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의 목표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말해질 수 있다. (1) 도덕윤리교육의 정체성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는 세 가지 경쟁적인 입장, 즉 정치교육으로서의 도덕윤리교육, 인성교육으로서의 도덕윤리교육, 철학교육으로서의 도덕윤리교육이라는 세 가지 입장을 ...
본 연구의 목표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말해질 수 있다. (1) 도덕윤리교육의 정체성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는 세 가지 경쟁적인 입장, 즉 정치교육으로서의 도덕윤리교육, 인성교육으로서의 도덕윤리교육, 철학교육으로서의 도덕윤리교육이라는 세 가지 입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2) 박정희 정권이 ‘한국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독재로 흘러가버린 탓에 박정희 정권 이래로 도덕윤리교육계에서 언급하기 꺼려했던 용어이지만, '바람직한 한국인의 육성'이 도덕윤리교육의 올바른 목표임을 '공동체적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정당화한다. 물론 이 경우 ‘바람직한 한국인’의 개념은 한국인에 대한 과거지향적 이고 고정된 정체성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 지향적이고 열린 정체성, 달리말해서 역동적 정체성에 기초하고 있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귀결인데, 윤리 ․ 도덕의 문제는 수학의 문제와 같은 ‘상황초월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여러 문제와 마찬가지로 ‘상황내재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한국인’은 항상 우리 국가가 처해있는 구체적 상황 속에서 과거에 터해서 미래를 바라보며 소위 롤즈가 말하는 ‘중첩적 합의’에 의해 ‘구성되어야’ 한다. (3) 그리고 바람직한 한국인의 육성이라는 도덕윤리교육의 목표를 달성하는 일에 있어서 앞서 언급된 세 가지 경쟁적 입장은 상호배척적일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상호 조화적 협동관계를 형성해야 하며 형성할 필요가 있음을 밝힌다. (4) 마지막으로 공동체적 자유주의(Communitarian Liberalism)의 입장에서 본 한국적 도덕윤리교육의 구체화된 모습을 밝힌다.
연구의 필요성 : 최근 도덕 ․ 윤리교육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유관 학자들 사이에서 비교적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국민윤리’라는 이름으로 도덕 ․ 윤리 교육이 행해지기 시작한지 30년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까지 도덕 ․ 윤리교육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도덕 ․ 윤리교육계의 스캔들이라 할 것이다. 무엇을 가르치는 교과인지도 모르고 뭔가를 가르쳐 왔다는 것은 난센스처럼 보이기도 한다. 수학교사는 수학이란 교과목이 무엇을 가르치는 교과목인지 잘 알고 수학을 가르친다. 이런 사정은 생물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경험과학들 일반에 대해 한결같이 통용된다. 그런데 도덕 ․ 윤리 교과에 대해서는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과연 도덕 ․ 윤리 교육은 무엇을 가르치는 교과인가? 이 물음에 답하는 세 가지 기존의 경쟁적인 입장이 있다. 첫째는 도덕 ․ 윤리 교육은 근본적 ․ 본질적으로 '정치교육Political Education'이라는 입장이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시절의 윤리교육관이 이런 입장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도덕 ․ 윤리 교육은 본질적으로 '인성교육Character Education'이라는 입장이다. 김영삼 정권 시절 구소련과 동구권이 붕괴되는 세계사적 변화가 있었는데, 이 때 교육학 전공자들을 중심으로 윤리․도덕교육을 인성교육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셋째로 도덕 ․ 윤리 교육은 근본적 ․ 본질적으로 '철학교육Philosophical Education'이라는 것이다. 최근 몇몇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되는 주장으로, 윤리학은 철학의 분과학이며, 따라서 윤리교육은 철학교육의 일환으로 이해되는 것이 옳다고 한다. 윤리교육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그것은 정치교육인가 인성교육인가 아니면 철학교육의 일환인가? 한 교과의 정체성 혼란이 무한정 방치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도덕 ․ 윤리 교육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은 단순한 이론적 관심사 이상의 일이다. 한국이라는 국가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그리고 자라나는 학생들이 올바른 국가관을 갖고 잘 적응하는 사회인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윤리․도덕교육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는 일은 매우 시급하게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다.
연구주제의 독창성 : 도덕 ․ 윤리 교육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이론적 노력은 교과목 명칭이 ‘국민윤리’일 때부터 있었으며, 지금도 그런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예컨대 이규호와 한승조 같은 연구자들은 국민윤리교육은 정치교육이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문용린을 위시한 교육학자들은 인성교육이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최근 몇몇 철학자들은 철학교육이라는 관점에서 도덕 ․ 윤리교육의 정체성 문제를 해명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모두 다 부분적인 정당성을 갖고 있지만, 어느 쪽도 절대적인 정당성을 갖지는 못하고 있다. 필자는 그 이유를 이 세 가지 입장이 도덕 ․ 윤리 교육의 세 가지 측면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도덕 ․ 윤리 교육을 우리는 다음처럼 정의할 수 있다. 도덕윤리 교육은 ①한국 사회에서 후세에게 전수해주기로 합의한 가치관과 덕목 및 삶의 자세를 ②반성적으로 내면화시키고 ③또 행동으로 실천하게 하는 교육이다. ①은 도덕 ․ 윤리 교육의 정치사회화 측면을 보여준다. ②는 도덕 ․ 윤리 교육의 철학교육적 측면을 보여준다. ③은 도덕 ․ 윤리 교육이 교육학적 기법을 중시해야 함을 보여준다. 그러면 도덕 ․ 윤리 교육의 이념은 무엇인가? 세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겠다. 개인적 차원, 국가적 차원, 세계적 차원이다. 도덕 ․ 윤리교육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한국인의 삶을 지배하는 도덕 중에서 후세들에게 전수해 줄 가치가 있는 것들을 전수해 주고 버릴 것은 버리게 해줌으로써, 구성원들의 삶이 도덕적으로 더 성숙하게 되는 것을 그 이념으로 한다. 둘째, 국가적 차원에서는 구성원들의 삶을 도덕적으로 더 성숙하게 만듦으로써 ‘한국사회’라는 공동체가 유지 ․ 존속되고 번영하는 것을 그 이념으로 한다. 셋째로, 세계적 차원에서 ‘한국사회’라는 공동체가 유지 ․ 존속되고 번영하는 것을 통하여 국제사회의 모범적 일원이 되어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그 이념으로 한다. 도덕교육을 정치교육으로 이해한 사람들은 한국이라는 국가 공동체를 중시한 것은 좋으나, 국가발전에 도움이 되는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정치교육을 특정 정권의 이익을 위해 악용하는 방향으로 시행했다. 도덕교육을 인성교육으로 이해한 사람은 도덕적 실천에 강조점을 둔 나머지 반성적 내면화에 취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도덕교육을 철학교육으로 이해한 사람들은 반성적 내면화에 치중한 나머지 한국적 특수성을 무시하고 그 실체가 불분명한 세계보편윤리를 강조하는 폐단을 노정시켰다. 본 연구가 목표로 하는 것은 이 세 가지 기존 입장의 근거와 장단점, 그리고 각각의 입장의 교사관, 교육관, 교과서관을 비교 분석한 뒤, 올바른 도덕교육은 한국인의 삶의 특수성을 고려하되, 개인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공동체적 자유주의 도덕교육’이 되어야 함을 입증하는 것이다. 공동체적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도덕 ․ 윤리교육철학을 확립해보고자 하는 시도는 처음 있는 일이다. ‘공동체적 자유주의’라는 관점에서, 정치교육으로서의 도덕교육관과 인성교육으로서의 도덕교육관 그리고 철학교육으로서의 도덕교육관이 갖고 있는 부분적 정당성을 통합하여, 각각의 관점들에 어울리는 각각의 자리를 마련해줌으로써 도덕교육의 정체성 문제를 둘러싼 논쟁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처음 시도되는 연구임을 강조하고 싶다.
선행연구와의 비교 : 도덕윤리교육의 정체성에 대해 적지 않은 학자들이 고민해왔으나, 엄밀한 철학적-윤리학적 방법론을 갖고 접근한 연구 성과물은 없었다. 필자는 ‘공동체적 자유주의’라는 개념이 그러한 방법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동체적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기존의 입장들에서 버려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을 적시하면 다음과 같다.
[선행연구에서 버려야 할 것] 첫째로, 정치교육으로서의 도덕 ․ 윤리교육관에서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도덕 ․ 윤리교육이 북한 식 정치교육과 비슷한 방식으로 특정 정권의 이익을 위해 악용되는 세뇌교육어서는 안 된다. 둘째로 인성교육론으로서의 도덕교육론에서 버려야 할 것을 다음처럼 말할 수 있다. 도덕교육의 인지적 측면을 무시하고, 도덕교육을 행동길이이기 식의 교화 교육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셋째로 철학교육으로서의 도덕교육론에서 버려야 할 것을 다음처럼 말할 수 있겠다. 반성적 사고능력을 길러주어 도덕적 행위자가 되도록 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가르칠 구체적 규범 내용이 없는 도덕교육은 지양되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최악의 도덕 ․ 윤리교육은 특정 정권이나 정치가의 이익을 위해 특정 이데올로기를 전 교육현장에서 광범위하게 주입식으로 내면화시켜 맹목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교육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현재의 북한식 사회주의가 실시하는 정치교육이 이런 교육의 전형이며, 박정희와 전두환 시대의 국민윤리 교육도 이와 닮은 점이 많은 것으로 판단된다.
[선행연구에서 수용해야 할 것] 먼저 도덕 ․ 윤리교육의 본질을 정치교육으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도덕 ․ 윤리 교육의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가 사회유지와 사회통합의 기능이다. 비록 도덕교육을 정치사회화 교육으로 이해한 정치학자들이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부역한 어용학자들이라 하더라도, 도덕 ․ 윤리 교육이 한국적인 특수성 즉 한국인의 삶의 특수성, 전통과 문화의 특수성, 분단의 특수성 등등을 바탕으로 해서 실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는 옳았다. 규범과학인 도덕은 결코 사실과학인 사회학과는 다르다는 논리로 도덕 ․ 윤리는 사회과에 포섭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규범을 만들고 따르며, 고치고 하는 것 역시 사회적 현상이기에 도덕 ․ 윤리교육도 한국사회의 특수한 사회적 맥락 위에서 이해되고 시행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에 이것을 부정해버리면 우리는 도덕과 윤리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인 사회유지와 통합의 기능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이제 우리는 도덕 ․ 윤리 교육이 올바른 방향을 가기 위해 충족시켜야 할 첫 번째 요구를 다음처럼 표현할 수 있겠다. 제대로 된 도덕․윤리교육은 현대 한국사회의 사회문화적 특수성과 세계적 보편성의 긴장 위에서 이루어 져야 한다. 도덕 ․ 윤리 교육이 한국사회의 특수한 문화적 맥락을 떠나서 행해진다면, 그런 도덕교육은 더 이상 공교육의 차원에서 행해질 필요가 없다. 물론 도덕 ․ 윤리 교육이 공적차원에서 실시된다는 것이 특정 정권의 이익에 악용되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선포된 유신체제가 도덕 교과서에서 찬양되는 부조리를 목격한 이후로, 도덕윤리 교육에서 ‘한국적 특수성’을 아예 멀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개념은 결코 버려져야 할 개념이 아니다. 우리가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도덕과 윤리를 ‘국민윤리’로 부르건, 아니면 ‘윤리’로 부르건 아니면, 다른 이름으로 부르건, 그것은 결국 ‘한국인의 윤리’인 것이다. 물론 ‘국민윤리’는 그 자체로는 나쁠 것이 없는 용어이나 독재정권에 의해 오염된 용어이기에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비록 도덕 ․ 윤리 교육에서 한국적 특수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필자는 그것이 좁은 의미건 넓은 의미건 정치사회화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도덕 ․ 윤리교육의 사회적 역할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과 도덕 ․ 윤리교육이 행해지는 배경인 한국사회의 특수한 맥락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필자는 협의의 의미의 정치교육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사회과 교육에서 그런 교육을 실시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가령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시장경제의 우월성 같은 것은 경제 교과서나 정치 교과서에서 가르치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 ․ 윤리 교육도 일종의 사회화 교육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도덕교육을 사회화 교육으로 이해했던 대표적인 사상가는 에밀 뒤르껭이다. 그는 “도덕이 사회마다 다르다는 사실이 도덕이 사회적 산물임을 명백하게 보여준다”고 말하면서, 도덕교육이란 한 사회가 채택하고 있는 도덕적 처세훈을 구성원들에게 내면화시키는 것임을 주장한다. 물론 뒤르껭에 의하면 도덕교육의 목표는 사회의 유지와 존속이다. 왜냐하면 “사회가 없다면, 도덕성은 그 어떤 대상도 의무도 근거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도덕교육을 인성교육으로 이해하는 입장으로부터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인성교육론자들은 도덕 윤리 ․ 교육에서 중시되어야 할 것이 도덕적 지식이 아니라 도덕적 행위하고 생각했다. 행함이 수반되지 않는 도덕지식만 교육하는 것은 잘못된 교육이라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교과로서의 도덕교육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제시하는 몇 가지 논리들에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도덕 교육은 궁극적으로 행함으로 연결되어야 하며, 교사는 학생들을 행함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다양한 교육학적 지식과 기법을 익히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거부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도덕 ․ 윤리 교육이 올바른 방향을 가기 위해 충족시켜야 할 두 번째 요구를 다음처럼 표현할 수 있겠다. 제대로 된 도덕 ․ 윤리교육은 행함을 목표로 해야 하며, 이를 위해 교육학적 지식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비록 주당 1시간씩 실시되는 도덕 교육을 통해 어떻게 교육하는 것이 행함에 이르는 효과적인 교육방법인가에 대해 논란은 있을 수 있겠지만, 어쨌건 도덕적 행함이 없는 도덕적 지식은 공허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아무리 행함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선을 행하는 기계를 길러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도덕적 반성이 없는 도덕적 행함은 맹목이기 때문이다.
도덕교육을 철학교육으로 이해하는 입장은 비록 앞서 우리가 바람직한 도덕 ․ 윤리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충족되어야 할 첫 번째 조건을 무시하는 결정적 잘못을 범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이 입장을 통해 우리는 바람직한 도덕 ․ 윤리 교육이 충족시켜야 할 세 번째 조건을 알려준다. 그것은 도덕 윤리 교육은 인습적 도덕성의 소유자가 아니라 반성적 도덕성의 소유자를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반성적 도덕성의 소유자를 길러냄으로써 도덕 ․ 윤리의 또 다른 중요한 기능인 자아실현의 기능이 가능하다. 도덕 ․ 윤리는 사회의 유지와 통합기능을 함으로써 도덕 ․ 윤리는 보수적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도덕과 윤리가 자아 실현의 기능을 함으로써 도덕 ․ 윤리는 진보적 기능을 하게 된다. 도덕 ․ 윤리가 어떻게 해서 자아실현의 기능을 가지며, 그것이 어떻게 해서 진보적 기능을 한다는 말인가 하고 의아해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소크라테스나 간디, 그리고 마틴 루터 킹 목사 같은 사람들의 삶을 생각해보면, 자신의 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것, 즉 양심의 실현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자아실현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양심을 실현하기 위해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던 사람들이며, 결국에는 자신의 목숨까지 버렸던 사람들이다.
2. 연구방법 및 내용
연구방법 및 내용 : 앞서 선행연구들에서 수용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들을 세 가지씩 정리했었다. 문제는 수용해야 할 것을 상호 상충되지 않게 하나로 통합해 낼 연구방법론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핵심적인 문제로 떠오른다. 필자는 그것이 공동체적 자유주의 도덕철학의 입장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관점이라는 것을 앞서 언급했다. 공동체적 자유주의 도덕철학은 다음의 여섯 가지를 주장하고 증명하려 한다. 1) 도덕적 명령이 신에게서 유래했다는 신명령론(Devine Command Theory), 도덕의 사회계약설, 이성에서 유래했다는 이성주의 윤리설 등등 도덕의 단일기원론을 거부한다. 도덕은 복합적인 문화 현상이라고 생각하기에, 세계화가 아무리 많이 진행된다 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윤리가 ‘하나의 윤리’로 통합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여전히 한국인에게는 ‘한국인의 윤리’가 존재할 것이다. 2) 공동체적 자유주의 도덕철학은 사회가 먼저냐 개인이 먼저냐 하는 사회철학의 오래된 문제를 사이비 문제로 간주한다. 개인이 먼저냐 사회가 먼저냐 하는 문제를 부분이 먼저나 전체가 먼저냐 하는 문제로 바꾸어 접근하는 것은 잘못이다. 따라서 사회유기체설과 사회합성체설은 둘 다 잘못이다. 3) 공동체적 자유주의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임을 인정하지만, 인간은 사회를 넘어서는 존재이라는 사실도 인정한다. 개인은 사회 속에서 공동체의 가치관과 삶의 양식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한 도약대를 마련하게 되며, 사회는 개인의 도덕적 양심의 실현을 도와줌으로써 공동체의 유지와 번영을 위한 자양분을 얻게 된다. 유신 독재시절은 이처럼 상호보완적이어야 했던 도덕교육의 두 측면이 상호대립적으로 작용했던 시절이었다. 공동체 교육의 미명하에서 이루어진 정치교육은 개인들의 자아실현을 위한 도약대의 구실을 못했고, 독재 정권은 권력에 대한 양심적인 개인들의 비판을 공동체의 유지와 번영을 위한 자양분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제대로 된 도덕교육에 있어서 도덕의 사회 통합적 기능과 자아실현 기능은 상호보완적 선순환구조를 형성하고 있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도덕교육이 사회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사회의 가치관과 예절과 삶의 방식을 잠정적 진리로 습득시키는 데서 도덕교육이 시작하지만, 그런 것들은 잠정적 진리이기에 항상 그 합당성과 유효성이 음미되고 검토되어야 한다. 이런 음미, 검토, 비판, 대안제시 능력을 길러주는 것도 도덕교육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이점에서 ‘도덕교육은 사회를 넘어선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사회를 넘어서서 갈 곳이 어디인가? 마티 루터 킹 목사가 흑인민권운동을 통해 당시의 미국사회를 넘어섰지만, 그는 미국사회의 발전을 위해 넘어섰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도덕교육은 사회화에서 시작하여, 기존 사회의 문제점과 한계를 넘어는 것을 가르치지만, 결국 개선된 사회로 돌아오는 것을 목표로 한다.’ 킹 목사에 의해 미국사회의 인종차별주의는 엄청나게 개선되었지만, 그렇게 개선된 미국사회의 경향적 여건이 지금의 미국인들에게는 새로운 사회화의 출발점을 형성하고 있다. 킹 목사가 살던 시대에 미국의 흑인들이 동경했던 목표가 지금은 출발점이 되어 있다. 4)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이 그들의 이론의 토대로 삼고 있는,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체’라는 개념은 머리 속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라고 비판한다. 롤즈의, 무지의 베일에 가리어진 자아를 샌들이 무연고적 자아라고 비판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공동체적 자유주의’에서는 인간의 자아는 연고적인 측면도 있고 무연고적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자아의 연고성을 인정하는 점에서 공동체주의적이지만, 자아의 무연고적 측면을 인정하는 점에서는 자유주의적이다. 5)도덕의 자아실현(최고의 자아실현은 양심의 실현)기능을 무시하는 도덕교육은 전체주의적 도덕교육이고, 도덕의 사회유지․통합기능을 무시하는 도덕교육은 아나키즘적 도덕교육이다. 이 때 ‘아나키즘적’이란 말의 뜻은 ‘무정부주의적’이라기보다는 ‘자유지상주의적’이라는 뜻이다. 북한사회와 같은 전체주의적 도덕교육의 역설은 그런 도덕교육이 일차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사회유지와 통합이지만 개인의 자아실현을 막아버림으로써 결국은 사회유지와 통합도 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유지상주의적 도덕교육도 역설적인 상황에 봉착하게 되는 데, 자유지상주의적 도덕교육이 일차적으로 목표로 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인간은 정치 ․ 사회적 동물이어서 국가를 떠나서는 자신의 자유를 실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두 기능을 동시에 고려하는 도덕교육은 ‘공동체적 자유주의’ 도덕교육이다. 6) 공동체적 자유주의자는 도덕의 영역에서 ‘잠정적 진리’라는 개념을 중시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분단 한국의 학생들에게 도덕 ․ 윤리 교육을 통해 가르쳐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한국인으로서 공유해야 할 국가관과 가치관, 그리고 생활양식일 것이다. 모든 국가는 그들의 문화적 특수성에 기초해서 가치관 교육을 실시한다. 물론 대다수 한국인의 삶을 지배하는 윤리 중에는 바람직하여 후손들에게 전승해주어야 할 것도 있고, 폐습이어서 버려야 할 것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한국인의 삶의 윤리를 학생들에게 교육한다고 할 때, ‘한국인의 삶의 윤리’라는 것은 어떤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시대가 바뀌면 바뀔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서는 한국인의 삶을 묶어주는 공통의 삶의 양식이요, 가치관이다. 그것은 영구적인 절대성을 갖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잠정적 절대성을 갖는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앞서 제기했던, 도덕 ․ 윤리교육에서 해결해야 할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를 다루고 있는 셈인데, 그것은 도덕 ․ 윤리교육을 통해 가르치는 도덕적 지식은 상대적인 것인가 절대적인 것인가 하는 것이다. 윤리학에서 상대주의 절대주의 논쟁은 해결되지 않고 있는 문제들 중의 하나이다. 만약 수학이나 물리학에서 그런 문제 즉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답이 없는 문제가 있다면, 그런 문제를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는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가르칠 수가 없다. 그러나 만약 도덕 ․ 윤리 교육에서도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답이 없는 그런 문제는 교과서에서 가르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가르칠 내용을 선정한다면, 교과서에서 가르칠 내용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가령 우리나라의 결혼윤리는 이슬람권의 일부다처제와는 달리 일부일처제이다.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 이외에도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여러 유형의 결혼제도가 있었다. 과연 어떤 결혼윤리가 절대적으로 옳은가?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 답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면 교사는 우리 사회가 받아들이고 있는 일부일처제는 단지 있을 수 있는 어려 유형의 결혼윤리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기에 원한다면 일부다처제를 택할 수 있다고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우리사회의 합의된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학생들에게 ‘마치 절대적인 진리인듯이’ 가르쳐야 한다. 그러므로 일부일처제 결혼윤리는 진리인 듯이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일부일처제 결혼윤리는 절대적 진리는 아니라 잠정적 진리인 것이다. 도덕교과서에서 가르쳐야 할 진리들은 바로 이런 진리들이다. 우리사회는 유교적 장유유서의 전통으로 말미암아 노소간의 서열의식이 강하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이 윤리는 ‘잠정적 진리’로서 교과서에서 가르쳐져야 한다. 그리고 뉴질랜드에서는 성매매를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어차피 근절되지 않을 것이라면, 성매매를 합법화함으로써 그 일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옳은 일인지는 모르지만, 어쨌건 ‘성매매는 비도덕적인 것이다’는 명제는 현재로의 한국사회에서는 잠정적 진리이다. 모든 나라는 자기 사회의 합의된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학생들에게 진리인 듯이 가르치고 있다. 특정 종교국가의 경우에는 ‘잠정적 진리’가 아니라 ‘절대적 진리’를 가르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어느 종교가 절대적인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지 모르기에, 제3자적인 입장에서 보면 여전히 ‘잠정적 진리’에 불과하다. 이제 우리는 ‘제대로 된 도덕 ․ 윤리교육은 현대 한국사회의 사회 문화적 특수성과 세계적 보편성의 긴장 위에서 이루어 져야 한다’는 명제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한국사회의 문화적 독자성과 특수성’은 한국사회에서 도덕․윤리 교육을 실시할 때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내용(잠정적 진리)의 원천이 된다. 그것을 무시하게 되면 우리는 ‘도덕․윤리 교육’을 ‘윤리학 교육’으로 오해하게 된다. 도덕교육에서는 잠정적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은 윤리학에서의 상대주의 절대주의 논쟁에서 도덕교육이 봉착하게 되는 딜레마적 곤경에 대한 좋은 해결책이 될 것이다. 만약 도덕이 극단적으로 상대적이어서 개인마다 다른 것이라면, 우리는 도덕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 각자는 알아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 그만이다. 만약 도덕이 절대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그 절대적인 도덕적 진리를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가르쳐야 할 절대적 진리가 없거나, 있다 하더라고 몇 가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각각의 사회나 국가나 문화권은 각각의 잠정적인 도덕적 진리를 갖고 있다고 한다면, 도덕이 극단적인 개인적 상대주의자들이 이해하듯이 사적인 영역의 일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그러니까 공적 교육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극단적 절대주의자들이 마주치게 되는 ‘가르칠 내용이 없는 교과’가 되는 것도 아니다.
앞서 충분히 암시되었지만, 이제 필자는 왜 ‘자유주의적 공동체’라는 용어 대신 ‘공동체적 자유주의’란 용어를 사용했는지 그 이유를 밝혀보고자 한다. 인간은 예외 없이 특정의 사회, 가정 속에서 태어난다. 개인이 먼저냐 사회가 먼저냐 하는 문제에 직면해서, 우리는 사회가 먼저라고 답해야 한다. 아무런 사회에도 소속되지 않은 개인들이 먼저 존재한 다음, 그들이 필요에 따라 사회를 만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근대 서구의 사회계약설은 기존 사회의 문제점을 분석하기 위한 개념적 틀로서는 의미를 가질지 모르지만, 잘못된 이론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 속에서 태어나 사회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고 행동하지만(이 점에서는 공동체주의자들이 옳다), 사회를 넘어선다(이점에서는 개인주의자들이 옳다). 우리는 사회를 넘어서기 위해, 사회 속에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 속에 태어나지 않으면 즉 특정 사회의 습속과 풍습과 가치관과 삶의 양식을 내면화하지 못하면, 늑대인간의 예에서 보듯이, 사회를 넘어서지도 발전시키지도 못한다. 도덕교육은 사회에서 시작하여 사회를 넘어서는 것을 교육한다. 과거 조선시대에 유교적 가부장제하에서 억압된 삶을 살았던 한국여성들의 삶의 목표가 지금의 한국여성들에게는 삶의 출발점이 되어 있다. 도덕교육은 학생들에게 사회를 넘어서는 것을 가르치지만, 그것은 결국 더 나은 사회로 되돌아오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인지만, 인간이 진정으로 사회적인 존재인 이유는 인간만이 의도적 ․ 의식적으로 사회를 개선시킬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른 고등 포유류들도 사회 안에서 살아간다. 그런 점에서 그들도 사회적인 동물이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이 ‘사회적인’ 방식으로 사회적이지는 않다. 그들은 조상대대로 전수되어 온 삶의 방식을 그냥 맹목적으로 답습한다. 동물들은 사회에 갇혀 사는 방식으로 사회적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조상들로부터 전수된 삶의 방식을 취사선택한다. 인간은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면서 사는 방식으로 사회적 존재이다. 필자는 ‘자유주의적 공동체’라고 말하지 않고 ‘공동체적 자유주의’라고 말했는데, 이제 그렇게 말한 이유를 설명할 단계에 이르렀다.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는 모순개념이 아니다. 그러면 ‘공동체적 자유주의’라는 개념도 성립할 수 있고 ‘자유주의적 공동체’라는 말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사회 속에서 태어나 사회 속에서 자아정체성을 형성하고 사회구성원이 되지만, 인간이 진정 사회적인 이유는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기 때문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사회를 넘어서는 자유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이 자유 - 이를 필자는 칸트를 따라 ‘선험적 자유’로 부르겠다 - 를 인간이 갖고 있지 못하다면, 인간은 사회의 예속물에 불과하게 된다. 그리고 이 자유가 없다면 인간에게 도덕적 지평이 열릴 수가 없다. 칸트의 말대로 “자유는 도덕법칙의 존재근거”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즉 아무리 인간이 사회화를 통해 공동체의 한 구성원인 인간이 된다 하더라도, 인간은 사회적 제도나 관습, 가치관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사회초월적 자유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필자는 ‘공동체적 자유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공동체적인 존재로 삶을 시작해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벗어나는 자유를 구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공동체적 자유주의’로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