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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서봉총 출토 은합의 성격 재검토
The reexamination of Silver Bowl with Lid excavated from the Seobongchong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시간강사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13S1A5B5A07046174
선정년도 2013 년
연구기간 1 년 (2013년 09월 01일 ~ 2014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장창은
연구수행기관 국민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 선입관과 편견으로 점철된 서봉총 출토 은합의 성격에 대한 문제의 제기
    일제강점기 서봉총 출토 은합의 제작주체와 시기는 대부분 신라 지증왕 12년(511)으로 보았다. 여기에는 신라 적석목곽분의 연대를 늦추어보고자 하는 일제 관변학자들의 선입관이 깔려 있었다. 은합에 대한 연구는 1946년 호우총에서 415년의 절대연대를 가진 고구려산 청동합이 발견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서봉총 출토 은합도 호우총과 가까운 시기로 소급될 수 있는 가능성과 고구려 문물의 관점에서 재검토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후 은합의 제작주체와 시기는 고구려 장수왕 39년(451)으로 보는 연구가 통설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는 5세기대 신라․고구려의 관계가 고려되지 못한 것이었다. 451년(눌지왕 35)은 신라와 고구려의 우호관계가 급속이 이완되어 가던 시기였다. 은합의 제작이 장수왕의 명령에 의해 451년 3월에 제작되었다면 그것이 신라로 전해져 무덤에 부장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는 양국관계상 고구려 문물이 신라 왕족의 무덤에 묻힐 정도로 기념될 만한 것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은합의 451년 고구려 제작설은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기왕에는 서봉총의 은합과 호우총 청동합이 재질과 형태, 서체 등 여러 면에서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양자를 관련지었다. 또한 ‘延壽’를 자구적 의미에 매몰되어 장수왕에만 연관지었다. 사실 황남대총 남분 출토 은합과 서봉총의 은합이 형태면에서 거의 대동소이하고, 다른 무덤에서 출토된 은합이 있으므로 이들과 서봉총의 은합을 비교함으로써 그것이 신라 것인지 고구려 것인지를 분별하는 연구방법이 선행되어야 한다. 기왕의 연구는 이러한 실증적 과정보다는 호우총의 발견에 경도되어 도출된 선입관이 작용한 듯하다.

    • 신라사의 발전과정과 신라․고구려 관계 대한 이해방향 제공
    은합에 대한 연구는 우선 은합의 재질과 제작기법 등에 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 서봉총의 은합과 다른 은합들의 제작기법 및 재질 등을 비교하여 서봉총 출토 은합을 511년(지증왕 12)에 신라에서 제작된 것으로 본 연구가 발표되었다.
    은합의 제작주체가 신라로 밝혀진다면 은합을 근거로 논급되어 온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는 수정이 불가피하다. 뿐만 아니라 현전하는 문헌과 금석문상에는 신라 연호의 사용과와 大王制의 성립시기가 법흥왕대 이후로 되어 있는데, 이 역시 지증왕대까지 소급할 단서가 마련된다. 지증왕대와 법흥왕대를 계기적 측면에서 파악한다면 은합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 신라사의 발전과정과 중고기 왕권의 성립에 대해 진전된 이해를 도출할 수 있다.

    • 서봉총의 매장 주체 추론
    서봉총 은합의 제작주체와 시기를 기존보다 진일보하고 객관적으로 밝히기 위해서는 은합뿐만 아니라 서봉총 출토 금관 등의 유물을 다른 고분의 출토품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은합이 서봉총의 은합과 재질과 속성 면에서 흡사한 것은 이러한 연구방법의 타당성을 시사한다. 특히 서봉총 금관의 새모양 장식은 다른 금관들과 차별되는 특징으로 주목된다. 제작시기가 분명한 은합의 분석을 통해 서봉총의 축조시기와 무덤의 주인공까지도 상정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것이다.

    • 신라 음양오행사상 및 도교에 대한 단초적 자료의 재음미
    서봉총 은합의 干支는 뚜껑 안쪽과 바닥에 나누어 표기되어 있다. 天干과 地支를 두껑과 몸체에 나누어 표기한 것은 종래 거의 주목받지 못했지만 제작자 나름대로의 의도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아마도 당시 음양오행설과 관련 있을 가능성이 크다. 간지의 표기법도 太歲紀年法이다. 은합에 제사용구로서의 기능적 측면이 담보되어 있다고 할 때, 이와 같은 간지의 표기 방식과 曆法은 밀도 있게 분석될 필요가 있다.
    延壽는 어느 나라의 연호인가도 중요하지만 不老長生과 연관한 도교적 표현일 수도 있다.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되는 운모, 朱砂, 바둑알 모양의 돌, 돌절구 등을 도교에서의 선약과 그 제조구로 해석하기도 한다. 은합 연구는 이런 면에서 주목할 만한 고고 자료로도 재음미될 요소가 충분하다.
  • 기대효과
  • [학문적 기대효과]

    첫째, 신라․고구려 관계 연구의 진전이다.
    기존의 많은 연구가 은합의 제작 주체와 시기를 고구려 장수왕 39년(451)으로 상정하였다. 그것은 곧 이 시기까지 고구려가 신라에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의미하는 자료로 은합이 활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은합 성격의 재검토를 통하여 이러한 통설에 대한 문제제기와 함께 그에 따른 연구의 활성화와 논의의 진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둘째, 신라 적석목곽분의 축조시기 및 매장주체에 대한 인식의 제고이다.
    은합의 제작 주체와 시기는 궁극적으로 서봉총의 매장주체와 함께 논의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따라서 이를 통해 서봉총의 주인공과 여타 다른 적석목곽분과의 관계 등이 드러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셋째, 신라 중고기 성립과 발전의 단초를 추적할 수 있다.
    은합에 남아 있는 연수 연호와 대왕의 표기가 만약 신라의 것으로 재조명될 수 있다면 신라사에서 연호와 대왕제의 성립 시기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재고할 수밖에 없게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중고기 성립과 발전의 단초가 좀 더 선명하게 부각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넷째, 한국고대 음양오행사상 및 신앙적 기반에 대한 논의를 활성화한다. 은합의 간지 표기방식과 태세기년법의 채택, 그리고 연수 연호의 의미는 단편적이지만 한국고대 음양오행사상과 도교 신앙이 삼국시대에 미친 영향에 대한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이는 다른 제사용구에 남아 있는 명문도 같은 연구방법으로 재조명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마련될 것으로 기대된다.

    [교육적 기대효과]

    서봉총 출토 은합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여기에서도 451년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과 파급력을 감안할 때 서봉총 은합에 대한 성격은 ‘고구려 장수왕시대의 유물’로 공인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유치원 어린이부터 초․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생과 일반인까지 내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관람하는 곳이다.
    본 연구를 통해 서봉총 출토 은합의 성격이 재조명될 수 있다면, 생산적인 논의과정과 별다른 설명 없이 은합이 ‘고구려의 것’으로 규정되어 전시되는 현 상황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 연구가 가지는 교육과의 연계 활용 방안은 단순한 연구논문 1편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확신한다.
  • 연구요약
  • 각 장별로 연구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Ⅱ. 연구사 검토
    서봉총 출토 은합은 제작 주체와 시기에 있어 논란이 분분하다. 여기에는 은합이 매장된 서봉총의 축조연대는 물론 연호와 대왕제의 성립시기 등 고구려와 신라를 바라보는 연구자 간의 시각 차이가 그대로 노정되어 있다. 따라서 논문의 논지를 주장하는 과정상 연구사를 별도의 장으로 할애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필자 논지의 당위성이 확보될 것이다. 이에 본 장에서는 선행 연구 성과를 객관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연구방법의 타당성과 연구내용의 질적인 부분을 제고시킬 수 있도록 하겠다. (연구사 검토의 구체적인 내용은 연구계획서의 내용을 참고 바람)

    Ⅲ. 은합의 제작 주체와 시기
    3장에서는 은합의 조성 주체와 제작시기를 본격적으로 추적하고자 한다. 특히 서봉총 출토의 은합과 다른 곳에서 출토된 기왕의 은합을 종합적으로 비교․검토하여 은합의 제작주체를 확정짓는 것은 연구방법에서 발전적으로 적극 수용하고자 한다. 나아가 서봉총 은합 명문의 서체를 다른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명문과 비교해 보는 작업[예컨대 황남대총 북분 출토 부인대]도 필요할 것이다. 또한 중국 지안시 태왕릉에서 출토된 「신묘년명 청동방울」 등 고구려 유물의 명문과도 비교하여 은합의 제작지를 선입관 없이 밝히고자 한다.
    은합의 제작시기는 연호 연수와 간지 신묘년이 결정적 단서임에는 분명하지만 서봉총에 부장된 시기 역시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은합이 고구려산으로 밝혀진다면 은합의 제작과 부장시기는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 속에서 풀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곧 신라․고구려 관계를 꼼꼼하게 재검토하여 과연 은합이 서봉총에 매장될 수 있었던 신라사회의 분위기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밝힐 것이다.
    이와 달리 은합이 신라산이라면 서봉총의 축조시기와 긴밀한 관련을 가질 것이므로 은합의 제작시기도 그 속에서 추적하는 것이 온당하다. 이것은 은합뿐만 아니라 서봉총 출토 금관 등 여타 유물의 종합적 검토를 수반해야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서봉총의 매장 주체를 밝힐 수 있는 계기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은합에 남아 있는 연수 연호와 태왕 명문을 통해 신라 연호의 최초 사용시기와 대왕제의 성립시기에 대한 재검토도 불가피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은 신라가 고구려의 정치적 간섭을 받았던 영향과 관련되는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 나아가 고구려와의 대립과정에서 누가 왜 은합을 만들었는지를 신라사 내에서 종합적으로 규명해야 할 것이다.

    Ⅳ. 은합에 함의된 그 밖의 문제
    4장에서는 은합에 담겨 있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논의를 확대하고자 한다. 먼저 은합의 간지를 왜 뚜껑 안쪽과 밑면 바닥에 나누어 기재했는지를 규명하고자 한다. 은합은 태왕의 명령에 의해서 만들어진 제사용 그릇일 가능성이 크므로 이는 분명한 의도가 내재된 결과임이 분명하다. 太歲紀年法을 사용한 것도 의미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문제는 음양오행사상과 曆法의 차원에서 중국적 전통이 한반도에 어떻게 전래되어 적용되었는지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延壽 연호를 기왕의 연구가 자구적 의미에 매몰되어 장수왕 내지 지증왕 같은 특정 인물의 장수와 관련지은 것에서 한 발 나아가 그 사상적 기반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보고자 한다. 그것은 곧 도교의 不老長生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보면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운모, 朱砂, 바둑알 모양의 돌, 돌절구 등을 도교에서의 선약과 그 제조구로 해석한 연구도 재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의 신라 토착신앙과 그에 내재된 도교적 신앙 요소의 한 단면을 살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결국 서봉총 출토 은합에는 신라사 내의 발전과정과 대외관계, 그리고 사상과 신앙체계를 알려주는 여러 열쇠가 있는 셈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연구 목적에 부합할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하고자 한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서봉총이 발굴된 것은 1926년이었지만 은합에 새겨진 명문이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1932년의 일이었다. 명문 내용에는 ‘연수(延壽) 원년(元年)’과 ‘신묘년(辛卯年) 삼월(三月)’이라는 제작 시기와 제작 주체자인 ‘태왕(太王)’이 분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에 은합의 제작 주체와 시기에 대한 연구성과가 누적되었고, 그에 따라 논란은 더 분분해져 갔다.
    우선 일제강점기 이후 초기 연구 단계에는 ‘신라설’의 관점에서 은합의 제작 주체와 시기가 조명되었다. 일본인 연구자들이 지증왕 12년(511)을 주목한 반면에, 이홍직‧박진욱 등은 눌지왕 35년(451)과 나물왕 35년(391)을 은합의 제작 시기로 보았다. 그러나 일본인 연구자들의 경우 신라 상대 사회에 대한 불신과 신라 적석목곽분의 연대를 자국의 것과 비교해서 늦추어 보려는 선입관에서 도출된 결론이었다. 이홍직‧박진욱도 장수왕 3년(415)에 제작되어 신라에 반입된 호우총 출토 청동합을 근거로 한 것이었지만, 청동합의 전세기간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서봉총 출토 은합의 제작 주체와 제작 시기는 1946년 경주 호우총에서 고구려산 청동합이 출토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곧 신라 무덤에서 출토되었지만 고구려에 의해 전래된 고구려 유물의 가능성이 모색된 것이다. 이것은 4세기 후반~5세기 중반 두 나라의 우호관계가 고려된 결과였다. 그에 따라 ‘고구려설’의 관점에서 은합의 제작 주체와 시기를 파악한 연구성과가 축적되어 통설이 되었다. 이들은 은합의 십자형 꼭지 손잡이 형태가 고구려 칠성산 96호분 출토 합에 기원을 둔 것으로 보고, 간지의 표현방식과 손잡이 형태가 ‘고구려적 요소’임에 주목하였다. 여기에는 <삼국사기>에 분명하게 남아 있는 법흥왕대(514~540) 연호 제정 기록과 금석문상에서 신라 ‘太王’호의 성립 시기를 법흥왕 이전으로 소급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전제되었다.
    그러나 호우총 청동합과 서봉총 은합의 제작 주체와 시기를 관련짓기에는 재질(청동‧은)과 제작방식(주조‧단조), 그리고 명문의 새김방식 등에서 양자 간의 차이가 확연하다. 따라서 두 합의 관련성을 논하는 것은 무리이다. 또한 칠성산 96호분 합과 형태적으로 공유하는 측면과 간지의 표기방식이 ‘고구려적 요소’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이 곧 은합의 제작지를 고구려로 단정해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4세기 후반~5세기 중반 신라와 고구려가 우호관계를 지속한 결과 고구려의 선진문물에 영향을 받은 신라 문물의 출토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고구려에서는 아직까지 서봉총 은합과 같은 단조방식으로 제작된 합이 없고, 재질상 은합의 출토 사례도 보고된 바 없음을 유념해야 한다. 신라사에서 ‘태왕’호를 사용한 시기도 현전하는 금석문상으로는 법흥왕 이후가 분명하지만, 지증왕이 재위 4년에 ‘신라국왕(新羅國王)’호를 칭한 것은 실질적으로는 ‘太王’호의 의미와 부합한다. 지증왕이 모량부 상공의 딸을 ‘황후(皇后)’로 봉한 것은 그 자신이 표방한 황제관념의 산물이다. 또한 ‘건원(建元)’이 법흥왕 대에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천명한 첫 연호임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연수’를 지증왕의 비공식적인 연호 내지 일연호(逸年號)로 이해하는 것과 꼭 상충하는 것만도 아니다.
    사실 서봉총 출토 은합을 장수왕 39년(451)에 고구려에서 제작되어 이후 신라 서봉총에 부장품으로써 매납된 것으로 볼 경우 가장 큰 문제는 5세기대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 추이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은합이 고구려 장수왕의 명령에 의해 451년 3월에 제작되었다면 그것이 신라로 전해져 무덤에 부장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는 두 나라의 관계상 고구려 문물이 신라 왕족 내지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에 묻힐 정도로 기념될 만한 부장품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은합의 제작 주체와 제작 시기에 대한 연구방법으로는 선입관을 배제하고 은합 자체의 재질과 제작방식에 대한 기초적인 분석이 중요하다. 이에 주목되는 것이 박광열의 연구이다. 박광열은 서봉총 은합과 같은 십자형 꼭지 손잡이 형식이 출토된 7개의 합의 제작기법(주조․단조), 합에 뚜껑을 덮는 방식(내물림식․외물림식), 재질, 십자형 꼭지 손잡이 부착 방법(리벳 사용․자체 부착), 뚜껑과 합의 높이․크기와 구경비율 등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서봉총 출토 은합의 제작 주체와 시기를 지증왕 12년(511)으로 파악하였다. 현단계에서는 가장 합리적인 이해방향이 아닌가 싶다. ‘고구려설’의 설득력이 배가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연구방법이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기존에 거의 주목받지 못했지만 은합의 연간지(年干支)를 뚜껑 안쪽과 합의 밑바닥에 나누어 표기한 데에는 제작자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 곧 ‘태세재신(太歲在辛)’과 ‘태세재묘(太歲在卯)’ 각각의 의미를 추적한 결과, 은합의 제작 주체인 ‘태왕(太王)’의 성덕(聖德)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것의 전제적 조건인 장수를 함께 염원하는 측면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규명되었다. 또한 ‘연수(延壽)’라는 연호는 도교에서 추구하는 불로장생의 표현인 ‘연년익수(延年益壽)’의 줄임말일 가능성이 크고, 은으로 그릇을 제작한 것도 도교적 산물일 가능성이 다분함을 지적하였다. 향후 서봉총을 비롯한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유물의 성격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입론은 좀 더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 영문
  • The Silver Bowl with Lid excavated from the Seobong-chong(瑞鳳塚) beared an inscription that 'The First Year of Yeon su(延壽, the name of an era reign name)' and 'Taewang(太王)'. It Means that Production period and Production entities of the Silver Bowl. The Research result accumulated about a Production period and Entities of the Silver Bowl.
    First, The Production entities of the Silver Bowl King of Goguryeo a view that to see. In This case, The Production period of the Silver Bowl understood that King Gogukyang 8 years(A.D. 391) or King Jangsu 39 years(A.D. 451).
    Second, The Production entities of the Silver Bowl King of Silla a view that to see. In This case, The Production period of the Silver Bowl understood that King Nulji 35(A.D. 451) or King Jijeung 12(A.D. 511). Beyond that, The Production period of the Silver Bowl understood that King Jinpyeong(r. 579~632). In this instance, 'Yeon su' understood that the name of chronicle age of Gochangguk(高昌國).
    As a result of formal classification if the Silver Bowl with Lid excavated from the Seobong-chong was made to pray Longevity of the King Jijeung(r. 500~514) 12 years(A.D. 511). I think that 'Yeon su'(延壽, the name of an era reign name) short for prolong life(延年益壽) of Taoism.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서봉총 출토 은합의 명문 내용에는 ‘延壽 元年’과 ‘辛卯年 三月’이라는 제작 시기와 제작 주체자로서의 ‘太王’이 남아 있다. 이에 은합의 제작 주체와 시기에 대한 연구가 축적되었고, 그에 따라 논란은 분분해져 갔다.
    일제강점기 이후 초기 연구 단계에는 ‘신라설’의 관점에서 은합의 제작 주체와 시기가 조명되었다. 일본인 연구자들이 지증왕 12년(511)을 주목한 반면에, 이홍직‧박진욱 등은 눌지왕 35년(451)과 나물왕 35년(391)을 은합의 제작 시기로 보았다. 서봉총 은합의 제작 주체와 시기는 1946년 경주 호우총에서 고구려산 청동합이 출토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그에 따라 ‘고구려설’의 관점에서 은합의 제작 주체와 시기를 파악한 연구성과가 축적되어 통설이 되었다. 이들은 은합의 십자형 꼭지 손잡이 형태가 고구려 칠성산 96호분 출토 합에 기원을 둔 것으로 보고, 간지의 표현방식과 손잡이 형태가 ‘고구려적 요소’임에 주목하였다. 여기에는 󰡔삼국사기󰡕에 남아 있는 법흥왕대(514~540) 연호 제정 기록과 금석문상에서 신라 ‘太王’호의 성립 시기를 법흥왕 이전으로 소급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전제되었다.
    그러나 호우총 청동합과 서봉총 은합의 제작 주체와 시기를 관련짓기에는 재질(청동‧은)과 제작방식(주조‧단조), 그리고 명문의 새김방식(鑄出‧線刻) 등에서 양자 간 차이가 확연하다. 또한 칠성산 96호분 합과의 형태적 공유 측면과 간지의 표기방식이 ‘고구려적 요소’이더라도, 그것이 은합의 제작지를 고구려로 단정해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4세기 후반~5세기 중반 신라와 고구려가 우호관계를 지속한 결과 고구려의 선진문물에 영향을 받은 신라 문물의 출토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고구려에서는 아직까지 서봉총 은합과 같은 단조방식으로 제작된 합이 없고, 재질상 은합의 출토 사례도 없다. 신라사에서 ‘태왕’호를 사용한 시기도 현전하는 금석문상으로는 법흥왕 이후이지만, 지증왕이 재위 4년(503)에 ‘新羅國王’호를 칭한 것은 실질적으로 ‘太王’호의 의미와 부합한다. 또한 ‘建元’이 법흥왕대의 공식적 첫 연호임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연수’를 지증왕의 逸年號로 이해하는 것과 상충하는 것만도 아니다.
    서봉총 은합을 장수왕 39년(451)에 고구려에서 제작되어 이후 신라 서봉총에 부장된 것으로 볼 경우 가장 큰 문제는 5세기대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 추이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은합이 고구려 장수왕의 명령에 의해 451년 3월에 제작되었다면 그것이 신라로 전해져 무덤에 부장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이 시기는 두 나라의 관계상 고구려 문물이 신라 왕족 내지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에 묻힐 정도로 기념될 만한 부장품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은합의 제작 주체와 제작 시기에 대한 연구방법으로는 선입관을 배제하고 은합 자체의 재질과 제작방식에 대한 기초적인 분석이 중요하다. 이에 주목되는 것이 박광열의 연구이다. 박광열은 서봉총 은합과 같은 십자형 꼭지 손잡이 형식이 출토된 7개의 합의 제작기법(주조․단조), 합에 뚜껑을 덮는 방식, 재질, 십자형 꼭지 손잡이 부착 방법, 뚜껑과 합의 높이․크기와 구경비율 등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서봉총 출토 은합의 제작 주체와 시기를 지증왕 12년(511)으로 파악하였다. 현단계에서는 가장 합리적인 이해방향으로 생각된다.
    은합의 年干支를 뚜껑 안쪽과 합의 밑바닥에 나누어 표기한 것도 제작자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 곧 ‘太歲在辛’과 ‘太歲在卯’ 각각의 의미를 추적한 결과, 은합의 제작 주체인 ‘太王’의 聖德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것의 전제적 조건인 장수를 함께 염원하는 측면이 담겨져 있었다. 또한 ‘延壽’라는 연호는 도교에서 추구하는 불로장생의 표현인 ‘延年益壽’의 줄임말일 가능성이 크고, 은으로 그릇을 제작한 것도 도교적 산물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학문적 기대효과>
    본 논문을 통해 가장 기본적으로는 서봉총 은합의 제작 주체와 제작 시기에 대한 향후 학계에서의 논의가 좀 더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한다. 나아가 서봉총에 대한 종합적 연구에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그밖에 간접적으로 몇 가지 학문적 기대효과를 상정할 수 있다.
    첫째, 신라 적석목곽분의 축조 시기 및 피장자에 대한 단서의 마련이다. 은합의 제작 주체와 시기는 결국 서봉총의 피장자 문제와 밀접히 관련되는 사안이다. 곧 본 연구는 서봉총의 주인공과 여타 다른 적석목곽분과의 관계에 관한 향후 연구에 단초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둘째, 신라 중고기 성립과 발전의 단초를 추적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처럼 은합에 남아 있는 ‘연수’ 연호와 ‘대왕’의 표기가 신라의 것으로 재조명될 수 있다면, 신라사에서 연호와 대왕제의 성립 시기에 대한 기왕의 이해는 재고되어야 한다. 따라서 본 연구는 중고기 성립과 발전의 단초가 선명하게 부각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셋째, 한국고대 도교 사상에 대한 논의를 활성화 할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은합의 ‘연수’ 연호와 은으로 그릇을 만든 근본적인 이유를 도교적 관점에서 재조명하였다. 이를 통해 은합뿐만 아니라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유물의 도교적 성격을 재검토함으로써 신라 사상의 다양성을 규명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한다.

    <교육적 활용 방안>
    서봉총 출토 은합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의 공식 안내문에서도 장수왕이 재위 39년(451)에 제작한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과 파급력을 감안할 때 서봉총 은합에 대한 성격은 ‘고구려 장수왕시대의 유물’로 공인받은 셈이다.
    본 연구를 통해 서봉총 출토 은합의 성격이 재조명될 수 있다면, 생산적인 논의과정과 별다른 설명 없이 은합이 ‘고구려의 것’으로 규정되어 전시되는 현 상황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 연구가 가지는 교육적 활용 방안의 의미가 배가될 것으로 확신한다.
  • 색인어
  • 서봉총 은합, 연수 연호, 태왕호, 장수왕, 지증왕, 도교
  • 연구성과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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