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문서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유·도교를 비롯한 기타 종교 및 시대상에 대한 돈황 불교의 관용과 포용적 성격을 진단해본다.
돈황문서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유·도교를 비롯한 기타 종교 및 시대상에 대한 돈황 불교의 관용과 포용적 성격을 진단해본다.
기대효과
첫째, 부진을 면치 못하는 한국 돈황학 연구에 새로운 활력소가 될 것이다. 1987년에 창립된 한국돈황학회는 이미 26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연구 성과는 참으로 보잘것없다. 가끔 중국에서 세계 각국의 돈황학 연구 현황을 소개하는 경우가 있는데, 여 ...
첫째, 부진을 면치 못하는 한국 돈황학 연구에 새로운 활력소가 될 것이다. 1987년에 창립된 한국돈황학회는 이미 26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연구 성과는 참으로 보잘것없다. 가끔 중국에서 세계 각국의 돈황학 연구 현황을 소개하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서 한국은 인도나 독일, 호주와 함께 ‘기타 국가’에 소속되어 제일 말단에 단 몇 줄, 그것도 연구 성과가 아니라 한국돈황학회를 소개하는 정도에서 그친다. 일본이나 미국, 프랑스의 연구 논문이 중국어로 번역되는 경우는 많아도 한국 논문이 중국어로 번역 소개되는 경우는 없다. 그 일차적 원인은 연구 인력의 절대 부족이고, 부차적 원인으로는 돈황에 대한 사회 일반의 무관심이다. ‘돈황은 중국에 있으나 돈황학은 일본에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돈황 연구에서 당사국 중국을 능가하는 일본, 한 해 수백 여 편에 달하는 논문으로 일본 따라잡기에 나선 중국, 20세기 전반기부터 일찌감치 돈황학 연구에 뛰어든 프랑스... 그런데 이웃나라 한국의 돈황학 연구는 한 해에 논문 몇 편 나올까 말까 하는 부끄러운 수준이다. 본 연구는 침체를 넘어 퇴보일로에 있는 한국의 돈황학계에 자극제가 될 것이다. 둘째, 삶의 현장 속에서 관찰되는 중고시기 돈황 불교도의 신앙 형태를 보다 구체적이고도 면밀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중고시기의 돈황 불교는 동시대 그 어느 지역보다도 세속적 성격이 짙었다. 이것은 민족의 용광로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여러 민족이 각축을 벌이면서도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는 돈황이라는 지리적 특수성에서 기인한다. 다양한 민족의 돈황인들을 부처의 가르침 속으로 인도하는 것은 출가자들의 사명이자 책무였다. 돈황 문서에는 당시 돈황 불교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까닭에, 이에 관한 본 연구는 당시의 불교 면모를 여실히 살펴볼 수 있게 할 것이다. 셋째, 중국불교사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갖게 한다. 기존의 중국불교사는 불교사라기보다는 중국 불학사(佛學史)나 정통 불학사상 발전사에 가깝다. 통속화되고 관용적인 성격의 불교 면모는 도외시한 채 불교의 정통 교리와 철리에 부합하는 내용만을 다루고 있는 까닭이다. 물론 불학사나 정통 불학사상 발전사가 불교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불교의 역사, 즉 불교사의 전부일 수는 없다. 본 연구는 정통 불학사상의 발전 과정만으로 채워져 있다시피 하는 기존의 불교사관에서 지역불교로서의 특화된 돈황불교의 의미를 일깨우게 될 것이다. 넷째, 우리 불교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효과가 있다. 민병훈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부장은 “우리 불교문화의 원류에 해당하는 둔황 막고굴이나 기타 석굴사원 등에 대해 우리는 이상하리만큼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며 “우리 불교회화가 돈황석굴의 불교회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등 우리 불교문화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이들 문화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의 불교문화와 돈황의 불교문화의 관련성은 단지 회화 방면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다섯째, 다른 종교를 대하는 한국 불교의 이상적인 미래상을 상정해볼 수 있다. 세계분쟁의 절반 이상이 종교 갈등으로 인해 일어나는데 개신교 쪽의 일부 근본주의를 예외로 두면, 우리나라는 예외적으로 종교 간 화합이 잘되는 나라에 속한다. 그러나 그 화합이 지속적이고도 탄탄하게 유지되려면 상대 종교를 단지 인정한다는 피상적인 차원을 넘어 그 교리에 대한 학습과 심도 있는 이해가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상대 종교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나오는 관용과 포용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고 시기 돈황의 불교인들은 유교와 도교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고, 그럼으로써 종교적 포용성을 확립할 수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연구요약
돈황은 불교를 비롯한 서역의 여러 종교들이 중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고, 또 중원의 기성종교, 혹은 중원화된 서역 전래 종교들이 역으로 서역으로 전파되는 중참(中站) 기지였다. 또한 돈황은 중원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기보다는 지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중원과는 격절 ...
돈황은 불교를 비롯한 서역의 여러 종교들이 중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고, 또 중원의 기성종교, 혹은 중원화된 서역 전래 종교들이 역으로 서역으로 전파되는 중참(中站) 기지였다. 또한 돈황은 중원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기보다는 지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중원과는 격절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종교방면 역시 그러했다. 수·당대처럼 중원 불교문화의 발전 추세에 부합되는 시기도 있었지만, 짧지 않은 시기가 중원과는 독립적 혹은 반독립적인 상태에 처해 있었다. 만당·오대가 그러한 시기였다. 중원에서의 만당·오대는 돈황의 토번 점령기(786~848년)와 귀의군(歸義軍) 시기(851~1036)에 해당한다. 만당·오대 시기 중원의 불교는 선종만이 유일하게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을 뿐, 다른 종파들은 대부분 수·당대의 전성기를 지나 쇠락으로 기울거나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상태였다. 출가 승려들의 전문적인 불교에서뿐만 아니라 세속 불교도들의 대중종교로서의 신앙 활동 또한 극성기의 활력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중국 서북쪽 귀퉁이에 자리한 돈황에서 불교는 오히려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돈황 주민들이 앞 다투어 불교사원을 건설하고 석굴 조성에 열을 올렸던 것이다. 이때 조성된 석굴은 규모면에서도 이전 시대의 것을 훨씬 뛰어넘었다. 막고굴에서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석굴들은 대부분 만당·오대에 건설된 것들이다. 이러한 현상은 불교를 국교로 삼고 불교를 독존(獨尊)의 위치에 올려놓았던 토번의 숭불 정책과 무관치 않다. 이후 토번 세력을 몰아내고 한족들이 정권을 되찾은 귀의군 시기가 되어서도 불교의 번성은 계속되었다. 귀의군 시기에는 그동안 내처졌던 유학 교육이 다시금 시행되기는 했으나, 토번이 건립한 불교의 독존적 지위는 흔들림이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 공고해지는 양상을 띠었다. 중원 불교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돈황 불교가 이렇듯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정치 지도자들의 개인적인 숭불 경향에 힘입은 바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서역과 중원의 문화 문물이 오가는 교착지라는 돈황의 지리적 특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곳에서 살고 있는 돈황인들의 심리적 요구에 적극 부응하여 대중적이면서도 불교교리에 어긋나지 않는 불교 전파방식(이를 테면 속강)을 펼친 돈황 불교계의 탁월한 현실 적응력에 힘입은 바가 컸다. 돈황 불교교단의 탁월한 현실 적응력이란 돈황 불교계의 민첩하면서도 과감한 세속화 경향을 의미한다. 세속화를 위한 돈황 불교교단의 대책은 여러 방면에서 강구되었다. 토번의 치하에서 돈황을 수복(收復)하고 당(唐)에 귀속하려는 귀의군 정권에 적극 힘을 보태는가 하면, 대민(對民) 불교 행사를 대대적으로 거행하기도 하고, 사람들의 출세욕을 부추겨 적극적으로 세상 속으로 들어가 사회에 공헌하라는 가르침을 펴기도 했다. 돈황 불교의 포용적 성격은 돈황의 지리적, 정치적 특수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며, 불교인들의 포용성은 한족 고유의 유교와 도교, 더 나아가 귀의군 시기의 주요 소수민족이었던 소그드인의 현교(祆敎), 즉 조로아스터교, 그리고 경교나 마니교 등 다양한 종교 모두를 불교 안에 아우르려는 행위로 나타났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국문
돈황 막고굴 제17굴, 즉 장경동(藏經洞)에서 발견된 돈황문서는 90% 이상이 불교문헌이다. 이 말은 곧 10%에 가까운 문헌이 비불교문헌이라는 말인데, 비불교문헌 중에는 중국의 경(經)·사(史)·자(子)·집(集) 사부서나 각종 관(官)·사(私) 문서 등 비종교문헌 외에도, 도교나 유교 ...
돈황 막고굴 제17굴, 즉 장경동(藏經洞)에서 발견된 돈황문서는 90% 이상이 불교문헌이다. 이 말은 곧 10%에 가까운 문헌이 비불교문헌이라는 말인데, 비불교문헌 중에는 중국의 경(經)·사(史)·자(子)·집(集) 사부서나 각종 관(官)·사(私) 문서 등 비종교문헌 외에도, 도교나 유교, 마니교, 경교 등 불교 이외의 기타 종교문헌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불교’사찰 삼계사(三界寺) 소속의 석실이었던 장경동에 이렇듯 비불교적인, 그것도 다른 종교문헌이 다수 보존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필자는 불교 이외 기타 종교문헌 보존의 이유를 돈황불교의 포용성이라는 측면에서 그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다.
영문
The Dunhuang manuscripts are a cache of important religious and secular documents discovered in the Mogao Caves of Dunhuang, China, in the early 20th century. Dating from the 5th to early 11th centuries, the manuscripts include works ranging from hist ...
The Dunhuang manuscripts are a cache of important religious and secular documents discovered in the Mogao Caves of Dunhuang, China, in the early 20th century. Dating from the 5th to early 11th centuries, the manuscripts include works ranging from history and mathematics to folk songs and dance. Most of the religious manuscripts are Buddhist, but other religions including Daoism, Nestorian Christianity and Manichaeism are also represented. In this paper, I have discussed about the catholicity of Dunhuang Buddhism contained in Dunhuang manuscripts from four aspects, i.e. Miao zhen zan in the Guiyijun period, school of the Dunhuang temple, Dunhuang vulgar literature texts, the religious manuscripts except Buddhism, namely Daoism, Nestorian Christianity and Manichaeism. Finally, I have discussed about the cause and background of the formation of Dunhuang Buddhism’s catholicity.
연구결과보고서
초록
돈황 막고굴 제17굴, 즉 장경동(藏經洞)에서 발견된 돈황문서는 90% 이상이 불교문헌이다. 이 말은 곧 10%에 가까운 문헌이 비불교문헌이라는 말인데, 비불교문헌 중에는 중국의 경(經)·사(史)·자(子)·집(集) 사부서나 각종 관(官)·사(私) 문서 등 비종교문헌 외에도, 도교나 유교 ...
돈황 막고굴 제17굴, 즉 장경동(藏經洞)에서 발견된 돈황문서는 90% 이상이 불교문헌이다. 이 말은 곧 10%에 가까운 문헌이 비불교문헌이라는 말인데, 비불교문헌 중에는 중국의 경(經)·사(史)·자(子)·집(集) 사부서나 각종 관(官)·사(私) 문서 등 비종교문헌 외에도, 도교나 유교, 마니교, 경교 등 불교 이외의 기타 종교문헌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불교’사찰 삼계사(三界寺) 소속의 석실이었던 장경동에 이렇듯 비불교적인, 그것도 다른 종교문헌이 다수 보존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당시는 종이가 귀해서 그 뒷면을 이용하기 위해 불교도들이 여기저기서 수집해 들인 결과라는 일부 학자들의 견해에 일리가 없는 바는 아니나, 그것만으로 돈황문헌의 다양성의 원인을 설명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답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불교 이외 기타 종교문헌 보존의 이유를 돈황불교의 포용성이라는 측면에서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당대 초기 전국 각지에 관제(官制) 사찰이 건립되며 불교의 교세가 크게 확장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당대는 황제의 후원을 등에 업은 도교 우위의 시대였다. 특히 당말 오대에는 잦은 국난과 두 차례에 걸친 불교 도태령으로 중원불교는 쇠퇴일로에 놓여 있었고, 불교가 ...
당대 초기 전국 각지에 관제(官制) 사찰이 건립되며 불교의 교세가 크게 확장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당대는 황제의 후원을 등에 업은 도교 우위의 시대였다. 특히 당말 오대에는 잦은 국난과 두 차례에 걸친 불교 도태령으로 중원불교는 쇠퇴일로에 놓여 있었고, 불교가 유·도를 대표하는 일도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만당·오대 돈황불교가 중원불교의 쇠락과는 달리 삼교(三敎)를 대표하여 유교와 도교까지 관장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중원과의 지리적인 격절이라는 간접적인 원인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집권층과 불교계의 추구하는 바가 서로 맞아떨어졌다는 점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티베트왕국의 내란을 틈타 정권을 잡은 귀의군정권은 한족(漢族)들의 성대한 환영을 받았지만 당시 돈황에는 한족뿐만 아니라 티베트족, 회골족, 소그드족 등 다양한 민족이 함께 살아가고 있었고, 돈황을 중심으로 하는 귀의군 한족 정권 주위에는 티베트와 회골回鶻, 퇴혼退渾, 용가龍家, 중운仲雲 등의 많은 소수민족 정권이 동, 남, 서 삼면에서 귀의군을 위협하고 있었다. 귀의군정권에 호의적이었던 당 조정도 내부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어 하서(河西)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이러한 대내외적인 불안한 정세 속에서 귀의군은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다양한 민족들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데 종교의 힘을 필요로 했다. 돈황에는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던 만큼 다양한 종교가 성행하고 있었는데, 불교는 당시 가장 큰 민족 집단이었던 한족과 티베트족이 신앙하는 종교였다. 따라서 귀의군 정권은 불교의 힘으로 불안한 민심을 수습하여 사회를 안정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주변의 위협세력들에 대항하고자 했다. 더군다나 장의조는 티베트 세력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홍변(洪辯)이나 오진(悟眞) 등 승려들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던 터였다. 귀의군 집권층의 불교 옹호에는 이러한 배경이 깔려 있다. 그런데 불교계가 티베트 세력을 몰아내는 데 힘을 보탠 이유는 무엇일까? 티베트족 역시 불교를 신앙하는 민족이었기에 돈황을 점령한 티베트인들은 한족 불교도를 억압하거나 한문불교를 소멸시키려는 행위는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한문불교를 경외(敬畏)하고 보호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리하여 승려 수는 크게 증가하였고 사원도 곳곳에 들어섰으며 막고굴에는 화려한 벽화로 꾸며진 석굴들이 여러 곳 개착되었다. 그러나 이렇듯 외형적인 번성과는 달리 한족 불교승려들의 심리적인 불만족은 어찌할 수 없었다. 단지 동족(同族)이 아닌 이민족의 통치를 받는다는 민족적 자존심의 발로만은 아니었다. 중원과의 완전한 관계 단절은 곧 중원의 최신 불학(佛學)을 돈황의 승려들은 접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비록 돈황 함락 직전 중원에서 돈황으로 들어온 담광(曇曠)으로부터 중원의 불교를 전수받고, 역경인(譯經人) 신분으로 티베트에 들어가 티베트불교를 학습하고 돌아온 법성(法成)으로부터 티베트불교를 전수받기도 했지만, 선진(先進) 불교에 대한 돈황 불교도들의 지적욕구를 해소시킬 수는 없었다. 게다가 불경 사경(寫經) 작업에 돈황 승려들이 동원되곤 했는데 이들 사경승(寫經僧)들은 자신들에게 할당된 양을 채우지 못할 경우 심한 매질을 당했으니 그들은 엄격한 감시와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고통스런 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장의조가 당나라로의 귀속(歸屬)의 기치를 내걸고 봉기의 깃발을 올리니 이에 적극 호응하는 것은 당연했다. 더군다나 장의조(張議潮)는 한때 학랑(學郞) 신분으로 사찰에서 생활하기도 했던 불교적 성향의 인물이었으니 그의 등장을 불교계는 당연 반겼을 것이다. 이렇듯 집권층과 돈황 불교계는 서로 의기투합하였고, 돈황불교는 중원불교의 쇠락과는 무관하게 사회변혁의 전면에 서서 유불도 삼교의 대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