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0년대에 시작된 문화적 기억과 역사적 기억에 대한 작업은 문학에까지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아쉽게도 문학에까지 외연을 확대하지는 못한 것 같다. 연구자는 문학적 기억이라는 개념을 확립하고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거듭한 끝에 반기억이라는 주제를 연구 ...
지난 90년대에 시작된 문화적 기억과 역사적 기억에 대한 작업은 문학에까지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아쉽게도 문학에까지 외연을 확대하지는 못한 것 같다. 연구자는 문학적 기억이라는 개념을 확립하고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거듭한 끝에 반기억이라는 주제를 연구의 목표로 설정하게 되었다. 이전의 저작에서 보였던 과제 ‘역사와 기억’이라는 토포스를 이제 기억과 반기억이라는 토포스로 옮겨가는 것이 이 연구의 목표다. 또한 기억과 반기억이라는 주제는 문학서사의 방식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과거의 전지전능 시점이나 자전적 서술방식과는 다른 생소한 흔적의 기억, 반기억의 동등한 권리 같은 데 관심을 둠으로써 반체계적인 서술방식에 관심을 돌리게 한다.
근자에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라는 책이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서구에서도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연구자는 이 책의 성공이 그저 어디서나 느낌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엄마>라는 주제 때문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보다는 엄마를 보는 시각의 문제, 즉 기억(회상)의 형식을 잘 구조화했기 때문에 큰 성공을 거둔 것이라 생각한다. 먼저 이 작품에는 엄마를 보는 시각이 다양하게 존재한다.<너>의 시각, <형철>의 시각, <당신>의 시각, 그리고 가상적인 <엄마> 자신의 시각. 이렇게 소설은 다양한 기억의 모자이크처럼 만들어져 있다. 구체적인 것이라곤 오직 엄마 실종 사건뿐이다. 그러나 그 사건을 보는 시각은 가족 구성원들 저마다 아주 다양하다. 그래서 이 작품의 현상을 극단적으로 말하라면 “기억은 없다”(피에르 노라)라고까지 할 수 있다. 다양한 관점만 있으므로, 즉 하나의 기억이 아니므로 저자는 (포스트모던이나) 해체적 글쓰기로 들어갔고, 기억담론의 관점에서는 반(反)기억의 전략으로 작품을 썼다고 할 것이다.
반기억에 대한 개념은 니체가 처음 제시했다. 그 다음으로는 프로이트를 꼽을 수 있고, 미셸 푸코가 그 대를 이어 반기억의 개념을 명시적으로 정립했다. 니체에게서 반기억은 기존의 <도덕적 가치들을> 비판하고 <가치의 전복>을 이루는 것이었다. 푸코에게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역사의 단절과 역사의 불연속성에 주목하게 되었다. 푸코의 계보학적 관점에서 보면 <지식은 하나의 관점일 뿐이며>, 지식으로서의 역사학을 거부하기 때문에 이질적 체계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반-기억을 구축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우리 또한 문학작품을 전통적인 역사학처럼 연속성을 강조하고 목적론을 강조하는 시각으로 파악할 수 없다. 전통적인 역사학에서는 인간의 삶 또한 단일한 집합적 기획으로 파악될 뿐이다. 문학은 도덕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요구하는 것과 다른 것이며, 문학에 대한 지식은 필연적으로 현실과는 단절된 관점을 요구한다.
이런 이론적 기반을 토대로 우리는 기억과 반기억, 반기억과 문학, 그리고 문학적 서술방식의 관계를 재조명하고 소설이 가지는 그러한 특성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이렇게 우리가 반기억의 다양한 서술태도를 견지하면 전통적인 서사적-기록자적 시점이나 자전적 서술방식이 그저 따분한 방식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반기억을 옹호하는 서술방식, 즉 콜라주 방식이나 개방형 서술방식들을 우리는 그라스, 조이스, 코엘료, 신경숙, 김훈, 보네거트, 샐린저 등에게서 찾고 그 유형을 분석하고자 한다. 대체로 반기억의 서술태도는 귄터 그라스에게서 과거극복으로, 슐링크에게서 진실에 대한 동등한 권리로, 클루게에게서 흔적으로, 신경숙에게서 (반)기억의 복권으로, 코엘료에게서 발견으로, 김훈에게서 역사에 대한 객관으로, 보네거트에서 증상으로, 조이스에게서 착오로, 셀린저에게서 작화로 드러난다. 이 저술은 그런 주제어들을 토대로 작품들의 반기억적 특성을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