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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일제하 포구상업도시 강경(江景)의 상업학교와 그 졸업생들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08-327-A00069
선정년도 2008 년
연구기간 3 년 (2008년 11월 01일 ~ 2011년 10월 31일)
연구책임자 정연태
연구수행기관 가톨릭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신청자는 2003년부터 최근까지 식민지적 근대화의 특성을 구체적으로 해명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포구상업도시 강경지역의 식민지기 변화상을 검토한 바 있다. 이를 통해 한편으로 일제의 지역지배․개발 과정에서 민족적 이해의 차이가 식민지적 근대성을 매개로 표출되는 특성의 일단을 밝히고, 다른 한편으로 지방 유력자들이 계층적․지역적․민족적 이해관계가 다층적으로 작동하는 정치․경제․문화 공간에서 자기성장을 추구해 가는 양상의 일단을 구명하고자 했다. 본 연구는 이같은 선행 연구를 토대로 밝혀진 식민지적 근대화의 특성이 강경상업학교라는 학교 공간과 졸업생의 사회공간에서는 어떻게 변형, 굴절되면서 발현되어 갔는지를 검토하려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 강경상업학교와 졸업생의 진로를 주목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강경상업학교가 강경의 식민지적 근대화의 특성을 어느 정도 반영할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이다. 강경은 조선 후기 이래 내재적 발전을 통해 성장한 상업 선진지대이면서도 개항 이후 일본인이 내륙 전진기지로 주목하여 식민사회를 형성한 지역으로서, 철도 개통, 군산개항, 군청 이전 등 사회․경제 환경의 변화로 지역경제의 위상이 위축되기 시작하자 지역발전의 요구가 분출된 포구상업도시였다. 이런 점에서 강경은 계층적․지역적․민족적 이해관계의 충돌과 결합, 그리고 근대성․식민지성․내재성의 착종을 통해 나타나는 식민지적 근대화의 특성을 살펴보기에 적합한 지역이다. 강경상업학교는 바로 이런 지역 환경을 배경으로 설립됐기 때문이다. 둘째, 강경상업학교와 졸업생의 사회공간이 식민지적 근대성을 체현한 공간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강경상업학교는 부산, 서울, 인천, 진남포, 개성, 함흥에 이어 1920년 4월 전국 9번째로 설립됐으며 1935년 사립 청주상업학교가 설립될 때까지 충남 유일의 명문 상업학교로 명성을 날렸고, 해방 이전까지 배출된 한국인 졸업생 612명, 일본인 졸업생 355명은 지방경제 금융계의 중추적인 실무인력으로 활동했다. 그리하여 강경상업학교와 졸업생들은 일제의 식민지 지역지배와 한국인의 자기성장, 그리고 해방 이후 한국사회의 경제운영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 마지막으로 강경상업학교가 한․일 공학으로, 학교당국․일본인교사와 한국인 학생의 수직적 관계뿐만 아니라 한․일 학생의 수평적 관계를 통해, 한편으로는 학교 구성원이나 학생으로서 동질감이나 유대감을 느끼게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적 경쟁, 갈등, 그리고 차별을 드러내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경상업학교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강경상업학교 개교 70주년을 기념하는 校史만이 학교 동문들의 주도로 발간됐을 뿐이다. 강경상업학교는 말할 것도 없고 상업계 중등학교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 또한 전무한 실정이다. 개화기 이래 1990년대까지의 실업교육 일반을 개설하는 과정에서 상업 학교와 교육을 간략하게 소개하거나, 상업교육 100년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근대 상업학교와 교육과정을 개략적으로 정리하고, 아니면 상업학교 개교 00주년을 기념하여 校史를 간행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본 연구는 이상의 연구 현황을 감안하여 강경상업학교의 구체적 사례 연구를 통하여 학교의 설립에서 졸업생의 사회적 진출에 이르기까지 강경상업학교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굴절된 근대화의 단면을 해부하고자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학교의 설립과 운영은 물론 학생의 출신배경과 학업실태, 학생활동, 사회적 진출과 해방 이후 활동 등을 전면적, 체계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식민지적 근대화의 특성이 학교공간과 졸업생의 사회공간에서 어떻게 변형, 굴절되고 발현되어 갔는지, 그리고 일제의 지역지배와 한국인의 대응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 기대효과
  •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학문적, 사회적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첫째,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었던, 일제하 실업계 중등교육사 연구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실업계 중등교육은 중추적 실무인력을 양성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주목되어야 한다. 둘째, 실업계 중등교육 연구에서도 일련의 「조선교육령」, 교과과정과 학교․교사․학생 관련 통계자료를 활용하여 실업계 중등교육의 전개양상을 개괄하는 식의 기존 연구경향을 지양하고 실업계 중등교육의 실상을 다면적, 입체적으로 밝히는 시발점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특히 학생의 출신배경, 학업성취도, 학생활동, 퇴학자 실태 등에 대한 분석은 이번 연구에서 새롭게 시도되는 접근방식으로서 근대 교육사 연구의 지평을 확대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셋째, 본 신청자의 선행연구와 함께 강경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식민지 근대화의 특성을 총체적으로 해명하는 데 활용함으로써 식민지 근대 역사상의 재구성을 둘러싼 학문적 논쟁과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 연구요약
  • 본 연구는 3개년에 걸쳐, 학교의 설립과 운영, 학생의 출신배경과 학내외 활동, 졸업생의 진로와 식민지 상업교육의 유산을 연구해 나갈 것이다. 이들 연구의 접근방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지역적․계층적․민족적 이해관계가 학교 공간과 졸업생의 사회공간에서는 어떻게 서로 착종하면서 작동하는지, 그런 것이 학교 공간, 구성원(교장-교사-학생) 및 졸업생의 의식 및 행동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이들을 어떻게 변화시켜 나가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둘째, 앞의 영향과 변화를 고찰할 때, 대상 범위를 학교 공간과 구성원으로 한정하거나 이해관계의 충돌을 일제 교육당국과 한국인 학생․학부모의 민족적 관계로서만 보지 않고, 식민교육 당국 - 학교 당국과 교사 - 학생(일본인 학생과 한국인 학생) - 지역사회와 학부모라는 폭넓은 상호관계를 통해 접근할 것이다. 이는 다음 두 가지 점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먼저 학교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이해관계의 착종은 상당 부분 학교 외부의 권력관계에 의해 규정당하거나 그것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4자의 상호관계를 통한 접근은 민족적 대립의 단조로운 접근에서 벗어나 식민지적 근대성의 다채로운 관계를 드러낼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이다. 셋째, 시기별 차이와 민족별 차이를 추적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먼저, 시기적 추이이다. 1920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어떤 유의미한 변화가 식민지 사회 현실의 변화와 관련을 맺으면서 나타나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또한 식민지 근대성의 다채로운 관계에 주목하면서도 일본인과 한국인의 민족별 이해관계나 대응의 차이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다채로운 관계가 민족적 차이와 어떤 관련을 맺으면서 전개되는지를 찾아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제1차 연도 : 강경상업학교의 설립과 운영> : 본 연도에서는 먼저 강경상업학교의 설립배경, 과정을 면밀히 분석할 것이다. 전국적으로 매우 이른 시기에, 충남에서는 유일하게 상업학교가 설립된 배경을 주목할 것이다. 특히, 그 과정에서 강경지역의 한국인, 일본인 유지들이 어떤 활동을 벌였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살펴볼 것이다. 동시에 상업학교(설립)에 대한 지역주민의 반응을 읽어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둘째, 학교의 운영에서는 교과과정, 교사, 시설과 경비, 학칙, 학사운영, 학내행사 등을 검토할 것이다. 여기서는 일본내 상업학교와 비교 검토하여 강경상업학교 운영상의 식민지적 특질을 찾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제2차 연도 : 강경상업학교 학생의 출신배경과 활동> : 본 연도에서는 강경상업학교 입학에서 졸업까지 학생들의 출신배경, 학업, 학내활동과 학생운동 등을 연구할 것이다. 먼저 학부모와 신원보증인의 신분, 직업, 거주지, 신입생의 출신학교, 학비와 부대비용 등을 조사하여 학교 입학자의 출신 배경을 조사할 것이다. 둘째, 학업성취도나 학생활동 양상 등이 민족별로 어떻게 차이를 보이는지, 과목별 특성에 따라 민족별로 어떤 상관성을 보이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셋째, 강경상업학교 학생들이 교내외에서 벌이는 특별활동을 포함한 학생활동을 조사하여 그 특성을 해명할 것이다. 넷째, 해마다 일정하지는 않지만, 적지 않은 학생들이 중도 탈락한 점에 주목하여 중도 탈락(퇴학) 사유, 탈락자 신상명세 등을 분석할 것이다. 특히 이와 관련하여 동맹휴학을 비롯한 학교와 한국인 학생 사이의 갈등을 검토할 것이다.
    <제3차 연도 : 강경상업학교 졸업생의 진로와 식민지 상업교육의 유산> : 본 연도에서는 강경상업학교 졸업생의 진로를 주목하여 이들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한국인 경제의 성장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특히 졸업생들이 취업하거나 선호한 분야와 직장을 조사하여 식민지 공간 속에서 자기성장을 도모하려는 졸업생들의 선택 경향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특히 2차 연도의 성과를 토대로 학업성취도와 취업분야의 연관성을 분석하고, 그 과정에서 민족적 차별이 나타날 가능성을 주목하고자 한다. 또한 강경상업학교 졸업생들의 해방 이후 진로와 활동, 식민지 상업교육이 해방 이후 한국에 미친 영향 등을 조사함으로써 식민지 유산을 둘러싼 논쟁을 해소하는 데 시사를 얻고자 한다.
    이상 3개년의 연구 성과를 종합하면, 일제의 식민지 상업교육정책, 상업학교의 설립과 운영, 학생의 학업과 학생 활동․운동, 졸업생의 사회진출, 식민지 상업교육의 유산 등 식민지 시기 포구상업도시 강경의 학교공간을 중심으로 다채롭게 펼쳐진 정치․사회․문화적 모색과 갈등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인의 발전 지향성이 민족적 이해의 차이와 식민지적 근대성을 매개로 표출되는 특성의 일단을 밝혀줄 것이다.
  • 한글키워드
  • 상업교육,민족성,근대성,식민지성,상업학교,강경,식민지적 근대화,식민교육,상업도시
  • 영문키워드
  • Ganggyeong,Commercial Education,Colonial Education,Colonial Modernization,Commercial city,modernity,Nationality,Coloniality,Commercial High School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식민지적 근대화의 특성이 학교 공간과 졸업생의 사회 공간에서 어떻게 변형, 굴절되면서 발현돼 갔는지를 밝히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일 공학인 강경상업학교의 학적부, 제적부, 동창회 명부, 교우회지 등의 자료를 전면적으로 데이터베이스화돼 미시적 분석을 시도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학교 운영이나 규율에서 식민지 근대적 특질은 다음과 같다. ① 선발과정에서 민족별 할당제를 채택해 일본인 학생들에게 입학 특혜를 줬다. ② 교장을 비롯한 교사의 대다수는 일본인으로 구성됐고, 그런 교장-교사-급장-학생으로 이어진 군대식 위계제가 학교생활 전반을 지배했다. ③ 학생들의 생활 전반을 감시, 통제하고 근대적인 규율과 질서를 강조함으로써 학생들을 식민지적 군국주의적 질서에 복종하는 근대인으로 훈육하고자 했다. ④ 그리하여 학교 당국의 식민지적 차별과 과도한 통제, 규율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은 적지 않았다.
    둘째, 학생들의 학업성취도에서 나타난 민족적 차별과 차이는 다음과 같다. ① 학년별 평균 성적, 상업학교생 실력의 상징인 주산 실기 능력에서 한국인은 일본인에 비해 높았다. ② 과목별 성적에서는 민족적 차이가 뚜렷해 한국인은 수학․영어․일본어습자 등의 성적에서, 일본인은 체조․교련․상품 및 상업실천의 성적에서 우세를 보였다. 교련과 체조에서 일본인 학생의 절대적으로 좋은 점수를 받은 데에는 식민지적 현실이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셋째, 일본인 교사들은 품행평가와 처벌 과정에서 일본인 학생을 우대하고 한국인 학생을 차별했다. ① 학업성적에서는 한국인 학생보다 훨씬 뒤떨어진 일본인 학생들이 22년간 품행 평가를 받은 97개 학기 중 절반 이상에서 한국인 학생보다 좋은 평가를 받았다. ② 재학생 처벌이나 품행불량 관련 제적 실태를 민족별로 비교하면 한국인 학생에 대한 징계율은 일본인 학생의 두 배에 달했다.
    넷째, 졸업생의 진로에서도 민족적 차이가 뚜렷했다. ① 한국인 졸업생은 대부분 금융조합․은행 등에 취업한 반면 일본인 학생은 회사․상점으로 진출했다. ② 취업률에서 한국인 졸업생이 일본인 졸업생에 비해 높았지만, 금융조합 취업자를 제외하면 일본인의 취업률이 더 높았다. 이 배경에는 하급직원으로 거의 한국인만을 채용했던 금융조합이란 취직선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③ 반면 진학이나 가사에 종사한 일본인 졸업생의 비율은 월등히 높았다. 이는 한일 졸업생의 경제형편의 차이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식민지기에 배출된 인력은 해방공간을 맞이하여 제한적이지만,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 ① 졸업생의 13.9%는 이미 사망했고, 생존자의 절반은 행방이나 직종 불명자였고 취업률도 일제말기에 비해 줄어들었다. 분단과 전쟁의 여파로 식민지기 교육의 유산 중 절반은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② 그러나 교육계 진출자와 직급 상승자가 큰 폭으로 나타나 해당 분야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런 점에서 식민지기 한국인 성장의 유산은 과장돼서고 곤란하지만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음도 무시돼서는 안 된다.
  • 영문
  • The Purpose of this research is to dig up the characteristics of the modernization through colonization which was revealed in the schools and society during the colonial rule of imperialist Japan. For this purpose, I analyzed the historical material such as school registers, removal lists, membership list of an alumni association and alumni bulletins, etc. of Ganggyeong commercial high school which was established at 1920. The main contents of this research are composed of five parts.

    In the first part, I tried to find out the characteristic of colonial modernization which was found in the process of administration and disciplines of the school. The results are as follows:
    1) The school authorities gave special treatment to Japanese applicant for entrance to the school through quota system favorable to Japanese.
    2) The order of rank of military style which was organized in the order of Japanese principal-Japanese teachers-class president-students superintended all the school life of the students.
    3) By way of surveillance and control, the school authorities intended to train and change students into modern subjects obedient to the Japanese Empire
    4) The Korean students felt aggrieved at and complained of the oppressive measures of the school authorities like that.

    In the second part, I tried to discover the racial difference and discrimination of school records. The noteworthy results are as follows:
    1) The koreans were more excellent than the Japanese in the average school records classified by grade and the records of the abacus calculation contests which was a symbol of real ability of the students in the commercial high school.
    2) There was a clear racial distinction in the school records by each subject. the Koreans were good at subjects like math and English but the Japanese got excellent records at subjects like physical exercise, military training.

    In the third part, I found out that Japanese teachers gave preferential treatment to the Japanese in the process of rating character and conduct and punishing students for their delinquency. Those details are as follows:

    1) The Japanese got higher average degree by grade than the Koreans in the evaluation of character and conduct in the ratio of one term to two terms.
    2) The percentage of disciplinary punishment on the Koreans was twice that on the Japanese.

    In the fourth part, I dug out there was the racial difference in the course and career of the graduates. They are as follows:
    1) Many Korean graduates got jobs with government-manufactured financial associations and bank but many Japanese entered companies and stores.
    2) Although the Korean graduates was higher in the rate of employment than the Japanese, they former was lower in that rate than the latter if the Korean graduates who were employed at government-manufactured financial associations were excepted in account.
    3) The rate of the Japanese graduates who went on to the next stage of education or was engaged in household affairs was higher by far. They could do so because their family circumstances were better than the Koreans.

    In the last part, I found out that the Korean graduates produced during the rule of Japanese empire played some part after national liberation but the extent of their part should not be exaggerated. The detail of the contents are as follows:

    1) The 13.9 percentage of the graduates was already the dead in 1950 and the half of survivors were unknown. In 1954 or 1958, the rate of employment of the graduates got lower than the close of the rule of the imperialist Japan. This fact showed that a half of the legacy of the colonial education was destroyed and could not displayed its ability in the aftermath of division of Korean peninsula and Korean War.
    2) The graduates who entered fields of education and improved their position at their places of work increased rapidly and played important roles in the diverse fields of Korean societ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식민지적 근대화의 특성이 학교 공간과 졸업생의 사회 공간에서 어떻게 변형, 굴절되면서 발현돼 갔는지를 밝히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일 공학인 강경상업학교의 학적부, 제적부, 동창회 명부, 교우회지 등의 자료를 전면적으로 데이터베이스화돼 미시적 분석을 시도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① 학교당국의 운영과정에서 나타난 식민지 근대적 특성, ②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와 교사들의 학생 평가와 처벌, 그리고 졸업생의 사회적 진출 과정에서 나타난 민족적 차이와 차별은 어떤 것인가, ③ 식민지기 교육의 유산이 해방 후 한국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등을 밝히고자 했다.
    첫째, 학교 운영이나 규율에서 식민지 근대적 특질은 다음과 같다. ① 선발과정에서 민족별 할당제를 채택해 일본인 학생들에게 입학 특혜를 줬다. ② 교장을 비롯한 교사의 대다수는 일본인으로 구성됐고, 그런 교장-교사로부터 급장-학생으로 이어진 군대식 위계제가 학교생활 전반을 지배했다. ③ 학생들의 교내외 생활에 대한 감시, 통제는 엄격했고 군국주의적 식민교육이 교과 영역 이외 다양한 방면에서 진행됐다. 동시에 학칙이나 학생 수칙 등에서 근대적인 시간관념․규율․질서와 청결 위생을 강조해 학생들을 식민지적 군국주의적 질서에 복종하는 근대인으로 훈육하고자 했다. ④ 한국인 학생들은 언뜻 보기에 명문학교 학생이란 자부심에 고무되고 전통적인 師弟觀에 속박돼 일제의 식민교육에 순응하거나 적응하는 듯했으나 학교 당국의 식민지적 차별과 과도한 통제, 규율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은 적지 않았다.
    둘째, 학생들의 학업성취도에서 나타난 민족적 차별과 차이는 다음과 같다. ① 학년별 평균 성적, 상업학교생 실력의 상징인 주산 실기 능력에서 한국인은 일본인에 비해 높았다. 고학년이 돼 감에 따라 민족별 성적 격차는 줄어들었으나 22년간 97개 학기 가운데 2개 학기를 제외하고 한국인의 성적이 더 높았다. 또한 교내외 각종 주산경기대회에서 한국인 학생의 입상 성적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② 과목별 성적에서는 민족적 차이가 뚜렷해 한국인은 수학․영어․일본어습자 등의 성적에서, 일본인은 체조․교련․상품 및 상업실천의 성적에서 우세를 보였다. 교련과 체조에서 일본인 학생의 절대적 우세는 식민지적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 입학성적부터 학업성적, 주산실기 성적 등에서 모두 한국인 학생들이 일본인 학생에 비해 우수했음에도 교사들은 품행평가와 처벌 과정에서 일본인 학생을 우대하고 한국인 학생을 차별했다. ① 품행 평가에서 일본인 학생은 전체 학기의 절반 이상에서 한국인 학생보다 좋은 평가를 받았다. ② 재학생 처벌이나 품행불량 관련 제적 실태를 민족별로 비교하면 한국인 학생에 대한 징계율은 일본인 학생의 두 배에 달했다. 이점은 한국인 학생들이 식민지적 차별과 학교의 규율에 더 반항적이었던 데 기인했을 수 있지만, 민족별로 불공정한 징계가 자행됐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넷째, 졸업생의 진로에서도 민족적 차이가 뚜렷했다. ① 한국인 졸업생은 대부분 금융조합․은행 등에 취업한 반면 일본인 학생은 회사․상점으로 진출했다. ② 취업률에서 한국인 졸업생이 일본인 졸업생에 비해 높았지만, 금융조합 취업자를 제외하면 일본인의 취업률이 더 높았다. 이 배경에는 하급직원으로 거의 한국인만으로 채용했던 금융조합이란 취직선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③ 반면 진학이나 가사에 종사한 일본인 졸업생의 비율은 월등히 높았다. 이는 한일 졸업생의 경제형편의 차이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인 졸업생의 해방후 진로에서 흥미로운 분석 결과가 나왔다. ① 졸업생의 13.9%는 이미 사망했고, 생존자의 절반은 행방이나 직종 불명자였고 취업률도 일제말기에 비해 줄어들었다. 분단과 전쟁의 여파로 식민지기 교육의 유산 중 절반이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② 그러나 교육계 진출자와 지위(직급) 상승자가 큰 폭으로 나타나 해당 분야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한 데서 보듯 식민지기 한국인 성장의 유산이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는 과문한 소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제강점기 학교의 학적부와 제적부, 동창회명부, 교우회지 등을 전면적으로 데이터베이스화하고 분석한 최초의 연구 성과라 자부한다. 특히 한․일 학생의 학업전반 및 과목별 성취도, 교사의 학생에 대한 품행 평가, 징계 실태 등을 처음으로 계량화하고 민족별로 비교 분석했을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자료와의 비교를 통해 해방 전후 한국인 졸업생의 사회 진출과 지위상의 변화를 미시적, 체계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동일한 제도와 조건, 즉 한일 공학 중등학교에서 나타난 식민지적 근대화의 특성의 일단을 밝히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런 사례 연구의 결과는 ① 한․일공학 중등학교를 대상으로 연구함으로써 재학 중에는 동일한 제도와 과정을 이수하는 과정에서, 졸업 후에는 동일한 학력의 소지자들이 취업하는 데서 나타난 민족적 차이와 차별을 밝히고, ② 민족적 차이와 차별 속에 배출된 한국인 졸업생들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이용되면서도, 한국사회의 자기 성장에서 가진 의미를 구명하고, ③ 이들 졸업생들이 해방후 한국사회에 수행한 역할을 분석함으로써 향후 식민지적 근대화의 특성과 식민지적 근대의 유산의 성격을 전반적으로 해명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나아가 본 연구 성과는 최근 학계와 사회 일각에서 논란․논쟁이 되고 있는 식민지 근대화 논쟁을 실증적 차원에서 진전시키고 식민지적 근대화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밝히는 데 하나의 의미 있는 근거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 색인어
  • 식민지적 근대화, 상업학교, 민족적 차별, 민족적 차이, 식민교육, 식민지적 유산
  • 연구성과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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