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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 전쟁과 바다의 민족들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학문후속세대양성_시간강사(인문사회)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1-35C-A00103
선정년도 2011 년
연구기간 1 년 (2011년 09월 01일 ~ 2012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오흥식
연구수행기관 서강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1. 연구의 목표

    1) 연구주제
    이 연구주제는 기원전 1200년경에 벌어진 트로이 전쟁을 ‘바다의 민족들(the Sea Peoples)’의 활동과 연계시킴으로써 그 전쟁이 바다의 민족들의 활동 중의 일부였음을 구명(究明)하는 것이다. ‘바다의 민족들’이라는 용어는 파라오 메르네프타 재위 5년째 (기원전 1232년)의 공적을 기록한 카르낙 신전의 비문과 람세스 3세 재위 5년 (기원전 1194년)에 기록된 테베의 메디네트 하부 신전의 비문에 나온다. ‘바다의 민족들’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Iḳwš(아카아와샤), Trš(테레시), Lk(루카), Šrdn (쉐르덴), Škrš (쉐클레시). Prst(페레세트), T̠kr(체케르), Šklš(=Škrš), Dnn(데니엔), Wšš(우셰쉬). 바다의 민족들은 히타이트 제국을 멸망시키고 레반트의 해안 국가들을 일시적으로 파괴하였다. 이집트는 살아남았으나, 간신히 그리고 훨씬 약해져서 살아남았다. 이들의 준동은 동(東) 지중해권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고 결국에는 기원전 1100년 경 동 지중해권의 청동기 문명이 종말을 맞는 단초가 된다. 이 연구는 바다의 민족들의 주 세력이 미케네 그리스인들이고, 트로이 전쟁은 그 준동의 과정에서 발생한 전쟁임을 밝히고자 한다.
    트로이 원정을 바다의 민족들과 연관시켜 연구하기 시작하는 경향이 오리엔트를 연구하는 소수의 서양 학자들 사이에 진행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이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트로이 원정을 바다의 민족들과 연관시켜 동 지중해권이라는 넓은 배경 속에서 연구한다면 이 전쟁의 의미에 관해 좀 더 정확하고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선행연구와의 비교
    트로이 전쟁은 주로 미케네 그리스와 트로이 사이의 전쟁으로만 연구되어 왔다. 최근에는 히타이트학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힘입어 이 전쟁의 배후에는 트로이를 봉신국으로 거느리고 있었던 히타이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강대국 히타이트가 약화되면서 힘이 균형이 깨져 발생한 것으로 고대그리스사 전공학자들에게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본 연구주제는 트로이 전쟁에 히타이트만이 관련된 것이 아니라, 동 지중해권 전체가 관련되어 있음을 밝혀내는 데에 그 참신성이 있다. 그런데 일찍이 애스터, 올브라이트, 바넷 같은 오리엔트학 학자들이 바다의 민족들에는 미케네 그리스인이 포함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최근에는 <블랙 아테나: 서양 고전문명의 아프리카·아시아적 뿌리>의 저자 마틴 버낼도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트로이 전쟁을 동 지중해권이라는 큰 테두리 속에서 연구하는 경향은 아직 서양의 학계에서도 소수의 학자들이 시도를 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그리스사를 전공하는 연구자들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트로이 전쟁을 연구하는 학자는 극소수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 연구과제와 간접적으로 관련된 논문은 송문현의 「트로이 전쟁―전승과 증거 사이」(󰡔서양고대사연구󰡕 21집, 2007.12)가 거의 유일하다. 이 논문은 서양의 히타이트학 학자들의 최근 연구성과를 끌어들여 국내 최초로 히타이트 외교문서를 통해 트로이, 히타이트, 미케네 그리스 사이의 관계사를 포괄적이면서도 세밀하게 다루면서 트로이 전쟁의 배경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 미케네 그리스인들이 바다의 민족들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가능성이 이 논문의 주제는 아니기는 하다―이 한 쪽 정도의 분량으로 시사되고 있을 뿐이다.
  • 기대효과
  • 4. 기대효과

    1) 연구결과의 학문적 기여도
    고대 그리스 문명의 형성에 관한 정통론 중의 하나는 ‘자생론’으로 그리스 문명은 외부의 영향 없이 그리스인들 스스로가 형성했다는 설이다. 정통론 중의 또다른 하나는, 만약 외부의 영향을 받았다면, ‘북쪽으로부터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로서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서양 인종인 아리아 인종의 영향을 강조한다. 이러한 정통론에는 서양문명의 한 기둥인 그리스 문명이 결국 동 지중해권에 위치한 레반트와 이집트 등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유럽중심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그 기저에 깔려있다. 서양문명을 떠받치는 한 기둥인 헬레니즘이 유색인종들인 페니키아의 셈족이나 이집트의 함족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인종주의가 그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리스는 동 지중해권에 위치해있으면서도 동 재중해권의 다른 지역과는 고립된 지역으로 받아들여져왔던 것이다. 정통론에 따르면, 고대그리스가 기원전 8세기에야 페니키아 알파벳의 전래를 시발점으로 삼아 동 지중해권과 접촉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트로이 전쟁과 바다의 민족들>이라는 연구주제는 관계사적 차원에서 기원전 1200년경의 트로이 전쟁의 원인과 의미를 동 지중해권이라는 좀 더 넓은 지역을 단위로 삼아 구명하고자 한다. 청동기 시대 말 동 지중해권을 혼란에 빠뜨렸던 바다의 민족들에 미케네 그리스인들이 포함되었으며 트로이 전쟁도 바다의 민족들의 활동의 일부로서 발발한 전쟁임을 주장하고자 한다. 관계사적 차원에서 트로이 전쟁을 다룬다는 것은 기존의 그리스사 연구에 내재된 유럽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 트로이 전쟁의 역사적 실체를 구명하는 데에 기여할 것이다.

    2) 교육과의 연계활용방안:
    트로이 전쟁은 대학생은 물론 중·고등학생도 친숙하게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그 전쟁이 단순히 미케네 그리스와 트로이 사이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히타이트와의 갈등, 더 나아가서는 동 지중해권 전체와 관련하여 벌어진 전쟁이라는 사실은 학생들에게 그리스를 고립된 지역으로서가 아니라 동 지중해권과 관련을 맺고 있는 지역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유럽중심주의적인 시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그리스 신화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하는 데에도 활용될 수 있다. 트로이 전쟁에 관한 고대그리스인들의 기록들은 주로 역사와는 관계가 없는 신화로 취급되어왔다. 그러나 바다의 민족들의 활동에 관한 오리엔트의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증거가 고대그리스인들의 기록과 대체로 일치한다고 한다면, 그리스 신화를 역사적 실체를 담고 있는 사료로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 그리스 신화란 디오도로스 같은 고대그리스인들에게 기원전 1100년경 “도리스족 침입 이전의 그리스 역사”였다. 그리스 신화를 사료로서 취급한다는 것 또한 유럽중심주의적 시각이 얼마나 깊게 기존의 그리스 고대사 연구에 깔려있는가를 학생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저자들이 기록하고 있는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미케네 문명은 기원전 1500년경 이집트나 페니키아로부터 온 다나오스―페르세우스와 헤라클레스의 조상이다―나 카드모스 같은 오리엔트의 정복자들이 그리스 땅에 식민왕조를 만들고 그리스인들을 수 세기간 통치하는 과정에 형성된 것이다. 마틴 버낼 같은 학자는 그의 저서 󰡔블랙 아테나󰡕에서 그리스 신화가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19세기와 20세기의 서양학자들은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또는 유럽중심주의적 관점에서 그리스 신화를 허구로 몰아부쳤다고 주장한다.
  • 연구요약
  • I. 머리말
    트로이 전쟁의 원인을 놓고 주장된 기존의 두 학설은 다음과 같다. 트로이 전쟁은 에게 해에서 흑해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잡아 번영을 맞은 트로이를 미케네 그리스인들이 약탈하기 위해 행한 전쟁이었다고 오랫동안 주장되어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소아시아 서부 해안을 놓고 히타이트와 대치하던 미케네 그리스가 히타이트의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히타이트의 봉신국이었던 트로이를 장악하여 해안 지역 전체를 차지하기 것이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라고 주장된다.
    본 연구는 트로이 전쟁의 원인 또는 의미를 좀 더 넓은 범주인 동 지중해권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던 바다의 민족들과 연결시켜 찾으려 한다. 바다의 민족들이 이집트에 침입하려 하였으나 격퇴되었다는 기록이 파라오 메르네프타 5년(기원전 1232년)과 람세스 3세 5년(기원전 1194년)에 제작된 두 승전비에 기록되어 있다. 이 연구의 목적은 트로이 전쟁이 두 침입사건의 사이에 벌어졌으며, 두 침입 사건 모두에 미케네 그리스인들이 관여되었으며, 동 지중해권의 차원에서 트로이 원정은 바다의 민족들로서 미케네 그리스인들이 벌였던 활동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데에 있다.

    II. 트로이 전쟁 이전, 미케네 그리스인들과 바다의 민족들
    이집트측 사료와 그리스의 전승을 통해 미케네 그리스인들이 파라오 메르네프타 치세에 이집트에 침입을 시도한 바다의 민족들의 하나였음을 제시하려 한다. 예를 들면, 그 파라오의 승전비에는 이집트 침입을 기도했던 다섯 바다의 민족들 중의 한 민족으로 ʼIḳwš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모음을 삽입하면 알파벳으로는 Akawasha, Akaiwasha, Ekwesh로 다양하게 재구성해낼 수 있는데, 이들을 미케네 그리스인들의 다른 명칭인 Achaioi(아카이오이, 즉 아카이아인들)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여기서는 그러한 주장의 근거들을 소개하고, 그리스 사료 중에서 트로이 전쟁 이전 바다의 민족들의 활동으로 볼 수 있는 미케네 그리스인들의 활동을 분석해볼 것이다.

    III. 귀향하는 트로이 원정군과 바다의 민족들
    트로이 원정군은 승전 후 곧바로 그리스로 귀향하지 않고 이집트와 에게 해 지역의 섬들에 침입한다. 귀향자들의 대부분은 해로를 택하지만 일부는 육로를 취한다. 귀향자들이 이집트를 침입하려 했던 바다의 민족들의 주요 세력이었음을 논증하려 한다. 히타이트측과 이집트측의 기록을 통해, 그리고 특히 그리스측 기록을 세밀히 분석하여 그들이 취한 해로와 육로를 추적할 것이다.

    IV. 맺음말
    바다의 민족들에는 그리스인들이 주요세력이었다는 결론을 근거로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해보려 한다. 트로이 원정군은 트로이를 함락한 후, 트로이에 주둔하지 않고 왜 육해로를 통해 키프로스, 페니키아, 이집트 쪽으로 남하하다가 결국 파라오로부터 이집트 접경인 가나안 해변에 정착지를 받고 정착한다. 그런데 그리스에서 제작된 도기 LHIIIA와 B(이 유형의 도기는 대략 1470-1220 BC에 사용되었다)는 히타이트 제국을 제외한 동 지중해권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발굴되었다. 그리스의 도기의 확산이 ‘미케네의 평화(Pax Mycenaeaca)’의 결과였는지, 아니면 ‘이집트의 평화(Pax Aegyptiaca)’의 결과였는지 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기원전 1470년부터 1370년까지 이집트가 그 지역에서 지배적인 세력이었고 기원전 13세기 말까지도 군사적·정치적·문화적으로 중요한 세력으로 남았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교역과 번영이 ‘이집트의 평화(Pax Aegyptiaca)’ 하에 일어났다고 가정하는 것이 더 타당하게 보인다. 미케네 그리스가 이집트로부터 수입한 물품 중에는 식량이 중요한 물품이었을 것이다(그리스는 척박한 지역이라 고전기에도 흑해 등지에서 식량을 수입하였다). 그런데 ‘이집트의 평화’가 와해되면서 동 지중해권의 교역망도 작동되지 않아 미케네 그리스는 이집트로부터 더 이상 식량을 수입할 수 없었고, 외부로부터의 식량수입에 의존한 미케네 문명이 와해되어 가는 중에 그리스인들이 바다의 민족들의 일부가 되어 이집트로 향하였을 가능성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 한글키워드
  • 유럽중심주의,동 지중해권,바다의 민족들,트로이 전쟁,이집트의 평화
  • 영문키워드
  • Eurocentrism,Trojan War,Sea Peoples,East Mediterranean,Pax Aegyptiaca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호메로스는 <일리아스ΙΛΙΑΣ>에서 그리스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 스파르타 메넬라오스의 왕비 헬렌을 되찾기 위해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다고 시인답게 원인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소아시아의 내륙에 자리잡았던 히타이트 제국(1700-1200 BC)의 문서가 해독되고 연구되면서 역사가들은 히타이트 문서의 아키야와(Ahhiyawa)를 그리스의 아카이아인들(그리스어의 Achaioi, 영어로 Achaeans)로 보고, 소아시아 서부 해안을 놓고 히타이트와 대치하던 미케네 그리스(청동기 시대의 그리스)가 히타이트의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히타이트의 봉신국이었던 트로이--히타이트는 트로이를 기지로 삼아 소아시아의 그리스인들을 제어하고 있었다--를 장악하여 해안 지역 전체를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트로이 원정의 원인을 더 넓은 차원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기원전 1200년 경 동(東)지중해를 혼란에 빠뜨려서 청동기 시대를 실질적으로 막내리게 했던 ‘바다의 민족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바다의 민족들과 그리스인들을 연계시키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이 논문도 이러한 시도 중의 하나로, 트로이 원정 직후의 노스토이(Nostoi, 트로이로부터 귀향하는 그리스군)의 활동이 파라오 메르네프타와 라메세스 3세 때 이집트에 침입한 바다의 민족들에 포함되어 있음을 주장하려 한다. 그런데 이 주장 자체는 새로운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으나, 이집트 비문에 기록된 아카이와샤와 데니엔이 구체적으로 어떤 그리스인인지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여기서는 그리스 연표와 이집트 연표를 좀 더 세밀하게 연계시키고 트로이 전쟁 후에 노스토이들이 세운 나라들의 활동을 바다의 민족들의 활동과 연계시켜 아카이와샤와 데니엔의 정체를 좀 더 구체적으로 구명하는 데에 그 목표를 두고 있다.
    연구자가 다달은 결과는 다음과 같다. 트로이 원정을 이집트와 연계시켜 연구할 경우, 대단히 어려운 과제가 그리스 연표와 이집트 연표를 맞추는 작업이다(두 지역의 연표도 각각 여럿이다). 우선 두 지역의 연표를 맞추기 위해, 기원전 3세기에 기록된 <파로스 연대기>가 말하는 트로이 전쟁의 시기 기원전 1218-1209년을 믿을 만하다고 연구자의 믿음으로부터 연구를 시작하였다(그런 믿음의 근거는 본문에서 언급된다).
    이집트에 침입한 바다의 민족들 중에 이집트 비문에서 언급된 아카이와샤(’Iḳwš, Akaiwasha)와 데니엔(Dnn, Denyen)이 그리스인들이라고 보는 데에는 학자들 사이에 큰 이견이 없다. 이집트 기록에 따르면, 메르네프타 5년에 아카이와샤가, 30년쯤 후 라메세스 3세 8년에 데니엔이 침입하였다. 트로이를 공격한 그리스인들이 그리스측 사료에서는 ‘아카이오이(Achaioi)’로, 히타이트 사료에서 ‘아키야와(Ahhiyawa)’로 기록되었다면, 이집트 사료의 ‘아카이와샤’가 앞의 두 발음과 비슷한 발음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연구자는 트로이가 함락된 후 ‘아카이오이’인들이 이집트를 침입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을 두 지역의 연표로 맞출 수 있을까? 이집트 신왕국 연표로 학자들에게 많이 사용되는 것은 <캠브리지 고대사(Cambridge Ancient History)>(1973)의 연표와 <옥스퍼드 고대이집트사(Oxford History of Ancient Egypt)>(2000)의 연표이다. 연구자는 <옥스퍼드 고대이집트사>의 신왕국 연표가 더 믿을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았고, 그 연표에 따르면 아카이와샤의 침입연도는 1208년이니 <파로스 연대기>에 따르면 트로이 원정이 1209년에 끝나고 1년 후에 아카이아인들이 이집트에 침입한 셈이 되어, 연대적으로 잘 들어맞는다. 그렇다면 라메세스 3세 8년에 침입한 것은 데니엔이고 그 연도는 <옥스퍼드 이집트사>에 따르면 기원전 1176년이 된다.
    학자들 사이에 아카이와샤와 데니엔이 그리스인일 것이라는 데에는 대체로 일치된 생각을 지니고 있지만, 그 차이가 명확히 제시되지는 않았다. 연구자의 이 연구에 따르면, 미묘한 차이가 있다. 아카이와샤가 히타이트어의 아키야와, 그리스어의 아카이오이와 관련된 것이라면, 아카이와샤는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던, 아카이오이인들을 비롯한 여타 그리스인들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데니엔은 트로이 전쟁 때 아르고스 왕 암필로코스가 이끌어던 아르고인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트로이가 함락된 후에도 암필로코스는 아르고스인들을 이끌고 킬리키아의 말로스(Mallus)에까지 이동하여 클라로스의 예언자 모프소스Mopsus와 함께 나라를 세웠다. 후에 그리스 저자들에 따르면, 말로스의 아르고스인들은 시리아, 페니키아에까지 이동하였다. 연구자는 이들 아르고스인들이 바다의 민족들의 하나로서 이집트를 침입했다고 본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아르고스는, 󰡔파로스 연대기󰡕에 따르면, 기원전 1511년 다나오스(Danaos)는 아르고스에 도래하여 나라를 세웠고 아르고스인들을 다나오이Danaoi(‘다나오스의 백성’이라는 뜻)로 명명하였고, 그후 다나오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었다. 아르고스 왕 암필로코스가 이끌었던 아르고스인들, 곧 다나오이인들이 이집트에 침입했다면, 이집트인들은 이들을 Dnn(Denyen, 데니엔)으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 영문
  • Abstract

    Homer says that the Trojan War broke out to get back Helen, the most beautiful woman in Greece. However, since documents from the Hittite empire (1700-1200 B.C) were deciphered and studied, many of the scholars identify Ahhiyawa in the Hittite documents with the Achaeans and argue that the Achaeans made war with the Troy, the vassal city of the Hittite, when the Hittite Empire was weakened in the second half of the thirteenth century.
    In recent years, there has been an attempt to find the cause of the Trojan War in the wider dimension. An attempt is under way to link the Greeks with the Sea Peoples, who plunged the eastern Mediterranean in chaos around 1200 BC and ended substantially the Bronze Age. This paper will argue that the activities of nostoi (the Greek army going home from Troy) after the Trojan War include the invasions of the Sea Peoples. There is not in disagreement among scholars to see Akaiwasha and Denyen, two of Sea Peoples recorded in Egyptian inscriptions, as Greeks. According to Egyptian records, Akaiwasha invaded Egypt in Merneptah's third year, Denyen in Ramses' 8th year about thirty years after the first invasion.
    But the difference between Akaiwasha and Denyen is controversial among scholars. This paper tries to identify Akaiwasha and Denyen more specifically by linking the Greek chronology with the Egyptian, and the activities of the nostoi with the activities of Sea Peoples, especially using Greek sources in detail.
    The results which this paper has reached are summarized as follows. When one studies the Trojan War in connection with the Sea Peoples, it is very difficult task to connect the Greek chronology with the Egyptian (Ancient Greece and Egypt have several chronologies respectively). To fit the chronologies of the two regions with each other, first of all I accept the date of the Parian Marble (inscribed in the third century B.C.), which has some reasons to trust. It says that the Trojan War took place 1218-1209 BC.
    The Greeks who attacked Troy were recorded as 'Achaioi' in Greek and 'Ahhiyawa' in Hittite. As 'Akaiwasha' in Egyptian inscription has pronunciation (Akaiwasha) similar to the previous two, I came to reasoning that Achaioi have invaded Egypt after the fall of the Trojan War. Could this conjecture fit in terms of the chronology?
    The Egyptian New Kingdom chronologies which are used most among the scholars are those in Cambridge Ancient History (1973) and Oxford History of Ancient Egypt (2000). I consider the chronology of the latter more reliable on the basis of some reasons, according that chronology the intrusion of Akaiwasha is the year of 1208 B. C. As the Trojan expedition ended in 1209 BC (according to the Parian Marble) and the Achaeans invaded Egypt one year after, it fits chronologically. Then Denyen invaded Egypt in Rameses III's eighth year, the year of 1176 BC according to Oxford History of Ancient Egypt.
    There is a consensus of opinion among scholars that Akaiwasha and Denyen were Greeks, but the differences between two peoples are not presented clearly. There are subtle differences between the two according to this paper. Akaiwasha referred to all the Greeks, including Achaeans, who fought in the Trojan War. Denyen were closely related with the Argives, whom Amphilochus the King of Argos led in the Trojan War. After the capture of Troy Amphilochus moved to Mallus in Cilicia, and founded a country there (with Mopsus the prophet of Clarus and Colophon). Later the Argives from Mallus moved to Syria, even to Phoenicia according to Greek writers. I reasoned that these Argives invaded Egypt as Denyen, one of Sea Peoples, because the Argives had been called Danaoi (Danaans) by Greek writers since Danaus founded a country in Argos in 1511 BC according to Parian Marble. It is likely that Egyptians recorded these Danaoi (Danaans) as Dnn (Denyen) in Egyptian hieroglyph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호메로스는 <일리아스 ΙΛΙΑΣ>에서 그리스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왕비 헬렌을 되찾기 위해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다고 시인답게 원인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히타이트의 문서가 해독되고 연구되면서 역사가들은 히타이트 문서의 아키야와(Ahhiyawa)를 그리스의 아카이아인들(Achaeans)로 보고, 소아시아 서부 해안을 놓고 히타이트와 대치하던 미케네 그리스가 히타이트의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히타이트의 봉신국이었던 트로이를 장악하여 해안 지역 전체를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트로이 원정의 원인을 더 넓은 차원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기원전 1200년 경 동지중해를 혼란에 빠뜨려서 청동기 시대를 실질적으로 막 내리게 했던 ‘바다의 민족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바다의 민족들과 그리스인들을 연계시키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이 논문도 이러한 시도 중의 하나로, 트로이 원정 직후의 노스토이(nostoi, 트로이로부터 귀향하는 그리스군)의 활동이 파라오 메르네프타와 라메세스 3세 때 이집트에 침입한 바다의 민족들에 포함되어 있음을 주장하려 한다. 그런데 이 주장 자체는 새로운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으나, 이집트 비문에 기록된 아카이와샤(’IḳwšAkaiwasha) 그리고 데니엔(DnnDenyen)이 구체적으로 어떤 그리스인인지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여기서는 그리스 연표와 이집트 연표를 좀 더 세밀하게 연계시키고 트로이 전쟁 후에 노스토이들이 세운 나라들의 활동을 바다의 민족들의 활동과 연계시켜 아카이와샤와 데니엔의 정체를 좀 더 구체적으로 구명하는 데에 그 목표를 두고 있다.
    연구자가 다다른 결과는 다음과 같다. 트로이 원정을 관계사의 차원에서 연구할 경우, 대단히 어려운 과제가 그리스 연표와 이집트 연표를 맞추는 작업이다. 연구자가 두 지역의 연표를 맞추는 작업의 기초로, 우선 기원전 3세기에 기록된 󰡔파로스 연대기󰡕가 말하는 트로이 전쟁의 시기 1218-1209년을 믿을 만하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이집트에 침입한 바다의 민족들 중에 아카이와샤와 데니엔이 그리스인들이라고 보는 데에는 학자들 사이에 큰 이견이 없다. 이집트 기록에 따르면, 메르네프타 5년에 아카이와샤가, 라메세스 3세 8년에 데니엔이 침입하였다. 연구자는 트로이를 공격한 그리스인들을 히타이트 사료에서 ‘아키야와’라고 기록되었다면, 이집트 사료에도 그와 비슷한 발음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여겨 이집트어 아카이와샤가 후기에 침입한 데니엔보다는 가능성이 크다고 여겼다. 이것을 두 지역의 연표로 맞출 수 있을까? 이집트 신왕국 연표로 학자들에게 많이 사용되는 것은 <캠브리지 고대사>(1973)의 연표와 <옥스퍼드 고대이집트사>(2000)의 연표이다. 연구자는 <옥스퍼드 고대이집트사>의 신왕국 연표가 더 믿을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위에서 언급하였고, 그 연표에 따르면 아카이와샤의 침입연도는 1208년이니 트로이 원정이 1209년에 끝나고 1년 후에 아카이아인들이 이집트에 침입한 셈이 되어, 연대적으로 잘 들어맞는다. 그렇다면 라메세스 3세 8년에 침입한 것은 데니엔이고 그 연도는 󰡔옥스퍼드 이집트사󰡕에 따르면 기원전 1176년이 된다.
    학자들 사이에 아카이와샤와 데니엔이 그리스인일 것이라는 데에는 일치된 생각을 지니고 있지만, 그 차이가 명확히 제시되지는 않았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 아카이와샤가 히타이트어의 아키야와, 그리스어의 아카이오이와 관련된 것이라면, 아카이와샤는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던 미케네에 왕궁을 두고 있었던 아카이오이인들을 비롯한 여타 그리스인들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데니엔은 트로이 전쟁 때 아르고스 왕 암필로코스가 이끌어던 아르고인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트로이가 함락된 후에도 암필로코스는 아르고스인들을 이끌고 킬리키아의 말로스(Mallus)에까지 이동하여 클라로스(Clarus)의 예언자 모프소스Mopsus와 함께 나라를 세웠다. 후에 그리스 저자들에 따르면, 말로스의 아르고스인들은 시리아, 페니키아에까지 이동하였다. 논자는 이들 아르고스인들이 바다의 민족들의 하나로서 이집트를 침입했다고 본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아르고스는, 󰡔파로스 연대기󰡕에 따르면, 기원전 1511년 다나오스(Danaus)에 의해 건국되었고, 다나오스는 아르고스인들을 다나오이(Danaoi, ‘다나오스의 백성’이라는 뜻)로 명명하였고, 그후 다나오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었다. 아르고스 왕 암필로코스가 이끌었던 아르고스인들, 곧 다나오이인들이 이집트에 침입했다면, 이집트인들은 이들을 데니엔(DnnDenyen)으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연구자의 연구결과는 두 가지 면에서 활용될 수 있다. 하나는 전문적인 활용방안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적인 활용방안이다. 먼저 전문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살펴보자. 데니엔이 암필로코스가 이끌었던 다나오이인이라면, 이들은 트로이 전쟁 이후 그리스로 귀향하지 않고 오늘날의 이스라엘 땅에 이스라엘의 12지파의 하나인 단 지파로서 정착하였다. 1511년 그리스 땅에 도래하여 아르고스 왕국을 건국한 다나오스를 이집트로부터 축출된 힉소스--학자들은 힉소스의 주류를 서부 셈족으로 보고 있는데, 서부 셈족에는 유다인과 페니키아인이 포함된다--로 본다면, 암필로코스가 이끈 다나오이인들은 300년쯤 후에 고향에 정착한 셈이다. 이를 근거로 삼아, 논자는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펠레세트도 이러한 경우가 아닐까? 대부분의 학자들은 펠레세트를 구약성서의 블레셋 사람들로 보고, 블레셋 사람들은 크레타(카프토르)로부터 왔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구약성경 「창세기」와 「출애굽기」에 아브라함과 이사악 때에 블레셋에 관한 언급이 있다. 이 때는 힉소스 시대 이전으로 보인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이 아비멜렉과 연을 맺게 되는 계기를 「창세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이사악이 그 곳[블레셋 땅]에 자리잡은 지 얼마 뒤의 일이다. 블레셋 왕 아비멜렉은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다가 이사악이 그의 아내 리브가를 애무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이사악을 불러 나무랐다. “그 여자는 분명히 네 아내다. 그런데 왜 네 누이라고 하였느냐?” (공동번역 「창세기」 26:8-9)

    위의 인용문들에서 블레셋은 아브라함 때부터 존재했던 민족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블레셋은 람세스 3세 8년 이후의 민족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다수의 견해이다. 그러나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라는 어구를 살핀다면, 아비멜렉이 정말로 블레셋 왕이 아니었다면 쓰기 어려운 표현인 것으로 보아, 아브라함과 블레셋 사람들이 동시대인들일 가능성도 열려 있다. 성서에서 블레셋인들이 카프토르로부터 왔다 하였는데,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기록을 사실대로 받아들인다면, 힉소스 시대에 블레셋인들이 크레타로 건너갔을 가능성도 있다. 크레타로 건너갔던 블레셋인들이 바다의 민족들의 이동 기간에, Dnn데니엔의 경우처럼, 다시 원고향으로 돌아온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둘째, 연구자의 연구결과는 일반적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 트로이 전쟁은 대학생은 물론 중·고등학생도 친숙하게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그 전쟁이 단순히 미케네 그리스와 트로이 사이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히타이트와의 갈등, 더 나아가서는 동 지중해권 전체와 관련하여 벌어진 전쟁이라는 사실은 학생들에게 그리스를 고립된 지역으로서가 아니라 동 지중해권과 관련을 맺고 있는 지역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유럽중심주의적인 시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할 것이다.
    “유럽중심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트로이 전쟁에 관한 고대그리스인들의 기록들은 주로 역사와는 관계가 없는 신화로 취급되어왔다. 원래 그리스 신화란 디오도로스 같은 고대그리스인들에게 기원전 1100년경 “도리스족 침입 이전의 그리스 역사”였다. 달리 말하면,그리스 신화는 도리스족의 침입 이전은 기원전 1120년 이전의 역사다. 그런데 현대인들에게 그리스 신화란 역사와는 관련이 없는 허구의 이야기로 받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 저자들이 기록하고 있는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미케네 문명은 기원전 1500년경 이집트나 페니키아로부터 온 다나오스―페르세우스와 헤라클레스의 조상이다―나 카드모스 같은 오리엔트의 정복자들이 그리스 땅에 식민왕조를 만들고 그리스인들을 수 세기간 통치하는 과정에 형성된 것이다. 마틴 버낼 같은 학자는 그의 저서 󰡔블랙 아테나󰡕에서 그리스 신화가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19세기와 20세기의 서양학자들은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또는 유럽중심주의적 관점에서 그리스 신화를 허구로 몰아부쳤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다의 민족들의 활동에 관한 오리엔트의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증거가 고대그리스인들의 기록과 대체로 일치한다고 한다면, 그리스 신화를 역사적 실체를 담고 있는 사료로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 신화를 사료로서 취급한다는 것 또한 유럽중심주의적 시각이 얼마나 깊게 기존의 그리스 고대사 연구에 깔려있는가를 학생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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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로이 전쟁, 바다의 민족들, 노스토이, 아카이와샤, 데니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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