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조선시대 상수역학의 필수원전인 주희의 『역학계몽』을 텍스트로 하여, 그것이 어떻게 수용되고 재해석되어 갔는지를 연구한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조선유학자들의 『역학계몽』에 대한 저작물 전반을 연구대상으로 하고, 퇴계학파와 기호학파로 대별하여, 조선시 ...
이 연구는 조선시대 상수역학의 필수원전인 주희의 『역학계몽』을 텍스트로 하여, 그것이 어떻게 수용되고 재해석되어 갔는지를 연구한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조선유학자들의 『역학계몽』에 대한 저작물 전반을 연구대상으로 하고, 퇴계학파와 기호학파로 대별하여, 조선시대 『역학계몽』연구의 흐름과 특성을 고찰하였다.
먼저 이황(李滉)의 『계몽전의(啓蒙傳疑)』는 조선의 『역학계몽』관련 저작 가운데 최초의 본격적 연구서로서 주희의 『역학계몽』보다 더 개방적인 상수학 저술이다. 이황은 주희가 부정한 한대역학의 납갑설(納甲說), 비복설(飛伏說) 등을 모두 수용한다. 도교역학의 여러 문헌을 활용하고 8괘를 참동계의 납갑에 입각하여 상세히 설명한다. 그러나 이렇게 철저한 상수적 설명방식이 그의 이학적 관심이나 이론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소이연(所以然)과 소당연(所當然)의 개념을 통하여 인사(人事)의 질서가 자연의 필연적 질서에 부합하기를 이상으로 추구하였던 성리학자의 입장에서, 상수학을 통하여 자연의 법칙적 질서를 드러내기를 추구하였다는 것은 하등 모순이 아니며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이는 후대 퇴계학파의 『계몽』연구에서 상수와 의리를 밀착하는 방향으로 가시화되며, 퇴계학파 특유의 이학적 관점도 드러남을 볼 수 있다. 요컨대 주희와 이황의 상수학은 모두 그 바탕에 이학적 관심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퇴계학파의 『역학계몽』연구는 『계몽전의』를 중심으로 문제를 제시하고 해결해가는 연구사의 축적을 통해 『역학계몽』이해의 완전성을 추구해 간다. 이는 퇴계학파 『역학계몽』연구의 특징이라 할 것이다. 다만 후대 퇴계학파의 『역학계몽』연구에서는 이학적 관심이 뚜렷한 경우와, 이학적 관심과는 별도로 도수적(度數的) 연구에 치중한 경우로 나뉨을 볼 수 있다. 후자의 경우 19세기 저작들에서 뚜렷이 드러나며 이는 퇴계학파 안에 내재하던 하나의 흐름이 19세기에 이르러 결실을 맺은 것으로 생각된다.
기호성리학파의 『역학계몽』연구는 대체로 한원진을 중심으로 그의 동료, 문인들에 의해 연구되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퇴계학파의 『역학계몽』연구가 이황 『계몽전의』이후, 16세기말로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진데 비하여, 기호성리학파의 『역학계몽』연구는 18세기에 집중적으로 논의되고, 그 이전과 이후에는 비중있는 연구저작들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상수학과 리학을 함께 다루는 경향이 두드러지며, 퇴계학파에서 순수하게 도수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연구경향의 흐름이 존재하는 것과 달리, 기호성리학파 내에서는 그러한 관심을 쉽게 찾을 수 없다. 기호성리학파의 『역학계몽』연구는 그들의 태극론을 살펴 볼 때, 그 성리학적 입장이 뚜렷하게 반영됨을 알 수 있다. 하도의 상수적 태극을 리기지묘(理氣之妙)에 바탕한 리기론 및 인성론과 연계하여 설명하는 것은 조선후기 기호학파 『역학계몽』연구의 독특한 풍토라 하겠다.
하도와 복희팔괘 형성에 관련한 논의는 매우 복잡한데, 조선의 유학자들은 특히 호방평 설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보다 명쾌하게 정리해 나아감을 볼 수 있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복잡하기 짝이 없는 이 문제에 대해 심혈을 기울여 논란을 거듭한 이유는, 천지자연의 이치와 인간사의 예제(禮制)가 하나의 원리로 구축되어야 한다는 성리학의 진리관에 기인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기호성리학파의 『계몽』논의에서는 자연의 운행에 대한 도수론적 관심이나, 한대역학을 수용한 논의의 흐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기호학파에 있어서 우주자연에 대한 과학적 탐구는 홍대용, 김석문, 황윤석 같은 실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기호실학자들은 음양오행, 천간지지(天干地支)를 매개로 하는 전통적 과학원리에 입각해 자연을 탐구하기 보다는, 서양의 과학문물을 수용하여 전통과학의 체계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