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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이주와 교류를 통해서 본 동아시아 지역 상호간의 네트워크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학문후속세대양성_학술연구교수& #40;인문사회& #41;
연구과제번호 2009-353-A00005
선정년도 2009 년
연구기간 3 년 (2009년 07월 01일 ~ 2012년 06월 30일)
연구책임자 배숙희
연구수행기관 경상국립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1252년 쿠빌라이가 몽고․ 색목․ 거란․ 한족 등의 다민족으로 구성된 몽고군 정예 10만 부대를 친히 이끌고 만리를 넘어 운남으로 진군하여 1253년 12월 15일에 大理城을 점령하였다. 그 후, 대리국의 잔여 세력을 제거하고 대리국주 段興智을 사로잡아 몽고제국에 귀부시킴으로서 운남지역이 드디어 평정되었다. 元나라의 건국으로 중앙정권 관할하에 1276년 雲南行中書省이 설치되었고 행정중심도 大理에서 昆明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이 때부터 “雲南”이 정식으로 행정구역의 명칭이 되었고 “昆明”은 운남성의 首府가 되어 명실상부하게 운남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元代에 많은 몽고인들이 운남으로 들어 왔을 뿐만 아니라 거란․ 여진․ 위구르와 중앙아시아의 색목인․ 북방의 한족 등 다양한 민족의 대이동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원대의 운남지역은 민족 융합과 교류가 그 어느시기보다도 활발하였던 시기였다. 元代부터 운남의 변경지역에 대한 통치가 더욱 공고해지게 되었으며 사회발전에 새로운 동력을 주었고, 몽고족․ 회족 등의 소수민족들이 거주하게 되어 오늘날 한족과 25개의 소수민족이 사는 중국 최대의 다민족 거주 지역이 되었다.
    원나라의 중국통일은 서남 변방지역의 운남이나 한반도 남단의 탐라 지역에 모두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원대의 운남지역은 唐代에 건국된 南詔의 뒤를 이은 大理國이 종말을 고함으로서 운남지역 500년간의 지방할거 정권이 끝나고 중앙정권이 직접 통제하게 되었다. 운남행성 관할 범위는 지금의 운남성 전제, 귀주성의 서부, 사천성의 서남부 및 오늘날의 미얀마의 북부, 베트남의 서남부, 라오스와 태국의 북부로서 굉장히 광범위하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한반도 남단의 탐라지역도 원 세조에 의해 직접 통치된 지역으로 원나라가 멸망된 이후에도 北元과 교류하면서 명 태조 주원장의 질서체제를 인정하지 않고 貢馬를 바치고 통교하였던 지역이다. 중국의 25史 外夷 열전중에서 유일하게《元史》에서만 ‘耽羅’를 一國 차원으로 격상시켜 제일의 外夷 高麗의 바로 아래에, 제3의 外夷 日本 바로 위에 제2의 外夷 ‘耽羅’를 다루었다. 이 사실은 간단한 것 같지만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원나라에 있어 탐라는 도대체 어떠한 존재이길래 하나의 독립된 열전으로 다루었던 것일까? 탐라가 元나라의 직접통치를 받게 된 것은 1273년 삼별초의 난을 麗蒙연합군이 함께 진압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후 약 100년간 탐라는 원나라의 직접 통치를 받았다. 때로는 원나라 도적떼의 유배지, 몽고 왕실에 죄를 지은 몽고족 관료나 한족 관료의 유배지가 되었다. 삼별초의 난을 진압한 이후는 초토사, 다루가치, 단사관, 만호관 등의 官府가 설치되어 원나라에서 직접 관원을 파견하여 왔다.
    필자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이 두 지역이 실제로 몽골통치하에서 긴밀하게 상호간에 네트워크가 형성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몽골족이 중국을 통일하기 위한 전략으로 가장 먼저 정복하였던 곳이 운남지역이었고, 이 운남지역을 거점으로 南宋을 멸망하고 중국 남부 諸國의 복속시킬 수 있었다. 또 한편으로 한반도 남단의 탐라를 직접 통치하게 되자 南宋과 日本 점령의 교두보로 삼고자 하였다. 비록 그 꿈이 완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할지라도 몽골족의 통치하에서 이 두 지역이 점하는 비중은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이 두 지역은 강력한 토착세력이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이 두 지역(운남과 탐라)은 또한 명나라 초기에 北元을 중심으로 하는 몽골통치 체제를 존속시키려는 움직임이 여느 지역보다도 강하였다. 그리하여 원나라의 운남통치는 중원지역에 비하여 13년이나 길었다. 명 태조 주원장은 운남지역과 막북의 몽골족 후손의 일부를 탐라로 이주시켜 기존의 탐라지역의 몽골족과 더불어 살아가게 하였다. 그렇다면 주원장은 왜 하필 몽골족 후손들을 탐라지역으로 이주시켰는가? 원나라 말기, 명나라 초의 권력을 중심으로 하는 네트워크가 어떠한 형태로 표출되었는지 연구하는 것은 상당한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제주도의 몽골문화와 의논이 분분한 유적지에 관한 전설이나 의문점이 해명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제주도에서 현재 추진하고 있는 몽골이나 중국 관련 문화 콘텐츠를 진행시켜 나감에 그 원류를 따져보고 풍부한 소재 등을 찾아 문화융합의 다양한 모습을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 기대효과
  • 몽골은 남송과 중국 남부 諸國의 복속을 위해 운남지역을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오늘날의 미얀마 북부에 緬中行省을 설치하고 운남의 蒙古 宗王인 운남왕으로 하여금 통치하게 하였다. 마찬가지로 몽골은 여몽연합군이 삼별초의 난을 진압한 후 탐라를 거점으로 남송과 일본정벌을 계획하였다. 비록 원나라의 계획이 완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할지라도 운남과 탐라지역은 둘다 원나라가 세력을 확대해 가는데 주요한 거점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이 두 지역이 하나는 고원지역에 위치하고, 하나는 바다 가운데 섬이지만 또한 공통성도 찾아볼 수 있다. 두 지역 다 중국 중세시기에 토착적인 성향이 강했던 지역으로 몽골에 의해 직접 통치되었으며 처음으로 몽골족의 移住가 이루어졌던 곳이라는 것이다.
    제주도는 한반도와는 다른 여러 가지 특징들이 있다고들 하는데 본 연구를 통해서 역사적으로 규명해 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몽골족이 탐라를 약 100년간 통치하였던 데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元․ 明初에 탐라로 왔던 몽골족중에는 운남지역에서 왔던 宗王 梁王의 후손이 여느 몽골족보다 탐라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원대 탐라지역에는 여러 원인으로 탐라지역으로 이주한 중국사람들로 인해 이미‘胡人部落’이 있었고 목호의 세력도 비교적 강했다. 이러한 바탕하에 명초 주원장은 양왕의 후손들과 막북의 달달친왕을 비롯한 상당수 몽고족을 移住시켰다. 이들의 집단적인 이주로 탐라사회는 몽골족과 탐라 현지인간의 交流가 이루어져 많은 사회 문화적인 변화가 생겨났다. 13세기 후반기의 동아시아 구도를 거시적으로 파악함으로서 나아가 14세기, 15세기초까지의 탐라지역과 운남지역간의 네트워크를 통해 원․ 명간의 권력 관계 구도도 밝힐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어, 제주도내에서 유적지의 답사와 조사 작업이 진행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제주도에는 양왕의 후손 유적지라고 전해지는 곳으로 대표적인 것이 동쪽 40리(지금의 河源境)에 있는 王子墓나 三墓의 階砌이다. 경술 국치 후 왜구가 묘안에 寶器가 있을까 발굴하였기 때문에 邱墟가 되어버렸다. 중문면 하원리 경계와 군산 동북 기슭에 “왕자골”이 있는데, 이 이름은 왕자묘에 기인한 것이다. 三墓 앞에 있던 石像(남제주군 청사에 보관중)은 견고한 백색 암석에 조각이 정교하고 문관의 의관을 한 것으로 보아 양왕자 혹은 부근 加內村의 궁궐 유적지(전설)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 석재가 제주도산이 아닌 점에 주목할 만 하다. 梁王子遺墟은 和順里에 있으니 지방 故老들이 전하여 말하기를 梁王子田이라고 하며 지금은 大路가 되었다. 혹자는 양왕의 후손이 왔던 중국 운남지역의 소수민족중의 하나인 苗族과 공통되는 특징으로 감옷을 들고 있다. 제주도에서 농부의 작업복에 감물을 들여 갈색을 띠게 하는데… 양왕의 가속을 제주도에 안치하고 나서 감옷을 입는 것이 전래되었다고 하는데 감물을 들이는 방법은 다르다. 또한 삼별초 난을 진압하고 나서 원나라는 탐라에 다루가치를 설치하였고, 원에서 관원이 파견되어 왔으므로 다루가치 軍民按撫使府의 위치가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한 조사도 필요하다. 이러한 답사와 조사는 더 이상 시간이 지나면 마멸되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 탐라가 몽골에 의해 약 100여년 간 통치되었다는 사실을 제주도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하였는지도 중요하지만 역사적인 유적지를 찾아내어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다.
    구령이나 적다 등 제주 조랑말의 다양한 명칭은 몽고어에서 나왔다. 말안장도 한반도의 것보다는 몽고 것과 유사하다. 마소의 주인을 표시하는 烙印도 몽고의 방목기술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얻은 것이다. 현지답사를 통해 좀더 조사해야 할 것이고, 앞의 유적지가 정말 양왕의 후손과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꼼꼼한 고증을 통해서 밝혀져야 될 것이다.
    이상과 같은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오늘날 제주도가 한․ 중․ 일의 허브로서 역할의 필요 충분한 설명과 국제자유도시로서 갖는 의미를 역사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을 것이다. 즉, 세계화와 지방자치를 동시에 지향하는 시대에 걸맞는 역사적 관점을 모색하고 제주를 연구의 중심에 놓고 중국 운남․ 몽골초원과의 교류를 활성화하는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동아시아사를 파악함에 있어서 그동안 제주의 역할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중세 동아시아 지역 상호간의 네트워크 속에서 탐라는 그 고유하고 독특한 역할을 하였다. 이런 사실들이 학문적이나 문화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면 그 파급효과는 상당하리라 생각된다.
  • 연구요약
  • 몽골이 大理國을 멸망시킨 후 雲南行省을 두어 통치하였다. 至元13년(1276) 정월에 赛典赤은 운남행성의 건립을 선포하고 雲南行中書省平章政事가 되었다. 賽典赤은 烏馬兒 라고도 칭하는데 중앙아시아의 回回人이다. 1274년부터 1279년까지 賽典赤은 호적을 조사하여 조세를 부과하고 交趾를 초무하여 행성의 관할범위를 확대하였다. 이처럼 운남행성의 건립을 시작으로 기타 9개의 큰 行省을 건립하게 된다. 운남지역은 기존에 있던 白族, 傣族 등의 토착 소수민족외에도 몽고족, 색목인, 한족, 거란족 등의 족속들도 封王出鎭, 軍隊戌守, 地方仕宦, 유배인 등으로 서남변방지역에 移住하게 되었다. 한편, 원래 대리국주였던 段氏와 기타 소수민족들도 직책을 맡게 하는 土官 정책과 아울러 몽고족 宗王을 파견하는 직접 통치도 겸하였다. 이들 宗王이 바로“雲南王”,“梁王”이라고 칭해진다. 양왕의 지위는 운남왕보다 높았으며 원나라의 일등왕으로 원나라 후반기 行省의 사무는 실제로 양왕에 의해서 장악되어졌다. 이렇게 운남지역은 雲南行中書省의 관원, 토착세력인 土官, 몽고 宗王의 三重 체제로서 약 100여 년 이상 통치되어졌다.
    明軍이 洪武 원년(1368년)에 대도를 침략하자 토곤테무르는 1368년에 상도에 정권을 수립하고 北元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양왕은 그대로 운남지역을 고수하였고, 해마다 색외의 順帝가 있는 곳으로 사신을 보냈다. 이런 상황하에 명 태조는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梁王의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사신들은 모두 살해당하였다. 홍무 14년 명군이 운남을 진격하자 양왕 바자라와르미는 가족과 함께 滇池에서 자살함으로 원나라의 운남지역과 그 부근 지역의 통치는 종말되어졌다. 홍무 7년(1374년) 8월에 명 태조는 다시 故元 威順王 寬徹普化의 아들 伯伯赍를 보내 梁王을 초유하게 하였지만 양왕이 따르지 않았고 伯伯은 이 후에 운남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홍무 15년 3월 征南將軍 傅友德등이 양왕 바자라와르미의 일부 가속과 위순왕의 아들 伯伯을 명조정에 잡아 바쳤다. 그 해 4월에 명 태조는 양왕의 가속과 위순왕의 아들 伯伯 등을 耽羅로 이주시켰다. 伯伯太子를 시작으로 하여 운남지역의 몽골 宗王 후손들이 한반도 남단인 탐라로 이주가 시작되었다. 명태조가 莫北을 정복한 후에도 몽골친왕을 탐라로 이주하게 되어 몽골족의 수가 증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이들을 탐라지역으로 이주시켰을까? 탐라지역이 몽골족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삼별초의 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별초는 진도를 거점으로 대몽항쟁을 하다가 후에 탐라로 거점을 옮겼고 여몽연합군이 삼별초난을 진압하고 나서부터 원나라는 직접 탐라지역을 통치하였다. 元代와 明初에 탐라로 오게 되는 중국 사람들을 다음과 같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1.주둔군:탐라에 耽羅國招討司를 설치하고 진변군 1700명을 주둔시켰다. 2.원나라에서 온 유배인들: 처음에 탐라로 유배되어졌던 인물은 도적이나 죄인이었는데 후에 탐라에 유배된 사람은 魏王 阿木哥․ 徽政院使 羅源․ 孛蘭奚大王․ 孛刺太子(孛羅)로 상당히 높은 신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 관부의 설치와 몽골족 관원: 지원 10년(1273)에 탐라에 다루가치를 설치하였는데 첫 번째 인물은 遜攤이다. 그 이듬 해 실리백의 아들 塔剌赤이 원나라에서 말 160필을 가져와 방목하였다. 塔刺赤은 원래 (운남) 曲靖등 路의 宣慰使였는데 탐라로 오게 된 것은 아마 아버지 실리백이 임명을 받고 오지 않았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그 다음으로 다루가치를 역임한 사람은 塔剌兒이다. 충렬왕 18년 3월에 右丞 阿撒이 탐라 다루가치의 죄를 조사하러 왔고 阿撒은 다루가치에 임명되어졌다. 후에 塔剌赤의 아들 奴列你他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耽羅國軍民按撫使司 達魯花赤가 되었다. 塔剌赤은 失里伯의 아들이고 塔剌赤의 아들이 奴列你他이므로 3대가 탐라에서 다루가치를 지냈다는 사실에서 세습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斷事官과 太僕寺 官員도 지속적으로 파견하여 왔다.
    원나라가 통치하던 시기 탐라사회는 많은 변화가 나타났는데 元이나 雲南에서 온 다양한 성씨의 출현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元에서 온 성씨로는 趙, 李, 石, 肖, 姜, 鄭, 張, 宋, 江, 周, 秦의 10개가 있다. 운남에서 온 梁, 安, 姜, 對의 4개의 성씨가 있다. 조선초의 통계에 근거하면 제주에 총 43개의 성씨 중에서 원나라나 운남의 성씨가 30%이상을 점한다.
  • 한글키워드
  • 운남행성,단씨,초토사,단사관,바자라와르미,원명교체기,哈赤,동아시아 지역,지역상호간,문화,융합,다양한 성씨,애안첩목아,달달친왕,목마인,다루가치,유배인,운남지역,교류,운남왕,몽고 종왕,대리국,원나라,이주,탐라지역,白族,漢族,남송,삼별초의 난,명나라,대리총관,南詔,왕자묘,達達親王,太僕寺,네크워크,주둔군,탐라국,박박태자,북원,양왕,색목인,賽典赤,쿠빌라이,막북
  • 영문키워드
  • cultural Integration,a varise family name,affect,Mongolian,cultural change,tartar king,Dali Province,Yuan Dynasty,interchange,migration,Eastern Asia regions,Danluo,baibai King's sun,network,Bei Yuan,Liang King,Yunnan King,Mongolian king,duan family,Yunnan Province,Bazalawarmi,a tomb of royal prince,Haqi,Duanshiguan,rebellion of Sanbiecu,Ming Dynasty,Monggorian conqure,moving,horse raising,an exile,Dalugaqi,Kubliai,Yuan-Ming alternation,Southern Song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이주와 교류를 통해서 본 동아시아 지역 상호간의 네트워크’연구는 다음의 세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첫째, 蒙元제국의 雲南統治와 諸 종족간의 소통: 몽골제국의 대리정복으로부터 약 20여년에 걸치는 군사통치시기, 운남행성이 설치된 초기는 원 세조의 팽창정책과 관련하여 몽골 종왕의 역할은 외정에 주안점이 놓여졌으며 운남지역의 통치는 운남행성이 설치된 후에 그 모습을 드러내며 방향도 정해졌다. 운남은 여러 종족이 잡거하는 지역인데다 새로 이주한 몽골족을 위시한 여러 종족간에 갈등, 소통, 융합의 측면은 중요한 문제이다.
    몽원제국이 서남변경의 大理지역에 주목한 이유를 원제국 건립이후 최대의 과제였던 남송의 정복과 원 세조의 눈에 비친 운남의 중요성을 중심으로 밝혀보았다. 나아가 몽골이 운남지역을 정복한 후, 제 종족을 복속시켜 가는 과정중 운남지역에서 징집된 촌백군을 비롯한 제 군인의 역할과, 대내외 정복전에서 운남왕의 역할을 살펴보았다. 다양한 종족이 거주하던 운남지역의 소통을 위해 원나라는 어떠한 조처를 취하였으며 정복전이나 사환을 위해 이주해 온 외부의 제 종족이 운남사회에서 어떠한 형태로 융합되었는지 살펴봄으로서 제3차 연구의 롤 모델을 찾고자 하였다.
    둘째, 元나라의 탐라 통치와 移住, 그리고 자취: 원 세조 쿠빌라이가 왜 그렇게 탐라를 중시하였는지, 몽골족을 비롯한 중국인들이 제주도에 끼친 영향 등에 대한 연구이다. 원나라의 탐라에 대한 중시는 관부의 설치와 관원의 임용에서 드러난다. 원대에 몇 차례에 걸쳐 단행되었던 중국인의 이주를 관원, 주둔군, 목인, 유배인으로 분류하여 그 특징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대원’을 본관으로 하는 여러 성씨가 출현하여 제주도 성씨의 30%이상을 점하였다. 원나라의 탐라 통치에 대한 전모와 특징을 밝혀보고 다양한 유형의 중국인의 이주와 그로 인한 영향 등이 제대로 밝혀져 몽원제국과 제주도 관련 문제를 해결하는 단서가 되었다.
    셋째, 元末․ 明初의 雲南과 故元 後裔의 濟州 移住: 명나라는 홍무 원년 7월 대도를 점령한 후 몽골족에 대한 초무와 안치 정책을 실시하였다. 한편, 서남 변경지역에서 명나라에 대항하면서 북원을 원조하던 운남의 양왕은 상황이 불리해지자 滇池에 투신 자살하고 홍무 15년(1382) 3월에 운남지역이 평정됨으로서 원나라의 약 128년에 걸친 운남통치가 종결되었다. 그 후, 명나라는 양왕의 가속과 관원, 토착세력인 대리총관 단씨에 대한 대우에 차등을 두었다. 일부 저항이 심하였던 양왕의 가속과 양왕을 초유하기 위해 운남지역으로 왔던 백백태자 등은 제주도로 이주시켰다. 그리하여 원대에 운남통치의 일환으로 출진하였던 쿠빌라이의 직계 후손이 명초에 주원장에 의해 다시 제주도로 이주되는 역사적 사실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아무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서남변경지역의 운남과 한반도 남단의 제주간에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운남의 양왕과 백백태자가 원세조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밝혀낸 것은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이들 운남지역의 故元 후예가 제주사회에 끼친 영향으로 다양한 성씨의 출현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또한 원대에 중창이 완공되었던 법화사가 갖는 의미, 제주도에 전해오는 왕자에 대한 전설이나 유적지와 이들 이주 집단과의 관련성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故元 후예들의 거주지도 상정해 볼 수 있었다.
  • 영문
  • The mongols conquered the kingdom of Dali, establishing Yunnanxingsheng, causing the center of economy, culture and polics in the region to move to Zhongqing which even thesedays still remains as the center of Yunnan province. The Yuan empire's conquest of Dali was not necessitated simply to conquer the Yunnan region, it was rather to initiate the conquest of Southern Sung, which was the most important task and the greatest goal. After the demise of Southern Sung, the Yunnan region was recognized an important base of militery operations that had grest potential for the Yuan empire to launch military campaigns into the neigboring contries such as Vietnam and Burma, thus the Yunan region acquired and demonstrated strategic importance in the South-western regison.
    Since Yuan governed Yunnan mongolian Zong prince such as the prince Liang and the prince Yunnan became to be asigned to government positions conducting their duties of adminstration over Yunnan in parallel with Yunnanxingsheng. However, during laster years of Yuan the prince Liang eventually became to acquire complete command over Yunnan. On tracing back genealogy of the prince Yunnan and the prince Liang and examing patterns of hereditary transmission of power and governmental posions to descendant it can be learnde that the most the prince Liang were promoted leaving Yunnan. Therefore it could be inferred that mainly descendants of Bolad and Bazalawalemi, the last prince Liang immigrated to Jeju. Bazalawalemi, stubbornly defended Yunnan maintaining close relationship in loyalty to Northern Yuan.even after Taizu of Ming conquered central regions of China. When Taizu, fonder of Ming attacked Great capital, the prince Bai bai, a son of the prince Weishun was captured as a prisoner of wa Liang to surrender to Ming. Later he was sent to Yunnan with a mission to persuade the prince surrendering to Ming but ended in failure. Since then he stayed dwelling in Yunnan. After Yunnan was finally conquerd on the 13th year of Hong-wu, a part of mongolian Zong princes and a large number of Duan's family members.
    Yuan had already established government offices on Tamla and dispatched a Darugachi as a head of the offices, directly controling the region. Furthermore under it's social and political polices Yuan maintained garrisons, also, had the exiles and ranchers of horses immigrate and dwell on Jeju. Because of these earlier activies before the immigration to Tamla. it could be presumed that the meta desandent of former Yuan did nto have exprinced difficulties in their daily living. Expecially, since the prince Bai bai was a figure whom Taizu dispated to Yunnan to persurade the prince Liang to surrender he was socially and economically treated better than the descendents of the prince Liang when the prince Bai bai immigrated to Jeju, together with the desendants the prince Liang. In some sense the prince Bai bai could be regarded as holding a position of managing, supervising and representing all mongolian descendants dwelling on Tamla at that time including the descendents of the prince Liang.
    What is most important in this matter of the immigration during early period of Ming is that all the desandants of the prince Liang and all the family members of the prince Bai bai from Yunnan were directly related by blood to Kubilai. Early on during a time of Kubilai, Tamla had been rtilized as one of important ranches of horse breeding for mongolian Yuan loyal families.
    On Jeju island there can be found family names of Liang, An, Jiang, Dui,Zhang and Yuan. All of them have Yunnan in common as their original ancestoral places. It can be further shown that the discendants of the prince Liang have the family name of Dui while the family members fo the prince Bai bai have the family name of Dui,and that the rest of family names have their ancestoral origions at Yunnan On Dongguoyudishenglan, family names from Yuan dynasty were differnetiated from the family names originating from Yunnan. This distincion was made to reflet special status and charateristics of Yunnan during late Yuan dynasty and early Ming dynasty.
    In addition, evidence gained from this investigation revealed that dwelling places of the meta descendants of former Yuan is presumed to be established with Fahua temple as a base, including the temple's vicinities. The temple was
    completely restored during the period of Yuan's governance over Tamla. The temple had a statue of Mitasanzun in its possession which was carved by highly skillful sculptors of Yuan. Also on Hujizhongchao is found at Heyuan village near the temple family name with their ancentral places in Greater Yuan can be noticed. Nowdays, these folk tales for example include such legends as a prince's tomb, a prince's valley and a housing site of the prince Liang. These can be supporting evidences illustrating nature, characteristics and circumstances surrounding the mongolian immigration.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이주와 교류를 통해서 본 동아시아 지역 상호간의 네트워크’연구는 다음의 세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첫째, 蒙元제국의 雲南統治와 諸 종족간의 소통: 몽골제국의 대리정복으로부터 약 20여년에 걸치는 군사통치시기, 운남행성이 설치된 초기는 원 세조의 팽창정책과 관련하여 몽골 종왕의 역할은 외정에 주안점이 놓여졌으며 운남지역의 통치는 운남행성이 설치된 후에 그 모습을 드러내며 방향도 정해졌다. 운남은 여러 종족이 잡거하는 지역인데다 새로 이주한 몽골족을 위시한 여러 종족간에 갈등, 소통, 융합의 측면은 중요한 문제이다.
    몽원제국이 서남변경의 大理지역에 주목한 이유를 원제국 건립이후 최대의 과제였던 남송의 정복과 원 세조의 눈에 비친 운남의 중요성을 중심으로 밝혀보았다. 나아가 몽골이 운남지역을 정복한 후, 제 종족을 복속시켜 가는 과정중 운남지역에서 징집된 촌백군을 비롯한 제 군인의 역할과, 대내외 정복전에서 운남왕의 역할을 살펴보았다. 다양한 종족이 거주하던 운남지역의 소통을 위해 원나라는 어떠한 조처를 취하였으며 정복전이나 사환을 위해 이주해 온 외부의 제 종족이 운남사회에서 어떠한 형태로 융합되었는지 살펴봄으로서 제3차 연구의 롤 모델을 찾고자 하였다.
    둘째, 元나라의 탐라 통치와 移住, 그리고 자취: 원 세조 쿠빌라이가 왜 그렇게 탐라를 중시하였는지, 몽골족을 비롯한 중국인들이 제주도에 끼친 영향 등에 대한 연구이다. 원나라의 탐라에 대한 중시는 관부의 설치와 관원의 임용에서 드러난다. 원대에 몇 차례에 걸쳐 단행되었던 중국인의 이주를 관원, 주둔군, 목인, 유배인으로 분류하여 그 특징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대원’을 본관으로 하는 여러 성씨가 출현하여 제주도 성씨의 30%이상을 점하였다. 원나라의 탐라 통치에 대한 전모와 특징을 밝혀보고 다양한 유형의 중국인의 이주와 그로 인한 영향 등이 제대로 밝혀져 몽원제국과 제주도 관련 문제를 해결하는 단서가 되었다.
    셋째, 元末․ 明初의 雲南과 故元 後裔의 濟州 移住: 명나라는 홍무 원년 7월 대도를 점령한 후 몽골족에 대한 초무와 안치 정책을 실시하였다. 한편, 서남 변경지역에서 명나라에 대항하면서 북원을 원조하던 운남의 양왕은 상황이 불리해지자 滇池에 투신 자살하고 홍무 15년(1382) 3월에 운남지역이 평정됨으로서 원나라의 약 128년에 걸친 운남통치가 종결되었다. 그 후, 명나라는 양왕의 가속과 관원, 토착세력인 대리총관 단씨에 대한 대우에 차등을 두었다. 일부 저항이 심하였던 양왕의 가속과 양왕을 초유하기 위해 운남지역으로 왔던 백백태자 등은 제주도로 이주시켰다. 그리하여 원대에 운남통치의 일환으로 출진하였던 쿠빌라이의 직계 후손이 명초에 주원장에 의해 다시 제주도로 이주되는 역사적 사실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아무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서남변경지역의 운남과 한반도 남단의 제주간에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운남의 양왕과 백백태자가 원세조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밝혀낸 것은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이들 운남지역의 故元 후예가 제주사회에 끼친 영향으로 다양한 성씨의 출현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또한 원대에 중창이 완공되었던 법화사가 갖는 의미, 제주도에 전해오는 왕자에 대한 전설이나 유적지와 이들 이주 집단과의 관련성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故元 후예들의 거주지도 상정해 볼 수 있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몽원제국은 남송과 동남아시아 諸國의 복속을 위해 운남지역을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오늘날의 미얀마 북부에 緬中行省을 설치하고 운남의 蒙古 宗王 운남왕으로 하여금 통치하게 하였다. 마찬가지로 몽골은 여몽연합군이 삼별초의 난을 진압한 후 탐라를 거점으로 남송과 일본정벌을 계획하였다. 비록 원나라의 계획이 완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할지라도 운남과 탐라지역은 둘다 원나라의 대외원정 정책의 일환으로 세력을 확대해 가는데 주요한 거점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다. 동시에 이 두 지역이 하나는 고원지역에 위치하고, 하나는 바다 가운데 섬이지만 또한 공통성도 찾아볼 수 있다. 두 지역 다 중국 중세시기에 토착적인 성향이 강했던 지역이었는데 몽원제국에 의해 직접 통치되었으며 처음으로 몽골족의 移住가 이루어졌고 그 영향이 아직도 남아 있다. 운남의 경우는 ‘운남몽골족’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켰고, 제주에도 몽골 여러 관련 유적지와 쿠빌라이 후손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제주도의 한반도와 다른 여러 가지 특징을 본 연구를 통해서 역사적으로 규명해 보았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몽원제국이 탐라를 약 100년간 직접 통치하였던 데서 그 원인을 찾아보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元末 ․ 明初에 제주로 왔던 몽골족 중에는 운남지역에서 왔던 宗王 梁王의 후손이 제주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원대 탐라지역에는 여러 원인으로 탐라지역으로 이주한 중국사람들로 인해 이미‘胡人部落’이 있었고 목호의 세력도 비교적 강했다. 이러한 바탕하에 명초 주원장이 운남지역을 정복한 후, 양왕의 후손들과 막북의 달달친왕을 비롯한 상당수 몽골족을 제주도로 移住시켰다. 이들의 집단적인 이주로 탐라사회는 몽골족과 현지인간의 交流와 융합이 이루어져 많은 사회 문화적인 변화가 생겨났다. 13세기 후반기의 동아시아 구도를 거시적으로 파악함으로서 나아가 15세기초의 제주지역과 운남지역간의 네트워크를 통해 원 ․ 명간의 권력 관계 구도도 밝힐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어, 제주도내에서 유적지의 답사와 문헌조사를 통해 원대 몽골족과 관련된 유적지를 비롯하여 명초 운남 양왕의 후손이 이주하였으리라 추정되는 구역과 호적중초에 나오는 대원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를 통해 몽골족을 비롯한 이주집단이 거주하였을 지역을 추정해 내었다.(元末․ 明初의 雲南과 故元 後裔의 濟州 移住(동양사학연구 제119집, 2012년 6월) 논문속의 지도 참조)
    이상과 같은 연구를 바탕으로 오늘날 제주도를 역사유적지와 관련지어 동북아시아의 허브로서 역할의 필요 충분한 설명과 국제자유도시로서 갖는 의미를 역사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을 것이다. 즉, 세계화와 지방자치를 동시에 지향하는 시대에 걸맞는 역사적 관점을 모색하고 제주를 연구의 중심에 놓고 중국 운남과 몽골초원과의 교류를 활성화하는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동아시아사를 파악함에 있어서 그동안 제주도의 역할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중세 동아시아 지역 상호간의 네트워크 속에서 탐라는 그 고유하고 독특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에서 자세히 밝히지 못하였던 운남지역 몽골족과 회족의 영향을 현지 답사를 통해 문화융합을 밝힐 필요가 있다. 원나라 때 운남의 巍山지역과 劍川지역 등에 정착한 회족과 몽골족이 현지 종족인 백족과 융합되었으므로 이에 대한 연구를 좀더 진척시킨다면 좀더 흥미로운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 색인어
  • 몽원제국, 운남지역, 대리, 운남행성, 한문화, 소통, 탐라, 다루가치, 주둔군, 유배, 이주, 흔적, 대원, 몽골종왕, 원말명초, 몽골후예,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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