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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옹방강(翁方綱)의 서예사론(書藝史論)― 해서(楷書)를 중심으로
The idea for history of Chinese calligraphy by Wen, Fanggang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우수논문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2S1A5A2A02018900
선정년도 2012 년
연구기간 1 년 (2012년 05월 01일 ~ 2013년 04월 30일)
연구책임자 정혜린
연구수행기관 서울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논문은 옹방강의 서예사관을 주제로 하여, 기존에 논의된 바 비학과 첩학의 겸수에 대해, 양자를 관통하는 이념을 탐색하였다. 옹방강(1733-1818)은 청대 중기 경학, 금석학, 시ㆍ서ㆍ화 등 분야에서 업적을 냈던 대학자이다. 또한 그는 다양한 조선의 문인들, 사대부·중인 그리고 소론·노론을 막론한 많은 이들과 교유를 나눠 조선의 문헌 속에 종종 등장할 뿐만 아니라 일본의 문인들과도 직간접적으로 교류한 바, 동아시아 문화 교류사에서 중요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중요성에 비해 그에 대한 연구는 갈 길이 멀다.
    특히 본 논문의 연구대상인 옹방강의 서예ㆍ금석학 관련 연구 분야는 이제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에서는 그가 한대 금석학에 조예가 깊고, 첩학(帖學)과 비학(碑學)을 절충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사항 정도가 간략하게 알려져 있을 뿐이다. 금석학과 서예사를 관통하는 옹방강의 관점, 그 미적 이념에 대해서는 국내외에서 연구된 바 없다. 옹방강 스스로 이해한 바 예술사가로서의 측면을 주목하고 그의 ‘미적 기준’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다. 그랬을 때만 그가 작성한 중국 서예사에서 특징 인물과 작품들이 선정된 이유, 당시 그의 이론을 비판한 최신의 서예실천론인 비학파가 등장한 이유, 그의 서예론이 청 중기 최신의 서예론의 경향이 아님에도 왜 조선에 널리 수용될 수 있었가하는 문제를 전면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옹방강은 특히 그 영향력이 중국 뿐 아니라 조선과 일본까지 미친다. 현재 동북아시아의 학계에서는 ‘근대 동아시아 문화권의 형성’ 혹은 ‘동아시아 문화의 교류’라는 주제하에 18-19기의 문화 교섭이 중요한 연구 논제로 자리잡았다. 옹방강은 그 논의의 가운데 있다. 본 논문은 옹방강을 재발견함으로써 근대, 동아시아 문화라는 주제는 더욱 활성화되고 중국학계에도 자극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 기대효과
  • ▣ 국제적인 파급효과
    금석학과 서예사를 관통하는 옹방강의 관점, 그 미적 이념에 대해서는 국내외에서 연구된 바 없다. 중국의 서예라는 분야는 서구의 학자들이 여전히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사상· 문학·회화에 대해 커다른 자취를 남긴 것과 매우 대조된다. 서예는 여전히 중국과 한국 일본 등 서예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국가의 학자들의 몫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자료에 대한 정리 외에 가치관에 대해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중국에서도 최근 20년간 4편의 석사학위논문에서 한대(漢代) 금석학, 비학과 첩학의 겸수, 그의 글씨를 정리하는 정도에 그치며, 박사학위논문은 전무하다. 국내에서의 연구상황은 훨씬 취약하다. 현재까지 거의 문학과 관련해 두 편의 석사논문과 몇몇 학술논문이 제시되었을 뿐이다.
    옹방강은 특히 그 영향력이 중국 뿐 아니라 조선과 일본까지 미친다. 현재 동북아시아의 학계에서는 ‘근대 동아시아 문화권의 형성’ 혹은 ‘동아시아 문화의 교류’라는 주제하에 18-19기의 문화 교섭이 중요한 연구 논제로 자리잡았다. 옹방강은 그 논의의 가운데 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연구가 미미한 이유 중 하나는 청대 옹방강의 위상에 대한 연구 관점에 있다고 생각된다. 동시대에 활동한 완원의 업적이 획기적이고 시대의 흐름을 앞당겼다는데 주목하면서 옹방강의 온건한 관점의 가치가 가려진 것이다. 옹방강이 온건하다는 것은 왕희지라는 전통 관념을 인정했고 아울러 단일한 가치를 내세우기보나는 여러 가치들을에 포용적이라는데 있다. 그 포용성은 문화의 전파에 큰 힘이 되어 조선과 일본의 문인들에게 수용될 수 있었다고 판단한다. 본 논문은 옹방강을 재발견함으로써 근대, 동아시아 문화라는 주제는 더욱 활성화되고 중국학계에도 자극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 국내에서의 기대효과
    옹방강의 서예사론과 금석학은 조선 후기 많은 유력한 문인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계층과 당색을 막론하고 그는 많은 조선의 문인들과 직간접적으로 교유했다. 그 핵심에 있는 김정희의 서예론에 대해 아직 옹방강과 밀접한 영향관계가 논의되지 못했다. 본 논문은 옹방강의 서예사관을 재조명하여, 이후 조선뿐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서예계에서 추앙되는 김정희의 글씨, 그 미적 이념을 재조명할 기회를 만들었다고 판단된다.
    또한 김정희 외에 이유원·신위의 서예에 대한 정보와 안목은 실제로 옹방강의 업적에 크게 힘입은 바 있다. 이는 본 연구자의 기존 논문에서 간략하게 언급된 바 있다. 본 논문은 옹방강의 서예사론을 연구함으로써 조선 후기 소론계 대서예가들의 성과를 재분석하고, 조선 19세기 서단을 재분석할 중요한 계기를 제시했다고 할 것이다.
  • 연구요약
  • 위 논문은 옹방강의 서예사관을 주제로 하여, 기존에 논의된 바 비학과 첩학의 겸수에 대해, 양자를 관통하는 이념을 탐색하였다. 옹방강은 어떠한 학술사적 의미를 지닌 인물이며, 그의 서예사관을 논하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은 청대 중기 경학, 금석학, 시ㆍ서ㆍ화 등 분야에서 업적을 냈던 대학자이다. 또한 그는 다양한 조선의 문인들, 사대부·중인 그리고 소론·노론을 막론한 많은 이들과 교유를 나눠 조선의 문헌 속에 종종 등장할 뿐만 아니라 일본의 문인들과도 직간접적으로 교류한 바, 동아시아 문화 교류사에서 중요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중요성에 비해 그에 대한 연구는 갈 길이 멀다. 특히 본 논문의 연구대상인 옹방강의 서예ㆍ금석학 관련 연구 분야는 이제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에서는 그가 한대 금석학에 조예가 깊고, 첩학(帖學)과 비학(碑學)을 절충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사항 정도가 간략하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이에 본 논문은 옹방강의 서예사관, 이와 관련된 그의 금석학적 업적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제에 답하였다. 첫째 널리 알려진 비학과 첩학을 겸수(兼修)한다는 것은, 양자를 어떤 방식으로 절충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단지 서예론과 관련해 비와 첩이 각각 특정 시대를 유효하게 설명하는 한 자유롭게 사용된다는 의미일까. 둘째 커다란 문제가 없어 보이는 옹방강의 자료선정방식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 완원(阮元)은 역사학에서뿐 아니라 굳이 서예라는 기예의 측면에서까지 비학만을 선양했을까. 셋째 조선의 명필들은 당시 청대 문화계에서 비학이 대세였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왜 여전히 완원에 옹방강을 절충했을까.
    이제까지 이상의 문제들이 제기되지 않은 이유는, 그의 업적을 역사학의 한 분과로서의 금석학이라는 시각에서만 다룬데 있다. 실제로 옹방강은 자신을 예술사가로 이해했다. 그만큼 그의 금석학과 서예사에 대한 업적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그의 ‘미적 기준’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다. 옹방강에게서 비와 첩의 겸수란, 비와 첩의 역사 자료로서의 유용성을 모두 수용한다는 의미만 가지는 것이 아니다. 자료의 ‘수집’ 외 자료의 ‘평가’에 주목해야 한다. 이 때 그 평가의 기준에는, 그 글씨가 전혀 남아있지 않은 왕희지(王羲之)가 존재한다. 옹방강은 왕희지의 글씨에 존재한다고 믿는 미적 원칙들을 기준으로, 비이건 첩이던 그 기준을 계승한 글씨의 역사를 제시했다. 그래서 이 미의 원칙과 거리가 먼 북조(北朝)의 비문들은 그의 시야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이른바 왕희지가 수립한 미의 원칙들과 부합하는 몇몇 수대, 당대의 해서(楷書)들은 뚜렷이 역사로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왕희지의 작품들의 아름다움은 첩학의 정체성을 회의케 할 위험성을 지닌다. 이 약점을 간파한 이는 바로 완원(阮元)이었다. 그는 서예사에서 왕희지의 글씨를 논하는 것 자체를 배제했다. 그런데 완원이 이를 간파할 수 있었던 것은 북비에 대한 더 풍부한 자료의 확보 뿐 아니라, 바로 옹방강과 다른 미적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실증할 수 있는 자료가 존재하는 비각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고, 이에 비각들에서 두드러지는 예서풍, 즉 주경하고 규범에 맞는 질박한 미를 선양했다. 결국 그의 미적 기준이 중국의 서예사 뿐 아니라 청대 중기 서단의 경향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왕희지라는 천년 이상 지속된 미의 이상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기에 너무나 견고했다. 조선의 대가들인 김정희ㆍ신위ㆍ이유원 등이 옹방강의 서예론을 계속 연구한 이유도 여기 있다고 짐작된다.
  • 한글키워드
  • 옹방강(翁方綱), 서예사론(書藝史論), 완원(阮元), 북비(北碑), 왕희지(王羲之), 해서(楷書)
  • 영문키워드
  • Wen, Fanggang, calligraphy, Ruan, Yuan, stone inscription, Wang, Xizi, kai 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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