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 <칸트와 현대 영미철학>은 현대 영미철학의 대표적 철학자인 포퍼, 셀라스, 퍼트남 등의 철학을 통해서 칸트의 철학이 어떻게 평가되어 재구성되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이들 철학자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재구성은 칸트의 철학이 지닌 철학적 의의와 한계에 대한 ...
이 연구 <칸트와 현대 영미철학>은 현대 영미철학의 대표적 철학자인 포퍼, 셀라스, 퍼트남 등의 철학을 통해서 칸트의 철학이 어떻게 평가되어 재구성되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이들 철학자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재구성은 칸트의 철학이 지닌 철학적 의의와 한계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이 연구가 지니고 있는 의도나 의미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통상적인 선입관과 다르게 칸트의 철학은 그 나름대로 재구성되어 현대 영미철학의 대표적 철학자라고 할 수 있는 포퍼, 셀라스, 퍼트남의 철학을 통해 현대 영미철학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연구가 다루지 않았지만, 우리는 칸트 철학의 강한 영향력을 비트겐슈타인이나 맥도웰, 나아가 브랜덤 등이 보여주는 철학적 작업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이 연구는 우리 철학에서 목도할 수 있는 소위 영미 분석철학과 대륙 철학의 간극을 약간이나 좁혀 보려고 했다. 포퍼, 셀라스, 퍼트남의 철학을 그들이 철학 이론 안에서 탐구할 수도 있지만, 칸트철학이라는 철학적 배경 아래에서 탐구한 연유는 바로 서로 무관심한 우리 철학의 연구 태도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표현 방식의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칸트나 현대 영미철학자들이 다루고 있는 철학적 문제들은 이미 칸트가 문제틀을 형성해 준 것처럼 철학의 목적과 방법, 철학과 과학, 과학과 도덕, 실재와 사유, 표상가능성과 지향성 등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포퍼, 셀라스, 퍼트남에게 칸트철학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포퍼는 칸트의 인식이론에 동의하면서도, 과학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철학의 기능과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포퍼에 의하면 철학과 과학은 그 방법에 있어서 연속적이다. 따라서 철학은 과학과 마찬가지로 문제 해결력이나 철학적 설명력에 의해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칸트의 선험철학적 철학관이 부정되면서 현대 영미철학의 두드러진 철학적 방법으로서 과학적 철학방법이 주장되고 있음을 목도할 수 있다.
셀라스는 칸트철학의 철학적 의미들을 철저하게 수용하면서 그것을 과학적 기초 위에 수립하려고 한다. 칸트의 철학은 셀라스가 현시적 영상(manifest image)의 세계라고 부른 인식론적 차원에서 그 철학적 중요성을 간직한다. 셀라스의 이러한 주장은 귀납적인 과학적 방법론, 경험론적 방법론을 비판하는 포퍼의 경우와 유사하다. 셀라스는 자신이 과학적 영상(scientific image)의 세계라고 부른 존재적 차원에서 칸트의 철학은 그 한계를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이 한계는 칸트가 직면했던 환경, 즉 유클리드의 기하학과 뉴턴 물리학으로부터 새로운 과학들이 나타난 환경으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셀라스는 실재, 물자체에 대한 칸트의 회의론으로부터 벗어나 과학적 실재론(scientific realism)을 주장한다. 셀라스의 과학적 실재론은 존재와 비존재의 결정, 즉 존재론의 문제는 바로 과학이 담당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존재론의 문제, 또는 형이상학의 문제는 이제 철학이 결정 사항이 아니라 바로 과학의 결정 사항이다.
한동안 실재론의 옹호자였다가 그것을 비판하고 내재적 실재론을 주장하는 퍼트남에 게 칸트의 철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퍼트남 자신도 밝히고 있듯이 매우 크다. 퍼트남은 우리의 모든 경험은 개념 매개적이며, 개념 부여적이라는 칸트의 주장을 철저하게 적용하고 있다. 또한 이것이 퍼트남이 형이상학적 실재론(metaphysical realism)을 비판하는 논거이기도 하다. 퍼트남은 이러한 논거를 통하여 셀라스의 과학적 실재론을 비판하고 있다. 퍼트남에 의하면 우리가 지각하는 대상들이나 타인들의 존재는 과학적 실재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가설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우리는 규범성을 지니고 있는 개념체계 속에서 바로 이러한 실재를 파악한다. 나아가 퍼트남은 칸트의 비판철학 전체를 통괄하면서 과학적 개념체계, 도덕적 개념체계, 예술적 개념체계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개념적 다원주의를 주장한다.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칸트의 철학이 우리에게 준 가장 중요한 유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