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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원 간섭기 고려 국왕 충선왕의 정치적 딜레마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0-327-B00015
선정년도 2010 년
연구기간 1 년 (2010년 05월 01일 ~ 2011년 04월 30일)
연구책임자 안외순
연구수행기관 한서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정치(政治, politics)는 기본적으로 권력(權力, power)을 수단으로 내치(內治)와 외교(外交)를 다루는 영역이다. 정치가 일국 단위의 최종적인 헤게모니인 이상 이는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시대마다 항시 두 영역이 같은 비중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양자는 동전의 양면처럼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더러는 대외적 사안이 더 중요할 수도 있고, 반대로 대내적 사안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내외적 사안이 동시에 긴급한 사안일 경우 대개는 총체적 난국의 국면일 경우이다. 대개 그것은 국내 질서의 혼란은 물론 대외적 주권이 심히 손상될 때 전개된다. 한국정치사에 있어서 그것은, 가까이는 구한말의 역사가 그러하고 멀리는 고려 후반기 원(元) 간섭기가 특히 그러한 예에 속한다고 하겠다.
    이 연구는 이 가운데 한민족이 인식하는 역사 가운데 국가 주권이 심각하게 훼손되었었다고 인식하는 시기 중의 하나인 이 시기 고려 국왕이었던 충선왕(忠宣王, 고려 제26대 군주, 재위: 1298년 1월-8월, 복위: 1308년 7월 - 1313년 5월)의 정치적 딜레마를 연구하고자 한다. 이 시기는 특히 ‘원 간섭기’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말 그대로 고려의 국가 위상이 기본적으로 독립적일 수 없는 시기이다. 첫째, ‘국왕’의 존재 자체도 원에 의해 즉위와 폐위가 거듭되는 상황이었고, 둘째, 양국 혼인으로 인해 이미 양국은 강국과 약소국의 관계만이 아닌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였으며, 셋째, 그러면서도 기존의 한족(漢族)과 한족(韓族) 중심의 고유한 중화질서를 깬 이민족 정권의 간섭과 피간섭의 관계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은 자연 고려 국왕들로 하여금 고려라는 정치공동체를 통치하는데 있어서 그 어느 시기보다 명실공히 ‘내치’와 ‘외교’의 민감한, 그러면서도 어느 한 쪽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원의 간섭을 전제로 하되, 그러면서도 대원관계 및 내치에 있어서 자주적이고 개혁적 시도를 행하려 하였더 대표적인 군주는 바로 충선왕과 공민왕(恭愍王: 1352-1374)이다. 전자는 원나라 간섭기 초기라면 공민왕의 말기를 담당했던 인물이다. 이 가운데 이 연구는 원나라 간섭기 대표적인 고려 군주 충선왕의 정치적 딜레마를 고찰하고자 한다.
    충선왕은 최초의 혼혈 국왕인 동시에 원(元)의 세조(世祖, 쿠빌라이)의 외손이었다. 혈통적 차원에서 역사적으로 보면 수치스러울 수 있는 존재일 수도 있지만 당대 정치권력 차원에서는 황금혈족에 속하였다. 그는 태생적으로 원의 간섭과 후원을 동시에 받는 존재였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이는 한편으로는, 물론 상대적이지만, 그 누구보다 정치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처지이기도 했고, 견제를 받을 수도 있는 처지이기도 했음을 의미했다. 결국 그의 이러한 존재적 의미는 정치적 행보로 나타났다. 그가 가는 곳은 어떤 형태로든 고려와 원의 동시에 고려하는 이중적 함의로 드러났다. 군주의 신분으로서도, 폐위된 신분에서도, 또 복위되었을 때도, 선양하였을 때도, 원으로부터 견제를 받아 귀양을 갔을 때도 그의 존재는 항상 고려와 원의 개혁을 동시에 함의하였고, 고려와 원의 권력투쟁에 동시에 얽혀 있었으며, 고려와 원의 권력세계에 동시에 견제대상이었다. 1298년의 1차 즉위를 전후한 대 고려 개혁의지, 국내 권력 게임에 밀려 불과 8개월만의 폐위 당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원(元)에 의해서였다. 같은 해의 퇴위 이후에도 각종 활동을 지원한 것도 원이고 복위를 도모한 것도 원이다. 원 황실과의 튼튼한 유대와 적극적인 참여, 강남의 사찰들을 순례하며 불교계에 공덕을 쌓고 인맥을 만드는 일, 유학자들과의 교유, 이 모두가 고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선택한 그의 또 다른 길이었다. 1303년 이후 충렬왕과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결국 1307년의 원의 무종 옹립에 성공하고, 그 귀결로 다시 원과 고려에서 정치적 위상을 다시 회복하였다. 원의 도움으로 복위를 하였지만 충선왕이 택한 복위 후의 길은 일종의 반원(反元) 정책과 고려의 적극적인 개혁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적극 활용된 것은 한족문화, 곧 문화적 중화주의였다. 이는 이 연구에서 구체적으로 해명할 충선왕의 정치적 기반이자 소재로 활용될 것이다.
  • 기대효과
  • (1) 학문적 기여도
    첫째, 한국정치사 연구의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할 것이다. 연구의 독창성에서도 논하였지만 본 연구는 기본적으로 한국정치사 연구 분야에서 아직 거의 다루지 못한 영역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연구사 차원에서 이 연구는 기존의 고려시대 정치사는 물론 사상사, 나아가 대외관계사의 연구 공백의 하나를 메운다.
    둘째, 한편 충선왕의 권력정치를 내치와 외교, 양면에서 평가하는 본 연구방법상, 기존의 한국사 분야에서 진행되어 왔던 미시적 접근 아니면 진보-보수 중심의 접근을 넘어 정치학적/사회과학적 분석을 동원하는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2) 사회적 기여도
    첫째, 정치사회 분야에서도 긍정적 영향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동아시아 반도에 위치한 지리적 성격상 한민족들은 다른 국가들의 역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국의 침략을 크게 받지도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대국의 역사적 경험도 없다. 대신 늘 주변 강국들의 영향력을 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현재도 강대국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점을 생각한다면 이 점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하겠다. 이에 원 간섭기 충선왕의 선택과 행보는 대국들 사이에서 국가적 선택을 항시 행해야 하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 던지는 함의도 충분하다고 하겠다.
    둘째, 현재 한국사회는 다분히 다문화사회이다. 원 간섭기 고려사회는, 특히 왕실 주변은 다분히 일종의 ‘다문화사회’였다. 충선왕 자신 혼혈 군주 1세였다. 오늘날의 슬기로운 다문화 사회 창출을 위해서도 충선왕의 정치적 고민은 물론 개인적 고민은 오늘날의 다문화 한국사회의 교훈이 되기도 할 것이다.

    (2) 인력양성 효과
    이 연구를 수행하는 동안 연구자들은 연구보조원들로 하여금 연구주제와 관련된 정기세미나, 최종발표회 등 여러 연구 활동에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이 연구에서 습득된 학문적 성과의 축적 및 확산에 기여할 것이다. 이것은 이 연구가 학문후속세대의 양성이라는 차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다른 한편 본 연구책임자의 지도하에는 몽골과 중국 출신 석사과정생들이 있다. 이들의 관련 연구 지도를 통해 국내 인력 양성뿐만이 아니라 국외 인력 양성도 연계할 계획이다.

    (3) 교육과의 연계 활용 효과
    본 연구 책임자가 담당하고 있는 수업 중의 하나인 한국외교사/ 한몽관계사 / 한중관계사 시간에 본 연구결과를 활용하여 수업을 진행할 것이다. 하여 명실 공히 연구자의 연구내용이 학문후속세대이자 미래 사회성원들인 학생들의 교육과 긴밀히 연계되도록 할 것이다.
  • 연구요약
  • 본 연구에서 진행할 구체적인 내용은 실질적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가능하겠지만, 현재로서 대략적으로 설계하는 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최초의 혼혈군주인 충선왕이‘고려’라는 국가의 위상을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는 보다 구체적으로 고려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어떠하며, 역대 민족과 국가의 역사관이 어떠하며, 앞으로의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 어떻게 전망하고 있는지를 통해서 설명되리라 본다.
    둘째, ‘고려’ 국왕으로서 자신의 위상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이 어떠한 지를 살펴볼 것이다. 국왕에 대한 인식은 국가에 대한 인식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기 때문이다. 특히 충렬왕부터 시작된 원나라 왕실과의 혼인관계, 충선왕부터 시작되는 원 왕실의 핏줄 관념은 고려 국왕으로서의 위상 설정이 이전과 동일할 수도 있지만 다를 공산도 크다. 충선왕의 정체성 문제에 이는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셋째, 원나라에 대해 필연적으로 이중적 태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는 가설 하에 원에 대한 충선왕의 시각과 전통 한족 중심의 중국관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여(麗)-원(元) 통혼관계를 통해 아무리 혈연관계로 맺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충선왕이 일국의 정치권력을 장악한 최고권력자인 이상은 지원이 아닌 간섭 차원의 원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견제하기 마련이고, 이때 현실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대외관계적 논리는 유구한 중화주의 전통 논리라고 하겠다. 따라서 본 연구는 양 세력에 대한, 그리고 이를 활용하는 고려 국왕으로서의 충선왕의 태도와 인식을 살펴볼 것이다.
    넷째, 물론 충선왕의 모든 대내외 정책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질 것이다. 국내정치와 대외정책, 특히 그의 사회경제정책은 물론 문화정책이 내포하는 국내외적 의미를 정치권력 문제와 연관시켜 고찰해볼 것이다. 여기에는 원에서의 그의 유교/불교활동이 대원 견제와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도 분석할 것이다.
    다섯째, 아울러 이 모든 것들은 그의 즉위교서와 복위교서 등 제반 교서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함께 이루어질 것이다. 즉 이 연구는 기본적으로 문헌연구에 속한다. 특히 여기서는 충선왕의 ‘고려’라는 ‘국가’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그의 내치와 외교 시각을 고찰할 것이기에, 주로 한국측 사료에 나타난 본인의 진술들을 중심으로 분석할 것이다. 따라서 주요 자료는 『高麗史』와 『高麗史節要』가 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해당 시기 국왕들의 각종 교서(敎書)들이 주요 자료가 될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즉위교서(및 복위교서)는 각 국왕들이 자신의 국정관과 시국관 등 주요 국가관이 포함되어 있기에 필수자료로 활용할 것이다. 그리고 『元高麗紀事』등 주요 원나라 자료도 활용할 것이다. 물론 이 모든 1차자료는 기존의 2차자료들과 함께 활용될 것이다.
  • 한글키워드
  • 충선왕,몽골,중화질서,고려,원,원간섭기,중화주의
  • 영문키워드
  • King Chungseon,China-centralism,the relations of between Korea and Yin(Mongolia)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1) 최초의 혼혈군주인 충선왕이 ‘고려’라는 국가의 위상을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특히 역대 고려 민족과 국가의 역사관과 발전방향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지 살펴보았다. 그는 역대 어떤 국왕보다도 고려의 자주성과 개방성을 동시에 고려하고 있었다. 특히 대원관계의 자주성 부분을 의식하고 있었다.
    2) ‘고려’ 국왕으로서의 위상에 대한 충선왕의 인식이 어떠한지 살펴보았다. 그는 고려의 기존 정치세력들에 대해서는 분명 황족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원나라를 상대로 해서는 반원의식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요컨대 황금혈족이면서도 약소국의 군주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3) 자신의 위치에서 오는 이중적 성격을 충선왕은 중국 한족의 중화주의, 곧 문화보편주의가 강한 유교문화를 양국에 부식하는 것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곧 유교문화와 정치제도 혁신을 통해 고려의 내치를 개혁하는 한편 반발세력을 무마하고, 외교적으로는 유교의 선진문화에 대한 선점권과 우월적 지식을 통하여 원나라를 견제하는 논리를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4) 이상의 성격은 충선왕의 모든 대내외 정책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특히 그것은 폐단척결과 과감한 인사행정, 지방행정 혁신 정책, 각종 유교적 문화 확산정책 등을 통해 살펴보았다. 나아가 염세정책과 노비정책을 통해 구세력의 기반을 침식하는 한편 유교적 관제개혁을 통해 원으로부터 자부심을 획득하는 측면을 고찰하였다. 나아가 충선왕의 상징이기도 한 유교/불교 활동은 특히 원나라 간섭을 견제하는데 활용된 측면이 강하였다.
    5) 충선왕의 복위교서에서는 즉위교서에서 보여준 것보다 더 강력한 기강확립, 공평조세, 개방적 인재등요, 공신자제 중용, 농업장려, 동성혼인 금지, 귀족횡포 엄단 등의 개혁정치를 천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복위 후 정치적 실천은 복위교서의 그것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전지(傳旨) 정치의 구조적 한계, 귀족의 저항, 원나라의 간섭 등으로 결국 실패하였다.
    6) 결론적으로 충선왕의 정치적 딜레마는 그의 신분적 정체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현실 제국의 황제의 혈손이라는 위상과 부마국 고려 국왕이라는 두 신분은 자부심과 자격지심의 양날의 칼이었다. 이 양국의 충선왕은 이 신분에서 오는 정치적 딜레마를 한족의 유교문화 및 관제개혁이라는 중화주의자로서의 실천을 통해 고려의 개혁과 원으로부터의 자존심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 영문
  • The objective of this research is to investigate the merit and demerit of exchange between Korea and Mongolia through historical relation between both countries, namely, the dual political dillema of King Chungseon in the age of Koryo. the peculiarity of relation between Koryo and Mongolia. Specifically, the relation between Koryo and Mongolia in the age of Koryo for characteristics of matrimonial relation and national position of royal families of both countries can be understood only as unstable relation of war and intervention of Yuan to people. However, the peculiarity of relation between Koryo and Mongolia, specifically, the relation between Koryo and Mongolia in the age of Koryo for characteristics of matrimonial relation and national position of royal families of both countries can be understood only as unstable relation of war and intervention of Yuan to people.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요컨대 충선왕의 출생 성분은 그로 하여금 항시 몽골을 상대로 하는 고려인의 자존감도 확보해야 하는 존재였고, 고려를 상대로 하는 몽골황족으로서의 자존감도 확보해야 하는 존재였다는 점이다. 그는 몽골과 고려의 경계인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최고의 집권자이자 황족이었다는 점에서 이중적 지배주체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태생적 위상은 고려국왕으로서의 위상도 제약하는 딜레마구조였다. 이에 대해 충선왕은 특히 자신의 이념적/문화적 기반을 중국 한족의 전통문화의 핵심인 중화주의와 유교에 기반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요컨대 그는 자신의 화려한 신분적 배경이 되기도 하지만 현실적 제약이기도 한 ‘고려출신 몽골혼혈 국왕’으로서의 약점을 보상하는 전략으로 한족의 유교 및 중화주의의 정통주의자 혹은 제일인자가 되는 전략으로 한편으로는 고려 상대 개혁정치를 추진하고, 원 상대 무너진 고려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세자로서의 청정(聽政) 시기에 이어 1차재위기 충선왕의 개혁정치에서 보여준 여몽관계는 숙명적으로 지워진 그 자신의 정체성, 곧 여몽(麗蒙)의 주체이면서도 경계인적 성격을 모두 띠고 있었다. 충선왕의 경우 이 경계인의 위치를 능동적이고 긍정적으로 활용하고자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원의 내각지 개혁, 관청·관직 삭감 및 감찰강화 등의 정책을 수용하여 정방 혁파, 왕실 권위 고양 등 고려를 몽골과 같은 부강한 제국으로 만들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내정·외교·재정·경제 등 전장제도(典章制度) 전반에 이르는 광범위한 개혁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반면 충선왕은 동시에 몽골과 강화(講和) 및 연혼(聯婚), 그리고 울루스 하안으로서의 고려의 위상을 벗어나 독자적 국체를 보존하고자 노력하였다. 원과 독립된 정치세력을 양성하고자 한 것 뿐만아니라 독자적인 국가체제 정비, 官人의 선발 및 충원(充員), 형상(刑賞), 호령(號令), 부세(賦稅) 체제 운영 등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10년 후 충렬왕의 서거로 복위되었을 때도 여전히 이어졌다.
    그러나 이후의 여전한 시도에도 불구, 충선왕 첫 재위시의 구조적인 여몽관계의 이중적 딜레마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깊어졌다. 이후의 왕들에게서는 이 점은 더욱 부정적인 쪽으로 심화되어 갔다. 충선왕의 여몽(麗蒙) 관계 개선에 대한 적극적인 개혁 시도는 공민왕에 가서야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 연구결과 활용방안:
    첫째, 연구계획 단계서도 언급했다시피, 정치학 분야에서 이 분야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시피하다. 연구결과를 학회와 학술지에 발표하여 고려시대 정치사 및 대외관계사 연구 이해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둘째, 충선왕의 권력정치를 내치와 외교, 양면에서 평가하는 본 연구방법상, 기존의 한국사 분야에서 진행되어 왔던 미시적 접근 아니면 진보-보수 중심의 접근을 넘어 정치학적/사회과학적 분석을 동원할 수 있도록 하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셋째, 정치사회 분야에서도 긍정적 영향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원 간섭기 충선왕의 선택과 행보에 대한 정보는 대국들 사이에서 국가적 선택을 항시 행해야 하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 던지는 함의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원 간섭기 고려사회는, 특히 왕실 주변은 다분히 일종의 ‘다문화사회’였다. 충선왕 자신 혼혈 군주 1세였다. 오늘날의 다문화 사회에서 충선왕의 정치적 고민은 물론 개인적 고민은 오늘날의 다문화 한국사회의 교훈으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섯째, 본 연구자가 재직하고 있는 국제관계학과 학부생과 대학원생들에게 수업교재의 하나로 활용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학술연구의 교육현장화를 바로 연결하고자 한다. 특히 한국외교사/ 한몽관계사 / 한중관계사 시간에 본 연구결과를 활용하여 수업을 진행할 것이다. 하여 명실 공히 연구자의 연구내용이 학문후속세대이자 미래 사회성원들인 학생들의 교육과 긴밀히 연계되도록 할 것이다.
    일곱째, 특히 본 연구자의 학과에는 지도하에는 몽골과 중국 유학생은 물론 13개국의 30명에 가까운 외국유학생들이 함께 한다. 본 연구결과를 쉽게 풀어서 이들의 수업에 활용함으로써 12세기 한반도에서의 다문화 경험을 세계화하는데 활용하고자 한다.
    2. 연구성과: 중간발표를 통해 학계와 일차 소통한 결과물이 최종적으로 마무리되면 전국적인 규모의 학술대회에서 발표하여 가능한 한 많은 관련 연구자들과 소통하고자 한다. 최종 발표 후의 수정을 거친 연구결과물을 국내외 주요 학술지에 게재하여 관련 연구자들과 보다 진지한 학술적 담론과 토론이 가능하도록 할 것이다.(예정 게재학술지는 국제정치논총 혹은 동방학, 한국정치학회보 순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결과물의 학술지 게재 이후 이를 대중판으로 수정하여 일반대중용 서적으로도 출간을 시도함으로써 본 연구의 사회적 향유도 도모하고자 한다.
  • 색인어
  • 충선왕, 고려, 몽골, 원, 고려 국왕, 이중적 딜레마, 한족, 중화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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