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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대운하의 존폐 논쟁과 휘주 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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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 신진연구자지원사업(인문사회)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Project Number 2011-332-A00009
Year(selected) 2011 Year
Research period 1 Year (2011년 05월 01일 ~ 2012년 04월 30일)
chief of research 조영헌
Executing Organization 고려대학교
the present condition of Project 종료
Research Summary
  • Goal
  • 본 연구는 기본적으로 중국의 휘주 상인(徽州商人=徽商)에 관한 연구의 일환으로, 특히 그동안 성장의 화려한 모습에 비하여 간과되어 온 쇠락의 요인 및 양상을 분석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휘주 상인은 산서 상인(山西商人=晋商)과 함께 명․청 시대(1368∼1911) 중국 경제를 주도했던 양대 상방(商幇)으로 손꼽힌다. 특히 휘주 상인은 단 1개 부(府)를 지역적 단위로 삼으면서도 1개 성(省)을 단위로 하는 산서 상인, 복건 상인, 강서 상인 등 여타 상방보다도 두드러지고 인상적인 발전을 보였다. 또한 휘주 상인은 당시 경제발전의 최선진 지역인 강남(江南) 지역, 행정적으로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을 중심으로 거의 전국 각지를 그 활동무대로 삼았다. 따라서 휘주 상인의 성장 요인에 대해서는 기존에도 많은 연구자들이 관심을 가져 왔으며, 크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설명으로 요약이 가능하다.
    첫째는 유교적 문화지식의 우수성이다. 둘째는 관부(官府)와의 관계로, 휘상은 다른 어느 상방보다도 관부와의 관계가 밀접했으며 관부의 필요를 채워주는 능력이 우수했다는 것이다. 셋째로, 휘상은 종족 관념이 강하여 종족 조직을 이용한 상호부조의 조직망으로 각 지역에서 상권(商權)을 쉽게 장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설명 방식은 대부분 각 지역에 진출한 휘주 상인의 다양한 사례를 종합하면서 그 공통적인 성장 요인을 추출한 것으로, 휘주 상인의 다양한 발전양상을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휘주 상인의 화려한 성장 과정 및 활동상에 대한 연구가 일일이 열거하기 곤란할 정도로 수적인 축적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휘주 상인에 대한 궁금증이 모두 해소된 것은 결코 아니다. 특히 미시적인 입장에서 이루어진 성장사(成長史)에 관한 연구가 늘어날수록, “그렇게 인상적으로 성장해갔던 휘주 상인이 왜 그리 쉽게 몰락하고 말았던가”라는, 쇠락의 국면에 대해서는 아직 공백이 많다. 무엇보다 휘주 상인의 성장 요인이 19세기 그들의 쇠퇴 요인과 정합적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최근 대운하의 사회경제적 기능에 주목한 연구에 따르면, 대운하는 15∼18세기까지 휘주 상인의 성장 과정에 대단히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즉 휘주 상인의 위상 변화 과정에는 다양한 요인이 존재했지만, 여러 요인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대운하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대운하가 유통로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했던 19세기, 회․양 지역의 엘리트였던 휘주 상인은 어떤 변화를 맞이했는가? 그들은 황하의 범람으로 시작되어 대규모 전란으로 증폭된 대운하의 위기 및 회․양 지역의 쇠퇴라는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나갔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늘 역사에서 잘 주목받지 못했던 ‘쇠락’의 국면을 복원함으로써 가능하며, 이를 기반으로 명·청 시대 최대 상방으로 군림했던 휘주 상인의 성장과 쇠락을 일관되게 평가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것이다.

    이에 본 연구는 대운하의 기능 약화와 그 대처 방안을 둘러싼 논쟁을 검토하면서, 휘주 상인이 그 이전까지 향유했던 유리한 조건이 19세기에 접어들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분석하려고 한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대운하의 유지와 관련해 국가권력, 관료 집단, 지역사회, 운수노동자, 서구 세력 등 여러 집단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교차하고 분기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고자 한다.
  • Expectation Effectiveness
  • 본 연구는 19세기 휘주 상인의 쇠퇴 국면에 발생하는 다양한 사회경제적 현상을 파악하기 위한 첫 연구로, 대운하의 기능 저하와의 관련성을 주목하는 것이다. 본 연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첫째, 본 연구를 통해 어느 정도 주춤했던 휘주 상인 연구에 새로운 활력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기존에 휘주 상인의 쇠락 요인에 대해서는 ① 강운법(綱運法)에서 표법(票法)으로 변화했던 염운법(鹽運法)의 개혁으로 인한 염업 독점권의 상실, ② 휘주 상인의 소모적인 자본 소비 형태, ③ 태평천국 운동의 발발로 인한 양자강 유통로의 파괴 등이 주로 지적되었고, 이에 대해서는 비교적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에 덧붙여 본 연구자가 주목하는 바, 대운하의 기능 약화 및 새로운 유통로의 개발이라는 측면이 더해진다면, 휘주 상인의 쇠락 과정이 보다 입체적으로 드러날 뿐 아니라 쇠락 요인과 정합적으로 연결된 성장 요인에 대한 연구도 활기를 띄리라 기대한다.

    둘째, 19세기 휘주 상인의 쇠락에 주목하는 본 연구는 당시 새로운 경쟁 집단으로 대두하는 절강(浙江) 상인과의 비교 연구를 촉발할 것으로 예상된다. 15∼18세기까지 휘주 상인의 경쟁 상대는 주로 산서(山西) 상인이었으나, 19세기에 접어들면 해양 무역에 관한 오랜 노하우가 있기에 서구 열강과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절강 지역 등 연해 지역 출신 상인과의 경쟁이 불가피해졌다. 19세기 국내외적 경제 여건의 변화에 대한 절강 상인의 전략과 휘주 상인의 대응 방식은 어떻게 대별되는가? 본 연구의 결과는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필요한 판단 준거를 제공해줄 것이다.

    셋째, 본 연구 결과는 19세기 근대적인 유통로의 확산과 맞물려 진행된 다양한 도시 성쇠(盛衰)의 사례를 발굴하고 비교하는데 활용될 수 있다. 대운하의 쇠락과 맞물린 양주·진강(鎭江)의 쇠락은 동시기에 진행된 상해, 영파(寧波), 온주(溫州) 등 연해 도시의 성장과 큰 대조를 이룬다. 그렇다면 서구열강의 침략 노선이나 근대적 교역 체제로의 편입이 반드시 강남의 여러 도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며, 지리적인 위치나 상업 관행 및 새로운 교역 방식에 대한 대처 능력 등에 따라 도시의 명암이 엇갈렸다고 볼 수 있다. 기존의 연구가 상해, 영파를 비롯하여 19세기에 괄목상대하게 성장하는 ‘신’도시에 집중되어 있었으므로, 양주와 진강과 같은 ‘구’도시, 특별히 대운하 유통망에 종속된 도시군의 사례 연구를 통해 근대 도시 발전에 대한 다양한 담론과 비교 연구가 촉발되리라 기대한다.

    넷째, 19세기 서구 열강의 개입과 함께 무너져버린 대운하의 물류 시스템에 초점을 맞춘 본 연구의 방향은, 최근 새롭게 복원되고 있는 중국 대운하에 대한 이해 및 이를 확인하기 위한 현지답사에도 활용될 수 있다. 19세기 대운하를 중심으로 한 국가적 물류 체제가 와해되었던 국면을 고려할 때, 대운하가 21세기까지 남아있을 뿐 아니라 최근 새롭게 부각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다만 21세기의 대운하는 물류보다는 관광 자원으로 각광을 받는 것인데, 중국 정부는 현재 대운하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대대적인 재정비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남북으로 놓여있는 대운하를 동서로 뻗어 있는 만리장성과 연결하여 거대한 T자형 관광코스로 발전시킬 계획까지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강북(江北) 지역의 대운하 구간은 20세기에도 지속적인 준설과 확장을 거쳐 현재 주로 무거운 건설자재를 운송하는 유통로로서의 기능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강남 지방의 대운하를 볼 때나 중국 정부의 계산을 보면 역시 관광 자원으로서의 대운하로 가닥을 잡아가는 추세다. 만리장성이 본래의 기능이나 목적과는 상관없이 관광 상품으로 둔갑했듯, 이제 대운하에게 그러한 변화가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물론 본 연구는 19세기 역사적 현상에 대한 분석에 국한되어 있으나, 이는 21세기에 새롭게 복원되는 대운하 및 대운하의 여러 기능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 Summary
  • 장구한 역사를 가진 중국의 대운하 물류 시스템은 19세기에 막을 내렸다. 마침 19세기는 기선(汽船)과 철도(鐵道)와 같은 근대적인 운송수단이 도입되는 시기였으므로 점차 이용률이 감소했던 대운하는 마치 전근대적 운송로의 ‘잔재’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중국의 대운하 물류 시스템의 흥망성쇠에는 경제 논리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정치 논리가 개입되어 있다. 대운하가 지방에서 거둔 세량(稅糧)을 수도인 북경으로 운송하는 조운(漕運)을 위한 유일한 유통로로서 오랜 기간 기능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 대운하의 기능과 생명력은 조운 제도를 둘러싼 논쟁과 함께 평가할 때 그 전모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자연히 조운 논쟁에는 정치 논리와 경제 논리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상고주의(尙古主義)라고 할 만한 전통과 선례에 대한 존중의 논리도 개입되어 있다. 동시에 조운 논쟁에는 조운과 관련된 여러 집단의 이해관계가 착종되어 있는데, 이러한 이해관계가 외부적으로 여과 없이 노출된 시기가 바로 19세기였다. 18세기 말까지 큰 문제없이 유지되던 대운하 물류 시스템의 누적된 문제점이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하였을 뿐 아니라 내우외환의 위기까지 겹치면서 19세기 조운 제도에 일대 전환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19세기 조운 제도의 변화에 대해서는 그동안 선학들의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본 연구는 기존의 연구에서 부각되었던 각종 논쟁들을 정리하면서, 구체적으로 이러한 논쟁이 대운하라는 사회적 인프라와 어떠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지, 더 나아가 회·양 지역에서 군림했던 휘주 상인에게는 어떤 파급 효과를 미쳤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조운 논쟁은 구체적으로 조운 제도에 대한 근본적 개혁안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기보수리론(畿輔水利論)과 해운론(海運論)이라는 두 논쟁점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기보수리론이란 북방 지역을 개발함으로써 물자 수급의 자급률을 높이는 방안으로, 4백여 년간 이어져오던 대운하 물류 시스템을 완전히 방기하는 대신 그동안 개간되지 않던 지역을 개간하고 징세 체계를 바꾸자는 대단히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방안이었다. 다만 기보수리론과 연결되어 제기된 조부(漕賦)의 절징(折徵)은 의화단의 난으로 서구열강과 체결한 신축조약(辛丑條約) 이후 막대한 배상금을 마련하기 위해 1901년에야 시행되었다[漕糧改折詔]. 하지만 당시는 이미 청조의 패망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으로, 사실상 조운 제도가 폐지되는 국면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해운론은 강남 지방의 조량을 대운하가 아니라 바닷길을 통해 북경 인근의 천진까지 운송하자는 주장이다. 기보수리론이 조운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안이라고 한다면, 해운론은 운하를 이용하는 하운론(河運論)과 어느 정도 병행을 모색하고 있는 절충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방안이라 할 수 있다. 1826년 ‘실험적’으로 실시된 해도(海道) 조운은 그 시작이었고, 1855년부터는 조량 해운의 수단으로 기선이 범선(帆船)과 함께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범선을 이용하던 해운에서 기선을 이용하는 해운으로 변화된 것이다. 이후 적어도 물류 측면에서 해운이 하운보다 경제적이라는 사실이 널리 인식되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 철도의 보급으로 대운하의 기능은 더욱 약화되었다.

    이처럼 대운하를 이용한 국가적 물류가 와해되면서, 휘주 상인의 근거지였던 회·양 지역의 경제는 급속하게 침체되었다. 19세기 전반에 발생했던 두 현상, 즉 회․양 지역 경제의 쇠퇴와 대운하의 단절은 바로 같은 시기부터 시작된 휘주 상인의 쇠락을 해석하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물자유통의 쇠락으로 인한 지역 경제의 몰락이 곧 그 지역을 근거로 활동하던 상인들의 성쇠를 해석하는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휘주 상인은 그 와중에 사업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상당수는 소주와 항주 및 새롭게 성장하는 상해로 진입하여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였다. 하지만 이미 이러한 지역에는 절강성 출신의 소흥 상인들이 19세기 전반기부터 진출하여 기반을 마련해 놓았으므로, 19세기 후반에 새로운 경쟁력을 확보하기는 대단히 어려웠다. 물론 그 중 일부는 20세기 전반까지 사업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나, 대부분의 휘주 상인은 대운하의 종말과 함께 상업계에서의 주도권을 잃고 중소 상인으로 전락하고 강남의 여러 도시로 흩어졌다.
  • Korean Keyword
  • 철도,기선,구생선,대운하,소흥 상인,조운,남순,회양 지역,기보(畿輔) 수리사업,해금 정책,해운,소주,상해,양주,북경,하공,신사,휘주 상인,자연재해,세관,공익사업
  • English Keyword
  • natural disaster,steamship,irrigation works of the capital region,sea transportation,gentry,the transport system of the grain tribute,hydraulic management,southern tour,Beijing,Huai-Yang region,Yangzhou,Shanghai,Suzhou,Huizhou merchants,grand canal,Shaoxing merchants,maritime ban policy,railroad,life-saving boats,customs,merchant philanthropy
Research Summary
  • Korean
  • 본 연구는 자연재해 및 행정력의 급속한 약화로 인한 19세기 대운하의 기능 저하와 휘주 상인의 몰락 사이의 상관 관계를 검토한다. 이를 위해 기선과 철도의 등장, 치수 체계를 다시 회복하려는 청조의 다양한 행정적 노력, 서구 세력의 후원에 기인한 상해의 급속한 성장, 그리고 염업 이외의 대체 산업을 찾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휘주 상인의 양태도 함께 고려된다.
  • English
  • This research seeks to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rocess of deterioration of the Grand Canal and the fall of Huizhou merchants during the 19th century. The advent of steamship and railway, several administrative efforts to recover the hydraulic system, the rapid development of Shanghai city sponsored by Western power, and desperate endeavour of Huizhou merchants to find alternative business will be discussed in this research too.
Research result report
  • Abstract
  • 장구한 역사를 가진 중국의 대운하 물류 시스템은 19세기에 막을 내렸다. 마침 19세기는 기선(汽船)과 철도(鐵道)와 같은 근대적인 운송수단이 도입되는 시기였으므로 점차 이용률이 감소했던 대운하는 마치 전근대적 운송로의 ‘잔재’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중국의 대운하 물류 시스템의 흥망성쇠에는 경제 논리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정치 논리가 개입되어 있다. 대운하가 지방에서 거둔 세량(稅糧)을 수도인 북경으로 운송하는 조운(漕運)을 위한 유일한 유통로로서 오랜 기간 기능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 대운하의 기능과 생명력은 조운 제도를 둘러싼 논쟁과 함께 평가할 때 그 전모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자연히 조운 논쟁에는 정치 논리와 경제 논리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상고주의(尙古主義)라고 할 만한 전통과 선례에 대한 존중의 논리도 개입되어 있다. 동시에 조운 논쟁에는 조운과 관련된 여러 집단의 이해관계가 착종되어 있는데, 이러한 이해관계가 외부적으로 여과 없이 노출된 시기가 바로 19세기였다. 18세기 말까지 큰 문제없이 유지되던 대운하 물류 시스템의 누적된 문제점이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하였을 뿐 아니라 내우외환의 위기까지 겹치면서 19세기 조운 제도에 일대 전환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19세기 조운 제도의 변화에 대해서는 그동안 선학들의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본 연구는 기존의 연구에서 부각되었던 각종 논쟁들을 정리하면서, 구체적으로 이러한 논쟁이 대운하라는 사회적 인프라와 어떠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지, 더 나아가 회·양 지역에서 군림했던 휘주 상인에게는 어떤 파급 효과를 미쳤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조운 논쟁은 구체적으로 조운 제도에 대한 근본적 개혁안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기보수리론(畿輔水利論)과 해운론(海運論)이라는 두 논쟁점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기보수리론이란 북방 지역을 개발함으로써 물자 수급의 자급률을 높이는 방안으로, 4백여 년간 이어져오던 대운하 물류 시스템을 완전히 방기하는 대신 그동안 개간되지 않던 지역을 개간하고 징세 체계를 바꾸자는 대단히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방안이었다. 다만 기보수리론과 연결되어 제기된 조부(漕賦)의 절징(折徵)은 의화단의 난으로 서구열강과 체결한 신축조약(辛丑條約) 이후 막대한 배상금을 마련하기 위해 1901년에야 시행되었다[漕糧改折詔]. 하지만 당시는 이미 청조의 패망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으로, 사실상 조운 제도가 폐지되는 국면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해운론은 강남 지방의 조량을 대운하가 아니라 바닷길을 통해 북경 인근의 천진까지 운송하자는 주장이다. 기보수리론이 조운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안이라고 한다면, 해운론은 운하를 이용하는 하운론(河運論)과 어느 정도 병행을 모색하고 있는 절충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방안이라 할 수 있다. 1826년 ‘실험적’으로 실시된 해도(海道) 조운은 그 시작이었고, 1855년부터는 조량 해운의 수단으로 기선이 범선(帆船)과 함께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범선을 이용하던 해운에서 기선을 이용하는 해운으로 변화된 것이다. 이후 적어도 물류 측면에서 해운이 하운보다 경제적이라는 사실이 널리 인식되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 철도의 보급으로 대운하의 기능은 더욱 약화되었다.

    이처럼 대운하를 이용한 국가적 물류가 와해되면서, 휘주 상인의 근거지였던 회·양 지역의 경제는 급속하게 침체되었다. 19세기 전반에 발생했던 두 현상, 즉 회․양 지역 경제의 쇠퇴와 대운하의 단절은 바로 같은 시기부터 시작된 휘주 상인의 쇠락을 해석하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물자유통의 쇠락으로 인한 지역 경제의 몰락이 곧 그 지역을 근거로 활동하던 상인들의 성쇠를 해석하는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휘주 상인은 그 와중에 사업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상당수는 소주와 항주 및 새롭게 성장하는 상해로 진입하여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였다. 하지만 이미 이러한 지역에는 절강성 출신의 소흥 상인들이 19세기 전반기부터 진출하여 기반을 마련해 놓았으므로, 19세기 후반에 새로운 경쟁력을 확보하기는 대단히 어려웠다. 물론 그 중 일부는 20세기 전반까지 사업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나, 대부분의 휘주 상인은 대운하의 종말과 함께 상업계에서의 주도권을 잃고 중소 상인으로 전락하고 강남의 여러 도시로 흩어졌다.
  • Research result and Utilization method
  • 첫째, 본 연구를 통해 어느 정도 주춤했던 휘주 상인 연구에 새로운 활력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기존에 휘주 상인의 쇠락 요인에 대해서는 ① 강운법(綱運法)에서 표법(票法)으로 변화했던 염운법(鹽運法)의 개혁으로 인한 염업 독점권의 상실, ② 휘주 상인의 소모적인 자본 소비 형태, ③ 태평천국 운동의 발발로 인한 양자강 유통로의 파괴 등이 주로 지적되었고, 이에 대해서는 비교적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에 덧붙여 본 연구자가 주목하는 바, 대운하의 기능 약화 및 새로운 유통로의 개발이라는 측면이 더해진다면, 휘주 상인의 쇠락 과정이 보다 입체적으로 드러날 뿐 아니라 쇠락 요인과 정합적으로 연결된 성장 요인에 대한 연구도 활기를 띄리라 기대한다.
    둘째, 19세기 휘주 상인의 쇠락에 주목하는 본 연구는 당시 새로운 경쟁 집단으로 대두하는 절강(浙江) 상인과의 비교 연구를 촉발할 것으로 예상된다. 15∼18세기까지 휘주 상인의 경쟁 상대는 주로 산서(山西) 상인이었으나, 19세기에 접어들면 해양 무역에 관한 오랜 노하우가 있기에 서구 열강과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절강 지역 등 연해 지역 출신 상인과의 경쟁이 불가피해졌다. 19세기 국내외적 경제 여건의 변화에 대한 절강 상인의 전략과 휘주 상인의 대응 방식은 어떻게 대별되는가? 본 연구의 결과는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필요한 판단 준거를 제공해줄 것이다.
    셋째, 본 연구 결과는 19세기 근대적인 유통로의 확산과 맞물려 진행된 다양한 도시 성쇠(盛衰)의 사례를 발굴하고 비교하는데 활용될 수 있다. 대운하의 쇠락과 맞물린 양주·진강(鎭江)의 쇠락은 동시기에 진행된 상해, 영파(寧波), 온주(溫州) 등 연해 도시의 성장과 큰 대조를 이룬다. 그렇다면 서구열강의 침략 노선이나 근대적 교역 체제로의 편입이 반드시 강남의 여러 도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며, 지리적인 위치나 상업 관행 및 새로운 교역 방식에 대한 대처 능력 등에 따라 도시의 명암이 엇갈렸다고 볼 수 있다. 기존의 연구가 상해, 영파를 비롯하여 19세기에 괄목상대하게 성장하는 ‘신’도시에 집중되어 있었으므로, 양주와 진강과 같은 ‘구’도시, 특별히 대운하 유통망에 종속된 도시군의 사례 연구를 통해 근대 도시 발전에 대한 다양한 담론과 비교 연구가 촉발되리라 기대한다.
    넷째, 19세기 서구 열강의 개입과 함께 무너져버린 대운하의 물류 시스템에 초점을 맞춘 본 연구의 방향은, 최근 새롭게 복원되고 있는 중국 대운하에 대한 이해 및 이를 확인하기 위한 현지답사에도 활용될 수 있다. 19세기 대운하를 중심으로 한 국가적 물류 체제가 와해되었던 국면을 고려할 때, 대운하가 21세기까지 남아있을 뿐 아니라 최근 새롭게 부각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다만 21세기의 대운하는 물류보다는 관광 자원으로 각광을 받는 것인데, 중국 정부는 현재 대운하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대대적인 재정비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남북으로 놓여잇는 대운하를 동서로 뻗어 있는 만리장성과 연결하여 거대한 T자형 관광 코스로 발전시킬 계획까지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록 강북(江北) 지역의 대운하 구간은 20세기에도 지속적인 준설과 확장을 거쳐 현재 주로 무거운 건설자재를 운송하는 유통로로서의 기능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강남 지방의 대운하를 볼 때나 중국 정부의 계산을 보면 역시 관광 자원으로서의 대운하로 가닥을 잡아가는 추세다. 만리장성이 본래의 기능이나 목적과는 상관없이 관광 상품으로 둔갑했듯, 이제 대운하에게 그러한 변화가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물론 본 연구는 19세기 역사적 현상에 대한 분석에 국한되어 있으나, 이는 21세기에 새롭게 복원되는 대운하 및 대운하의 여러 기능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 Index terms
  • 대운하, 휘주 상인, 소흥 상인, 조운, 하공, 남순, 북경, 회양 지역, 양주, 상해, 소주, 해운, 해금 정책, 기보(畿輔) 수리사업, 철도, 기선, 구생선, 공익사업, 세관, 자연재해
  • Research Achievements 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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