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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종교; 헬레니즘 문명과 비잔틴 문명이 정치, 경제, 문화적 관점에서 기독교와 갖는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공동연구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11-32A-A00050
선정년도 2011 년
연구기간 2 년 (2011년 05월 01일 ~ 2013년 04월 30일)
연구책임자 임진수
연구수행기관 감리교신학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중단
공동연구원 현황 남성현(한영신학대학교)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이 연구는 문명과 종교의 관련성을 다루는 종교사연구이다. 특별히 헬레니즘 문명과 비잔틴 문명이 기독교와 어떤 연관을 갖는가에 대해서 심층적인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헬레니즘 문명이 1-3세기 초기 기독교의 생성과 자리매김에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그리고 이렇게 헬레니즘 문명의 토양에서 자양분을 얻으며 탄생한 기독교가 4-7세기에 이르러 그 모태가 되는 그리스-로마 문화를 어떤 과정을 거쳐 기독교 문명인 비잔틴 문명으로 변화시키는지를 주제로 한다.
    인류 역사는 구시대의 종말과 신문명의 탄생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이루어져 왔다. 인류 역사에서 탄생했던 문명의 흥망성쇠가 거의 언제나 종교적 가치체계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문명과 종교의 관계는 특별한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집트 문명은 태양숭배종교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고, 올림포스 산의 열두 신(神)을 빼놓고는 그리스 문명을 논할 수가 없으며, 로마제정기의 문명은 황제 숭배적 정치 종교와 불가분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고대 문명에서도 마찬가지어서, 불교에 대해서 논하지 않고 신라와 고려의 역사를 말할 수 없고, 조선의 가치체계에 대해서 말하려면 필연적으로 유교를 기반으로 해야 하며, 19세기말-20세기 초반의 구한말의 계몽시대는 오직 기독교라는 외래종교의 유입을 통해서만 적절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 연구는 서양문명의 근원이 되는 헬레니즘 문명, 비잔틴 문명이 기독교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밝혀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으로 그리스 세계상이 지중해 유역에 퍼지고 이런 새로운 시대정신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기독교의 탄생 및 성장에 영향을 주게 된다. 기독교는 그 근원에 있어서 유대교와 구약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동시에 헬레니즘 문명과의 조우 없이 기독교의 탄생은 적절하게 설명되지 못할 것이다.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만남으로 탄생한 기독교는 그리스적 가치를 실천적이고 실용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인 제정 로마기의 문명 속에서 지중해 세계에 빠른 속도로 전파된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기독교가 헬레니즘적 로마 사회 속에서 성장하였지만, 정치, 경제, 문화적인 관점에서 그리스-로마 문명에 영향 받으면서도 차별적인 특수한 관점을 집요하게 유지하였다는 것이다. 헬레니즘 문명과 헤브라이즘의 체계가 어느 정도로 1-3세기 기독교의 탄생과 기독교 가치체계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는 자못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3세기에 이르러 그리스 문명에 바탕을 둔 로마 사회의 전통적 가치들이 혼란을 겪을 때에, 신흥종교인 기독교는 빠른 속도로 사회 각계각층에 뿌리를 내린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출현 이후, 전통적인 그리스-로마의 가치가 도전받게 되며, 기독교적 정신세계가 사회에 뿌리 내리게 된다. 기독교의 약진과 함께 헬레니즘적 로마 문명은 퇴조하고, 정치, 경제, 문화적 체계들이 기독교적인 가치와 체계로 재편되는 광범위한 변화가 일어난다. 헬레니즘적 세계상이 1-3세기 기독교의 탄생에 영향을 주고 기독교의 성장에 자양분을 제공했지만, 4세기 기독교적 사회의 출현과 함께 서서히 질식되어 가는 과정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이런 충격적인 변화는 4세기에 시작하여 6세기에 이르러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흐름으로 자리잡는데, 이를 가리켜 소위 비잔틴 문명이라고 한다. 비잔틴 문명은 기독교와 함께 시작되었고, 기독교적 세계상과 함께 성장했으며, 기독교적 가치를 구현하려고 했던 최초의 기독교 문명이라는 점에서 서구사회를 이해하는 길잡이의 역할을 해 준다. 비잔틴 문명은 1352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더불어 그 역사적 사명을 다하였다.
    본 연구는 이런 각도에서 헬레니즘 문명, 비잔틴 문명이 기독교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를 정치, 경제, 문화적 관점에서 파악해보려는 문명사 연구이다. 다시 말해 본 연구는 헬레니즘 문명 속에서 형성된 기독교적 가치들이 4-6세기의 비잔틴 문명의 정치, 경제, 문화적 차원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살펴보는 거시담론을 그 목적으로 한다.
  • 기대효과
  • 이 연구는 기존의 서양사 연구가 통사 중심으로 종교와 문화의 상관성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이 연구는 기존의 연구를 극복하고 종교와 문명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발전한다는 것을 다루고자 한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걸쳐 불교는 한반도의 문화 속에 민간 신앙으로 그 뿌리를 깊게 내렸다. 조선시대 600년의 역사는 유교라고 하는 종교-정치적 가치체계(가부장적 권위주위와 남녀차별사상)를 근본으로 하는 사회였다. 이와 아울러 우랄 알타이 계열의 샤머니즘적 성향이 우리 문화에 깊숙하게 내재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전통종교의 가치는 전반적으로 그 소명이 다하였고 오늘 우리나라의 삶을 새롭게 하기에는 요원한 것처럼 보인다.
    전통종교에 비해 신흥종교에 불과한 한국개신교는 많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지만 아직도 그 종교적 잠재력을 잃지 않고 있다고 보고싶다. 선교 초기인 구한말에 이미 계몽적 역할을 통해 시대를 밝혀준 개신교는 아직 일백년 남짓한 역사를 갖고 있을 뿐이다. 비록 우리나라의 주류 개신교의 성향이 전통종교의 부정적인 잔재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으나, 기독교적인 보편적 가치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으므로, 한반도의 문명을 일깨울 잠재력을 잃지 않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시대에 따른 서양문명과 기독교의 관계가 어떠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필요하고도 의미깊은 작업이 될 것이다. 기독교가 헬레니즘 문화의 자양분을 받아 어떻게 가치체계를 세워나갔으며, 어떤 방식으로 헬레니즘 문명을 극복하고, 비잔틴 문명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을 제공했는지 연구하는 것은 역사적 반성을 통해 우리사회에 대한 기독교적 소명을 일깨우는 데에 도움을 줄 것으로 확신하는 바이다.
    먼저 이 연구는 헬레니즘 문명과 기독교적 가치의 생성이 어떤 관계를 갖는지 연구하는 것으로 기존의 학문적 지평을 넓혀주는 데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그 동안의 신약학계의 연구 동향은 주로 신약 문서들에 대한 역사 비평적 연구에 집중되어 왔다. 신약성서 배경사를 다룬다 할지라도 주로 신약 성서의 해석을 위한 전초작업에 국한되어 왔다. 아울러 신약 문서와 연관이 깊은 속사도 교부 문헌에 대해서는 극소수의 연구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신약 연구의정황 속에서 기독교의 정치, 경제, 문화적 사고체계가 1-3세기에 어떻게 태어나고 성장하고 형성되어 갔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기존의 연구방향을 보완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비잔틴 문명의 정치, 경제, 문화적 가치의 형성에 기독교가 어떤 공헌을 했는가 하는 것도 여태껏 국내학계가 주목하지 못한 논제이다. 그 동안 국내교부학계의 연구방향은 4-5세기의 교부들의 삶과 사상, 교리형성을 둘러싼 황제와 감독들의 관계 혹은 교회 내적인 다양한 견해차이, 4세기 이후의 수도적 영성의 형성 등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방제국의 삶이 기독교를 통해 어떻게 변해갔는가 하는 거시적 지평의 사유는 국내 교회사 학계의 논의 밖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연구는 4-6세기 교회사나 교리사 혹은 영성사의 범주를 넘어, 4세기-7세기 비잔틴 시대의 정치구조와 경제구조, 법과 예술 등의 문화적 가치들이 어떤 점에서 기독교적 사유에 의해 영향 받아 생겨나게 되었는가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최초의 기독교 문명인 비잔틴 문명이 어떤 방식으로 정치, 경제, 문화적 측면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구현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는 것은 국내학계에도 신선한 도전이 될 것이다.
    헬레니즘 문명과 비잔틴 그리고 기독교의 관계를 정치, 경제, 문화 등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살피는 것은 아주 방대한 연구계획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연구를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도 이렇게 종교와 문명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이를 토대로 새롭게 부각되는 종교적인 현상들을 가늠하며 동시에 종교와 문명의 충돌로 인해서 발생하는 갈등관계를 극복하는 중요한 안목을 얻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본 연구의 결과, “문명과 종교”라는 제목하에 신약학과 교회사를 연결시키는 통합과목을 개설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동안 신약학과 초대교회사를 분리해서 다루는 경향이 지배적이었으나, 문명과 기독교를 주제로하는 본 연구를 통해 학문 간의 고립을 넘어 소통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헬레니즘 문명이 기독교의 탄생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헬레니즘의 문화적 토양에서 자라난 기독교가 어떻게 그리스-로마 문화를 기독교 문명으로 바꾸어 비잔틴 문명을 열어 가는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 연구요약
  • 이 연구에서 정치적인 관점에서 헬레니즘 문명이 기독교와 갖는 관계를 제일 먼저 다룰 것이다. 이런 연구 방향을 위해서 첫째, 기독교와 관련된 헬레니즘의 정치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들(diadochoi)이 벌인 투쟁의 과정과 그 이데올로기를 보다 심층적으로 연구하는 데에 집중할 것이다. 둘째, 헬레니즘과 기독교의 정치적인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류커스 왕조의 지배하에서 유대교의 지도적인 세력들이 어떤 정치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는가를 신구약 중간 문헌 등 1차 사료 연구를 통해 보다 심층적으로 밝힐 것이다. 셋째, 헬라왕조들과 로마의 지배로 이어지는 역사적 과정에서 유대교 안에 생겨난 다양한 그룹들이 기독교의 탄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에 대해서 분석, 종합할 것이다.
    계속해서 경제적 관점에서 헬레니즘과 기독교가 갖는 관계를 이해하기위해서 다음 사항들을 다룰 것이다. 첫째로, 헬레니즘적 국가 자본주의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위해 파피루스 자료 등의 연구를 통해서 국내 학계서 미개척된 분야를 소개할 것이다. 둘째, 헬레니즘의 경제적인 변화를 알아보기 위해 헬레니즘 시대에 발행된 주화에 대한 연구를 행할 것이다. 주화학은 국내 헬레니즘 연구에서는 시도된 적이 없는 새로운 것으로 당시의 권력의 변화를 알게 해 준다. 셋째, 헬레니즘의 조세정책을 연구할 것이다. 넷째, 헬레니즘적 경제의 구조와 기독교의 경제이해, 특히 예수와 제자들이 어떤 경제적인 입장을 가졌는가에 대해서 종합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또 다른 중요한 논의는 헬레니즘과 기독교 간에 존재하는 문화적인 이해다. 첫째로, 헬레니즘의 철학사상과 헬라어의 확산 그리고 인종차별 등이 기독교의 문화적 이해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심층적으로 연구할 것이다. 둘째, 헬레니즘의 도시문화에 대해서 1-3세기 기독교가 어떤 입장을 갖고 있었는가에 대해서 연구할 것이다. 셋째, 헬레니즘의 종교혼합주의에 대해서 연구하고, 이에 대한 유대교와 기독교의 태도를 연구해 볼 것이다.
    계속해서 기독교가 비잔틴 문명의 정치개념 및 정치 구조를 형성하는 데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기독교 정치신학의 영향, 정치신학의 이상과 정치 현실의 상관관계, 교회의 국가기관화로 인한 국가행정의 변화 등 세 가지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판단된다. 첫째로 비잔틴 정치구조의 사상적 토대가 되는 정치신학이 어떻게 받아들여졌고 더 나아가 비잔틴 사회에 어떤 관념을 형성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두 번째 관점은 기독교적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정치신학이 냉혹한 현실 정치 세계와 어떤 점에서 충돌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세 번째로 교회가 국가행정기관이 되어가는 경향이 국가행정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가 하는 점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또한 본 연구에서는 비잔틴과 경제적인 관점을 다루기 위하여 ‘가난한 자선사업가(선행가)’라는 비잔틴 초기문명의 사회경제적 인물상의 형성에, 전기(傳記)나 성인전(聖人傳) 등의 기독교 문학과 교부들의 설교가 어떤 역할을 했는가에 주목할 것이며, 더 나아가서 ‘가난한 자선사업가’라는 기독교문학의 사회경제적 영웅상이 이교문학에 빚진 부분이 있는지에 대한 연구도 병행될 것이다. 첫째로, 가난한 자들을 돕는 영웅적인 인물들이 5세기 중반 이후 7세기까지의 기독교 문학에서 어떻게 묘사되는지를 추가적으로 연구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5세기 중반 이후 7세기까지의 교부들의 설교에서 ‘사회적 약자를 돕는 교회지도자’ 혹은 ‘사회적 약자를 돕는 신도들’의 이미지가 어떻게 형상화되는지 연구할 것이다. 셋째로, 4-7세기 기독교 문학이나 교부들의 설교가 사회적 약자들을 돕는 자들을 영웅화 시키면서 ‘가난한 자선사업가’라는 새로운 사회경제적 인물상을 창출하였다면, 3-5세기의 이교문학에서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지 비교문학적인 차원에서 접근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비잔틴과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것이 다루어진다. 첫째로 공공 오락에 대한 기독교 교사들의 비판적 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둘째로 4-7세기 초기 비잔틴 문명의 공공 오락이 실제적인 변화의 추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셋째로 4-7세기의 공공오락과 관련하여 제정된 법에 대해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서 서양사상의 골격이 되는 헬레니즘 문명이 헤브라이즘과 더불어 1-3세기 기독교의 탄생과 성장에 어떤 기여를 하였는지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기독교가 그리스-로마 사회에 기독교적 가치를 적용하여 4-7세기 초기 비잔틴 문명을 형성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한글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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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문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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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차년 연구에서 연구책임자는 헬레니즘 세계의 황제숭배를 다루었다. 이 연구는 황제(지배자) 숭배와 기독교/유대교 간에 존재했던 갈등을 다루는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기원전 333년 동방원정을 시작하면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 그의 후계자들은 그를 신으로 숭배하며 그가 정복했던 나라를 분할하여 통치했다. 그 중에서도 황제숭배의 징후와 갈등관계는 이집트를 지배하던 프톨레미 왕조와 시리아를 지배하던 셀류커스 왕조의 팔레스타인 지배와 깊은 연관을 가진다.
    이렇게 헬레니즘의 지배 세력과 그 지배를 받는 유대교와의 갈등은 활제숭배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는데, 그에 대한 가장 인상적인 사건은 기원전 167년경의 마카비 혁명이며, 여기에는 유대교의 제사와 헬레니즘의 제사가 혼합되는 가운데 나타나는 갈등을 보여준다. 이 사건은 당시 시리아를 통치하던 셀류커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의 주도로 이루어졌는데, 그는 올림픽의 제우스 제사와 유대교의 제사를 하나로 통합하려고 했다. 이 당시 시골의 제사장이었던 마카비의 주도로 일어난 봉기는 이에 대한 시도를 저지하는 결과를 이루어 냈다. 그리고 이어지는 갈등은 기원후 67-70년에 있었던 유대전쟁이다. 유대교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대전쟁의 발단의 원인을 제공한 쪽은 그리스인들이었다. 이 운동을 주동했던 열심당원들은 무력투쟁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고 로마라는 제국의 외세를 몰아내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즉 이들의 사상적인 기반은 유대교에 기초한 것으로 유대교 전통인 신정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들은 단순한 유대교의 제사와 관련된 관심에서 출발했지만, 결국에는 로마의 세금정책에 반대해서 일어난 것으로 이 전쟁 바탕에는 유대교의 신정론과 로마의 문명이 만들어 내는 황제숭배 지배이데올로기의 충돌이라는 문화적인 갈등의 양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유대교 영역에서 일어난 대로마 항전은 하드리안 황제의 재위 기간에 발생은 바르 코흐바 전쟁이며, 이 전쟁으로 유대교와 유대교인들은 그들의 기반을 완전히 상실하는 역사를 맞이한다. 위와 같은 갈등은 예수의 가르침과 활동에서도 나타난다. 예수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의 뜻이 이 땅에서 실현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이미 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다는 것으로 로마 제국의 황제숭배에 대한 대안 개념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예수와 유대교의 차이점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상은 현재라는 관점에서 진행되고 있지만, 유대교의 사상은 미래적인 것이라는 차이를 드러낸다. 이런 이해 때문에 초대기독교는 발전과정에서 로마제국과 갈등을 겪는다. 그리고 이것은 로마제국이 교회를 박해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특히 교회의 변증문서들은 로마제국의 황제권력이 하나님의 권력과 비교해서 상대적인 것임을 강조했다. 거기에 나타나는 사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고대 교회는 로마 황제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논증하려고 했다. 즉 이 주장은 인간은 신의 피조물로서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황제를 위해서 기도할 수는 있어도 그를 숭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교회 교부들과 기독교인들은 황제숭배를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그에 대한 숭배를 거부했다. 이것은 당시 로마인들이 황제의 혼령을 향해서 제물을 바치는 행위를 거부한 것을 말한다. 이런 행위에 대해서 로마 당국은 기독교의 황제숭배에 대한 저항으로 보았다. 마지막으로 황제숭배에 대해서 제물을 바치는 것을 거부함으로 그들을 믿음을 증명해 보이고자 했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로마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탄압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로마 황제와 기독교 사이의 갈등은 초대 기독교의 변증문헌들을 통해서 나타나며, 변증가들은 황제의 영혼을 숭배의 대상으로 만드는 로마의 압력이나 이데올로기를 사탄의 활동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이런 갈등을 경험하면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어간 사실은 역사적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계속해서 연구책임자는 2차년에 헬레니즘 세계의 경제개념 이해를 “그레코 로망 세계의 자선가 사상 초대기독교의 자선가 사상(euergetism)에 대한 비교연구”를 하고 있다. 이 용어는 그리스 로마문명에 있어서 특별히 자선의 행위에 보답해야 한다는 도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엄격한 상호호혜주의라는 의미가 들어 있으며, 권력과 경제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사회구조를 반영한다. 따라서 이 연구는 이 개념이 그레코 로망 세계 안에서 기독교가 그 개념을 어떻게 수용하고 발전시켜나가는지 다루고자 한다.
    이 용어는 ‘선행가’나 ‘자선가’를 의미하는 헬라어 euergetes에서 파생하는 것으로 A. Boulanger가 학문적인 용어로 사용했다. 이렇게 자선행위에 대해서 보답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상호 주고받는 것으로 사회인류학적인(문화인류학) 개념에 해당한다. 그것은 엄격한 상호호혜주의라는 의미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선행이나 자선을 베푼 사람에게 보답을 해야만 하는 한 사람 혹은 어떤 그룹과 관련된 행위다. 선행(euergesia/beneficium)의 기본적인 개념은 그것에 대한 보답으로 그에 상응하는 감사(charis,eucharistia/gratia)를 전제로 한다. 그 결과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어떤 사람이나 집단의 감사를 고려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기대했다. 선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사회적인 명성은 본질적으로 그와 같은 규칙을 준수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선행/자선(euergesia)에 대한 이해는 개인적으로 긴밀한 친구관계의 사랑과 우정에 기반을 두기도 하며, 인간들과 신들 사이의 관계도 이렇게 선행이라는 사상에 기초하여 사회적인 관계들을 만들어 내는 본질적인 요소였다.
    이 개념은 기원전 5세기 이후부터 국가들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선가사상은 자선을 행하는 사람의 사회적으로 두드러진 위치를 승인해 주는 결정적인 요소였다. 자선을 행하는 과정은 자발성과 의무를 분리하지 않았다. 특히 부유한 개인들은 자선가로 판명이 났고, 그런 행위들은 그것이 계속 장려되도록 존경을 받았다. 존경은 다시 명예와 연결되며, 자선가들은 명예를 얻기 위하여 계속해서 자선행위를 촉진시켰고, 이를 통해서 고대 세계는 오랫동안 강력한 권력체계를 유지하여 사회를 안정적으로 이끌었다. 이처럼 자선가사상에 대한 연구는 고대세계가 어떻게 당시의 사회를 유지하고 권력을 형성해 나가는 살펴볼 수 동시에 이런 관점을 통해서 자선과 그에 대한 보답으로 나타나는 당시 사회에 대한 경제적인 측면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자선가 사상에 대한 역사적인 개괄은 크게 그리스, 헬레니즘, 로마 시대로이어지는 일련의 발전 과정을 가지고 있다.
    첫째, 고전주의 시대로 불리는 그리스에는 이러한 규범체계로서 자선가 사상이 있었다(특히 Arist. reth. 1,5,1361a 28-b 2). 기원전 4세기 말기에 자선가사상은 그리스 도시들 안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가지는 근본적인 토대였다.
    둘째, 헬레니즘과 그 시대 통치자들의 자선가 시대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나타난다. 헬레니즘 시대에 신들은 신인(神人)으로 나타난다. 이 신인은 인간을 돌보고 그들에게 자선을 베푼다. 그리고 그렇게 자선을 베푸는 근거는 인간(인류)에 대한 사랑, 즉 박애/인간애(filanqrwpi,a) 사상이다. 특히 자선가(euergetes)라는 의미 안에는 구세주(soter)나 신으로 나타난 자(epifanes)와 같은 개념들이 결합되어 있다.
    셋째, 로마 안에서 자선 행위 참여한 사람들은 귀족들이었다. 이들의 주도적인 역할은 그리스의 귀족들 보다 전통적으로 보다 확고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로마의 자선가사상은 2세기부터 의뢰인들의 위치가 약해지면서 로마 확장의 토대가 되는 중요한 재정적인 재원을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 후 자선가사상은 선행(beneficium)과 그에 대한 감사(gratia)는 당연한 의무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공동연구원은 1년차 연구에서 <테오도시우스 칙법전을 통시적 분류(Genealogia Constitutionum Codicis Theodosiani)>라는 연구결과물을 산출하였다. 전체 연구 분량은 A4 174쪽에 달하며 PDF 파일로 정리하였다. 본 연구는 테오도시우스 칙법전(Codex Theodosianus)을 통시적으로 분류정리 한 것으로, 비잔틴과 기독교의 상관관계를 연구하는 중요한 토대에 해당한다. 테오도시우스 칙법전(Codex Theodosianus)은 4-5세기 기독교 황제들이 공포한 칙법 모음집으로 로마제국 최초의 공식적인 칙법전이다. 429년-438년 사이에 편찬되었으며 439년 1월 1일부터 공적인 효력을 갖게 되었다. 이 칙법전에는 311년 혹은 313년에서 438년까지 공포된 약 2천여 개에 이르는 칙법이 총 16권에 주제별로 편집되어 있다. 테오도시우스 칙법전은 로마제국의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친 4-5세기의 다양한 면모를 역사적으로 증언해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하지만 주제별로 편집된 칙법전의 배열 때문에 특정 연도에 공포된 칙법을 연구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런 어려움을 해소하고 비잔틴 기독교 문명에 대한 연구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본 연구가 계획되었다. 테오도시우스 칙법전 전체를 통시적으로 나열한 본 연구를 통해 특정연도에 공포된 칙법 전체를 아주 손쉽게 한 눈에 식별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의 칙법은 약 2000여개에 이르지만, 칙법에 따라 공포연도가 불확실 한 것이 있고, 이럴 경우 가능한 연도에 모두 배열을 했으므로, 전체 일련번호는 약 3000여 개로 확대되었다는 점을 밝혀둔다.

    2년차 공동연구원의 연구는 크게 네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첫째로 해외학자 초청 국제학술대회이다. 2012년 12월 1일 비잔틴 정치사와 문화사에 관련하여 프랑스 소르본의 명예교수 피에르 마라발(Pierre Maraval)과 캐나다 몬트리올 대학의 고대후기 문명사 교수인 크리스챤 라슐레(Christian Raschle) 등 해외학자 2명을 초청하였다. 피에르 마라발 교수는 “Le Christianisme et le pouvoir politique dans les premiers siecles”라는 주제로 논문을 발표하였다. 크리스찬 라슐레 교수의 발표 주제는 “Teaching by exemplum- Cultrue and Rhetoric in the Pagan and Christian Tradition in Late Antiquity”였다.
    둘째, 공동연구원은 초기 비잔틴 제국과 기독교가 빈민을 위해서 어떻게 협력했는가를 실증적인 차원에서 규명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공동연구원은 4-6세기에 세워진 다양한 복지기관이 비잔틴 제국과 기독교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협력했던 모델임을 주장하였다. 그 동안 국내 교회사학계와 고대후기 연구 분야에서는 경제사 분야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연구를 통해 기독교 문학뿐 아니라 사회경제사적인 자료를 분석하고 종합함으로써 최초의 기독교 문명이 일구어낸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해서 보다 폭넓은 관심을 갖게 되리가 생각한다.
    셋째, 공동연구원은 3년차로 예정된 문화에 대한 연구를 부분적으로 앞당겨 진행하였다. 2012년 6월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Christian Moses in the Transfiguration of Early Christian Art”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하였다. 공동연구원은 이 논문에서 유대교의 인물인 모세가 초기 비잔틴 제국의 예술에서 어떻게 ‘기독교화’ 되어 가는 지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네 번째로, 공동연구원은 2013년 3월 23일 개최된 서양미술사학회에서 “4-6세기 초기 기독교 미술에 나타난 삼위일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 후 서양미술사학회 논문집(39집, 2013, 37-64쪽)에 게재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서 초기 비잔틴 제국의 삼위일체적 도상이 어떻게 확립되어 갔는가를 통시적으로 연구할 수 있었다. 본 연구는 국내 고대후기 역사 연구에서 결여되었던 비잔틴 문화의 문화적 측면을 연구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 영문
  • In the first year the research director concerned himself with the emperor cult in the hellenistic world. The theme of this project is “Civilization and Religion: the correlation of the Christianity and the Hellenistic civilization and the religion”. This study is dealt with the conflict between the ruler (the emperor) cult and Judaism/ Christianity which occured in the process of the Alexander's Eastern Expedition. After the conqueror's death, he was worshiped as a god by his successors. Ptolemy dynasty in Egypt and Seleucid dynasty in Syria attempted the ruler(the emperor) cult.
    A conflict of Hellenism and Judaism, especially the Hellenistic civilization and the ruler(the emperor) worship, took place from the revolution of the Maccabees(167 B.C.E.), the Zeloten(the Judaean war, 67-70 C.E.). The resistance against the emperor worship in Judaism continued throughout the Bar Kochba war(in the 129/130 C.E.).
    Jesus' teaching is a little different from the traditional Jewish antagonism. Jesus emphasiz that God ruled the world. In his sermons, Jesus preached that God's reign had been already realized right in this world. However, in the resistance of Judaism, Jewish people expected the Jesus eschatological future to come. Over two to three centuries, Christianity had a conflict with the emperor worship. This would cause the persecution of the church. Christian apologetic documents showed that Christianity had suffered conflict with the emperor worship. Especially these documents showed that the state power under the Roman emperors was just relative. Its contents ar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the early churches argued that the Roman emperor was not a god. That is, human is the creature of God, so Christians denied the emperor to be a god. An Emperor was just a person for whom christians should pray.
    Second, the church󰠏fathers and christians defined the emperor worship as an idolatry. They refused to devote offerings to the spirit of the dead emperor because they believed that this act was an idol worship. Finally, christians proved their beliefs by rejecting to give sacrifices to the ruller cult. The Roman rulers regarded this activity as a resistance to the state power.

    And in the seceond year the research director dealt with the subject "the comparison between an idea of benefactor of Greco-Roman world and the early christianity". The term 'euergetism' means a moral essence that a beneficiary should repay the benefactor for his beneficence. This theme represents the strict principle of reciprocity and a social structure in relationship with the power and the economy. This research will deal with the process of how the early christianity accepted this concept and improved itself. This term comes from Greek euergetes. A. Boulanger made this word the academic term. This concept means a reciprocal give and take in the milieu of socio-anthropology. The euergetism is related to the fact that a beneficiary should repay the benefactor for his good beneficence in the meaning of the strict reciprocity wether it is positive or negative. The principal concept of good deeds(euergesia/beneficium) has a presupposition that the reciprocative thanksgiving(charis/eucharistia/gratia) must follow good deeds. As a result the benefactors expected a thanksgiving or a honor from the beneficiaries as the reward of their virtue. The honor that is attained by beneficence must follow the rule of euergetism. So the euergesia depends on the intimate friendship between the people.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benefector and the beneficiary and the gods was based on the idea of euergetism that formed a social reciprocity.
    This concept represente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Greek states since the fifth century B.C.E. Also the euergetism was the decisive factor that recognized the outstanding status of the person who had given charity. Spontaneity and obligation was not differentiated in the process of the euergetism.
    Through this idea the antiquity could maintain the stable system of the power and led the society for a long time. Also the research of euergetism give us an important perspective that understand the social and economic situation at that time in connection with the beneficence and repay.

    In first year, the common researcher concerned himself with a relation between Christianity and the politics of Byzantine Civilization. His research aimed at a chronological investigation of the Codex Theodosianus. The Codex Theodosianus is an official code of the Christian period since Constantine the Great to 438. In this code, some two thousand constitutions are edited in sixteen volumes of which each has a specific theme. The Codex Theodosianus is a very considerable material that represents overall general aspects of politics, society and culture of the Roman Empire. Nevertheless, this code of Christian period caused many difficulties to researchers, because it’s classified according to themes. In first year, the common researcher classified chronologically all the code, and his study which he calls <Genealogia Constitutionum Codicis Theodosiani> and he classified into an amount of 174 sheets (A4) in a form of PDF document would be an useful instrument or tool for the research of the early Byzantine Civilization.

    In second year, his researches consisted of third fields. At first, he engaged himself into an international conference held on December 2012 in Korea. He invited two european scholars. One is Pierre Maraval, emeritus professor of University of Sorbonne, and the other, Christian Raschle, professor of University of Montreal. Professor Maraval presented an article entitled “Le Christianisme et le pouvoir politique dans les premiers siecles,” which is destined to a politico-religious relation of the fourth century. Professor Christian Raschle who concerned himself with the Byzantine culture, presented an article intitled “Teaching by exemplum- Culture and Rhetoric in the Pagan and Christian Tradition in Late Antiquity.”
    Secondly, he tried to examine a cooperation for the poor of the early Byzantine Empire and Christianity. He published an article entitled “A Collaboration for the Poor of the Early Byzantine Empire and Christianity.” New Christian leaders called ‘Poor Euergetes’ came into existence in the 4th-6th century in the Byzantine World. The Poor Euergetes, monks or bishops who abandoned their property for Christ, were new heroes of the Christian period inaugurated by Constantine the Great in the 4th century. Nevertheless, they did not originate simply from Christian monastic spirituality. With the birth of the new leading class, the Poor Euergetes were also influenced by Hebrew-Jewish spirituality. This called for the care on the poor and the Greeko-Roman tradition of euergesia.
    It is worthwhile to pay attention to the imperial constitutions written since the 4th century. These influenced numerous Christian institutions. Constantine the Great offered to the church a right of inheritance. This right was not a problem until the 6th century. On the other hand, several Emperors like Leo, Anastasios and Justinianus aimed at the growth of numerous of Christian institutions with a policy called ‘prohibitio alienandi.’ This policy helped them to engage in the establishment and operation of the hospitals of the Christian Euergetes for the poor. I presented a list of some hospitals administrated by monasteries and churches. The Poor Euergetes that Christian hagiography of the 4th-6th century described were not imaginary but a historical leading group which established these hospitals and cared for the poor. Consequently, the imperial policy and Christian institutions collaborated for the charitable care of the poor in Early Christian Civilization.
    Thirdly, the common investigator studied a relation of the Byzantine culture and Christianity. In June, 2012, he presented, in an international conference held in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Washington, an article entitled “Christian Moses in the Transfiguration of Early Christian Art.” In his study, he tried to show, in a point of view of visual art, how to christianize ‘Moses, Jewish hero’ in 4th-6th century. He published also an another article entitled “Trinity represented in the visual art of the 4th-6th century.” The Christian dogma of the Trinity was a crucial issue of the ecclesiastical history of the 4th century. But the history of the trinitarian image of the 4th - 6th century was not investigated in Korea, and the common researcher synthesized the trinitarian images of this period.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서양문명의 근원이 되는 헬레니즘 문명, 비잔틴 문명이 기독교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밝혀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제의 동방원정으로 그리스 세계상이 지중해 유역에 퍼지고 이런 새로운 시대정신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기독교의 탄생 및 성장에 영향을 주게 된다. 기독교는 그 근원에 있어서 유대교와 구약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동시에 헬레니즘 문명과의 조우 없이 기독교의 탄생은 적절하게 설명되지 못할 것이다.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만남으로 탄생한 기독교는 그리스적 가치를 실천적이고 실용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인 제정 로마기의 문명 속에서 지중해 세계에 빠른 속도로 전파된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기독교가 헬레니즘적 로마 사회 속에서 성장하였지만, 정치, 경제, 문화적인 관점에서 그리스-로마 문명에 영향 받으면서도 차별적인 특수한 관점을 집요하게 유지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3세기에 이르러 그리스 문명에 바탕을 둔 로마 사회의 전통적 가치들이 혼란을 겪을 때에, 신흥종교인 기독교는 빠른 속도로 사회 각계각층에 뿌리를 내린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출현 이후, 전통적인 그리스-로마의 가치가 도전받게 되며, 기독교적 정신세계가 사회에 뿌리 내리게 된다. 기독교의 약진과 함께 헬레니즘적 로마 문명은 퇴조하고, 정치, 경제, 문화적 체계들이 기독교적인 가치와 체계로 재편되는 광범위한 변화가 일어난다. 헬레니즘적 세계상이 1-3세기 기독교의 탄생에 영향을 주고 기독교의 성장에 자양분을 제공했지만, 4세기 기독교적 사회의 출현과 함께 서서히 질식되어 가는 과정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이런 충격적인 변화는 4세기에 시작하여 6세기에 이르러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흐름으로 자리잡는데, 이를 가리켜 소위 비잔틴 문명이라고 한다. 비잔틴 문명은 기독교와 함께 시작되었고, 기독교적 세계상과 함께 성장했으며, 기독교적 가치를 구현하려고 했던 최초의 기독교 문명이라는 점에서 서구사회를 이해하는 길잡이의 역할을 해 준다. 비잔틴 문명은 1352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더불어 그 역사적 사명을 다하였다.

    본 연구는 이런 각도에서 헬레니즘 문명, 비잔틴 문명이 기독교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를 정치, 경제, 문화적 관점에서 파악해보려는 문명사 연구이다. 다시 말해 본 연구는 헬레니즘 문명 속에서 형성된 기독교적 가치들이 4-6세기의 비잔틴 문명의 정치, 경제, 문화적 차원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살펴보는 거시담론을 그 목적으로 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이 연구에서 다룬 문명과 종교라는 주제는 현재 우리나라가 직면하고 잇는 다문화현상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단초를 제공하리라 기대된다. 현재 세계의 글로벌화 과정은 종교와 문명의 빠른 교류를 촉진하고 있으며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도 다양한 종교와 환경을 가진 사람들이 유입해 들어오며 정착하는 과정에서 종교와 문명/문화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문제다. 따라서 이 연구는 기독교가 당시의 종교와 문명을 만나면서 해결해 나갔던 종교와 문명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 특히 이렇게 종교와 문명의 문제는 단순하게 감정적이고 정신적인 문제가 아닌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이해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런 이해를 통해서 내부로는 한국내 존재하는 전통 종교화의 대화를 위한 장이 마련될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서 기도교의 폐쇄성을 극복하는 길에도 기여할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기독교가 직면해 왔던 종교와 문명에 대한 이해와 그 해결방법들은 현재 한국과 세계에서 일어나는 종교 간의 갈등과 그로 인한 문화 충돌에 대한 대안을 찾는 과정이 될 것이다.

    본 연구의 결과 신약학과 교회사를 연결시키는 교과과정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가칭 “문명과 종교”라는 이름의 교과과정을 개발하여, 헬레니즘 문명이 기독교의 탄생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헬레니즘의 문화적 토양에서 자라난 기독교가 어떻게 그리스-로마 문화를 기독교 문명으로 바꾸어 비잔틴 문명을 열어 가는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책임연구자와 공동연구자가 발표하는 총 6편의 연구 논문과, 관련분야의 해외석학들이 발표한 3편의 논문 등 통 7편의 연구를 통합하여 단행본을 출판한 후, 가칭 “문명과 종교”라는 신약학과 교회사 통합과목의 교재로 사용할 것이다.
  • 색인어
  • 헬레니즘, 비잔틴 문명, 유대교, 기독교, 황제 숭배, 지배자 숭배, 신격화, 신화, 테오도시우스 칙법전, 자선가, 선행가, 선행, 고대후기, 본보기, 삼위일체, 기독교 예술, 초기 비잔틴 제국, 가난한 선행가, 콘스탄티누스, 황제 레오, 황제 아나스타시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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