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의 독법이나 글쓰기는 바틀비적인 전략을 따릅니다. 지젝은 마르크스, 헤겔, 라캉의 독자로 알려져 있지만, 지젝은 마르크스를 마르크스적으로 읽지 않기를, 헤겔을 헤겔적으로 읽지 않기를, 라캉을 라캉적으로 읽지 않기를 선호합니다. 이러 ...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의 독법이나 글쓰기는 바틀비적인 전략을 따릅니다. 지젝은 마르크스, 헤겔, 라캉의 독자로 알려져 있지만, 지젝은 마르크스를 마르크스적으로 읽지 않기를, 헤겔을 헤겔적으로 읽지 않기를, 라캉을 라캉적으로 읽지 않기를 선호합니다. 이러한 지젝의 바틀비적 독법은 그의 책에서 어떤 일관성있는 독서를 확보하려는 독자를 종종 혼란에 빠뜨립니다. 우리가 종종 지젝이 말하는 핵심을 놓치는 것은 오로지 이러한 ‘바틀비적 부정성’에만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지젝의 주장을 정확히 관통하기는 어렵습니다.
지젝이 (칸트를 경유하여) 바틀비적 전략을 따르는 것은 우리의 유한한 이성은 종종 이율배반적이고 쉽게 모순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성을 통해 우리는 ‘우주가 무한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도 있고, ‘우주가 유한하다’라는 것 역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이성을 사용하여, 증거를 찾고 흩어져있는 사실을 수집하여, 나치 홀로코스트의 만행을 고발할 수도 있고, 반대로 이스라엘의 존재를 합법화하기 위하여 홀로코스트가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것을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떠한 정치적 목적이나 이해관계에 따라서 홀로코스트를 언급할 때,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은 정치적 목적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유일한 언급은 부정적인 것이어야 하며, 우리의 정치적 행위에 한계를 가하기 위해서만 언급되어야합니다. 즉 문제의 본질에 제대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성을 부정적으로 사용해야하며, 이성을 부정의 양상(a negative mode)으로 그 사용을 제한해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지젝의 바틀비적 독법 역시도 어떤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나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을 위한, 덧셈의 사유를 위한 것이 아니라, 부정, 즉 뺄셈의 사유에 의해, 우리 사회의 근본적 한계를 노출하기 위해서입니다.
지젝의 다른 개념과 마찬가지로, 외상(trauma) 개념 역시 우리 사회의 한계를 노출하고, 그것의 발본적 변화를 촉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지젝은 프로이트의 외상 개념을 활용하여, 마르크스적 정치학을 개진하고, 혁명을 외상적 사건으로 간주합니다. 프로이트는 외상에서 ‘억압이 일어나는 구조’를 전제하고, 외상을 주체발생의 근본 조건으로 보지만, 지젝은 다른 질병과 달리 유전자 지도를 가지지 않는 외상의 예외적 위상에 주목하고, 외상이 주체의 구조 그 자체를 파괴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지젝의 진단에 의하면, 오늘날의 자본주의 세계는 먹기만 하고, 배설하지는 못하여, 지독한 변비에 걸려있는 사회입니다. 변비를 치료하기 위해 변비약을 먹는 것은 일시적인 처방책밖에 되지 않으며, 변비약의 잦은 복용은 오히려 질병을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따라서 지젝은 세계를 근본적으로 치유하기 위해서는 병증의 원인에 주목하여, 병을 일으키게 만드는 그 구조적 원인을 제거해야한다고 봅니다. 지젝은 외상은 인간의 정신 구조 그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기에,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이 될 수 있고, 외상 후 주체는 혁명적 주체로 나아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외상 후 주체는 알츠하이머 환자와 같은 환자나, 사고의 충격에서 정신적으로 헤어나지 못하는 환자와 경험적으로 동일시해서는 안됩니다. 지젝은 뇌손상을 입은 주체와 이전의 체계와 완전하게 단절하는 사건의 주체가 동일하게 드러나는 개념 구조를 말하는 것이지, 특수한 경험이나 사례의 일반화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외상 후 주체는 죽음에서 살아난 주체이며, 이전의 사회적 정치적 정체성과 단절한 완전히 초기화된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외상 개념에 의해서, ‘~하지 않을 것을 선호하는’ 바틀비는 외상 후 주체이자, 혁명적 주체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사회에서 수많은 바틀비들은 트라우마에 의해서 리비도조차 빼앗겨버린, 리비도를 박탈당한 주체들이자, 불나방처럼 돈과 자본만을 쫓는 욕망을 상실한 리비도-프롤레타리아입니다. 따라서 지젝의 트라우마 개념에 의해서 전개되는 외상 후 주체에서 리비도-프롤레타리아 사회로의 이행은 마르크스나 레닌이 주장한 바와 같은 어떤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약속해주지는 않지만, 동시에 전체주의라는 부작용 없이, 최소한 오늘날 세계의 병증을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