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공동연구에서 시도하는 ‘새로운 전쟁사’는 전쟁과 정치・경제・사회・문화・문명의 복합적인 관계에 주목하는 생태인문학적 전쟁사이다. 클라우제비츠의 영향을 받은 기존의 전쟁사가 전역(campaign)과 전투의 구체적인 전개와 전술을 분석하고 평가해서 승리를 확보해줄 ...
본 공동연구에서 시도하는 ‘새로운 전쟁사’는 전쟁과 정치・경제・사회・문화・문명의 복합적인 관계에 주목하는 생태인문학적 전쟁사이다. 클라우제비츠의 영향을 받은 기존의 전쟁사가 전역(campaign)과 전투의 구체적인 전개와 전술을 분석하고 평가해서 승리를 확보해줄 교훈을 도출하는 데 주력하는 ‘군사사’라는 좁은 영역에 매몰된 데 반해, 생태인문학적 전쟁사는 문명사의 주요 부분을 구성한다. 또 기존의 전쟁사는 “전쟁은 다른 수단들에 의한 정치의 연장(延長)”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테제를 따라 전쟁의 합리적인 원인을 분석하는 데 주력하고, 그 결과 전쟁이라는 폭력 행위가 국민에게 가하는 고통을 외면한 채 전쟁이라는 정치 행위가 가져다준 영광만을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는 데 반해, 생태인문학적 전쟁사는 전쟁이라는 폭력 행위가 인간, 인간 사회, 문명, 환경에 미친 파괴적인 영향에 주목하여, 궁극적으로 전쟁이 파국적인 재앙임을 고발한다.
본 공동연구가 생태인문학적 전쟁사라는 새로운 전쟁사를 시도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에마뉘엘 르 루아 라뒤리(Emmanuel Le Roy Ladurie)가 제시한 생태인구학과 동양사학자 김택민 교수의 중국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이다. 르 루아 라뒤리는 근대 초 프랑스가 장기적으로 맬더스적 안정을 유지한 것은 “묵시록의 4기사”, 즉 질병・기근・전쟁・국가라는 인구조절자들이 협동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전쟁은 항상 질병, 기근, 국가이성을 동반하여 그 파괴력을 높인다는 것이다. 전쟁사는 전술과 전략이라는 군사사적인 차원을 넘어 질병, 기근, 국가라는 생태학적인 요소를 고려하고, 파국적인 인구 감소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택민 교수가 그려주는 중국사는 문명과 문화의 역사가 아니라 재난과 재앙으로 얼룩진 어두운 역사이다. 그는 전쟁으로 죽은 사람, 굶어죽은 사람, 홍수에 쓸려 죽은 사람, 역병으로 죽은 사람, 인육이 되어 먹혀버린 사람, 임금 무덤에 덤으로 묻혀 죽은 사람, 만리장성 축조 등 각종 노역에서 죽은 사람 등을 역사의 무대에 올린다. 김택민 교수의 연구는 생태인문학적 전쟁사 연구가 필요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이렇게 파국적인 결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전쟁은 문명을 파괴하지만, 동시에 문명의 교류와 창조를 낳는다. 르 루아 라뒤리의 연구에서도 시사되었지만, 전쟁은 인구조절의 기능을 담당한다. 전쟁은 과잉인구를 제거함으로써 문명적 차원에서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바로잡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인구의 변동에 따라 사회제도 및 규범도 재정비된다. 또한 전쟁은 장거리 이동이며 교류이다. 물적인 교류이건 인적인 교류이건, 문명의 교류는 상당 부분 전쟁의 결과이다. 전쟁은 문명의 정체와 부패를 막아 문명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인데, 이와 관련하여, 칸트의 담론이 우리의 주목을 끈다. 칸트는 판단력비판에서 전쟁이 ‘숭고’하다고까지 이야기한다.
전쟁조차도, 질서를 지키고 시민의 권리를 신성시하면서 수행된다면, 어떤 숭고한 면모를 가지는 법이다. 그리하여 어떤 민족이 이런 식으로 전쟁을 수행할 경우에는, 그 민족이 위험에 처하여 대담히 그 위험에 대처할 수 있다면, 위험이 크면 클수록 전쟁은 그 민족의 사고방식을 더욱더 숭고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에 반해 오랜 평화는 한갓 상인기질만을 퍼뜨리며, 그와 함께 천박한 이기심과 비겁함 그리고 유약함만을 만연시켜 민족의 사고방식을 천박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칸트는 전쟁은 문명을 파괴하는 요소이지만 동시에 문명을 발전시키는 요소라고 말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칸트는 세계문명의 중심이었던 중국이 근대 이후에 정체한 것을 전쟁의 부재로 설명한다. 본 공동연구 역시 칸트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양면적 가치에 주목하고, 전쟁의 창조적 기능을 탐구할 것이다. 1년차 주제인 “문명의 충돌과 충격 그리고 기억”은 서양사에 나타난 구체적인 문명 충돌 사례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이지만, 생태인문학적 관점에 따라 전쟁이 문명의 파괴와 교류 및 창조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의 기억에 어떻게 각인되어 왔는지를 연구한다. 2년차 주제인 “전쟁과 평화의 수사학”은 전쟁이 생산해낸 전쟁론과 평화론 같은 담론에 대해 연구한다. 3년차 주제인 “전쟁의 사회사”는 전쟁이 국가건설, 계급, 젠더, 관용사상, 디아스포라, 혼혈, 생태학, 매체 등에 미친 영향을 연구하는 역사사회학적 연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