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초 다산 정약용의 아들이자 당대 유명 시인으로 명성을 얻었던 유산 정학연은 <秋蟲>(10수), <秋花>10수), <秋草>(10수), <秋柳>(20수), <秋風>(10수), <秋雨>(10수), <秋燈>(10수), <秋笛>(10수), <秋士>(10수), <秋月>(10수) 등 10여종의 가을경물을 제재로 108수에 이르는 연작시를 ...
19세기 초 다산 정약용의 아들이자 당대 유명 시인으로 명성을 얻었던 유산 정학연은 <秋蟲>(10수), <秋花>10수), <秋草>(10수), <秋柳>(20수), <秋風>(10수), <秋雨>(10수), <秋燈>(10수), <秋笛>(10수), <秋士>(10수), <秋月>(10수) 등 10여종의 가을경물을 제재로 108수에 이르는 연작시를 창작하였다. 각각의 작품은 가을경물을 읊은 영물시이지만 이와 같은 장편 연작시로 창작하는 경우는 문학사상 유래가 없는 현상으로 보인다. 무엇인가 가을 서정에 대한 특별한 의식이 반영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 중에는 ‘가을을 슬퍼하는 시인’이라는 의미를 지닌 ‘秋士’라는 제목의 시가 10수 있는데, 현실세계와의 부조화에서 오는 내면적 갈등과 좌절한 지식인의 퇴락한 모습을 진솔하게 형상화하였다. 이 작품은 일종의 자화상으로, 감상적 색채가 짙은 장편의 가을 연작시를 지은 작가의식이 투영되어 있다.
‘秋士’라는 자의식은 18세기 중후반 연암그룹으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19세기 초에 이르면 정학연, 자하 신위에 이르러 보다 분명한 정체성을 드러내며 ‘秋題詩’라 칭할 수 있는 작품들이 활발하게 수창된다. ‘秋題詩’는 ‘秋蟲’, ‘秋草’, ‘秋風’, ‘秋雨’ 등 가을경물을 다룬 詠物詩와 ‘秋懷’, ‘秋興’ 등의 가을의 정회를 다룬 서정시를 하나의 범주로 묶은 것으로, 대부분 제목에 ‘秋’자를 붙인 부류의 시를 지칭한다. 이외에 이외에 ‘落葉’, ‘丹楓’ ‘黃葉’, ‘秋葉’ 등 ‘紅葉詩’계열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 역시 비록 제목에 ‘秋’자는 붙이지 않았지만, 가을경물을 다룬 영물시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추제시’에 포함시킬 수 있다.
또한 ‘추제시’는 19세기 초 한중 문학 교류에 참여한 翁方綱, 張際亮, 吳嵩梁, 董文渙 등의 문집에서도 발견되는데, 한중 문학 교류의 주요한 매개체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董文渙<秋懷詩>(五律 8수)에 조선 사신 7인이 수창하여 秋懷唱和集이 제작되기도 하였고, 吳嵩梁의 ‘추제시’인 <秋蟬>, <秋蝶>, <秋花>, <秋草> 등의 4首에 申緯, 趙秀三 등의 조선 문사가 차운하여 연작의 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19세기 초 ‘추제시’에서 가장 주목되는 특징은 바로 한중 양국의 문인들이 수창한 가장 대표적 시라는 점이다. 세도정치가 고착되며 관료진출에 좌절한 조선의 지식인과 만주족 치하에서 억압을 당하던 한족 지식인은 절정의 아름다움이 쇠락을 맞이하는 가을의 感傷的 정서에 공감하며, 양국 모두 가을과 관련된 시작품이 유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정치에서 소외된 지식인이 문인사회의 주류를 이루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심미적 태도를 보다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으며, 추제시의 수창은 그러한 공감대 형성의 한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