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카스트에 대한 이미지와 인식이 영국 식민지배 시기에 공적 영역에서 어떻게 표출되고 변화해왔는지 "인도 센서스" 일반 보고서를 중심으로 추적한다. "인도 센서스"는 중앙 정부와 각 주 정부의 공직자들과 정부에 의해 위촉된 기관에 의해 조사, 제작되었고, ...
본 연구는 카스트에 대한 이미지와 인식이 영국 식민지배 시기에 공적 영역에서 어떻게 표출되고 변화해왔는지 "인도 센서스" 일반 보고서를 중심으로 추적한다. "인도 센서스"는 중앙 정부와 각 주 정부의 공직자들과 정부에 의해 위촉된 기관에 의해 조사, 제작되었고, 인도의 행정을 책임지고 운영하는 각 정부 기관에 의해 인도 사회와 인도인을 이해하는 기초자료로 이용되어왔으며, 특히 카스트 제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고 카스트 체제를 더욱 공고한 것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1871년 센서스 보고서는 영국 정부가 직접 통치를 실시한 초기 관료들의 카스트와 민족 집단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전 인도에 적용되는 단일화된 구분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카스트라는 카테고리를 이용해 인도의 인구를 분류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1871년 보고서는 힌두(Hindoo)라는 큰 범주 안에 기원상으로 힌두였던 다양한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으나, 동시에 무슬림과 부족민들은 별도의 범주로 보고하였다. 또한 힌두 카테고리 이하에는 여러 자띠나 부족의 이름이 포함됨을 물론, ‘카스트 특정되지 않음’, ‘알려지지 않은 카스트’ 등의 항목이 발견된다. 센서스 보고서의 저자인 Beverly는 벵갈에서만도 카스트를 특정하지 못한 카스트나 부족 집단은 적어도 천개 이상, 수천 개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카스트라는 구분이 19세기 후반에 어느 정도 일반적인 것이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881년 센서스는 이후의 조사에서 기준이 될 만한 인구의 범주화를 시도하였고, 이는 카스트, 종교, 직업 부분에서 특히 그렇다. 또한 지역적 지식(local knowledge)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어 주별, 지역별로 카스트 제도는 상당한 지역적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1881년 센서스에서는 전체 힌두 인구를 브라만(Brahman), 라즈뿌뜨(Rajput), 기타 카스트(Other Castes)로 크게 구분하였으며, 카스트를 직업구분에 준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또한 몇몇 카스트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씨족이나 가족의 이름을 카스트 이름으로 기재하거나, 벵갈리(Bengalees), 힌두스타니(Hindoostanees), 뻔자비(Punjabees)와 같이 지역이나 언어적 정체성이 카스트 이름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또는 직업의 이름으로 자신들을 표현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와 같은 혼란은 카스트라는 개념이 인도 전역, 인도 인구 전체를 아우르는 사회제도도 아니었고, 모든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을 카스트로 범주화하지도 않았으며, 따라서 카스트라는 정체성이 보편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1867년 이래 카스트의 수가 27.7% 급증한 사실이나 부족의 수가 완만하게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도인들이 ‘카스트화’되고 있다는 증거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1891년 센서스는 인구뿐 아니라 각 지방의 지리적 특성과 인구의 지리적 분포를 세밀하게 조사 기록함으로써 각 지역 인구의 경제적 효용성을 측정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고 생각된다. 동 보고서는 제 5장의 “민족지적 분포”에서 카스트를 주로 다루고 있는데, "카스트 정신"이라는 어휘를 사용하며 카스트에 담긴 종교적 의미를 부각시킨다. 이 때 종교란 도덕이나 정신이라기보다는 예식과 의례를 의미하는 것이며, 따라서 사회적 관계, 위계, 직업에 종교적 권위가 개입하며 세습적인 특질로 만들어 창의성과 독창성을 억누르는 결과를 빚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논의는 결국 “카스트와 민족의 양립불가능성”에 대한 주장으로 이어지는데, 카스트에 대한 민족주의적 시각에 단초를 부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1891년 보고서는 카스트의 성립에 대한 역사적 고찰로서 아리아인의 이동과 인도아대륙 정착 과정을 인종주의적 입장에서 서술함으로써 카스트와 인종을 연결시켰던 당대의 담론을 형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01년 센서스는 그 보고서가 양적으로 증가하고 형질인류학적 조사와 연구 성과가 대거 반영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형질인류학적 조사에 근거하여 유럽인과 같은 인종으로 분류되는 북인도의 힌두들과 오스트랄로이드 또는 불명확한 기원의 종족인 드라비다인을 완전히 다른 집단으로 분리하였다. 또한 인종간의 차이는 차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리아인과 선주민간의 우열 구분과 지배-종속의 역사로 이어지며, 이는 다시 카스트를 구분하는 기본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생체적 특징은 카스트의 집단적 특징으로 연결되므로 사회적 신분에 따라 상이한 신체조건을 갖는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카스트의 구분이 1891년 센서스와는 달리 브라만을 정점으로 하는 의례상의 정과 부정의 순위로 형성되었다는 점과 카스트 제도는 인도 전역을 규정하고 있다고 상정한 것도 20세기 센서스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점이다. 촌락에서의 관습을 실증적으로 연구한 인류학적 지식의 확대와 이러한 현지 조사가 식민 정부의 인도 식민지 이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준다. 1911년과 1921년의 센서스는 전체적인 구성과 조사관들의 태도가 이전과 비슷하게 유지되는 가운데, 카스트 항목의 조사와 보고는 양적으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또한 카스트의 분류에 있어서 1901년 센서스보다 종교적, 의례적 의미를 더 많이 개입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즉, 1891년까지의 센서스에서 직능 중심의 구분을 했다면 1901년 센서스에서 처음으로 종교적 의미에 의한 높고 낮음에 의해 카스트의 대구분을 했고, 1921년 센서스에서는 지역별로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고전적 의미의 바르나 구분에 상당히 가까운 형식의 대구분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각 자띠의 이름과 인구수에 의한 크기별 분석도 이전보다 정교화되고 지역적으로 특화되었다. 인도 사회와 인구가 제국주의적 시각을 통하여 체계화되는 센서스 조사와 보고 작업에서 인도의 특정 계층에 국한되는 전통 지식이 왜곡되어 식민 지식으로 자리 잡은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931년 센서스는 카스트에 대한 조사와 보고가 이루어진 마지막 센서스이다. 이전까지의 카스트 조사에 대한 비판점에 대한 인식 역시 나타난다. 카스트에 대한 조사가 편협한 지식을 담고 있다는 점과 센서스 조사가 카스트를 영속화시킨다는 비판은 대표적인 것이다. 10년마다 행해진 센서스에서 카스트의 위상이 변화해 온 궤적을 통찰한다면, 사회의 일반적인 범주가 결코 아니었던 카스트가 오히려 센서스 조사에 의해 일반화되었던 상황을 읽을 수 있다. 여기에 각각의 카스트에 대한 상, 하 위계질서, 특히 의례적인 정과 부정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던 것 역시 카스트 조사가 가져온 결과였다. 카스트 조사와 기록에 대한 반감은 특히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점점 커졌고, 1930년대부터 보다 강력해진 민족주의 운동은 결국 1941년에 시행될 다음번 센서스에서 카스트 조사를 폐지시키기에 이르렀다. 19세기 중반 인도에 대한 직접통치를 시작한 영국 식민정부는 행정상, 통치상의 필요에 의해 전국적 규모의 인구조사를 기획했고, 이때 카스트는 ‘인도를 이해하는 사회학적 열쇠’로서 중요성이 부과되어 전 인구를 범주화시키는 주요 분류기준으로 적용되었다. 그러나 센서스 보고서에 의하면 카스트가 원래부터 인도 사회를 규정하는 규율이었는가 하는 점은 의심스럽다. 오히려 센서스 조사와 함께 카스트는 사회 제도로서 카스트 밖에 위치하던 많은 인도인, 특히 부족민들에게 부과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원래 카스트를 직능집단으로 인식하던 식민정부는 결국 카스트의 종교적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고 브라만 집단이 고집하던 카스트의 이미지를 식민지식으로 고착화함으로써 현대 인도 사회에서 극단화되고 있는 카스트 위계의 모순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