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政治, politics)는 기본적으로 권력(權力, power)을 수단으로 내치(內治)와 외교(外交)를 다루는 영역이다. 정치가 일국 단위의 최종적인 헤게모니인 이상 이는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시대마다 항시 두 영역이 같은 비중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양자는 ...
정치(政治, politics)는 기본적으로 권력(權力, power)을 수단으로 내치(內治)와 외교(外交)를 다루는 영역이다. 정치가 일국 단위의 최종적인 헤게모니인 이상 이는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시대마다 항시 두 영역이 같은 비중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양자는 동전의 양면처럼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더러는 대외적 사안이 더 중요할 수도 있고, 반대로 대내적 사안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내외적 사안이 동시에 긴급한 사안일 경우 대개는 총체적 난국의 국면일 경우이다. 대개 그것은 국내 질서의 혼란은 물론 대외적 주권이 심히 손상될 때 전개된다. 한국정치사에 있어서 그것은, 가까이는 구한말의 역사가 그러하고 멀리는 고려 후반기 원(元) 간섭기가 특히 그러한 예에 속한다고 하겠다.
이 연구는 이 가운데 한민족이 인식하는 역사 가운데 국가 주권이 심각하게 훼손되었었다고 인식하는 시기 중의 하나인 이 시기 고려 국왕이었던 충선왕(忠宣王, 고려 제26대 군주, 재위: 1298년 1월-8월, 복위: 1308년 7월 - 1313년 5월)의 정치적 딜레마를 연구하고자 한다. 이 시기는 특히 ‘원 간섭기’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말 그대로 고려의 국가 위상이 기본적으로 독립적일 수 없는 시기이다. 첫째, ‘국왕’의 존재 자체도 원에 의해 즉위와 폐위가 거듭되는 상황이었고, 둘째, 양국 혼인으로 인해 이미 양국은 강국과 약소국의 관계만이 아닌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였으며, 셋째, 그러면서도 기존의 한족(漢族)과 한족(韓族) 중심의 고유한 중화질서를 깬 이민족 정권의 간섭과 피간섭의 관계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은 자연 고려 국왕들로 하여금 고려라는 정치공동체를 통치하는데 있어서 그 어느 시기보다 명실공히 ‘내치’와 ‘외교’의 민감한, 그러면서도 어느 한 쪽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원의 간섭을 전제로 하되, 그러면서도 대원관계 및 내치에 있어서 자주적이고 개혁적 시도를 행하려 하였더 대표적인 군주는 바로 충선왕과 공민왕(恭愍王: 1352-1374)이다. 전자는 원나라 간섭기 초기라면 공민왕의 말기를 담당했던 인물이다. 이 가운데 이 연구는 원나라 간섭기 대표적인 고려 군주 충선왕의 정치적 딜레마를 고찰하고자 한다.
충선왕은 최초의 혼혈 국왕인 동시에 원(元)의 세조(世祖, 쿠빌라이)의 외손이었다. 혈통적 차원에서 역사적으로 보면 수치스러울 수 있는 존재일 수도 있지만 당대 정치권력 차원에서는 황금혈족에 속하였다. 그는 태생적으로 원의 간섭과 후원을 동시에 받는 존재였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이는 한편으로는, 물론 상대적이지만, 그 누구보다 정치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처지이기도 했고, 견제를 받을 수도 있는 처지이기도 했음을 의미했다. 결국 그의 이러한 존재적 의미는 정치적 행보로 나타났다. 그가 가는 곳은 어떤 형태로든 고려와 원의 동시에 고려하는 이중적 함의로 드러났다. 군주의 신분으로서도, 폐위된 신분에서도, 또 복위되었을 때도, 선양하였을 때도, 원으로부터 견제를 받아 귀양을 갔을 때도 그의 존재는 항상 고려와 원의 개혁을 동시에 함의하였고, 고려와 원의 권력투쟁에 동시에 얽혀 있었으며, 고려와 원의 권력세계에 동시에 견제대상이었다. 1298년의 1차 즉위를 전후한 대 고려 개혁의지, 국내 권력 게임에 밀려 불과 8개월만의 폐위 당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원(元)에 의해서였다. 같은 해의 퇴위 이후에도 각종 활동을 지원한 것도 원이고 복위를 도모한 것도 원이다. 원 황실과의 튼튼한 유대와 적극적인 참여, 강남의 사찰들을 순례하며 불교계에 공덕을 쌓고 인맥을 만드는 일, 유학자들과의 교유, 이 모두가 고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선택한 그의 또 다른 길이었다. 1303년 이후 충렬왕과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결국 1307년의 원의 무종 옹립에 성공하고, 그 귀결로 다시 원과 고려에서 정치적 위상을 다시 회복하였다. 원의 도움으로 복위를 하였지만 충선왕이 택한 복위 후의 길은 일종의 반원(反元) 정책과 고려의 적극적인 개혁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적극 활용된 것은 한족문화, 곧 문화적 중화주의였다. 이는 이 연구에서 구체적으로 해명할 충선왕의 정치적 기반이자 소재로 활용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