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가 주목하는 주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17세기 동북아시아사회이고, 하나는 明末淸初 대륙 사회, 朝鮮王朝, 德川幕府의 도가사상 연구의 사상사적 의미이다. 본 연구에서 주목하는 17세기 한・중・일 3국 간 사회적 배경에서 본 연구가 주목하는 점은 주자학이 ...
본 연구가 주목하는 주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17세기 동북아시아사회이고, 하나는 明末淸初 대륙 사회, 朝鮮王朝, 德川幕府의 도가사상 연구의 사상사적 의미이다. 본 연구에서 주목하는 17세기 한・중・일 3국 간 사회적 배경에서 본 연구가 주목하는 점은 주자학이 중심을 이루고 있던 (혹은 이루어 가고 있던) 사회에서 형성된 노장 연구의 사상사적 의미이다. 전통적으로 도가와 유가는 ‘자연과 명교의 대립’ 혹은 ‘자연주의와 인문주의의 대립’ 등 양 사상 간의 길항관계가 주로 부각되었다. 특히 송대 성리학이 성립하면서 노장사상은 ‘異端’으로 규정되어 ‘闢異端’이라는 성리학의 학문적 과제의 폄하 대상이 되었다. 송대 성리학자들이 논구했던 벽이단은 논점선취의 오류를 범했던 측면도 있지만, 철저한 부정을 위해 철저한 연구가 선행되는 현상이 발현되기도 했다. 즉 그들은 이단 배척을 위하여 이단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딜레마에 직면하였고, 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단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를 노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육조 시대에 이어서 당대에 유행했던 노장에 대한 불교적 이해를 뒤로 하고, 송말 임희일에 이르러 ‘벽이단적 배척’은 ‘『노자』에 대한 유가적 이해’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곧 ‘부정을 위한 벽이단’에서 ‘흡수를 통한 벽이단’으로 변화되는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더욱이 본 연구에서 주목하는 17세기 동북아시아 3국의 노장주해는 단순한 학문적 흥미를 넘어서 사상사적 의미를 논구해야 할 가치가 있는 부분이다. 17세기는 시기적으로 근대를 앞둔 사회였기 때문에 당시 사회의 사상적 동향에 대한 미시적 연구는 17세기 사회와 18세기 이후 사회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명말 청초 대륙 사회는 관학으로 자리 잡은 주자학 극복의 효시로 양명학이 위세를 떨치면서 왕부지・고염무・황종희를 중심으로 양명학의 관념적 특징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이어져 청대 고증학을 형성하게 되었다. 특히 왕부지는 당시 동북아시아 사회에 유입된 서구 사상과 노장 사상을 흡수하여 새로운 세계를 준비하고 있었다. 한편 17세기 조선 사회는 건국 이후 사회 구성 이념의 중심을 이루던 주자학의 권위에 대한 상대화가 시도되었는데, 이는 남인의 6경 연구와 서인 소론의 양명학, 노장 연구를 통해 현실화되었고 ‘벽이단’의 도그마를 넘어서는 시도는 이후 북학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토쿠가와막부의 林羅山(1583∼1657)은 주자학을 도입하여 토쿠가와막부의 계급질서 형성의 이데올로기를 정착화시키고 동시에 일본 사회에 林希逸(1193∼?)의 『老子鬳齋口義』를 유행시켜 ‘儒老合一’의 회통적 시각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일본 내부에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노자』와 『장자』 독법에 일대 변화를 주었고 이러한 시각의 변화가 이후 이어지는 주자학적 유교경전 이해의 절대적 권위 해체의 신호탄으로 작용했다는 가설을 사정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 주목하는 노장 주석가들은 모두 과도기적 인물이다. 王夫之의 경우 청대고증학 성립의 과도기에 있었고 박세당(1629∼1703)은 실학의 선하로 평가되며 林羅山은 德川幕府 수립기의 사상가로 주자학 수용의 중심인물이었다. 주자학의 풍토 속에서 성장한 이들에게 주어진 사상적 테마는 결국 ‘벽이단’이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이들의 이단연구가 지니는 사상사적 의미 일면 상호 유사한 부분도 있고 상이한 부분도 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유사성과 상이성에 대한 검토는 본 비교 연구를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정리되어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로 배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각 사회에서 해당 주석이 지니는 사회사상적 기능과 의미에 대한 유력한 가설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이 연구는 개별 인물이나 단순 연구 주제의 경향을 극복하고 동일한 시기 각 사회의 사상적 과제와 전망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와 토론의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기대효과
본 연구는 1970년 대・1980년 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1990년 대 후반 이후 지속적으로 배출되는 조선 후기 노장 사상 주해 및 도교 사상 관련 연구 성과를 토대로 연구의 범위를 조선 사상사에서 근세 동북아시아 3국 비교를 통해 연구 영역을 확장하려 계획하고 ...
본 연구는 1970년 대・1980년 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1990년 대 후반 이후 지속적으로 배출되는 조선 후기 노장 사상 주해 및 도교 사상 관련 연구 성과를 토대로 연구의 범위를 조선 사상사에서 근세 동북아시아 3국 비교를 통해 연구 영역을 확장하려 계획하고 있다. 본 연구의 주요 주제인 ‘17세기 동북아시아 3국의 노장연구’는 각 국의 주석서에 대한 개별 연구를 거쳐 상호 비교 연구로 진행될 것이다. 우선 17세기 한・중・일 3국 노장 주석의 개별 연구는 국내 미개척 분야인 일본 근세의 노장 사상과 근세 중국 사회의 노장 사상의 연구 동향과 그 사상사적 의미를 소개는 데 일차적 과제가 있다. 그리고 이후 해당 주석들 사이의 비교연구를 진행하면서 각 주석가의 노장 개념과 명제에 대한 이해를 분석・비교하는 미시적 연구와 각 주석들의 사상사적 의미를 비교 조망하는 거시적 연구를 순차적으로 적용할 예정이다. 이 연구는 유가적 노장 해석 과정에서 발생하는 노장에 대한 유가적 변용에 대한 미시적 연구를 통해서 유가적 노장 해석의 동기와 사상사적 의미를 규명하는 거시적 연구 성과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상의 비교 연구를 통하여, 조선사상사를 주변 국가와의 비교를 통해서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18세기 이후 사회와의 연관성, 곧 17세기 이단 연구의 18세기 사회에 대한 영향의 문제와 관련된 학계의 견해에 다소간을 자극을 줄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본 연구는 한국사 관련 학계에서 요구한 17세기 이후 사상사의 문제 해결과 유력한 가설 설정에 다소간 기여를 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 방법은 기존의 연구 방법이 고수했던 한계를 넘어서 미시적 분석을 통한 거시적 전망을 연구 과정에 도입하여 학계에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연구 성과로 배출할 예정이다. 기존의 ‘동북아시아의 노장 주석 연구’ 혹은 ‘한・중・일 각 국의 노장 주석에 대한 연구’는 1990년 대 이후 해당 분야 박사학위논문이 배출되면서 미개척 분야였던 ‘북송 이후(더 정확하게는 성리학 성립 이후) 동북아시아 노장 주석’의 경향을 소개하였다. 본 연구가 주목하고 있는 ‘17세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그 시대에 성립되었던 노장 해석의 경향성’의 결합, 곧 ‘노장 주석 의미를 17세기 사상사의 문제로 환원하는 연구 방법’은 17세기 한・중・일 3국 노장 해석 비교 연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는 부분이다. 17세기 이후 한・중・일 3국은 점진적으로 근대 사회에 접근하면서 국제 사회라는 새로운 세계의 일원이 되었고, 이후 중화적 질서와는 상이한 양상으로서 서로의 관계를 재설정하게 된다. 본 연구는 18세기 이후 사회와의 연장선 속에서 17세기를 파악하고, 이 과정에서 17세기 사회 속에서 ‘이단[노장 사상]의 연구’가 지니는 역사적 역할과 사상사적 의미를 상호 비교 연구를 통하여 진행할 예정이다. 이후 이어질 관련 연구 성과는 한국사와 한국사상사 및 전근대 한국철학사 관련 강의 교재로 활용될 수 있으며, 관련 학위 논문의 질적 향상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판단한다. 또한 일본과 중국의 연구 성과에서도 현재까지는 자국의 유가적 노장 해석에 대한 개별 연구가 진행되었고 한・중・일 3국 노장 주석의 비교 연구 및 사상사적 의미에 대한 연구는 후발 연구를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본 연구가 지향하는 ‘17세기 한・중・일 3국 노장 주석의 비교 연구 및 사상사적 의미’는 해당 분야의 연구를 국제적으로 선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각 국가 간 비교 연구를 통해서 17세기 『노자』와 『장자』 주석에 담긴 한・중・일 3국의 시대적 과제를 전망하여 시대와 호흡하는 고전이해의 현장을 전달하여 향후 현대와 교감하는 고전 이해 더 나아가서 미래를 전망하는 고전 이해의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연구요약
동북아시아 학문 전통에서 유가와 도가의 고전 해석은 각 시대의 학문적 경향을 표출하는 방식이었으며, 해당 고전에 대한 해석은 각 시대의 문화를 담아내는 도구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므로 고전 주석의 변화 경향은 사상사(혹은 철학사)의 변천을 대변하는 경우도 있 ...
동북아시아 학문 전통에서 유가와 도가의 고전 해석은 각 시대의 학문적 경향을 표출하는 방식이었으며, 해당 고전에 대한 해석은 각 시대의 문화를 담아내는 도구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므로 고전 주석의 변화 경향은 사상사(혹은 철학사)의 변천을 대변하는 경우도 있다. 본 연구의 주요 고전인 『노자』와 『장자』 역시 이와 같은 ‘해석학적 변천’을 통해서 각 시대의 사상적 담론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수용되고 해석되었다. 이러한 노장 해석학의 시대적 변천에 대하여 武內義雄은 ‘老莊別行’・‘老莊提携’・‘老莊分離・老儒提携’의 3시기로 규정했다. 특히 그는 제3시기에서 林希逸의 노장 해석의 역할을 지적하면서 이에 대하여 “林希逸은 종래 동일한 사상으로 인식되었던 『노자』와 『장자』를 분리시키고 ‘『장자』는 불경과 일치하지만 『노자』는 유가와 같다’라고 주장했는데, 이로 인하여 오래 동안 결합되어 있던 『노자』가 『장자』와의 관계를 끊고 유가와 손잡게 되어 『노자』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성립되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견해에 의하면 임희일의 주석은, ‘『노자』에 대한 유가적 해석’ 곧 ‘以儒釋老’라는 노자 해석학적 관점과 ‘노장 분리의 해석학적 관점’을 수면 위로 부각시켜 노장 해석상 일대 전환을 수행하였던 셈이 된다. 이후 임희일의 노장 주석은 조선 초기 한반도로 유입, 목판 간행되어 보급되었으며, 일본의 경우는 林羅山의 역할과 林希逸의 후손인 승려 卽非(1616∼1671: 1658년 渡日, 1671년 長崎 사망)가 일본 滯在 기간 동안 자신의 선조인 林希逸의 『老子鬳齋口義』를 校定하고 句点과 評点을 붙여서 간행하면서 이후 德川幕府의 문화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근세 일본 사회에서 임희일 노장 연구의 사상적 기여에 대한 연구는 현재 愛知県立大学 文学部 国文学에 재직 중인 大野 出이 1997년 그의 박사학위논문인 『日本近世における老莊思想の受容-老莊思想と儒敎思想との交涉をめぐって』을 정리 출판한 『日本の近世と老荘思想 -林羅山の思想をめぐって』을 선보이면서 일본 근세 사회에서 임라산의 역할과 임희일 노장 주석의 (일본에 국한된) 사상사적 의미에 대한 시론을 전개한 바 있다. 그리고 대륙에서는 2004년 현 香港中文大学文化及宗教研究系의 尹志华가 그의 학위논문인 『北宋老子注硏究』를 출간하면서 북송 시대 당시 노자 주석에 ‘정치 방법론적 시각’과 ‘도교적 신앙’ 및 ‘性命論’과 ‘有無論’ 등의 다양한 시각이 담겨 있음을 지적하여, 주석사를 통한 노장이해의 당위성을 시사하였다. 근래 국내에서도 『노자』와 『장자』를 사상사・주석사와 연결하여 연구하는 연구 성과가 배출되고 있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본 연구의 주요 테마는 17세기 한・중・일 3국에서 목격되는 유가적 노장 해석의 사상사적 의미인데, 노장에 대한 유가적 해석은 남송 말 임희일의 『老子鬳齋口義』와 『莊子鬳齋口義』에 이르러 주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게 된다. 임희일의 노장 주석은 이후 주석가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하였다. 첫째는 유가적 시각에서 『노자』를 수용하는 ‘以儒釋老’의 해석학적 관점이었고, 둘째는 『노자』와 『장자』를 각기 ‘친유가적 『노자』’와 ‘친 불교적 『장자』’로 구분하여 기존의 道家라는 범주에서 무차별적으로 인식되던 『노자』와 『장자』를 분리하여 파악했다는 점이다. 본 연구에서 주목하는 점은 ‘以儒釋老’라는 『노자』 해석학의 관점에 대한 비판적 검토이다. ‘이유석로’라는 해석학적 관점은 ‘노장에 대한 유가적 해석과 수용’이라는 점에서 다소간의 시사점이 있기는 하지만 ‘유가적 시각에 의한 『노자』 사상의 훼손과 곡해’라는 난점을 안고 있는 관점으로 자칫 딜레마에 빠질 수 있는 시각이다. 이는 임희일 주석의 영향을 받은 박세당이 『노자』 18장과 19장을 해석하면서 원문을 임의로 수정하고 『장자』 「인간세」의 본문을 자의로 변경한 부분을 통해서 그 여파를 확인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유가적 해석 과정에서 발생하는 『노자』・『장자』 원문의 곡해 및 변형과 관련하여 문맥의 변형과 개념의 변질을 주제로 미세한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 성과는 다시 사상사의 맥락에서 조망되어 각 주석가의 노장 해석 동기와 그 사상사적 의미 서술을 통한 거시적 전망으로 이어질 것이다.
17th Century.,Lao Zi,Lin Xi Yi,Hayashi La Zan,Far East,Namhwagyeongjuhaesanbo,Siinjudodukgyong,the notes of LaoTzu,the notes of Chuang Tzu,Zhuang Zi,Wang Fu Zi,Taoism,Park Sae Dang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국문
본 연구는 明末의 王夫之와 朝鮮 後期의 朴世堂 그리고 江戶幕府 초기의 林羅山의 노장 사상의 사상사적 의미 규명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였다. 우선 王夫之와 朴世堂의 『莊子』해석의 경우, 양자는 「逍遙遊」와 「齊物論」 이해에서 상이한 방향을 우화 및 개념 규정을 진행하였다. 王夫之의 경우 「逍遙遊」를 해석 ...
본 연구는 明末의 王夫之와 朝鮮 後期의 朴世堂 그리고 江戶幕府 초기의 林羅山의 노장 사상의 사상사적 의미 규명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였다. 우선 王夫之와 朴世堂의 『莊子』해석의 경우, 양자는 「逍遙遊」와 「齊物論」 이해에서 상이한 방향을 우화 및 개념 규정을 진행하였다. 王夫之의 경우 「逍遙遊」를 해석하면서 인격적 변화의 당위성과 계급이동에 대한 경계를 암시하는 해석을 진행하였는데, 이는 그의 명말 사회 비판서인 『噩夢』의 ‘才力性情’ 및 民亂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입증할 수 있다. 그리고 王夫之는 「齊物論」 해석에서 기존의 주석가들과 달리 ‘滑疑之耀’와 ‘寓庸’의 입장을 유달리 강조했다. 그가 주장했던 ‘滑疑之耀’는 ‘분명하지 않은 밝음’으로 ‘寓庸’은 ‘현재 임박한 상황에 따라 활용해 간다’라고 그 의미를 규정할 수 있는데, 이러한 사고는 그의 역사 비판서인 『宋論』에서 보이는 ‘順勢’와 ‘順衆志’ 그리고 舊法黨과 新法黨의 대립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그 활용의 사례를 규명할 수 있다. 한편 朴世堂의 경우는 「逍遙遊」해석에서 큰 특이점은 발견되지 않고 「齊物論」의 서론격으로 「逍遙遊」의 의미를 평가하고 있다. 朴世堂은 「齊物論」 부분에서 ‘成心’을 孟子的 性善論과 『中庸』의 ‘率性’으로 이해하고 ‘明’을 ‘天理之公’으로 해석하여 성리학의 제1명제인 ‘性卽理’를 『莊子』「齊物論」 해석에 응용하고 있다. 朴世堂은 성심과 명을 내재적 진리와 초월적 진리로 파악하여 두 개념의 개념적 내포를 동일화시키고 있는데, 그의 이러한 해석은 『莊子』 주석사에서도 다소 특이한 입장으로서 송대 이후 진행된 『莊子』의 유가적 해석의 심화 사례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林羅山의『莊子』에 대한 연구는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 가시적 연구 성과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老子』해석에 있어서 王夫之 朴世堂 林羅山 3인은 각자 상이한 동기에 의거하여 개성있는 해석을 진행했다. 우선 王夫之는 『老子』 解釋의 역사가 『老子』에 대한 오해의 근원임을 지적하고 『老子』를 『老子』로 이해하는 연구 방법론에 대하여 거론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老子』는 정치방법론의 텍스트로 규정하여 그 특징과 한계에 대하여 지적하였다. 또한 王夫之의 경우 『老子』 해석의 동기는 양명 좌파에 대한 비판에 있다는 점을 논의하였다. 한편 조선 후기 사회의 朴世堂은 『老子』를 ‘淸靜無爲’의 정치 교과서로 규정하고 그 핵심 개념을 ‘修身治人’으로 지목하였다. 朴世堂은 『老子』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不爭’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그의 생존 당시 극렬했던 당쟁에 대한 비판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朴世堂의 『老子』주석 동기는 당시 여러 사상가들의 주자학 비판을 통해서 문화적 학문적 다양화의 필요성에 대한 역설에 있었다는 것을 가설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林羅山의 경우 王夫之 朴世堂의 경우와 같이 독립적 주해로 보기 어렵고 현존하는 판본들의 혼란으로 인해 연구 진행에 난점은 있다. 하지만 그가 林希逸의 『老子鬳齋口義』를 和譯하면서 강조점을 두었던 ‘無心’을 통해서 武士 社會의 특징을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老子鬳齋口義』의 특징으로 꼽히는 유도합일을 중심 논점으로 놓고 본다면, 林羅山의 『老子鬳齋口義』 수용이 불교가 중심을 이루었던 전국시대의 학풍을 유교 중심으로 쇄신에 그 목적이 있었다는 점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江戶幕府 초기의 儒敎 受容은 忠孝倫理의 이데올로기 강화를 통한 德川家의 장기적 지배구조 강화의 이념적 배경 형성에 그 동기가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영문
There three important Master's Taoism Text Analysis in this study. They are just Wang Fu Zhi王夫之 who lived in Ming Dynasty and Park Sae Dang 朴世堂 who lived in Chosun Dynasty and Hayashi Ra Zan 林羅山 who lived in Tokugawa Bakuhu. They were interested in t ...
There three important Master's Taoism Text Analysis in this study. They are just Wang Fu Zhi王夫之 who lived in Ming Dynasty and Park Sae Dang 朴世堂 who lived in Chosun Dynasty and Hayashi Ra Zan 林羅山 who lived in Tokugawa Bakuhu. They were interested in the Taoism text interpreted as a political ideology. Wang Fu Zhi's Laozhi Analysis had a purpose in Yang Ming leftist criticism. Andhis Zhuangzhi Analysis has been established for this purpose in the class ideology. His classic interpretation center concepts are Cai Li XIng Qing才力性情, Hua Yi Zhi Yao滑疑之耀, Yu Yong寓庸, and Bian Hua變化. On the other hand, Park Sae Dang interpreted Taoism as Meaning of Confucian classics. He changed the nuances of original text of Taoism in the Confucian and transformed original text of Tao-ism. He lived in a lifelong political debate. So, in his Toaism classic study has melted his political life and beliefs. He was opposed to the dogmatism of the Neo-Confucian Joseon society wanted to be ideologically and culturally diverse. Finally Hayashi Ra Zan 林羅山 was accepted by the Minister of Confucian of Tokugawa Bakuhu江戶幕府 in charge of the mission of the Neo-Confucian regime. His classical studies are briefly than Wang Fu Zhi王夫之 and Park Sae Dang 朴世堂. And His classical studies were followed Lin Xi Yi林希逸's Laozhi Yanzhaikouyi老子鬳齋口義. So hard to find those unique characteristics. However, in his classic study that was done to accommodate the great mission of the Neo-Confucian society at Beginning of Tokugawa Bakuhu江戶幕府. As described above, this study was discussed with respect to the Confucian interpretation of the Taoism text. Park Sae Dang 朴世堂and Hayashi Ra Zan 林羅山 were in opposition sought to reconcile the relationship between Confucian and Taoism. On the other hand, Wang Fu Zhi王夫之 was trying to research the Taoism Text in the Taoism itself. Wang Fu Zhi王夫之 who lived in Ming Dynasty and Park Sae Dang 朴世堂 who lived in Chosun Dynasty and Hayashi Ra Zan 林羅山 who lived in Tokugawa Bakuhu's Taoism study were all they have in common is their work that contains his contemporary challenges.
연구결과보고서
초록
본 연구는 明末의 王夫之와 朝鮮 後期의 朴世堂 그리고 江戶幕府 초기의 林羅山의 노장 사상의 사상사적 의미 규명에 그 목적이 있다. 본 연구의 연구 텍스트는 王夫之의 『莊子解』・『老子衍』 그리고 朴世堂의 『新注道德經』・『南華經註解刪補』 및 林羅山의 『老子經抄』・『老子抄解』로 한정한다. 우선 王夫之와 朴世堂의 『莊子』해석의 경우, 양 ...
본 연구는 明末의 王夫之와 朝鮮 後期의 朴世堂 그리고 江戶幕府 초기의 林羅山의 노장 사상의 사상사적 의미 규명에 그 목적이 있다. 본 연구의 연구 텍스트는 王夫之의 『莊子解』・『老子衍』 그리고 朴世堂의 『新注道德經』・『南華經註解刪補』 및 林羅山의 『老子經抄』・『老子抄解』로 한정한다. 우선 王夫之와 朴世堂의 『莊子』해석의 경우, 양자는 「逍遙遊」와 「齊物論」 이해에서 상이한 방향을 우화 및 개념 규정을 진행하였다. 王夫之의 경우 「逍遙遊」를 해석하면서 인격적 변화의 당위성과 계급이동에 대한 경계를 암시하는 해석을 진행하였는데, 이는 그의 명말 사회 비판서인 『噩夢』의 ‘才力性情’ 및 民亂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입증할 수 있다. 그리고 王夫之는 「齊物論」 해석에서 기존의 주석가들과 달리 ‘滑疑之耀’와 ‘寓庸’의 입장을 유달리 강조했다. 그가 주장했던 ‘滑疑之耀’는 ‘분명하지 않은 밝음’으로 ‘寓庸’은 ‘현재 임박한 상황에 따라 활용해 간다’라고 그 의미를 규정할 수 있는데, 이러한 사고는 그의 역사 비판서인 『宋論』에서 보이는 ‘順勢’와 ‘順衆志’ 그리고 舊法黨과 新法黨의 대립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그 활용의 사례를 규명할 수 있다. 한편 朴世堂의 경우는 「逍遙遊」해석에서 큰 특이점은 발견되지 않고 「齊物論」의 서론격으로 「逍遙遊」의 의미를 평가하고 있다. 朴世堂은 「齊物論」 부분에서 ‘成心’을 孟子的 性善論과 『中庸』의 ‘率性’으로 이해하고 ‘明’을 ‘天理之公’으로 해석하여 성리학의 제1명제인 ‘性卽理’를 『莊子』「齊物論」 해석에 응용하고 있다. 朴世堂은 성심과 명을 내재적 진리와 초월적 진리로 파악하여 두 개념의 개념적 내포를 동일화시키고 있는데, 그의 이러한 해석은 『莊子』 주석사에서도 다소 특이한 입장으로서 송대 이후 진행된 『莊子』의 유가적 해석의 심화 사례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林羅山의『莊子』에 대한 연구는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 가시적 연구 성과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老子』해석에 있어서 王夫之 朴世堂 林羅山 3인은 각자 상이한 동기에 의거하여 개성있는 해석을 진행했다. 우선 王夫之는 『老子』 解釋의 역사가 『老子』에 대한 오해의 근원임을 지적하고 『老子』를 『老子』로 이해하는 연구 방법론에 대하여 거론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老子』는 정치방법론의 텍스트로 규정하여 그 특징과 한계에 대하여 지적하였다. 또한 王夫之의 경우 『老子』 해석의 동기는 양명 좌파에 대한 비판에 있다는 점을 논의하였다. 한편 조선 후기 사회의 朴世堂은 『老子』를 ‘淸靜無爲’의 정치 교과서로 규정하고 그 핵심 개념을 ‘修身治人’으로 지목하였다. 朴世堂은 『老子』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不爭’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그의 생존 당시 극렬했던 당쟁에 대한 비판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朴世堂의 『老子』주석 동기는 당시 여러 사상가들의 주자학 비판을 통해서 문화적 학문적 다양화의 필요성에 대한 역설에 있었다는 것을 가설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林羅山의 경우 王夫之 朴世堂의 경우와 같이 독립적 주해로 보기 어렵고 현존하는 판본들의 혼란으로 인해 연구 진행에 난점은 있다. 하지만 그가 林希逸의 『老子鬳齋口義』를 和譯하면서 강조점을 두었던 ‘無心’을 통해서 武士 社會의 특징을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老子鬳齋口義』의 특징으로 꼽히는 유도합일을 중심 논점으로 놓고 본다면, 林羅山의 『老子鬳齋口義』 수용이 불교가 중심을 이루었던 전국시대의 학풍을 유교 중심으로 쇄신에 그 목적이 있었다는 점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江戶幕府 초기의 儒敎 受容은 忠孝倫理의 이데올로기 강화를 통한 德川家의 장기적 지배구조 강화의 이념적 배경 형성에 그 동기가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본 연구는 「王夫之 『莊子解』「逍遙遊」 해석의 사상사적 의미」(『동양문화연구』13집, 2013.03)의 연구를 이어서 지극히 난해했던 『莊子解』「齊物論」연구를 통해서 王夫之는 ‘滑疑之耀’와 ‘寓庸’ 개념에 집중하고 있었고 이는 그의 역사비평의 莊子的 槪念化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老子』와 관련 ...
본 연구는 「王夫之 『莊子解』「逍遙遊」 해석의 사상사적 의미」(『동양문화연구』13집, 2013.03)의 연구를 이어서 지극히 난해했던 『莊子解』「齊物論」연구를 통해서 王夫之는 ‘滑疑之耀’와 ‘寓庸’ 개념에 집중하고 있었고 이는 그의 역사비평의 莊子的 槪念化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老子』와 관련된 연구, 곧 王夫之・林羅山・朴世堂 3인의 주석을 (그들의『老子』 주석 동기와 관련하여) 종합적으로 비교・연구하는 논의의 틀을 구성하였다. 이는 이후 ‘「왜, 유학자들은『老子』를 주목하였는가?」’(假題)라는 논문으로 구성할 계획이다. 아울러 王夫之의 『莊子解』 등의 원전에 대한 지속적 분석과 검토를 통해서 明末의 여타『莊子』 주석과의 비교 연구를 위한 학문적 토대구축에도 일정정도 시간을 할애할 예정이다. 그리고 연구 진행과 연구 정리 이후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지속성이라고 생각한다. 곧 본 연구가 1회성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동북아시아 노장 사상사 관련 문제를 환기해야 하는 점이 학문적 토대 구축의 측면에서 중요한 점이며, 이것이 연구 결과의 기대치로서 그리고 활용방안의 측면에 모두 부합하는 점일 것이다. 한편 본 연구는 현재까지 관련 연구를 진행하면서 王夫之가 생존했던 明末 淸初 당시에 그의 친우였던 方以智의『莊子』 주석인 『藥地炮莊』을 비롯하여 다양한『莊子』해석이 공존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는 현재 학계에서 부각되지 못한 주제로서 명말 사상사의 과제 및 개성을 규명하는 데에 일조를 기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같이 본 연구는 宋代 이후 老莊 해석의 역사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할 수 있는 학문적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는 이후 老莊 텍스트 내부의 槪念 解釋史에 대한 微視的 硏究를 거쳐서 차츰 각 시대별 老莊 解釋史의 특징을 조망하는 巨視的 硏究로 확산될 것이다. 당초 본 연구는 17세기 한중일 노장 해석의 사상사적 의미, 곧 노장 해석의 시대적 기능에 대한 점을 주요 연구 과제로 출발하였다. 그래서 2013년 2월 「王夫之 『莊子解』「逍遙遊」해석의 사상사적 의미」를 기고하면서 王夫之의『莊子』「逍遙遊」 解釋이 지니는 사회사상적 의미를 階級 이데올로기와 王政 合理化의 측면에서 규명하였는데, 이 과정에서『噩夢』의 ‘才力性情’과 『莊子解』「逍遙遊」의 ‘自得’・‘任自然’・‘物各還物’ 사이의 사상적 교차점이 논의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王夫之 『莊子解』「齊物論」 해석에서 부각되고 있는 ‘滑疑之耀’・‘寓庸’과 王夫之 역사비판 사이의 상호 연관성에 대한 가설도 수립하였다. 『老子』해석에 있어서 王夫之 朴世堂 林羅山 3인은 각자 상이한 동기에 의거하여 개성있는 해석을 진행했다. 王夫之의 경우 『老子』 해석사 비판과 그의 『老子』해석의 동기가 陽明 좌파에 대한 비판에 있다는 점을 논의하였다. 한편 조선 후기 사회의 朴世堂은 『老子』를 ‘淸靜無爲’의 정치 교과서로 규정하고 그 핵심 개념을 ‘修身治人’으로 지목하였다. 朴世堂의 『老子』해석에 대해서는 당쟁과 서인 노론의 주자절대화 비판에 그 동기가 있다는 점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林羅山의 그의 林希逸『老子鬳齋口義』 수용이 불교가 중심을 이루었던 전국시대의 학풍을 유교 중심으로 쇄신과 德川家의 장기적 지배구조 강화의 이념 형성에 그 목적이 있었다는 점을 거론하였다. 이후에도 이와 관련된 연구는 지속할 예정이다. 한편 본 연구를 지속하면서 王夫之와 朴世堂 등의 老莊 注釋書의 ‘老莊 注釋史的 흐름 속에서의 의미’라는 (사회사상사에 비하여) 다소 미시적 의미의 사상사적 주제 곧 ‘老莊 텍스트 注釋史’에 주목하게 되었다. 곧 본 연구 과정을 통해서 明代 老莊思想史는 平地突出이 아니고 宋代 老莊思想史의 연장선 속에서 그 사상사적 의미를 조망해야 한다는 사상사적 관점을 확립하였고, 이러한 내재적 성과는 향후 ‘동북아시아 노장사상사’ 연구에 지속적 추진 동력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고, 본 연구의 연구결과에 대하여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