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논문은 옹방강의 서예사관을 주제로 하여, 기존에 논의된 바 비학과 첩학의 겸수에 대해, 양자를 관통하는 이념을 탐색하였다. 옹방강은 어떠한 학술사적 의미를 지닌 인물이며, 그의 서예사관을 논하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은 청대 ...
위 논문은 옹방강의 서예사관을 주제로 하여, 기존에 논의된 바 비학과 첩학의 겸수에 대해, 양자를 관통하는 이념을 탐색하였다. 옹방강은 어떠한 학술사적 의미를 지닌 인물이며, 그의 서예사관을 논하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은 청대 중기 경학, 금석학, 시ㆍ서ㆍ화 등 분야에서 업적을 냈던 대학자이다. 또한 그는 다양한 조선의 문인들, 사대부·중인 그리고 소론·노론을 막론한 많은 이들과 교유를 나눠 조선의 문헌 속에 종종 등장할 뿐만 아니라 일본의 문인들과도 직간접적으로 교류한 바, 동아시아 문화 교류사에서 중요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중요성에 비해 그에 대한 연구는 갈 길이 멀다. 특히 본 논문의 연구대상인 옹방강의 서예ㆍ금석학 관련 연구 분야는 이제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에서는 그가 한대 금석학에 조예가 깊고, 첩학(帖學)과 비학(碑學)을 절충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사항 정도가 간략하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이에 본 논문은 옹방강의 서예사관, 이와 관련된 그의 금석학적 업적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제에 답하였다. 첫째 널리 알려진 비학과 첩학을 겸수(兼修)한다는 것은, 양자를 어떤 방식으로 절충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단지 서예론과 관련해 비와 첩이 각각 특정 시대를 유효하게 설명하는 한 자유롭게 사용된다는 의미일까. 둘째 커다란 문제가 없어 보이는 옹방강의 자료선정방식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 완원(阮元)은 역사학에서뿐 아니라 굳이 서예라는 기예의 측면에서까지 비학만을 선양했을까. 셋째 조선의 명필들은 당시 청대 문화계에서 비학이 대세였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왜 여전히 완원에 옹방강을 절충했을까.
이제까지 이상의 문제들이 제기되지 않은 이유는, 그의 업적을 역사학의 한 분과로서의 금석학이라는 시각에서만 다룬데 있다. 실제로 옹방강은 자신을 예술사가로 이해했다. 그만큼 그의 금석학과 서예사에 대한 업적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그의 ‘미적 기준’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다. 옹방강에게서 비와 첩의 겸수란, 비와 첩의 역사 자료로서의 유용성을 모두 수용한다는 의미만 가지는 것이 아니다. 자료의 ‘수집’ 외 자료의 ‘평가’에 주목해야 한다. 이 때 그 평가의 기준에는, 그 글씨가 전혀 남아있지 않은 왕희지(王羲之)가 존재한다. 옹방강은 왕희지의 글씨에 존재한다고 믿는 미적 원칙들을 기준으로, 비이건 첩이던 그 기준을 계승한 글씨의 역사를 제시했다. 그래서 이 미의 원칙과 거리가 먼 북조(北朝)의 비문들은 그의 시야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이른바 왕희지가 수립한 미의 원칙들과 부합하는 몇몇 수대, 당대의 해서(楷書)들은 뚜렷이 역사로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왕희지의 작품들의 아름다움은 첩학의 정체성을 회의케 할 위험성을 지닌다. 이 약점을 간파한 이는 바로 완원(阮元)이었다. 그는 서예사에서 왕희지의 글씨를 논하는 것 자체를 배제했다. 그런데 완원이 이를 간파할 수 있었던 것은 북비에 대한 더 풍부한 자료의 확보 뿐 아니라, 바로 옹방강과 다른 미적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실증할 수 있는 자료가 존재하는 비각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고, 이에 비각들에서 두드러지는 예서풍, 즉 주경하고 규범에 맞는 질박한 미를 선양했다. 결국 그의 미적 기준이 중국의 서예사 뿐 아니라 청대 중기 서단의 경향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왕희지라는 천년 이상 지속된 미의 이상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기에 너무나 견고했다. 조선의 대가들인 김정희ㆍ신위ㆍ이유원 등이 옹방강의 서예론을 계속 연구한 이유도 여기 있다고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