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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편년을 위한 고구려와 신라고분 비교연구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1-327-A00110
선정년도 2011 년
연구기간 1 년 (2011년 05월 01일 ~ 2012년 04월 30일)
연구책임자 강현숙
연구수행기관 동국대학교 WISE& #40;와이즈& #41;캠퍼스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고구려와 신라는 4세기대부터 5세기 중반까지 긴밀한 우호관계를 지속하였고, 그러한 관계는 고구려나 신라 고분에서 잘 드러난다. 특히 고구려의 적석총이나 신라의 적석목곽분은 무덤 축조에 돌을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중국은 물론, 백제, 가야와 구별될 뿐 아니라 부장품과 장속의 일부에서 특징을 공유한다. 때문에 고구려나 신라 고분연구에서 양국의 자료는 서로 활용될 수 있지만, 적석목곽분의 기원과 관련하여 적석총을 살피거나, 일부 고구려 유물이 신라 고분 편년에 이용되는 정도였고, 고구려 유물 연구에서도 신라 고분 자료가 활용되는 예는 전무하다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의 1차 원인은 비교적 많은 정보를 가진 대형의 적석총이나 적석목곽분의 상당수가 일제 강점기에 조사된 데 있다. 당시의 조사가 적석총이나 적석목곽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을 뿐 아니라 보고된 유물도 불완전하여서 연구자료로서 활용성이 떨어졌다. 황남대총과 천마총의 조사로 적석목곽분에 대한 구조적인 이해가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고 하여도 고분으로부터 얻는 정보는 여전히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고구려 고분도 마찬가지여서 고분 외형과 구조파악이 어느 정도 되었다고 하여도 부장유물과 그 출토 맥락에 대한 정보는 다분히 제한적이다. 그러나 양국 자료는 제작지가 같다고 볼 정도로 같거나 유사한 것들이 적지 않을 뿐 아니라 고분 구조나 장속의 특징을 공유하여서 양국의 고분을 비교연구하는 것은 의미있는 결론을 도출할 것으로 기대된다.
    고구려와 신라 고분의 비교연구는 고분 편년에 초점을 두고자한다. 이는 최근 고분 연구의 관심이 왕릉비정에 모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 중국 길림성 집안에 있는 초대형적석총에 대한 여러 입장이나, 경주 분지의 황남대총을 내물왕, 실성왕, 눌지왕릉으로 서로 다른 입장이 모두 고분 편년안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비단 왕릉비정 문제 뿐 아니라 고대사 복원에 있어서 시간성의 확보가 무엇보다 근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전제가 되기 때문에 양국 고분의 비교는 고분의 편년에 초점을 두었다.
    기존의 고분 편년연구에서 적석총은 고분 구조를, 적석목곽분은 유물이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고분 구조는 편년 기준으로서 안정적이지 못하며, 특정 유물의 형식편년이 고분의 연대를 보여준 것도 아니다. 실제 신라 고분에 부장된 유물은 동일 기종이라 하여도 여러 형식의 유물이 복수부장되어서, 고분 유물 전반과 출토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특정 한 유물로는 안정적인 편년안을 마련하기 어렵다. 이에 비해 고구려 적석총의 유물은 다종, 다양하지 않지만 대개 단수 부장되었고, 설사 복수 부장되었다고 하더라도 재질과 형태나 제작기법 등에서 별도의 형식을 설정할 만큼 변이가 크지도 않다. 따라서 고구려와 신라 고분자료를 함께 고려하면 보다 설득력있는 편년체계를 세울 수 있다. 양국자료를 함께 분석하여 도출된 편년안은 다시 기존의 고분 편년안과 문헌 기록 등을 통하여 검증함으로써 보다 안정적인 편년안으로서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자료상의 이러한 문제를 인지하여 본 연구에서는 먼저, 일제 강점기에 조사된 고구려와 신라의 고분과 강점기 이후에 조사된 고분 자료를 취합하여 이를 정리, 재검토하여 구조와 유물의 출토맥락에 따른 부장양상을 정리함으로써 편년 자료로서 활용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다음으로, 고분 편년은 개개 유물의 형식편년과 교차편년을 하고, 이의 공반관계와 출토맥락을 고려하여 고분 편년을 하고자 한다. 안정적인 편년안을 바탕으로 고구려와 신라 고분을 통시적, 공시적으로 비교하여 사회 복원은 단서를 얻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유물이 고분에 부장되기까지의 과정은 물론 부장습속과 장속의 변화도 비교 고찰할 것이다.
  • 기대효과
  • 본 연구 결과에서 행한고구려와 신라 고분에 대한 정리, 검토는 고분 연구의 기초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조사되었던 고구려 적석총이나 금관총, 금령총, 식니총, 서봉총 등을 포함한 신라적석목곽분 자료는 구조나 일부 유물만이 연구의 대상이 되었으나, 고분 구조와 이에 따른 유물의 출토맥락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정리.분석은 고고학 뿐 아니라 고구려, 신라사 연구의 기초자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고구려와 신라 고분 부장 개별 유물의 공반관계와 출토 맥락을 고려한 고분의 안정적은 편년안은 고구려와 신라 고분을 통한 사회 제 측면의 복원에 적극 활용될 것이다. 먼저, 고구려나 신라의 왕릉급으로 비정되는 초대형 적석총과 적석목곽분의 편년안은 왕릉비정 뿐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른 왕릉의 변화 나아가 고구려와 신라의 능제 복원에 활용될 것이다. 둘째로는 공시적으로 고분을 나열하게 되면 왕을 정점으로 사회의 분화정도나 중앙과 지방과의 관계 연구에 단서를 제공할 것이며, 통시적으로 나열하게 되면 고대 왕권국가로서 고구려와 신라의 성장과정을 설명하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셋째, 시공적으로 유물의 출토 맥락과 공반유물과의 관계는 고구려와 신라의 교류는 물론, 동아시아에서 고구려와 신라의 문화적 위상을 판단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장속이나 부장습속에 대한 정보는 장묘제 연구에 활용될 것이다.
    고구려와 신라의 고분의 안정적인 편년안과 위와 같은 해석은 삼국시대 고분 연구에 도움이 활용될 것이다. 백제의 경우 한성시기 고분과 부장 유물은 물론 사비시기 부여와 인근 지역에서 출토되는 와당과 토기를 포함한 고구려계 유물은 물론, 마구류의 연대 비정에서 활용될 것이며, 시간에 따른 고구려와 백제, 백제와 신라의 관계망에 대한 해석도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가야의 경우 중장기병과 관련된 갑주와 마갑주, 마구류 등의 편년 연구에 활용될 뿐 아니라 중장기병 관련 유물을 통한 가야 제 집단과 신라, 고구려 나아가 중국 북방과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적극 활용될 것이다. 이외에도 일본 고분시대 도래계 유물의 편년 연구에도 적극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고분 연구자들에게는 유물의 공반관계와 출토 맥락을 고려한 편년은 고분에 대한 인식을 확대하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새로 고구려로부터 유입된 유물이 신라 고분에 부장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설명은 백제나 가야 고분에 부장된 외래계 유물에 대한 해석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유물 출토 맥락에 따른 재질과 형태 차이가 있음은 출토 맥락에 따른 유물 분석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을 모두 일괄유물로 취급하였던 기존의 연구에서 일보 전진하여 매장 행위 전 과정을 복원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인식은 향후 고분 조사에서 유물의 출토 정황에 대한 정확한 기술을 하게 함으로써 고분으로부터 많은 정보를 추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문헌연구에서도 활용되는 바 적지 않을 것이다. 시간 위치를 알 수 있는 거대한 고분은 고대사회의 복원에 있어서 문헌 자료가 갖은 한계를 극복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예가 근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고구려 왕릉이나 황남대총 남분을 위치한 왕릉 비정 문제이다. 고고학적 방법에 의한 안정적인 편년안은 문헌의 왕호와 장지명과 특정 유물의 편년안에 의한 왕릉 비정의 불확실성을 줄이고, 보다 구체적으로 논지를 전개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줄 것이다. 아울러 고분의 안정적인 편년안과 그에 따른 해석은 문헌 기록의 한계에서 오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외에도 중국 길림성 집안에 있는 거대한 적석총이나 경주 시내 분지에 있는 적석목곽분의 주인공과 그 주인공이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일반인들의 이해를 돕는데 활용될 것이다. 고구려나 신라 고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일반인들에게 고구려나 신라 고분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제고시킬 것이며, 나아가 궁극적으로 우리 고대사에 대한 바른 인식을 함으로써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 연구요약
  • 고구려과 신라 고분을 정리한 결과, 적석총의 경우 계단의 남이나 남서측에 마구류와 함께 말뼈 등이 놓이며, 묘실 입구쪽에서는 식생활을 보여주는 용기류 등이 부장된다. 적석목곽분에서는 주검은 장신구와 대도 등을 착장한 상태로 안치되며, 주곽이나 부곽 등에 다종, 다양한 유물이 복수부장되고, 분구 중에서는 장식마구가 매납되는데, 분구에 매납된 마구는 크기와 제작 방법에서 실용 마구와 차이가 있다. 따라서 구조와 출토 양상에 따른 고분 유물의 차이가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며, 매장부와 분구에서 출토된 유물은 장속이나 매장의례는 물론 시간 판단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개별 유물에 대한 편년은 고분의 구조와 유물의 출토맥락을 고려하여 형식편년과 교차편년 방법을 이용하였다. 편년 방법은 장신구나 마구류 처럼 개체수가 많은 경우에는 개개 유물을 분류하여 형식편년하고, 금속제 용기처럼 개체수가 적은 유물의 경우 고구려와 중국 유물과의 교차편년할 것이다. 그리고 설정된 편년안은 신라의 토기 편년안이나, 문헌 기록 등과 결부하여 다시 검증해 볼 것이다.
    실제 신라 초대형 적석목곽분에는 이전 시기에는 없었던 관, 이식, 대금구 등 황금 장신구와 화려한 장식대도, 마구, 금.은기와 청동용기, 로마 유리 등 새로운 문물 가운데, 금, 은, 금동으로 만들어진 관은 착장한 상태로, 일부는 다른 부장품과 함께 부곽에서 출토되었는데, 의성 탑리 1곽 금동관의 깃털형 세움 장식이나, 황남대총 남분의 조익형 관식은 태왕릉에서 출토된 조익형 관식이나 개마총, 쌍령총에 표현된 인물의 새깃털 관식 등에서 서로 유사하다. 귀걸이도 삼국 중 고구려와 신라에서만 태환이식과 세환이식이 공반되는데, 황남대총 북분과 집안 마선구 1호분의 태환이식, 황오리14호분 1곽과 고구려 용강 후산리 추동 고분에서 출토된 세환이식 중간 장식의 소환연접구체 등 형태와 제작 기법에서 서로 특징을 공유한다. 이외에도 요패가 드리워진 삼엽문이 투조된 대금구의 문양 모티브나 못신 등에서 신라에 미친 고구려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또한 호우총의 <廣開土地好太王壺玗什> 명문이 있는 청동합, 서봉총의 출토 은합의 <延壽元年> 연호, 고구려 토기의 특징적인 기형을 가진 금관총의 청동 사이호 외에도 청동제 정, 시루, 초두, 합, 세 등의 금속용기는 고구려의 칠성산 96호분이나 우산하68호분에서 일괄로 출토된 바 있어서, 고구려로부터 신라로의 직, 간접적인 영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로부터 신라가 받은 영향을 잘 보여주는 것은 갑주와 마구 등 중장기병과 관련된 기물들로 경주 일원 뿐 아니라 주변 지역의 크고 작은 고분에서 말을 부리기 위한 재갈, 안장과 등자, 말띠 드리개 등 여러 종류의 마구가 출토되었다. 금속제 마구를 무덤에 부장하는 풍습은 북방 모용선비의 무덤에서 흔히 보이지만, 그 가운데 삼국에서 공통된 심엽형 행엽은 모용선비 무덤에서 보이지 않은 형태이며, 반구형이나 화판형 입식부 운주 등은 모용선비보다는 고구려와 신라에서 더 유행하였다. 한편, 황오동 쪽샘지구 C10호묘 주곽에서 출토된 찰갑과 완전한 형태로 출토된 마갑은 고구려 벽화분에 표현된 기마무사를 실물로 복원해줌으로써 이해를 도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라 고분 자료를 통하여 고구려 고분 유물에 대한 이해도 가능하다. 고구려 마선구 2100호분에서 출토된 금동 말모양 장식판은 금령총에서 안교와 함께 출토되어 안교 장식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마선구 1호분에서 출토된 Y자모양 장식은 황남대총 북분의 주곽 옆에 머리쪽에서 출토되어 머리 장식구였음을 알 수 있어서 유물에 대한 이해는 물론 보다 구체적으로 연대 판단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출토된 유물의 부장양상을 고려하여 편년을 시도한 결과 머리 장식이나 관이나 이식 등 일부 장신구는 커다란 시차 없이 신라고분에 부장되기도 하고, 대금구나 안교 장식품, 마구류와 같은 일부 유물은 일정한 전세기간을 가진 후에 부장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어서, 유물이 고분에 부장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개별 유물의 편년안을 통하여 고구려와 신라 고분의 시간적 위치를 판단하고, 이의 시공적 비교를 통하여 고구려와 신라는 고분 구조나 부장유물 뿐 아니라 분구에 부장된 마구나 훼기 등과 관련된 부장습의 일부를 공유하였음을 설명하고, 착장용 장신구와 금, 은제 용기, 토기 등을 차이를 통하여 고구려와 신라 고분이 화이부동하였음을 설명할 것이다.
  • 한글키워드
  • 신라,고구려,중국 집안,적석총,적석목곽분,장신구,갑주,분구의례,천마총,호우총,은령총,식니총,은령총,금관총,전 동명왕릉,평양 경신리1호분,훼기,고분,황남대총,마구,금속제 용기,부장품,봉토분,왕릉,경주,평양
  • 영문키워드
  • wooden chamber burial covered with a stone mound,equipment for horse,willful damaged burial,Royal tomb called King Dongmyeong,burial goods,Chunmachong,Houchong,Eunryeongchong,Siknichong,Kumryeongchong,Kumgwanchong,earth mound tomb,stone mound tomb,Royal Tomb,Gyeongju,Pyeongyang,Jian China,Tomb,Old Silla,Koguryo,Kyeongsinri tomb No.1,burial ceremony at mound,iron armor and helmet,Hwangnamdaechong,ornament,metal vessel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이 글은 신라 적석목곽분에 부장된 여러 유물 중 고구려와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은 금속용기와 마구이므로, 이를 대상으로 고구려와 비교한 결과 고구려로부터의 영향을 구체적으로 살필 필요가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양국의 교차편년에서 간과되었던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였다.
    고구려 고분과 적석목곽분에 부장된 문물을 비교한 결과, 편년제시에 앞서 완제품으로 반입된 것과 고구려의 것을 모본으로 신라에서 자체 제작한 것을 구분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구려에서 제작되어 완제품이 반입된 유물로는 서봉총 연수명 은합이나 호우총 광개토왕호우, 금관총의 청동사이호를 들 수 있다. 이 유물들의 고구려에서 제작시기 그리고 신라로의 반입시기와 그 배경, 그리고 적석목곽분에 부장된 시기를 구별할 필요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제작시기가 부장시기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므로, 교차편년에서 부장까지의 각 과정을 고려하여야 한다. 마구 중 편년을 위해 비교 가능한 것은 등자와 심엽형 행엽, 운주이다. 이 유물들은 고구려와는 세부적인 형태 차이가 있으므로, 고구려에서 제작된 완제품이라기 보기보다는 신라에서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중 등자와 행엽은 단순 모방하였다기 보다는 고구려의 시기가 다른 등자와 행엽의 속성을 선택적으로 채용하였고, 행엽의 경우 신라식으로 변용 제작하였다. 운주는 비교적 고구려의 것을 충실히 모방제작하였다. 따라서 새로운 문물의 영향과 변용 정도에 따라 동시에 여러 형식이 병존할 수 있으므로 고구려의 유사형태 문물의 편년을 그대로 신라 문물 편년에 적용시킬 수 없다.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보이는 고구려계 문물은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에 걸친 고구려 고분에 부장되었던 것들로, 이는 문헌기사에서 보이는 고구려와 신라의 교류 시기와도 부합된다. 따라서 문헌기사와 고고학적 현상을 결부시켜 볼 때 고구려 영향의 추이는 4세기 말을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 5세기 전반까지의 두 단계로 나눌 수 있으며, 신라 적석목곽분에 부장된 문물의 공반관계를 고려하여 적석목곽분의 상대적 선후관계를 월성로 가-13호분, 황남동14-1호분, 황남동14-2호분-> 황남동 110호분 -> 황남대총 남분과 북분 -> 서봉총, 금관총, 노동동142호 옥포총, 은령총, 황남동82호 서총 -> 금령총, 천마총, 노서동 138호 -> 황오동 4호, 호우총, 계림로 14호 순으로 배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편년의 기준이 되는 황남대총의 상한을 5세기 2/4분기로 비정하였다.
  • 영문
  • The aim of the paper is the comparison burials excavated from Koguryo tombs and wooden chamber with stone-earthenmound tomb of Silla. In the processing of comparison Koguryo and Silla, it indicate some topics of cross-dating Koguryo and Silla.
    As a result of comparing burials from Koguryo tombs and wooden chamber with stone-
    earthenmound tomb of Silla, there are two categories of Silla burials in relation with Koguryo. Th one is carried into Silla freom Koguryo and the another is made by Silla under the influence of Koguryo.Foe example, Yeonsu sliver tureen from Subongchong, King Guanggaeto hohu(bronze tureen) from Houchong and bronze crock from Gumgwanchong were made by Koguryo.The stirrups and the ornaments of harness were made by Silla under the influence of Koguryo between mid 4th century and early 5th century. In Silla, some attributes of the stirrups and the ornaments of harness are imitated the Koguryo items or transformed following their needs. So It is not suitable criteria for crossdating because there are several types at the same time.
    Therefore it were divided into two steps of influences of Koguryo excavated from wooden chamber with stone-earthenmound tomb of Silla. The first step is represented Chilsungsan Tomb No.96 and the second step is represented Manbojung tomb No.78. The archaeological result of the comparison burials excavated from Koguryo tombs and wooden chamber with stone-earthenmound tomb of Silla is accord with the documents of Samguksaki. So according to the influences of Koguryo excavated from wooden chamber with stone-earthenmound tomb of Silla, the Hangnamdaechong nambun is dated 5th 1/4centur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이글은 고구려 고분과 신라 적석목곽분에 부장된 금속용기와 마구를 비교하여, 양국의 교차편년에서 간과되었던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나아가 신라 적석목곽분의 상대서열과 주요 고분의 편년을 제시하였다.
    고구려 고분과 적석목곽분에 부장된 문물을 비교한 결과, 편년제시에 앞서 완제품으로 반입된 것과 고구려의 것을 모본으로 신라에서 자체 제작한 것을 구분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완제품이 반입된 서봉총 연수명 은합이나 호우총 광개토왕호우, 금관총의 청동사이호의 경우 제작과 반입, 부장시기를 구별하여 고려하여야 하며, 등자와 심엽형 행엽, 운주의 경우를 단순모방 그리고 특정 속성의 선택적 채용과 변용 과정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새로운 문물의 영향과 변용 정도에 따라 동시에 여러 형식이 병존할 수 있으므로 특정 한 유물을 편년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적석목곽분에서 보이는 고구려계 문물은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에 걸친 고구려 고분에 부장되었던 것들로, 고구려 영향의 추이는 4세기 말을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 5세기 전반까지의 두 단계로 나누고, 이를 근거로 적석목곽분의 상대적 선후관계를 배열하고, 황남대총의 상한을 5세기 2/4분기로 비정하였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신라와 고구려가 밀접한 교류관계에 있었고, 신라의 적석목곽분에 부장된 유물에서 고구려의 영향이 있었음을 선행연구에서 언급되어왔지만, 적석목곽분에 부장된 고구려관련 문물의 부장 배경과 그 시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논의가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이에 본 논문은 기존의 신라적석목곽분에서 부장된 고구려관련 문물의 부장 배경을 반입과 자체제작과 변용이라는 측면에서 관찰하였다는 점에서 신라와 고구려의 교류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였으며, 토기 위주로 이루어진데 적석목곽분의 편년안을 금속용기와 마구 등의 자료를 통하여 수정, 보완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아울러 본 연구는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의 교류의 정도와 그 내용을 복원하는데 활용될 것이다.
  • 색인어
  • 신라, 적석목곽분, 고구려 고분, 금속용기, 마구, 연수명 은합, 광개토왕호우, 칠성산96호분, 만보정78호분, 황남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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