이라는 문자서사의 세계에서 영화라는 영상서사의 세계는 어떠한 의미와 역할을 발휘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찰이 될 것이다. 이는, 현대사회의 대표적 대중문화 양식이라 할 수 있는 영화를 바라보는 소설(가)의 시선을 가늠하게 해줄 것이다. 또한 이른바 영상의 시대를 주도하는 영화에 대해 소설이 취하는 나름의 대응 혹은 적응의 한 측면을 살펴보는 작업이기도 할 것이다.
이 연구의 대체적인 분석 대상은 1990년대 이후의 한국소설이다. 이 시기 들어 한국소설은 스타일과 형식면에서, 또한 주제와 내용면에서 이전과는 사뭇 다른 서사적 풍경들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새로운 풍경 조성의 배경에는 아무래도 영화 혹은 영상매체의 성행과 위력이 놓인다. 90년대 이후 소설에서 영화가 이야기의 소재, 또는 모티브로 작용하는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은 그 중요한 근거가 된다. 영화를 보고 있는, 혹은 보았거나 보려 하는 인물이 등장하거나, 소설의 이야기가 영화로 인해 발생하거나 전환되기도 하고, 아예 영화의 장면이 그대로 인용․삽입되기도 하는 것은 90년대 이후의 소설이 보여주는 내용상의 흥미로운 특징이다.
영화가 소재로 등장하는 몇 작품들의 예를 든다면 김영현의 <내 마음의 서부>, 박상우의 <한 편의 흑백영화에 대하여 그는 말했다>, 김소진의 <자전거 도둑>, 안정효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김영하의 <전태일과 쇼걸>, 김경욱의 <변기위의 돌고래> <미림아트시네마> <낭만적 서사와 그 적들>, 천명관의 <유쾌한 하녀 마리사>, 조경란의 <마리의 집>, 우애령의 <정혜>, 정미경의 <밤이여 나뉘어라>, 듀나의 <히즈 올 댓> <얼어붙은 삶>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들 외에 영화 애호가가 등장하거나 극장을 소재로 한 적잖은 작품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90년대 이후 한국소설의 하나의 경향이라 할 만하다고 본다. 이러한 경향은 단순히 일시적 소재적 차원으로 머무르지 않다는 점에 더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본다.
"영화는 제게 폭발적인 가속도가 붙은 상상력을 촉발시켜주는 요소"라는 김경욱의 고백이 웅변하듯 최근의 젊은 작가들에게 있어 영화를 비롯한 영상매체의 영향은 소설 창작에 있어 중요한 자극이거나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소설 속의 영화 역시 단순한 일회적 소품으로 그치는 경우보다는 작중인물이나 사건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면서 작품 전반을 지배하거나 주제 형성에 기여하는 정도로까지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영화가 소설 속에서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는 것, 다시말해 소설이 영화를 즐겨 이야기의 소재로 삼고 있다는 것은 분명 90년대 소설이 갖는 주요한 변별성이다. 소재의 선별과 채택이 작가의 세심한 관심과 인식의 당연한 결과라면 이러한 소설적 소재상의 변화는 무엇보다도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현대사회의 ‘문화적 우세종’으로 그 위상을 달리하고 있는 영화라는 양식을 소설 장르가, 언제나 인간과 삶을 주시하고 현실의 변화에 민감해야 하는 소설 장르가 자신의 이야기의 소재로 삼는다는 것, 즉 자기 세계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일 터이다. 일상처럼 행해지는 영상매체 혹은 영상이미지와의 끝없는 접촉, 그러한 오늘날의 보편적 삶이야말로 영화가 소설의 주요 소재로 등장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외양상의 증가나 확산이 아니다. 소설 속에서 영화가 단순한 소재로서의 기능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물에 의해 그저 즐겨지는,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혹은 피지배적인, 그런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그의 의식과 정서를 지배하거나 결정짓고 이야기를 발생시키고 사건을 전환시킨다.
90년대 이후 소설이 영화에서 이야기나 모티프를 빌려오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소설이 누리고 있었던 지위 혹은 그 역할에 변화가 생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영화에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제공해왔던 소설과 그것을 빌려오는 데 머물러 있었던 영화의 위치가 이제는 역전이 되었거나, 적어도 쌍방향의 대등한 관계로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