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의 목적은 대원제국 소멸 이후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재편되어 가는 과정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北元과 高麗 그리고 明 사이에 벌어지는 국제관계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는데 있다. 14세기 말 대원제국의 붕괴는 100여 년 간에 걸친 동아시아에 대한 일원적 지배가 종결되 ...
이 연구의 목적은 대원제국 소멸 이후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재편되어 가는 과정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北元과 高麗 그리고 明 사이에 벌어지는 국제관계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는데 있다. 14세기 말 대원제국의 붕괴는 100여 년 간에 걸친 동아시아에 대한 일원적 지배가 종결되고, 북원(몽골)․고려․명이라는 다원적 국제관계로 변모했음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20년 뒤에 북원이 멸망하면서, 잠시 동아시아에는 고려와 명 주도의 국제관계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그 후 몇 년 사이에 만주의 몽골 세력으로 대표되는 우량카이 3衛의 성장은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를 몽골(우량카이)․고려․명의 다원적 구조로 다시 환원시켜준 셈이 되었다. 북원이 명과 요동을 사이에 두고 팽팽히 맞서 충돌하고 있는 상황은 고려의 생존과도 직결되기 때문에, 고려는 명과의 통교는 물론이고 북원과도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는 양면적이고 실리적인 외교를 구사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고려의 외교·군사의 전략적 행보는 북원과 명에게도 단연 주목의 대상이었다. 고려는 양국의 요구 모두를 수용하지 않은 채 적당히 거리를 두는 외교정책을 구사하며, 동아시아 정황을 세밀히 파악해 필요에 따라 親明과 親元을 구사하고 있었기에 북원과 명에게 고려의 영향력이 살아있었다. 동아시아에서 14세기말 북원의 존재를 확인하고 연구하는 작업은 북원사 자체뿐만 아니라 고려의 대외관계를 새롭게 해석하는 중요한 단초가 될 수 있다. 북원과 명이 치열한 대립을 하고 있는 14세기말의 동아시아 상황은 고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즉, 북원과 명의 대립으로 동아시아가 다원적 질서로 복귀한 상황에서 고려의 위상이 크게 강화되었다. 신청자는 이 연구를 통해 그동안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의해 소외되어 왔던 북원의 위상을 제대로 복원함으로써 새로운 동아시아의 역사상을 찾아보려고 한다. 중국 중심의 편향적 역사관을 극복하고 동아시아의 다양한 역사주체들의 활동을 조명함은 그동안 소외되어 왔던 북원사를 복원함으로써 동양사학의 균형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14세기 말 북원과 명이 요동을 두고 각축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승리한 세력이 향후 동아시아의 패자가 됨을 잘 알고 있던 고려는 요동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상황에 대해 다양한 정보들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고려의 정보수집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이들은 명으로 파견되었던 사절들이다. 요동을 경유하는 遣明 사절의 사행은 당시의 정세 및 명의 군사기지를 탐색할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 수단이었다. 북원의 소멸은 다시 한 번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북원․고려․명의 삼각 균형에 의한 다원적인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북원의 소멸로 고려와 명의 양자적 관계로 변화되었다. 이것은 고려와 명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명은 고려의 우왕과 창왕을 책봉하지 않음으로서 고려 내부의 정권쟁탈을 야기 시켜, 결국 고려의 멸망을 재촉하는 역할을 수행한 셈이 되었다. 즉, 북원의 멸망에 따른 고려․명 관계의 성립은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분수령으로 작용하고 있다. 1391년이 되면 우량카이 3위는 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장점을 이용해 군사력을 확장했고, 여기에 명이 제공하는 경제적 풍요를 통해 부를 축적하여 위상이 크게 강화되었다. 더구나 명이 영락제 사후에 실제로 북변정책을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량카이 3위는 허술한 명의 변방정책을 이용해 자신들의 군사력을 앞세워 요서 지역까지 진출하고 있다. 이러한 우량카이의 강성은 동아시아의 국제 환경을 변화시켜 양국체제에서 다원적 시스템이 다시 한 번 형성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1391년을 기점으로 시작되는 우량카이 3위의 세력 확장은 1392년에 건립된 조선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배경에서 조선 초기의 요동정책을 이해해 볼 필요도 있다. 따라서 우량카이 3위의 성립과 활동은 14세기말 동아시아 정세를 양국체제에서 다원체제로 변모시키는 계기라는 점에서, 이 연구에 포함시켜야 할 필연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기대효과
이 연구는 북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국제 환경의 구조적인 역학관계가 고려의 멸망과 조선 건국에 직․간접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함을 통해 기존의 중국 중심의 가치가 아니라 새로운 동아시아 역사상을 정립하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14세기 말 동아시아의 국제 ...
이 연구는 북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국제 환경의 구조적인 역학관계가 고려의 멸망과 조선 건국에 직․간접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함을 통해 기존의 중국 중심의 가치가 아니라 새로운 동아시아 역사상을 정립하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14세기 말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는 여말 선초의 한국사에서 풀어야 할 중요한 역사적 과업중 하나이다. 이러한 작업은 한국사를 한국사 안에서 해석하지 않고 거시적으로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작업이 되어 관계된 다양한 연구 주제들이 나올 것이고 자연스럽게 연구자들의 접근과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여러 분야의 후속연구를 파생시킴으로서 학문적․사회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본 연구가 몽골사 연구의 지평을 확장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최근 사회 전반에서 몽골제국과 관련된 다수의 연구서나 논문들이 나오고 있다. 반면 몽골제국 소멸과 동시에 존재했던 북원에 대해서는 국내 연구가 전무한 상태이다. 북원사 연구는 몽골제국사에 한정된 기존의 연구를 뛰어넘어 몽골사 연구의 외향을 확대하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북원사 연구는 14세기 말 변화하는 동아시아사를 이해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14세기말 북원의 존재를 확인하고 연구하는 작업은 북원사 자체뿐만 아니라 14세기 말 고려와 북원 및 명의 관계를 새롭게 해석하는 중요한 단초가 될 수 있다. 북원의 존재와 활동이 고려의 대외 관계와 명의 정책 변화를 읽는 중요한 잣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본 연구를 통해 북원사를 재평가하는 작업은 북원사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사의 지평을 확대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14세기 말 동아시아에는 다원적 국제관계(북원․고려․명)→ 양국체제(고려․명) →다원적 체제(우량카이3위․고려․명) 등으로 다양한 국제관계가 성립되었고, 이것은 한반도의 역사 주체들에게 새로운 국제관계 정립이라는 과제를 안겨 주었다. 따라서 14세기 말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새로운 체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자가 발전의 동력으로 사용한 역사 주체에게는 새로운 기회로 또는 체제 변화를 몰이해한 세력에게는 자멸을 부추기기도 했다. 14세기 말 동아시아 정세는 21세기의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와 양상의 면에서 유사성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21세기 중국의 급부상으로 야기된 팽팽한 긴장관계가 동아시아 주변국에서 직접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의 국제관계가 한국의 미래와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 변화하는 동아시아 질서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만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14세기말의 역사적 교훈이 현재의 문제와 관련해 미래의 모습을 조망하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14세기 말․15세기 초의 동아시아 역사상의 재구성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기초 사료는 한국 사료이다. 북원과 고려에 대해 기록한 한적 사료들은 명조 편향적 시각에서 기술하고 있기에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반면 高麗史, 高麗史節要와 朝鮮王朝實錄 등은 당시의 정황을 보다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므로 높은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들 한국 사료들을 당시 북원과 관련된 北巡私記, 華夷譯語, 몽골원류Erdeni-yin Tobči 등의 몽골 사료들과 비교 분석함으로써 한국 사료의 정확성과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한국 자료의 우수한 수준을 알리고, 한국 사료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북원사는 중요성에 비해 이에 대한 전문 연구가 매우 미진하다. 이러한 미개척 분야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진다면 한국 인문학 발전의 지평을 넓히고 한국인의 타문에 대한 이해도와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데 기여할 것이다. 이 연구를 통해 새롭게 조명될 동아시아 역사상은 교육 현장에서 교육 자료로 적극 활용할 것이다. 주변국의 역사왜곡이 날로 심화되는 상황에서 그동안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의해 소외되어 왔던 북원의 위상을 제대로 복원함으로써 중국 중심의 편향적 역사관을 극복하는 것은 현재의 역사의식 고취에도 중요하다.
연구요약
제1차년 연구는 14세기 말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고려․북원․명이 팽팽히 대립하며 존립하던 다원적 국제 관계를 이해하는 한 방편으로 고려의 요동 경유 사행이 가지는 의미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고려의 역동적인 실리외교의 수단이 되었던 요동 경유 사행이 북 ...
제1차년 연구는 14세기 말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고려․북원․명이 팽팽히 대립하며 존립하던 다원적 국제 관계를 이해하는 한 방편으로 고려의 요동 경유 사행이 가지는 의미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고려의 역동적인 실리외교의 수단이 되었던 요동 경유 사행이 북원과 명의 역사 주체들에게 상당한 파급력이 있었음에 주목하려 한다. 고려가 명의 강압적인 저지에도 불구하고 요동을 경유하는 사행을 강행했던 것은 상당 부분 정찰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신청자는 고려의 요동 경유 사행이 정찰과 정보 탐색의 일환이었음을 가설로 설정해 연구를 시작하려고 한다. 관련 고려, 북원과 명의 사료를 활용하여 지금까지 천착되지 않았던 요동 경유 사행의 목적을 실증적으로 확인해 보려고 한다. 1368년 대원제국 소멸로부터 북원이 멸망하는 1388년 까지 고려가 집중적으로 사행했던 시기는 언제이고 이것이 당시 정세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면밀히 살피려 한다. 요동 경유 사행을 통해 확보한 정보를 고려가 어떻게 활용하는지, 그리고 정보를 공유한 북원에서 이를 정책에 어떻게 반영하는지, 이에 대한 명의 태도 등을 살펴서 14세기 말 고려의 요동 경유 사행이 고려․북원․명에게 각각 어떤 파급력을 발휘하는지 등을 분석함으로써 14세기 말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에 고려의 역할을 좀 더 입체적으로 살피겠다. 제2차년도 연구는 北元 소멸에 따른 高麗․明 관계의 변화라는 제목으로 동아시아에서 일정기간 유지되었던 다원적 국제 관계가 북원의 소멸로 와해된 뒤에 성립된 고려와 명의 양자적 관계가 고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살필 것이다. 특히 북원 소멸에 따른 고려와 명 관계의 변화된 양상을 살피기 위해 양국 사이를 내왕했던 사절의 목적, 역할과 구성 등을 북원 소멸 전과 후로 나누어 비교 고찰하려 한다. 이를 통해 북원의 소멸이 가져온 동아시아의 역학 관계의 변화를 분석할 것이다. 고려와 명의 외교 문서 및 사절 파견에 관련된 자료들을 활용하여 불균형적 양국 관계 성립 배경을 집중적으로 다루겠다. 특히 북원 소멸 이전과 이후로 구분해 북원이 상존하고 있던 시기의 고려․명의 외교 관계와 북원 소멸 후로부터 고려 멸망시기까지의 약 5년 동안 양국 관계를 비교 분석하려 한다. 제3차년도 첫 번째 주제는 우량카이 3위의 대두와 多元體制의 再現라는 제목으로 우량카이 3위의 성립과 활동이 동아시아에 끼친 변화를 연구할 것이다. 명은 동방3왕가의 기득권을 옹호해 이들에게 기존의 통치권을 유지케 함으로써 그들이 親明的 세력으로 남아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를 위해 우량카이 3위에게 300여개에 이르는 대량의 관직을 하사하고 馬市를 통해 우량카이 3위가 필요로 하는 물자를 제공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명이 제공하는 경제적 혜택은 우량카이 3위의 급성장을 불러왔고 여기에 몽골리아에서 새롭게 성립한 동․서 몽골이 우량카이 3위와 연합함으로써 우량카이 3위는 옛 동방3왕가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었다. 결국 명의 초무정책이 요동 일대에서 우량카이 3위의 급성장을 불러와 동아시아 정세는 급격하게 우량카이 3위의 활동에 의해 변화를 거듭하게 된다. 신청자는 이 연구를 통해 우량카이 3위의 세력 강화 과정에서 동서 몽골과 어떻게 연대했는지를 밝힘을 통해 우량카이 3위의 활동이 동아시아 정세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겠다. 그리고 우량카이 3위의 활동이 14세기말의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과 어떤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살피겠다. 제3차년도 두 번째 논문은 우량카이 3위의 남하와 명의 북변정책에 대해 기술할 것이다. 우량카이 3위는 성립된 지 40년도 안되어 1426년경에 원 거주지인 요동 북부지역에서 요서 일대로 남하하게 된다. 특히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우량카이 3위의 남하가 군사력을 앞세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우량카이 3위의 남하 배경과 남하로 인한 요동 문제를 살피려 한다. 결국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 속에서 우량카이 3위는 명의 정치적 혼란과 동․서 몽골의 강성을 이용해 동아시아의 세력 구도를 재편성해 나가고 있음을 확인하려 한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국문
제1차년 연구는 14세기 말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고려․북원․명이 팽팽히 대립하며 존립하던 다원적 국제 관계를 이해하는 한 방편으로 고려의 요동 경유 사행이 가지는 의미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고려의 역동적인 실리외교의 수단이 되었던 요동 경유 사행이 북 ...
제1차년 연구는 14세기 말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고려․북원․명이 팽팽히 대립하며 존립하던 다원적 국제 관계를 이해하는 한 방편으로 고려의 요동 경유 사행이 가지는 의미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고려의 역동적인 실리외교의 수단이 되었던 요동 경유 사행이 북원과 명의 역사 주체들에게 상당한 파급력이 있었음에 주목하려 한다. 고려가 명의 강압적인 저지에도 불구하고 요동을 경유하는 사행을 강행했던 것은 상당 부분 정찰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신청자는 고려의 요동 경유 사행이 정찰과 정보 탐색의 일환이었음을 가설로 설정해 연구를 시작하려고 한다. 관련 고려, 북원과 명의 사료를 활용하여 지금까지 천착되지 않았던 요동 경유 사행의 목적을 실증적으로 확인해 보려고 한다. 1368년 대원제국 소멸로부터 북원이 멸망하는 1388년 까지 고려가 집중적으로 사행했던 시기는 언제이고 이것이 당시 정세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면밀히 살피려 한다. 요동 경유 사행을 통해 확보한 정보를 고려가 어떻게 활용하는지, 그리고 정보를 공유한 북원에서 이를 정책에 어떻게 반영하는지, 이에 대한 명의 태도 등을 살펴서 14세기 말 고려의 요동 경유 사행이 고려․북원․명에게 각각 어떤 파급력을 발휘하는지 등을 분석함으로써 14세기 말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에 고려의 역할을 좀 더 입체적으로 살피겠다. 제2차년도 연구는 北元 소멸에 따른 高麗․明 관계의 변화라는 제목으로 동아시아에서 일정기간 유지되었던 다원적 국제 관계가 북원의 소멸로 와해된 뒤에 성립된 고려와 명의 양자적 관계가 고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살필 것이다. 특히 북원 소멸에 따른 고려와 명 관계의 변화된 양상을 살피기 위해 양국 사이를 내왕했던 사절의 목적, 역할과 구성 등을 북원 소멸 전과 후로 나누어 비교 고찰하려 한다. 이를 통해 북원의 소멸이 가져온 동아시아의 역학 관계의 변화를 분석할 것이다. 고려와 명의 외교 문서 및 사절 파견에 관련된 자료들을 활용하여 불균형적 양국 관계 성립 배경을 집중적으로 다루겠다. 특히 북원 소멸 이전과 이후로 구분해 북원이 상존하고 있던 시기의 고려․명의 외교 관계와 북원 소멸 후로부터 고려 멸망시기까지의 약 5년 동안 양국 관계를 비교 분석하려 한다. 제3차년도 첫 번째 주제는 우량카이 3위의 대두와 多元體制의 再現라는 제목으로 우량카이 3위의 성립과 활동이 동아시아에 끼친 변화를 연구할 것이다. 명은 동방3왕가의 기득권을 옹호해 이들에게 기존의 통치권을 유지케 함으로써 그들이 親明的 세력으로 남아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를 위해 우량카이 3위에게 300여개에 이르는 대량의 관직을 하사하고 馬市를 통해 우량카이 3위가 필요로 하는 물자를 제공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명이 제공하는 경제적 혜택은 우량카이 3위의 급성장을 불러왔고 여기에 몽골리아에서 새롭게 성립한 동․서 몽골이 우량카이 3위와 연합함으로써 우량카이 3위는 옛 동방3왕가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었다. 결국 명의 초무정책이 요동 일대에서 우량카이 3위의 급성장을 불러와 동아시아 정세는 급격하게 우량카이 3위의 활동에 의해 변화를 거듭하게 된다. 신청자는 이 연구를 통해 우량카이 3위의 세력 강화 과정에서 동서 몽골과 어떻게 연대했는지를 밝힘을 통해 우량카이 3위의 활동이 동아시아 정세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겠다. 그리고 우량카이 3위의 활동이 14세기말의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과 어떤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살피겠다. 제3차년도 두 번째 논문은 우량카이 3위의 남하와 명의 북변정책에 대해 기술할 것이다. 우량카이 3위는 성립된 지 40년도 안되어 1426년경에 원 거주지인 요동 북부지역에서 요서 일대로 남하하게 된다. 특히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우량카이 3위의 남하가 군사력을 앞세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우량카이 3위의 남하 배경과 남하로 인한 요동 문제를 살피려 한다. 결국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 속에서 우량카이 3위는 명의 정치적 혼란과 동․서 몽골의 강성을 이용해 동아시아의 세력 구도를 재편성해 나가고 있음을 확인하려 한다.
영문
The study investigated reopening of diplomatic relations by examining not only Töqtö Büqa's enthronement of king of Koryo Kingdom before fall of Yuan Empire but also Ming's policy toward Koryo Kingdom after fall of Yuan to find out dynamic relations o ...
The study investigated reopening of diplomatic relations by examining not only Töqtö Büqa's enthronement of king of Koryo Kingdom before fall of Yuan Empire but also Ming's policy toward Koryo Kingdom after fall of Yuan to find out dynamic relations of East Asia that made change from pluralistic order to unitary order. Allied forces of both Koryo and Yuan was likely to attack Ming's military base in Liaodung so that Ming gave up previous hard-line policy and started to follow appeasement policy toward Koryo. Koryo Kingdom that resumed diplomatic relations with Yuan was suspicious of diplomatic relations with Yuan when Yuan Empire lost power rapidly because of not only consecutive death of both Koke Temur and Ayuširidara but also Ming's isolation policy blocking connection among Yuan, Nagachü and Koryo. Koryo positively accepted Ming's imposing of tribute in the name of enthronement of King Uwang. In 1384, Koryo sent as many as 5,000 horses to Ming that was much larger than previous number, and recovered relations with Ming disconnected to take active actions against changes of political situation. Before fall of Yuan, Ming repeated both hard-line policy and appeasement policy and actually often followed appeasement policy. Ming's policy toward Koryo made change to be hard-line policy at Nagachü's surrender and Yuan's fall that lasted until fall of Koryo. Ming detained Koryo's envoy or rejected entering into capital city and notified opening of Cheolryeongwi in Koryo to follow hard-line policy. Ming's hard-line policy triggered Choi Yeong's conquest of Liaodung to let Koryo fall. Üriyangqai was closely connected with Mongolia to the north. And, Üriyangqai had relations with the Ming's governing areas to the south to connect Koryo and Jurchen force so that Üriyangqai 3-Wi's direction had important role at confrontation between the Ming and Mongolia. A study on the roles between Mongolia and the Ming could be base of the analysis upon political situation in East Asia in the 15th century. In Mongolia, Üriyangqai was called ‘Ölu Tuman’ that ‘Ölu’ indicated southern slope of the Xinganling Mountains where the Dongbangwangga expanded feudal estate site since being given feudal estate from Chinggis Khan, and that meant Manho Group to the south of Xinganling. Ming provided Üriyangqai with enormous amount of economic advantages by prizes and foreign trade to investigate political situation and military trends of Mongolia by using their eyes and ears. Üriyangqai's information played an important role at Ming's policy against Mongolia. Üriyangqai 3-Wi gave Ming schedule of Mongolia upon Ming's needs to be given economic advantages from Even if Ming. Ming opened Üriyangqai at the surrender of Dongbangwangga, Üriyangqai 3-Wi followed political system and society of Mongolia. Üriyangqai that was belonged to Mongolia was not governed completely by Mongolia. Üriyangqai that was Ölu with decentralization was rather independent and decentralized when the central government did not control enough: So, Üriyangqai accepted changes of political situation of Mongolia sensitively to unite and have hostility when necessary to have their own areas.
연구결과보고서
초록
이 연구의 목적은 대원제국 소멸 이후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재편되어 가는 과정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北元과 高麗 그리고 明 사이에 벌어지는 국제관계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는데 있다. 14세기 말 대원제국의 붕괴는 100여 년 간에 걸친 동아시아에 대한 일원적 지배가 종결되 ...
이 연구의 목적은 대원제국 소멸 이후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재편되어 가는 과정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北元과 高麗 그리고 明 사이에 벌어지는 국제관계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는데 있다. 14세기 말 대원제국의 붕괴는 100여 년 간에 걸친 동아시아에 대한 일원적 지배가 종결되고, 북원(몽골)․고려․명이라는 다원적 국제관계로 변모했음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20년 뒤에 북원이 멸망하면서, 잠시 동아시아에는 고려와 명 주도의 국제관계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그 후 몇 년 사이에 만주의 몽골 세력으로 대표되는 우량카이 3衛의 성장은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를 몽골(우량카이)․고려․명의 다원적 구조로 다시 환원시켜준 셈이 되었다. 동아시아에서 14세기말 북원의 존재를 확인하고 연구하는 작업은 북원사 자체뿐만 아니라 고려의 대외관계를 새롭게 해석하는 중요한 단초가 될 수 있다. 북원과 명이 치열한 대립을 하고 있는 14세기말의 동아시아 상황은 고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연구를 통해 그동안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의해 소외되어 왔던 북원의 위상을 제대로 복원함으로써 새로운 동아시아의 역사상을 찾아보려고 했다. 중국 중심의 편향적 역사관을 극복하고 동아시아의 다양한 역사주체들의 활동을 조명함은 그동안 소외되어 왔던 북원사를 복원함으로써 동양사학의 균형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14세기 말 북원과 명이 요동을 두고 각축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승리한 세력이 향후 동아시아의 패자가 됨을 잘 알고 있던 고려는 요동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상황에 대해 다양한 정보들을 가지고 있었다.1391년이 되면 우량카이 3위는 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장점을 이용해 군사력을 확장했고, 여기에 명이 제공하는 경제적 풍요를 통해 부를 축적하여 위상이 크게 강화되었다. 더구나 명이 영락제 사후에 실제로 북변정책을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량카이 3위는 허술한 명의 변방정책을 이용해 자신들의 군사력을 앞세워 요서 지역까지 진출하고 있다. 이러한 우량카이의 강성은 동아시아의 국제 환경을 변화시켜 양국체제에서 다원적 시스템이 다시 한 번 형성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1391년을 기점으로 시작되는 우량카이 3위의 세력 확장은 1392년에 건립된 조선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이 연구는 북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국제 환경의 구조적인 역학관계가 고려의 멸망과 조선 건국에 직․간접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함을 통해 기존의 중국 중심의 가치가 아니라 새로운 동아시아 역사상을 정립하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14세기 말 동아시아의 국제 ...
이 연구는 북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국제 환경의 구조적인 역학관계가 고려의 멸망과 조선 건국에 직․간접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함을 통해 기존의 중국 중심의 가치가 아니라 새로운 동아시아 역사상을 정립하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14세기 말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는 여말 선초의 한국사에서 풀어야 할 중요한 역사적 과업중 하나이다. 이러한 작업은 한국사를 한국사 안에서 해석하지 않고 거시적으로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작업이 되어 관계된 다양한 연구 주제들이 나올 것이고 자연스럽게 연구자들의 접근과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여러 분야의 후속연구를 파생시킴으로서 학문적․사회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본 연구가 몽골사 연구의 지평을 확장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최근 사회 전반에서 몽골제국과 관련된 다수의 연구서나 논문들이 나오고 있다. 반면 몽골제국 소멸과 동시에 존재했던 북원에 대해서는 국내 연구가 전무한 상태이다. 북원사 연구는 몽골제국사에 한정된 기존의 연구를 뛰어넘어 몽골사 연구의 외향을 확대하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북원사 연구는 14세기 말 변화하는 동아시아사를 이해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 고려에 대해 기록한 한적 사료들은 명조 편향적 시각에서 기술하고 있기에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를 통해 한국 자료의 우수한 수준을 알리고, 한국 사료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북원사는 중요성에 비해 이에 대한 전문 연구가 매우 미진하다. 이러한 미개척 분야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진다면 한국 인문학 발전의 지평을 넓히고 한국인의 타문에 대한 이해도와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데 기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