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조선후기 시조사의 주요한 부면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소설 차용 시조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 특징적 현상을 집약적으로 제시하고, 그것의 출현 동인을 당대의 시대적, 사상적 배경과 연계하여 해명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특히, 차용된 소설 작품 중 주 ...
본 논문은 조선후기 시조사의 주요한 부면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소설 차용 시조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 특징적 현상을 집약적으로 제시하고, 그것의 출현 동인을 당대의 시대적, 사상적 배경과 연계하여 해명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특히, 차용된 소설 작품 중 주종을 이루고 있는 『삼국지』 속의 인물들, 그 중에서도 ‘제갈량’과 ‘관우’의 시적 형상에 주목하여 그들이 어떠한 이유로 조선후기 시조사의 드넓은 지평 안으로 포섭될 수 있었던가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였다.
『삼국지』 속 인물들이 조선후기 시조 작품의 주된 모티프로 기능하는 현상에 주목한 논의는 그리 많지 않다. 유관한 내용의 성과들을 종합하여 그 大綱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중국에서 창작된 『삼국지연의』가 16세기 말 이래 조선에 전래되면서 사대부 및 여항층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고, 이와 아울러 조선후기 들어 중인 계층으로 확대된 시조 담당층의 연의류 소설에 대한 탐독과 소재 및 주제의 확대를 요구하던 시조사 내부의 동인이 맞물리게 되면서 소설의 일부 내용 및 인물들이 시조의 주된 모티프로 유입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삼국지』와 관련된 시조 작품들의 출현에 있어 『삼국지연의』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는 요인임에 분명하지만 소설의 성행을 절대적 常數로 파악한 종래의 성과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좀더 세밀한 고찰을 요한다. 첫째, 역사적 인물이 주된 소재로 활용된 시조 작품의 경우, 그 창작적 원천의 모두가 소설이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둘째, 『삼국지연의』 관련 시조 작품들의 경우 그 출현 시기를 최대한 느슨하게 잡는다 하더라도 18세기 이전을 내려오지 않는데, 『삼국지연의』의 16세기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향유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양자 사이에 놓여 있는 적지 않은 시간적 간극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셋째, 여러 기록들을 통해 『삼국지연의』가 광범위한 독서 대중을 확보하고 있었음은 확인할 수 있지만, 이 소설이 당대에 향유되었던 여타의 소설작품들, 이를테면, <구운몽>, <사씨남정기>, <숙향전> 등과의 비교에 있어 반드시 우위를 점했다고는 단정지을 수 없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서 본고에서는 7,000여 수에 달하는 고시조 작품들 중 소설적 내용과 유관한 작품을 검출하여 이러한 현상이 『삼국지』 속의 인물들, 그 중에서도 ‘제갈량’과 ‘관우’에게만 편중되어 나타난다는 점을 계량적으로 확인하고, 아울러 이러한 편중의 원인을 조선후기에 강화되어 가는 중화계승의식의 흐름과 그 속에서 재호명된, 몇몇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기억의 대중화, 고착화 양상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하였다. 제갈량과 관우는 그 몇몇의 인물들 중 대표적인 사례였으며, 그들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기념사업, 東廟, 祠堂과 같은 기념물의 건립 등은 시조, 소설, 판소리 등에 나타나는 그들의 모습을 일정한 방향으로 견인하였다. 조선후기 시가 향유 공간에서 관우와 제갈량에 대한 작품들이 꾸준히 창작되고 향유될 수 있었던 사정에는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