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풀턴은 일관되게 총체성과 동일성의 사유를 비판하고 근대적 주체와 재현의 미학을 해체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녀가 볼 때 대립과 이분법의 사유는 연속적이고 다층적인 현상들을 여러 양극들, 예컨대 진리와 거짓, 개념과 감각, 논리와 비논리, 추론과 체험 등 ...
앨리스 풀턴은 일관되게 총체성과 동일성의 사유를 비판하고 근대적 주체와 재현의 미학을 해체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녀가 볼 때 대립과 이분법의 사유는 연속적이고 다층적인 현상들을 여러 양극들, 예컨대 진리와 거짓, 개념과 감각, 논리와 비논리, 추론과 체험 등으로 구분하여 위계질서를 창조하며 이 질서를 반복하고 확산시킨다. 최근 미국의 주류 서정시가 자서전적인 개인의 목소리를 중요시하여 선형적이고 자기 패쇄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고 풀턴은 비판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현실에는 개인의 의지나 의도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총체성의 원환을 비켜나려는 수많은 원심적 운동들 역시 존재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또한 다수성의 열린 체계마저 부정하지는 않는다. 풀턴은 사물과 인간 상호 관계들에서 일정한 방향성과 모종의 법칙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여기며, 그러하기에 구조나 총체성 자체를 모조리 포기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녀는 총체성과 동일성을 해체하면서도 또 다른 체계의 구성 가능성과 그 체계 내부에서의 부단한 탈주 가능성을 모색한다.
풀턴의 글쓰기는 자서전적이며 자기 완결적인 주류 서정시와 이에 대립하여 모든 체계를 거부하는 언어시에서 동시에 벗어나려 한다. 이 때문에 그녀는 최근 미국시의 두 주류 ‘사이’에 위치된다. 그녀의 시는 개인의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는 서정시의 범주와 ‘실험적이고’ ‘대안적인’ 언어시의 범주를 모두 포괄하면서도 동시에 이에서 벗어난다. 풀턴은 이러한 두 군의 모델에 대한 대안으로서 동일성과 총체성을 단절하는 힘과 다수성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녀의 시 형식과 주제는 현실의 현상이나 운동을 산출하는 힘들과 이 힘들 간의 내재적 관계 및 배치,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 내는 다수성과 다르지 않다. 그녀의 시에서 시어, 운율, 이미지, 줄거리 등은 끊임없이 관계와 배치를 바꿔가며 변화해가는 연속체를 이룬다. 다양한 규모로 관계와 배치를 바꾸어가며 반복되는 생성은 풀턴의 시적 실험에 중요한 장치가 되며, 그녀의 이러한 실험은 의미화와 주체화의 강고한 벽을 무너뜨리고 고정된 지층에서 벗어나며 새로운 전복의 공간을 열어준다.
풀턴의 실험 시학에 대해 국내에서는 아직 논의된 적이 없지만 국외의 경우에는 풀턴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스팃(Peter Stitt)은 풀턴의 이미지와 다양한 짜기에 대해 주목했고, 조셉(Lawrence Joseph)은 풀턴의 시가 맺는 과학기술, 성, 계급, 종교 등과의 관계를 다루었다. 옌서(Stephen Yenser)는 풀턴의 시를 최대주의 시(Maximalist Poetry)로 정의하면서 그녀의 시가 진행하는 다양한 영역과의 교차를 탐구한다. 하지만 이들은 단순히 풀턴의 시에 나타나는 현상을 묘사하는 것에 그치고 그 밑바탕에 버티고 있는 배치와 다수성에 대해 보다 체계적으로 탐구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준다. 본 연구는 최근 미국시의 두 주류인 서정시와 언어시 사이에 위치하는 풀턴의 실험 시학을 단순히 설명하거나 기존 풀턴의 비평에 또 다른 관점을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여러 비평가가 이미 주목하고 있는 풀턴 시에 나타나는 여러 기법들과 그 관계의 성과를 풀턴 시학의 근본 지점인 결정성과 비결정성 간의 경계를 다수성과 배치의 관점에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검토한다. 그녀는 이질적인 요소 사이에 존재해 오던 이분법적 대립과 위계질서를 해체하고 이들의 비선형적인 융합이라는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풀턴은 형식과 내용, 자연과 문화, 언어와 실제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사유하여 이들 간의 경계를 다선형적으로 결합한다. 본 연구는 기존의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풀턴의 시에서 이질적인 요소들이 서로 자극하고 결합하면서 내재적 관계와 배치를 산출해가는 과정을 탐구한다. 나아가 본 연구는 다수성과 배치의 존재론을 바탕으로 풀턴이 언어와 시의 영역과 정치사회문화가 어떤 식으로 접속하며, 결합하는 구조가 어떻게 최근 시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있는지를 논의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무질서는 온기의 지표」에서는 하잘 것 없이 보이는 사건인 창문의 서리에서 출발하여 수많은 원심적인 운동과 배치를 통해 물리학, 화학, 생물학, 종교, 사회정치 간의 내재적 관계를 산출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내 마지막 T.V. 캠페인」에서는 문화 관례나 신체적인 특징은 성을 고정하거나 결정하는 기능을 수행하지 않으며 비결정성, 혼종성, 성 위치 바꾸기 등의 가능성을 여는 방식을 살펴본다. 「전에 뼈이던 나무 얼레에 실이 감기다」(“The Lines Are Wound on Wooden Bobbins, Formerly Bones")에서는 풀턴이 연결실 표시(==)를 사용하여 여성이 남성의 지배 하에서 주변부와 배경으로 사라지는 것을 폭로하는 방식을 고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