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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백제의 수취제 및 물자유통과 도량형 -- 척도의 변화를 중심으로 --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지방대학육성지원
연구과제번호 2004-002-A00004
선정년도 2004 년
연구기간 1 년 (2004년 07월 01일 ~ 2005년 07월 01일)
연구책임자 노중국
연구수행기관 계명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도량형은 길이·부피·무게를 측정하는 수단이다. 이 도량형은 개인과 개인사이나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물자유통의 사회적 약속이며, 국가와 개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조세수취에서 그 양과 질을 결정해주는 바탕이 된다. 때문에 중앙집권적 국가체제가 갖추어지게 되면 국가는 도량형을 통일하여 영역 안에서 일원적으로 실시하게 된다. 따라서 도량형에 대한 연구는 사회사 정치사를 이해하는데 기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의 도량형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도 별로 없고 실제 유물도 거의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삼국의 도량형에 대한 연구는 매우 부진함을 면하지 못하였다. 다행이 근래에 와서 부여에서 백제의 자가 출토되었고, 이성산성에서는 고구려의 자가 출토되어 이러한 고고자료를 중심으로 백제나 고구려의 도량형을 정리한 새로운 업적들이 나오게 되었다. 이 업적들은 백제 도량형 이해의 기초자료가 됨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 업적들은 도량형의 기본 단위가 무엇이었느냐를 밝히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이러한 도량형이 언제 통일되었고 시대에 따라 왜 변화였는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미흡하였다고 할 수 있다.
    본고는 이러한 기초자료를 토대로 하여 백제의 도량형을 수취제도 및 물자의 유통과 연관시켜 정리해 보기로 한다. 먼저 백제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고 지방통치조직인 담로제를 실시하면서 종래 소국에 따라 또는 지역에 따라 달랐을 도량형을 통일하게 된 모습을 먼저 정리할 것이다. 다음으로 이때 통일된 도량형이 백제사의 전개과정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였고, 그러한 변화가 생겨나게 된 배경이 무엇이었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도량형을 관장하는 기구가 무엇이며, 도량형의 변화에 따라 수취에도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가 등의 문제들을 규명하고자 한다. 다만 논지의 전개를 위해 도량형 가운데 자료가 상대적으로 많은 자를 중심으로 정리할 것이다.
  • 기대효과
  • 백제의 도량형은 백제사의 전개과정과 긴밀하게 맞물며 변화되어 왔다. 본 연구를 통해 백제의 척도는 삼한 시기에는 후한척인 23cm의 자가 사용되었고, 중앙집권체제가 갖추어진 근초고왕 이후는 남조척인 25cm자가 사용되었으며 이 자는 웅진도읍기를 거쳐 사비도읍기인 6세기 중후반까지 사용되었고, 6세기 후반에 와서 수당척인 29cm자가 사용되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는 다음과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첫째 척도의 변화를 밝힘으로써 백제의 사회사 정치사에 대한 이해를 한 단계 높일 수 있게 되었다. 둘째 척도의 변화는 되나 말 또는 무게의 기준 단위에도 변화를 주게 되며 나아가 수취제도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지배층의 민에 대한 착취의 심화, 농업생산력의 증대에 따른 생산량의 증가 등의 사실을 추출해 볼 수 있다. 셋째 백제 도량형의 변화에는 중국의 영향, 특히 남조의 영향이 컸으며 이를 통해 백제와 중국 왕조 사이의 교역과 교섭이 매우 활발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넷째 도시부의 설치는 물자유통과 도량형을 체계적으로 통괄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다섯째 재정수요와 도량형 변화와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사비천도 이후 중앙 및 지방통치조직의 정비 및 확대에 따른 관료조직의 비대화와 빈번한 전쟁으로 인한 군수물자의 확보는 재정의 압박을 가져오게 되었고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척도의 길이를 늘임으로써 도량형의 변화가 생겨나게 되었다. 여섯째 백제의 중요한 토목·건축 사업, 즉 성왕의 사비도성 건설, 백제금동대향로의 제작, 5방성 축조, 정림사지오층석탑 및 미륵사석탑 건축 등에 사용된 자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다 분명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각 건축물의 축조시기를 추정하는데 토대가 된다.
  • 연구요약
  • 백제의 도량형과 그 변화
    백제는 처음에는 마한의 한 구성원으로서 존재하였다. 마한시기 각 소국들은 낙랑·대방군과 긴밀한 접촉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하호들까지도 군현과의 교역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 시기 중국 군현에서는 후한척인 23cm자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마한연맹체의 한 구성체인 백제국도 23cm자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러나 모든 소국이 일율적으로 23cm자를 사용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군현과 접촉하는 것이 드물었거나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국의 경우 다른 척도를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백제에서 도량형의 통일 문제는 부체제가 성립되면서 보다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부체제단계에서는 연맹체적 성격이 점차 극복되고 각 소국의 수장들은 이제 그 독자성을 상실하여 중앙귀족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리하여 대외교역권은 중앙에 귀속되게 되어 갔고 대외교역권의 중앙으로의 귀속은 자연히 도량형의 통일을 필요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
    백제에서 도량형의 일원화 작업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생산력의 증대이다. 백제는 부체제 단계인 고이왕대에 도전의 개발을 적극 장려하였고 특히 비류왕대에 오면 벽골지를 축조하는 등 대규모의 저수지 건설사업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수리사업은 종전에 비해 농업생산력을 크게 증대시켰고 그 결과 이러한 생산력에 걸맞는 도량형도 필요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정비이다.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는 권력의 집중화와 귀족세력의 재편제라고 하는 정치적 측면 외에 국가를 운영함에 있어서 필수적인 조세수취와 노동력 동원도 일원화하게 되었다. 조세수취와 노동력 동원의 일원화는 지방통치조직이 만들어지고 지방관이 파견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백제에서 지방통치조직이 마련된 것은 근초고왕이 담로제를 실시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런데 일원적 조세수취를 위해서는 일정한 수취기준이 마련되어야 하였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도량형의 통일이 필요하였다. 이렇게 볼 때 백제에서의 도량형의 통일은 늦어도 근초고왕대에는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근초고왕 이후 한성도읍기의 척도에 대해 종래에는 방이동 4호 석실분의 측정치를 기준으로 하여 후한척인 23cm자가 사용된 것으로 추정하여 왔다. 그러나 방이동 고분의 경우 신라 고분이라는 설도 있고 하여 그대로 받아들이기뇩옛佇틈? 필자는 이 시기의 자와 관련하여 칠지도에 주목하고자 한다. 칠지도에는 태화 4년이라는 동진의 연호가 새겨져 있고 또 일본서기에 백제가 왜가 전수해 준 것으로 나와 있는 칼이며 백제왕실에서 만들었다. 따라서 이 칼의 제작에는 당시의 척도가 적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이 칼의 길이는 74.9cm이다. 이는 동진척 25cm자로 계산하면 3척이 된다. 따라서 한성도읍기의 자는 25cm라고 할 수 있다.
    백제는 475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하는 등의 위급한 상황에서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웅진 천도 이후의 도량형은 이 시기에 조영된 건조물의 측정에서 추론해 볼 수밖에 없다. 송산리 6호분은 전축분인데 뒷벽은 9자 반, 옆벽은 16자로 축조되었다. 그리고 무령왕릉은 뒷벽 11자, 앞벽 17자로 축조되었다. 이는 25cm의 자로 환산하면 실제의 길이와 맞는다. 이는 웅진도읍기에도 25cm자가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사비도읍기의 척도는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부여 쌍북리에서 출토된 실물 자이다. 이 자는 단면 직사각형의 긴 막대 형태로 한쪽만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남아 있는 길이는 19.2cm이다. 자의 눈금은 넓은 면에 새겨져 있는데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쪽을 기준으로 첫 번째 눈끔까지가 2.90cm이고 그 다음 눈금들의 간격은 1.45cm이다. 첫 번째의 눈금인 2.90cm는 1치(一寸)를, 1.45cm는 1치의 반(五分)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바탕으로 자를 복원해 보면 이 자의 길이는 29.1cm이며, 1자의 정확한 길이는 29cm가 된다. 이 자가 출토된 유적은 7세기 전반대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29cm인 이 자는 북위에서 기원한 唐尺으로 생각된다. 당척은 29.5cm-29.7cm였다.
    다른 하나는 백제금동대향로나 궁남지 등에서 출토된 목간에서 추정되는 길이이다.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의 높이는 61.8cm로 25cm자로는 2자 5치에 해당되며, 창왕명석조사리감은 높이 74cm로 3자가 된다. 그리고 부여 궁남지와 능산리절터 및 관북리 등에서 출토된 목간에서 측정된 수치에 의하면 25cm자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 유물들이 만들어진 시기는 창왕명 사리감의 명문에는 창왕 13년(566)이라는 기년이 나오므로 6세기 중후반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사비도읍기의 자는 7세기 중후반까지는 25cm의 자를 사용하다가가 7세기 후반에 와서 쌍북
  • 한글키워드
  • 도량형. 담로제. 후한척. 동진척. 북위척. 당척. 척도. 되. 말. 저울. 저울추. 영조척. 청동환권. 도시부. 조세수취. 물자유통. 중앙집권체제. 부세. 재정수요. 백제금동대향로. 양관와위사. 정림사지오층석탑. 장식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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