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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발일 항로 변화에 관한 검토
Study on the Change of Maritime Route between Palhae and Japan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신진연구자지원사업& #40;인문사회& #41;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2S1A5A8023578
선정년도 2012 년
연구기간 1 년 (2012년 05월 01일 ~ 2013년 04월 30일)
연구책임자 구난희
연구수행기관 한국학중앙연구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1980년대 이후 발해에 대한 관심이 점증되고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발해 일본 교류사 연구 또한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가 일본 사료에 산견되고 있는 관련 기사를 중심으로 교류의 양상을 살피는 데 머물러 있다. 뿐만 아니라 발해사 자체의 근본적 한계인 자체 사료 부재와 국가별 연구 기반의 편차로 인해 한국학계의 성과나 기초 인프라는 중국과 일본에 비해 극히 미진하다. 특히 이 계획서의 관심 분야인 발해와 일본간의 교류 항로에 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발해와 일본간의 교류는 자체 기록이 없는 발해 연구를 보완해 줄 수 있는 중요한 축이 되지만 그 시작이 1930년대 일본의 대륙 침략의 이론적 근거로 시작됨에 따라 ‘발해=일본 조공국’과 같은 일본 우위의 시각이 기본적 인식을 형성한 이래 현재까지도 발해와 일본의 관계를 고찰함에 있어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더욱이 이러한 관점은 발해와 일본의 협력 교류, 발해와 신라의 대립이라는 기본 구도로 이어져 한국사 이해에도 부정적 인식을 초래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발일 항로에 관한 연구는 ‘환일본해 해역권’이라는 관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루트로 재인식되면서 이 지역의 교역이 오래 전부터 일본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논리를 재생산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는 동해․독도 논쟁의 선점적 논리의 한 축으로 발전될 소지조차 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에 대한 한국학계의 관심은 거의 백지수준에 머물러 있어 각별한 관심이 요구된다.
    현재까지 이루어진 일본학계의 성과를 보면 전반적으로 동해 횡단 항로가 주요 루트였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연안 항로는 거의 배제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북회 항로는 양국 교류 초기에 이용되다가 횡단 항로가 안정화되면서 이용되지 않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그 원인이 무엇이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면밀한 검토는 진행되지 못했다.
    이는 양국 교류를 줄곧 일본중심적 시각에서 해석함에 따른 것이라 생각한다. 예컨대 발해와의 교류는 이미 肅愼과 일본 동북 지방간에 이루어지고 있었던 교류를 모태로 이루어졌으며, 발해와 신라의 갈등이라는 일관된 가설을 설정하고 연안 항로 이용의 가능성을 아예 차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부 학자의 경우 동해 횡단이 가능하게 된 것은 일본과의 교류 과정에서 항해술, 조선술을 습득하였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조차 한다.
    하지만 발해사신의 도착지가 동북 지방에서 점차 北陸 및 山陰 지역으로 이동하는 시기와 맞물려 도착 시기, 선단의 구성 등 교류 전반에 걸쳐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고 있음에 주목해 본다면 좀 더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 판단한다. 더 나아가 ‘일본 우위, 발해 순응’, ‘발일 우호, 발신 대립’이라는 일본 중심의 시각에 대한 일정한 비판적 논리를 형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연구는 이러한 문제 인식하에 다음과 같은 목적을 중심으로 작업을 진행하고자 한다.
    첫째, 발일 교류의 양상 변화의 실태와 원인을 탐구한다. 한중일에 산견되고 있는 발일 교류 관련 사료를 통해 발일 교류의 양상 변화를 재검토하여 일정한 경향성을 파악하고 그것이 나타나게 된 원인을 탐구한다.
    둘째, 발일 교류 관련 사료와 항해 정보를 통합적으로 재구성한다. 사료상에 등장하는 발해측 지역과 일본측 지역을 직선적으로 연계하는 방식을 넘어서서 항해 조건과 이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제요소를 파악할 것이다. 이를 위해 동해상의 풍랑, 풍속, 해류 등 다양한 데이터를 접목하고 항로 변화를 추론할 수 있는 컨텍스트를 통합적으로 재구성하여 그 실체에 접근해 볼 예정이다.
    셋째, 발일 항로를 복원하고 그 역사적 함의를 탐색한다. 재구성된 통합 정보를 바탕으로 그동안 일본중심적 시각에서 간과했던 발일 항로의 다양한 가능성과 변화 양상을 모색하고 그것이 갖는 역사적 함의를 탐색한다.
    넷째, 발일 교류사 연구의 향후 과제를 제안한다. 양국 교류의 구체적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새로운 이해와 통로 마련함으로써 발일 교류사 뿐만 아니라 발해사와 고대 동아시아 교류를 이해하는 시야를 확장하고 향후 과제와 이 분야 연구에 대한 전망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기대효과
  • 발해와 일본의 교류는 동해 해상 교역의 역사적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로 발해사를 넘어서 한일교류사, 환동해 해상 교역권, 동아시아 문물 교류 등 다양한 영역의 연구 가능성을 제고하고 이해의 폭을 확장시킬 수 있는 분야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동해독도 문제를 둘러싼 한일간의 갈등 구도를 완화하고 일본의 논리를 선점할 수 있는 학제간 연구의 한 축으로도 기능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므로 이 분야 연구의 중요성과 잠재적 확산력은 매우 지대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발해 일본 교류의 연구 시작이 1930년대 일본의 대륙 침략의 이론적 근거로 시작됨에 따라 ‘발해=일본 조공국’과 같은 일본 우위의 시각이 기본적 인식을 형성한 이래(鳥山喜一(1933); 沼田瀬輔(1933a); 沼田瀬輔(1933b); 浅海正三(1935); 烏山喜一(1938) 등) 현재까지도 발해와 일본의 관계를 고찰함에 있어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더욱이 이러한 관점은 발해와 일본의 협력 교류, 발해와 신라의 대립이라는 기본 구도로 이어져 한국사 이해에도 부정적 인식을 초래하고 있다.
    한국학계는 1990년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양국 교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일본 우위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주요 근거로서 제시해 왔던 이른바 新羅侵攻計劃, 國書분쟁, 訪期 제한 등의 문제에 대해 安史의 亂 시기 발해의 유연한 외교 전략(朴眞淑, 1997, 56~62쪽; 具蘭憙, 1997, 23~26쪽), 문왕대 이후 발해의 적극적 對日 外交라는(조이옥, 2005, 226~229쪽; 김종복, 2008, 112~114쪽) 관점에서 새로운 인식을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오랜 일본학계의 시각을 극복하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다.

    이러한 연구 환경 속에서 추진될 발해․일본 항로에 관한 본 연구는 한국학계가 거의 배제하여 왔던 새로운 학문 영역을 열어 나가고 역사학 뿐만 아니라 관련 학문의 성과를 통합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함으로써 다앙한 가능성과 영역을 확대해 나갈 수 있다.
    첫째, 본 연구는 한국의 학계에서는 아직 원시단계에 머물고 있는 ‘발일항로’에 대한 연구의 새로운 접근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동해상을 둘러싸고 일본과의 역사 해석 및 영유권, 표기문제 등의 갈등이 항존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해 볼 때 그동안 간과되었던 동해 교류의 역사성에 천착한다는 사회적 의미로 함께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문헌사료 중심의 역사학 연구의 방법론을 넘어서서 교류의 물질 환경인 해양에 주목하고 해양조건의 탐색하는 관점이 결합되어 전개될 것이므로 학제간적 연구 방법론의 중요성도 제고시킬 것이다. 이를 통해 고대인들의 역사적 행위와 자연 조건의 조응 과정을 복원함으로써 한국 고대사의 영역 또한 확대될 것으로 기대한다.
    셋째, 이 연구는 국가별로 산재한 다양한 성격의 자료를 검토함으로써 발일교류를 둘러싼 국가별 연구 성과의 성격 및 지향을 역사상과 현재적 인식의 결절점에서 읽어내는 새로운 접근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이론적 작업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면서, 동시에 이 연구를 통하여 발굴, 선택, 정리된 자료의 제시를 통하여 발일교류 연구의 특성과 향후 과제를 의미 있게 드러낼 수 있는 자료집으로서의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본 연구는 대학원에서 한국학을 공부하고 있는 학문후속세대를 연구보조원으로 활용하여 기초자료 수집과 정리 작업을 진행함으로써 새로운 관심 영역을 제공하고 연구의 경험을 쌓게 할 것이다. 특히 일본 및 러시아 지역의 연구 인력과 기관에 접근하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국제적 학문 네트워크를 조성하고 유지해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 과제의 연구결과물은 각 대학의 한국학 과정이나 자유전공 학부, 수업 자료로 이용함으로써 연구의 교육적 기대효과를 높이고자 한다. 더불어 이 연구 과제를 수행하면서 획득된 인적, 물적 인프라를 활용하여 한일간 항존하고 있는 동해독도 문제 등에 대한 일반 대중의 역사적 교양을 제고하는 기초자료의 활용이라는 점에서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 연구요약
  • 이 연구에서 항로 변화에 주목한 첫 출발점은 발해 사신단의 도착지의 변화 양상으로부터 출발할 것이다. 이에 따라 우선적으로는 발해 교류의 변화 양상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그러한 변화 양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탐구할 것이다.
    이를 위해 발해사신단의 도착지역, 발해사신단의 도착 시기( 및 출발시기), 발해사신단의 구성으로 나누어 제요소들에서 나타나는 변화와 이들간의 관련성 여부를 탐구할 것이다.
    발해사신단의 도착지는 8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과도적 양상을 보이다가 점차 出羽 지방으로부터 北陸 지방 以西 지역으로 변화해 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위해 『續日本紀』, 『日本後紀』, 『續日本後紀』, 『日本文德天皇實錄』, 『日本三代實錄』 등 일본 사료와 중국측 사서, 삼국사기를 분석할 것이며 필요한 경우 조선후기 각종 사서에서 다루어진 발해 관련 기록도 재검토할 것이다.
    둘째, 항로 변화를 동반한 발일 교류의 제요인을 분석할 것이다. 발해사의 도착 시기는 9~10월에서 점차 11월~1월로 변화해 나가고 있으며 공교롭게도 그 변화의 양상이 도착지 변화와 중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발해사신단의 구성도 8세기 후반부터 점차 100인 전후로 정례화되고 있다.
    이는 양국 교류의 구도가 변화하고 있음을 시사해 주는 대목으로 변화가 발생하는 시기 발해 및 신라, 당의 정세에 대한 포괄적 접근을 통해 좀 더 무게있는 해석에 접근해 볼 것이다.
    발해사신의 항해 조건과 구체적 실체를 탐색하기 위해 러시아와 일본의 현지답사 및 자료 조사를 추진할 예정이다. 우선적으로는 일본과 러시아 양측의 발해 사신단 출입의 창구가 되었던 지역을 답사하고 항해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해상 관련 자료를 수집할 것이다.
    한국 국립해양조사원이 파악한 겨울철 해류 현황도를 통해 현재까지 분석한 바에 따르면 일본학계가 주장하는 동해 횡단 항로를 이용해 북륙 지방으로 무사히 안착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따르는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12~1월로 정례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동해 횡단 항로 이용에 대해 의심해 볼 여지가 좀 더 커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에 착안하여 사신이 왕래하는 시기의 항해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국가별, 지역별 세부적인 자료에 접근하고 해류와 다른 항해조건과의 관계를 검토하여 구체적인 실체에 근접해 볼 것이다.
    이를 위해 일본 및 러시아 지역의 현지 조사를 병행할 것이다. 일본은 8세기 후반 이후 발해사신의 도착지가 집중되어 있는 石川県을 중심으로 조사를 진행할 것이다. 답사는 富來町, 金沢市, 羽咋市, 志賀町에 남아 있는 교류 관련 유적 및 유물을 확인하고 기초 자료를 수집할 것이다. 아울러 이 분야 연구 성과를 축적하고 있는 財団法人石川県埋蔵文化財センター 및 金沢学院大学 美術文化学部文化財学科를 방문하여 전문가 인터뷰 및 집담회를 통해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할 것이다.
    러시아 지역은 포시에트 및 크라스키노 일대가 주요 출항지이지만 이에 관한 자료는 지원자가 기습득하고 있으며 겨울 항해의 조건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할린 지역의 자료 수집이 긴요하다고 판단하여 SakhNIRO(사할린 어업 해양학연구소)를 방문하여 해양조건을 파악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와 정보를 수집하고 일본과의 교류와 관련된 유적, 유물에 접근해 볼 계획이다.
    이상과 같은 연구내용을 충족해 나가기 위해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병행해 나갈 것이다.
    가. 기초자료 수집 : 발일 교류와 관련된 한중일 사료, 항해 관련 자료, 동해 항로 이용 관련 기록 등 기초 자료를 수집하여 발일 항로를 재구성하는 토대를 마련한다.
    나. 문헌 연구 : 발일 항로의 해석은 물론 보다 넓은 의미에서 해상 교류의 역사상 복원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구축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에 착수한다.
    다. 학제간 연구 : 발일 항로 변화가 내포하는 양국 교류의 성격 및 의미에 맞추어 역사고고학, 기후기상학, 해류학 등의 협력을 통한 학제적 접근을 시도한다.
  • 한글키워드
  • 발해일본 교류, 발해일본 항로, 발해사, 동해 횡단 항로, 연안 항로, 북해도 항로, 해류
  • 영문키워드
  • the Exchange between Palhae and Japan, Maritime Route between Palhae and Japan, Palhae's Envoy, Maritime route through the Eat Sea, Maritime route along the corst, Hokkaido-Okhotsk maritime route, Sea currents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이 연구에서는 8세기말 9세기초에 이르러 발해와 일본간 교류에 나타난 항로 변화의 양상과 그 배경을 분석하였다. 기존 연구에서는 항로 변화와 함께 나타난 현상으로 도착지의 남하, 사신단 수의 증가, 12~1월 혹한기 도착 등을 들고 이러한 변화를 해사사적 상황에서 해석해 왔다. 그러나 이 연구에서는 변화를 가져 온 원인이 항해상의 외적 요인에 있기보다는 내적 요인와 연계되어 나타난 것이라는 점을 밝혀 보고자 했다.
    결론적으로 8세기말 9세기초에 나타난 발해와 일본 교류 항로의 변화는 항해기술의 향상에 따른 결과라기보다는 양국간의 교류 시스템 재편 속에서 최적의 항해 환경을 갖추어 나가는 과정임을 밝혀 보았다.
    첫째 8세기 후반 발해는 771년 國書 논란, 773년 筑紫道 이용 들을 둘러싸고 일본 조정과의 외교적 마찰을 야기되자 이를 회피하기 위해 二元的 외교를 추진하였다. 조정과의 협의나 공식적 접촉이 필요한 경우 北陸으로 향하였으며 일본조정의 요구를 따르지 않거나 교역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파견시에는 出羽에 도착하였다. 出羽 이용을 통해서는 교역을 지속하고 그 부수적 효과로 일본조정을 압박하는 동시에 北陸을 통해 협상을 추진하면서 방기 문제와 사신단 수에 대한 제한을 완화하였던 것이다.
    둘째 수차에 걸쳐 筑紫道 이용을 요구하는 일본조정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발해가 거듭 出羽에 도착하자 결국 현실성이 적은 筑紫道 이용 요구를 접고 802년 能登에 便處(客院)을 설치하면서 北陸 도착을 공식적으로 보장하였다. 이러한 일본조정의 방침 변화는, 798년 呂定琳 이후 放期 문제를 포함하여 사신단 규모 등 교류의 실질적 내용을 개편하려는 발해의 의도와 교섭의 결과였다. 즉 발해의 이원적 외교가 실질적으로 자국에 유리한 외교 조건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出羽로부터 北陸 또는 그 以西 지역으로 도착지가 변화한 것은 이원적 외교가 불필요하게 되자 더 이상 出羽 지역으로 향하지 않게 되었던 결과라고 해석하였다.
    선행 연구에서는 도착지 변화를 주로 해사사적 관점에서 접근하여 항해술 등의 발전을 원인으로 보고 일본의 영향에 주목하고 있으나 이에 대한 의문점도 제시하였다. 고구려 시대부터 北陸 항로와 出羽 항로를 이용하고 있었으므로 발해는 일본과의 교류 초기부터 계절풍에 관한 지식을 이미 습득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항해술의 발달로 항로가 변화하였다는 해석은 재고가 필요하다.
    이러한 해석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동해상의 해류 변화와 발해측과 일본측 항로의 결빙 시기, 북서 계졀풍의 시기별 변화 등 타분야 연구 성과를 검토하였다. 그 결과 발해로부터 일본으로 출항하는 데 가장 유리한 시기는 12~1월 전후의 혹한기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원적 외교의 일환으로 出羽 지역으로 가는 경우 혹하기에는 인근 연해가 결빙되므로 어쩔 수 없이 그 이전 시기를 택했던 것이고 이로 인해 많은 조난을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과의 외교 마찰이 일단락되면서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 이용했던 出羽 지역의 도착 항로는 폐기되었으므로 최적기 혹한기를 이용하여 도항하였던 것이다.
    이상의 검토 사항을 종합하여 8세기말 양국 교류상에 나타난 일련의 변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모색하였다. 발해는 8세기 중반 出羽와 北陸을 통한 이원적 외교를 추진함으로써 자국에 유리한 국면을 이끌어 내었다. 이후 발해는 海流나 蝦夷 문제 등의 위험이 따르는 出羽 항로를 더 이상 이용하지 않고 北陸과 山陰에 이르는 항로를 이용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항해시기 또한 계절풍과 해류의 조건상 가장 유리한 계절인 酷寒期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궁극적으로 8세기말 이후 北陸 以西 지역으로 酷寒期에 105명 내외의 사신단이 도착하게 되는 일련의 변화는 양국 외교상에 노정된 현안을 발해가 용의주도하게 협의해낸 성과 위에 이룩한 교류 안정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 영문
  • This research has examined the aspect of maritime trade route changes between Palhae and Japan during its history. The previous researches mainly dealt with destination, the number of envoys, the change of arrival time focusing on history of maritime affairs, But this research has taken a new approach relating with current issues between the exchange between two countries.
    First, in the late 8th century, Palhae pushed dual diplomacy after the diplomatic conflict with Japanese Court because of credential controversy in 771 and the use of Tsukushi Line(筑紫道) in 773. When Palhae needed a conference or official contact with Japanese Court, they headed for Houkuriku(北陸). However, when it avoided meeting with Japanese Court and focused on the large-scale trade with Japan, it arrived in Dewa(出羽). Palhae continued the trades with the use of Dewa and pushed a conference through Houkuriku simultaneously oppressing Japanese Court as by-effect of the trade between them. Finally, Palhae achieved the easing of restriction for visitation terms and the number of envoy group.
    Second, despite of Japan's request for the use of Tsukushi Line several times, Palhae arrived in Dewa. Accordingly, Japan withdrew less realistic request for Tsukushi Line and constructed the guesthouse in Noto, officially securing the arrival in Houkuriku. This change of Japanese policy was the result of negotiation after Yeo, Jeonglim(呂定琳) case in 798. Palhae rearranged substantial contents such as the issue of visit term and the scale of envoy group.
    Third, the change of destination from Dewa to Houkuriku and it's west area offers the evidence that the navigation development was not the direct cause for the change of destination. Houkuriku and Dewa routes had been used from the Goguryeo period and Palhae acquired the knowledge about monsoon from the beginning of trade with Japan.
    Ultimately, the change that around 105 envoys arrived at Houkuriku in the cold season implies the process of trade stabilization thanks to the thought-out conference about pending problems revealed in diplomacy between two countie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이 연구는 8세기말 9세기초에 이르러 양국 교류상에 나타난 항로 변화의 양상과 그 배경을 검토한 것이다. 기존 연구에서는 주로 도착지, 사신단 수, 도착 시기의 변화 문제를 해사사적 상황에 초점을 두고 다루었지만 이 연구에서는 양국 교류에서 나타난 현안 문제를 연계하여 새롭게 접근하였다.
    첫째 8세기 후반 발해는 771년 國書 논란, 773년 筑紫道 이용 등을 둘러싸고 일본 조정과의 외교적 마찰을 야기되자, 二元的 외교를 추진하였다. 조정과의 협의나 공식적 접촉이 필요한 때는 北陸으로 향하였으며 일본조정과 대면을 피하고 교역에 초점을 둔 대규모 파견시에는 出羽에 도착하였다. 出羽 이용을 통해서는 교역을 지속하고 그 부수적 효과로 일본조정을 압박하는 동시에 北陸을 통해 협상을 추진하였다. 결국 발해는 일본으로부터 訪期와 사신단 수에 대한 제한 완화를 받아내었다.
    둘째 일본은 수차에 걸친 筑紫道 이용 요구에도 불구하고 발해가 거듭 出羽에 도착하자 결국 현실성이 적은 筑紫道 요구를 접고 804년 能登에 便處(客院)을 설치하면서 北陸 도착을 공식적으로 보장하였다. 이러한 일본 조정의 방침 변화는, 798년 呂定琳 이후 추진한 발해 교섭의 결과였다. 발해는 교섭을 통해 訪期 문제, 사신단 규모 등 실질적 내용을 개편하였다.
    셋째 出羽로부터 北陸 以西로 도착지가 변화한 것은 항해술의 발전 등이 직접적 원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였다. 北陸 항로와 出羽 항로는 이미 고구려 시대부터 이용한 바 있으며 발해는 일본과의 교류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초기부터 계절풍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궁극적으로 北陸 以西 지역으로 105명 내외의 사신단이 酷寒期에 도착하게 되는 일련의 변화는 양국 외교상에 노정된 현안을 발해가 용의주도하게 협의해낸 성과 위에 이룩한 교류 안정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이 연구는 양국의 항해의 변화의 양상을 시기별로 특징화한 뒤 도착지의 변화, 사신단 규모의 변화, 도착 시기의 변화로 세분하여 이들의 선후관계 내지는 인과관계 등의 관련성을 추론해보았다. 기존 연구에서는 이러한 일련의 변화를 해사사적 상황과 항해기술적 관점에만 초점을 두어 변화를 설명해왔다. 이에 이 연구는 양국 교류에 나타난 변화 양상을 교류 외적 요인은 물론 교류 내적 요인과 연계하여 새롭게 분석하였다.
    첫째 8세기 후반 발해는 771년 國書 논란, 773년 筑紫道 이용 등을 둘러싸고 일본 조정과의 외교적 마찰을 야기되자, 二元的 외교를 추진하였다. 조정과의 협의나 공식적 접촉이 필요한 때는 北陸으로 향하였으며 일본조정과 대면을 피하고 교역에 초점을 둔 대규모 파견시에는 出羽에 도착하였다. 出羽 이용을 통해서는 교역을 지속하고 그 부수적 효과로 일본조정을 압박하는 동시에 北陸을 통해 협상을 추진하였다. 결국 발해는 일본으로부터 訪期와 사신단 수에 대한 제한 완화를 받아내었다.
    둘째 일본은 수차에 걸친 筑紫道 이용 요구에도 불구하고 발해가 거듭 出羽에 도착하자 결국 현실성이 적은 筑紫道 요구를 접고 804년 能登에 便處(客院)을 설치하면서 北陸 도착을 공식적으로 보장하였다. 이러한 일본 조정의 방침 변화는, 798년 呂定琳 이후 추진한 발해 교섭의 결과였다. 발해는 교섭을 통해 訪期 문제, 사신단 규모 등 실질적 내용을 개편하였다.
    셋째 出羽로부터 北陸 以西로 도착지가 변화한 것은 항해술의 발전 등이 직접적 원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였다. 北陸 항로와 出羽 항로는 이미 고구려 시대부터 이용한 바 있으며 발해는 일본과의 교류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초기부터 계절풍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결론적으로 발해는 8세기 중반 出羽와 北陸을 통한 이원적 외교를 추진함으로써 자국에 유리한 국면을 이끌어 내었다. 이후 발해는 海流나 蝦夷 문제 등의 위험이 따르는 出羽 항로를 더 이상 이용하지 않고 北陸과 山陰에 이르는 항로를 이용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항해시기 또한 계절풍과 해류의 조건상 가장 유리한 계절인 酷寒期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궁극적으로 8세기말 이후 北陸 以西 지역으로 酷寒期에 105명 내외의 사신단이 도착하게 되는 일련의 변화는 양국 외교상에 노정된 현안을 발해가 용의주도하게 협의해낸 성과 위에 이룩한 교류 안정화 과정으로 새롭게 접근하였다.
    이 연구의 결과는 일차적으로 소속 대학원의 수업 자료 또는 국가기관의 연수 기관의 강의자료로 활용하면서 대중적 이해 기반이 미약한 발해사에 대한 이해를 제고하는 데 적극 이용할 예정이다.
    아울러 이 연구 과제를 수행하면서 획득된 인적, 물적 인프라를 활용하여 한일 간 항존하고 있는 동해독도 문제 등에 대한 대중 교양 교육에도 기여하고자 한다.
    문헌사료 중심의 역사학 연구의 방법론을 넘어서서 교류의 물질 환경인 해양에 주목하고 해양조건의 탐색하는 관점이 결합되어 전개될 것이므로 학제간적 연구 방법론의 중요성도 제고시킬 것이다.
    나아가 연구 과정에서 새롭게 형성된 외국의 관련 분야의 전문가에게도 연구 성과를 공유함으로써 그동안 일본중심의 시각에서 이해되어 온 발해와 일본의 교류사 연구에 새로운 해석과 시사점을 여는 계기를 제공해 줄 것이다.
    일본의 교류사 연구에 새로운 해석과 시사점을 여는 계기를 제공해 줄 것이다.
  • 색인어
  • 발해와 일본의 항로 이원적 외교 축자도(筑紫道) 出羽 北陸 訪期 제한 能登客院
  • 연구성과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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