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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주(商周)시대 인문(人文) 사조(思潮)에 있어서 말하기와 글쓰기의 연원과 형성 고찰
A study on the origin and form of speaking and writing in the trend of the Shang(商)and Zhou(周) dynasty`s human civilization in China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신진연구자지원사업& #40;인문사회& #41;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4S1A5A8019671
선정년도 2014 년
연구기간 1 년 (2014년 05월 01일 ~ 2015년 04월 30일)
연구책임자 문승용
연구수행기관 사이버한국외국어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인류는 지난 수백만 년 동안 사회를 이루고 문화와 문명을 일구며 살아왔다. 이처럼 인류가 이 땅에서 문화와 문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말을 하고 자신들이 보고 듣고 사유한 것을 문자로 적어 지식을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언어와 문자는 인간의 역사 문화와 가장 가까이 호흡하며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근자에 문학ㆍ역사ㆍ철학으로 대표되는 인문학이 위기라는 우려 속에서도 사회와 학계의 관심과 성원으로 말미암아 작으나마 인문학이 붐을 이루고 있는데, 인문학 연구에 바탕을 이루는 연구 분야는 역시 언어학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중국 인문학 연구에 있어서 중국어와 한자의 연구는 매우 깊은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류문명의 시작을 열었던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등의 다른 문명들이 오늘날 이미 거의 단절된 상태로 인류의 문화유산 정도로만 남아 있지만, 중국의 경우에는 고대 문명이 오늘날까지 그 명맥이 면면이 이어오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점은 오늘날 중국학 연구에 있어서도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한자(漢字)는 고대로부터 오늘날까지도 중국과 중국인들의 고유한 문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자는 표의문자(表意文字)로서 고안될 당시 중국에 살고 있던 인류 사유방식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한자가 만들어진 원리와 변화 발전의 양상을 잘 살펴보면 중국 문화의 근원은 물론 그 흐름의 대강을 파악하는 데에 관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 문명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코드는 단연 한자(漢字)문화라고 할 수 있으며, 한자 문화가 싹트고 중국 문화의 원형이 형성된 시기는 상(商: B.C.1600~B.C. 1046)과 주(周: B.C. 1046∼B.C. 771)나라 때이다. 상나라는 성읍(城邑)국가의 형태를 띠기는 하였지만, 고대 중국에서 최초로 청동기를 근간으로 발전하였고, 한자의 원형이 되는 갑골문자(甲骨文字)를 고안해서 썼던 만큼 중국 역사에서 왕조국가의 체제를 비로소 갖추었다. 주나라는 앞선 상나라의 비인문적(非人文的)인 요소를 떨어버리고 인간 중심의 사회질서 체계로서 봉건제(封建制)적인 종법제(宗法制)를 근간으로 하는 봉건제도(封建制度)를 세웠으며, 주나라 후반기인 춘추전국시대에는 제자백가의 학술사상가들이 나와서 중국 사상의 황금시기를 열었던 때이다. 그래서 이 시기를 이른바 인간문화가 중심이 되는 인문의 시대가 비로소 열렸다고 일컫는 것이다.
    본래 인문학이란 문학, 역사, 철학을 중심으로 인간과 인간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현상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을 가리키며, 서구 문예부흥기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중세의 기독교적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문화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인간성을 회복하려던 정신운동을 인문주의(humanism)라고 일컫는데, 중국의 주(周)나라 역시 신정(神政)정치를 펼쳤던 상(商)나라와는 달리 정치의 주체를 하늘의 상제(上帝)로부터 인간에게로 옮겨온 시대로서 이 시대는 인간이 세상 사물을 보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사유를 하며, 또 자신의 생각을 말과 글을 통해서 표출하기 시작하였던 시대라고 할 수 있으니, 이 시대야말로 고대 중국에서 인문사조가 비로소 움트던 때라고 할 수 있다.
    주(周)나라 이후 인문사조가 열리면서 언어[名]를 통해서 현상으로 드러나 보이는 실질[實] 혹은 형상[形]을 지배하는 정치적인 구조가 형상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일찍이『관자(管子)ㆍ구수(九守)』편에서 “이름을 닦아 실질을 살피고, 실질에 의거하여 이름을 정한다. 이름과 실질은 서로 보완되는 것이다.(修名而督實, 按實而定名, 名實相生.)” 戴望 著,『管子校正-諸子集成 五』, 北京, 中華書局, 1986, p.302.
    라고 하였고, 공자(孔子)가 정치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우선해야 할 것으로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않고, 말이 순조롭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名不正, 則言不順.)” 朱熹 撰,『論語集注-四書章句』, 北京, 中華書局, 1995, p.142
    이라고 한 정명론(正名論) 등 한 대(漢代)이래 유지되어 오던 유가와 한자 문화 체계가 근대 5`4운동 시기 신문화운동 이후 흐트러지기까지 중국의 역사에서는 늘 언어와 문자를 중심으로 한 문화요소가 정치적인 지배논리를 펴기 위한 명분(名分)으로 작용하여 왔다.
    그러므로 본 연구를 통해서 중국 상고시대에 해당되는 상주(商周)시대 당시의 언어와 문자가 어떻게 연원하여 형성되고 발전하였는지를 연구하는 것은 오늘날 중국학 연구의 초석이 되는 것이며, 과거로부터 면면이 흘러내려온 지금의 중국을 이해하는 근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기대효과
  • 오늘날 중국은 정치와 경제 방면에서 세계 최강국을 향해 한창 매진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장 가까울 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화 방면에 있어서도 이제껏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지난 세기 서구 근대화의 압박과 동서냉전의 시기에 이념의 장벽이 우리나라와 중국을 가로막고 있었던 적도 있었지만, 오늘날 우리나라와 중국의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앞으로도 이와 같은 한중 관계는 각자에게 매우 중요하게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도 중국의 안정적인 발전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으니, 오늘날 중국학 연구는 중국의 시사분야에 집중해야 하는 것 역시 매우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오늘의 중국은 물론 이른바 문명고국(文明古國)을 자부하는 중국의 과거를 이해하는 것 역시 앞으로 우리나라와 중국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에도 매우 중대한 작용을 할 수 있다.
    중국만큼 많은 인구에다가 다양한 소수민족들이 함께 어울려서 오랜 기간 동안 동일한 국가 체제를 유지해 온 나라는 아마도 없을 듯하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될 수 있었다는 것이 중국의 역사를 두고 볼 때,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를 평가하는 것은 일단 접어두고, 지난 수천 년 동안 중국은 넓은 국토 면적에 이질적인 소수민족들과 많은 방언들로 말미암아 분열될 수도 있었지만, 한자의 독특한 특성 덕택에 여러 차례의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중국의 문화와 문명은 지난 5,000여년 동안의 명맥을 이어왔으며, 이번 연구 과제는 그러한 중국 문화와 문명의 뿌리와도 같은 시기의 문화 현상을 언어와 문자의 연구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지난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때 여러 행사활동 가운데, 죽간(竹簡)을 든 유학자(儒學者), 한자(漢字)로 된 활자, 비단, 만리장성 등 고대 중국의 찬란한 문화를 대표할 만한 것들을 내세웠던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처럼 중국은 정치경제적으로는 패권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문화적인 방면에서는 늘 최고였다는 자부심을 포기한 적은 없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도 본 연구의 시대 배경이 되는 상주(商周)시대는 중국 문화의 고향과도 같은 시기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중국은 다른 문명국들과는 달리 상형문자(象形文字)의 표의문자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난 수천 년 동안의 왕조국가 체제를 유지해 왔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으로 말미암아 20세기 초 중국의 근대화 시기 중국의 역사에 있어서 중국의 정체된 역사를 순환하여 반복해 왔던 원인을 한자(漢字)와 유가(儒家)사상이라 하였고, 이후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로 거듭 나면서 한자와 유가사상 등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그런데 근자에 중국이 폭발적인 경제발전을 바탕으로 다시 한 번 세계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하고자 하면서 세계 각지에 중국 문화를 소개하는 첨병으로 공자학원을 설치하는 등 그들의 전통적인 사상인 유가와 한자 문화를 내세우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과 같은 근대 시민사회의 시대이념과 상반되는 것으로 일단 매우 모순되는 것이기도 한데, 그러한 연원으로서 중국 상고시대 상(商)나라 때 문자가 탄생하고, 주(周)나라 때의 언어를 중심으로 한 중국적 문화현상을 잘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며, 이것을 통해서 전통적인 한자 문화권에서 살아온 중국이나 우리나라가 서구로부터 이식 받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어떤 삶을 누릴 것인가 하는 거울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본 연구는 고대 중국의 상주(商周)시대 인문주의 사조와 언어와 문자의 상관관계를 알아보는 것을 통해서 드러난 당시 어떤 양상으로 발전되어 갔는지 알아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이번 연구에서 지나치면 안 될 부문이 상고시대 중국의 언어와 문자 연구가 우리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한 방편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와 중국이 가장 가까운 이웃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동북공정(東北工程)과 같은 역사 문화 방면의 충돌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와 여러 방면에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온 만큼 중국 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는 곧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해서 이번 중국 문화의 뿌리와 역사의 연원인 상주(商周)시대의 말하고 글쓰기와 관련된 이모조모를 살펴봄으로써 중국에 관한 새로운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 연구요약
  •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근원적인 다른 것은, 인간만이 언어와 문자를 구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중국에서 왕조 국가가 성립하게 되는 과정에서 언어와 문자가 과연 어떤 작용을 하였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고대 중국문명의 문화사적인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상(商)대 갑골문자는 오늘날 한자(漢字)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날과 같이 당시의 문자는 보통 사람들의 의사소통의 도구로 고안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갑골문자는 일종의 신성문자(神聖文字, hierogram)로서 당시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신정(神政) 통치를 하던 왕조의 통치자들이 하늘의 상제(上帝)와 소통하여 자신들의 정치적인 통치권위를 인정받기 위한 점복(占卜)의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한대(漢代)에 허신(許愼)도『설문해자(說文解字)』의 서문에서 “문자는, 제왕의 조정에서 그것을 가지고 정치교화를 펴고, 도덕교화를 밝히는 것이다.(文者, 宣敎明化於王者朝廷)” 許愼 撰, 淸 段玉裁 注,『說文解字注』, 臺北, 黎明文化事業股份有限公司. 19??, p.429
    라고 하였던 것처럼, 문자는 일찍이 고대 중국에서 정치교화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효용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고안되었던 것이다.
    상(商)나라를 멸하고 들어선 주(周)나라는 상제(上帝)를 하늘[天]로 교체하고 그로부터 그들 왕조의 정통성을 위임 받아서 나라를 통치하고자 하였다. 특히 주나라의 후반기인 춘추전국시대는 사회가 좀 더 극렬하게 분열하고 갈등하는 양상이 거듭되던 때로서 수많은 사상가들이 나와서 우주만물의 원리와 더불어 인간 삶에 대한 그들의 사상과 주장을 말하기와 글쓰기를 통해서 세상에 전파하고자 하여 각 제후들에게 자신의 학술과 정치 이상을 설파하기 위하여 온갖 수사법(修辭法)을 다 동원된 말과 글이 되어야만 하던 때였다.
    공자의『논어(論語)ㆍ술이(述而)』편에 “시서(詩書)와 예(禮)를 행하는 것에는 모두 바르게 말씀하셨다.(子所雅言, 詩書執禮, 皆雅言也.)” 楊伯峻 譯注,『論語譯注』, 北京, 中華書局, 1989, p.71: 전통적으로 朱熹는 이 구절에 역주하기를 雅言을 ‘평소에 하는 말’이라 풀이하였다.
    라고 한 것처럼, 공자는 늘 아언(雅言)이라는 표준어로 말하였다고 하였고, 당시 어지러워진 사회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각기 사회 구성원마다 저마다 부여 받은 이름을 바르게 한다는 의미의 정명(正名)사상을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공자가 말한 당시의 표준어[雅言]는 어떻게 제정되어서 통용되었던 것이며, 고대 중국어에 있어서 문언과 백화의 구분은 언제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이에 반하여, 노자는『도덕경(道德經)』에서 “이름 지을 수 있는 것은 항상 된 이름이 아니다.(名可名非常名.)” 王弼 注, 『諸子集成-老子注』, 北京, 中華書局, 1990, p.20.
    라고 하여서 말로는 세상 만물이나 사정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고 하여 ‘언부진의(言不盡意)’의 논리를 펴서 말과 글의 효용가치에 대하여 회의적인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어서 최초의 통일 왕조 진(秦)나라 건국의 이념적인 바탕이 된 한비자(韓非子)는 극단적인 공리주의(公利主義)를 전제로 말을 하고 글을 쓰는 것조차 군주 통치 수단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법가를 채택하여 부국강병을 이루고 중국에서 최초의 통일왕조국가를 열었다고 할 수 있는 진시황(秦始皇) 역시 통일 사업에 있어서 ‘글 쓰는 데에 문자를 통일해야 한다[書同文字]’는 것이 주요한 정책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처럼 언어문자 정책은 통일정책 가운데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제자백가 사상의 종결자인 법가의 이론저작은 학술과 사상 방면에서뿐만 아니라 형식적인 면에서 언어와 문자를 운영하는 방면에 있어서도 춘추와 전국시대 각 사상가들의 수사의식을 포괄하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으며,『한비자』에 나타난 수사의식을 궁구하는 것 역시 매우 가치 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의 첫 단계는 중국 최초의 문자인 상(商)나라의 갑골문자가 어떻게 국가 통치의 수단의 역할을 하였는지를 알아보고, 다음으로 인문시대를 열었다고 할 수 있는 주나라의 후반기인 춘추전국시기에 제자백가들이 그들의 학술사상과 이론저작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말하기와 글쓰기에 있어서 어떤 수사학적 이론들을 활용하였는지, 그리고 전국시대 말기 그들 제자백가의 사상을 종결하여 통일 왕조를 이루는 기틀을 세운 한비자의 법가사상에 나타난 수사학적 이론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즉 중국의 고대 왕조인 상주(商周)시대의 전적(典籍)에 나타난 말하기와 글쓰기의 연원과 형성의 과정을 인문사회적인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하였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원시 인류들이 일정한 소리를 내고 이것에 자연스러운 약속이 이루어지면서 인류의 언어가 차츰 형성되었고, 이로부터 인류는 생존하고 문화와 문명을 일구며 오늘날과 같은 과학문명의 시대까지 발전하는 데에 언어와 문자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인류의 언어가 낮은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거듭 발전하여 오늘날과 같이 정밀한 언어체계를 갖추게 된 것은, 살아가면서 좀 더 복잡한 상황까지도 서로 의사소통해야 하는 일들이 점점 많아졌고, 어떤 특정한 사물이나 관념을 규정하거나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일컫는 작업으로부터 인류의 언어가 거듭 발전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일찍이 상대(商代: 약 B.C.1600년~B.C.1046년)에 거북의 배딱지나 소의 견갑골 등에 문자를 새겨서 표현하는 도구로 쓰기 시작하였고, 언어에 대한 초보적인 인식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周나라 후반기인 春秋時代에 이르러서 諸子百家에 의해서 비롯되었는데, 특히 『周易․繫辭上』에서 “글은 말을 다 나타내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 표현할 수 없다.(書不盡言, 言不盡意.)”라고 한 것처럼, 말로는 말하고자 하는 제 뜻을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해서 인간 언어가 가진 한계성을 제기하였다는 점은 이후 중국의 언어 문자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본고는 고대 중국에서 언어와 문자가 보편화 되면서 학술과 지식 정보가 체계를 갖추고 인간 중심의 문화가 비로소 싹트기 시작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는 춘추전국시대 당시 주요 사상가들 가운데 유가와 도가학파를 중심으로 언어가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의 양상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였다. 일반적으로 선진시기 여러 학파 가운데에서 언어의 부정적인 요소에 대한 인식을 견지한 주류는 도가라고 할 수 있다. 노자는 『도덕경』 1장에서 道가 특정하게 고정된 개념으로 정의될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사물 혹은 개념 역시 고정된 하나의 이름으로 불릴 수 없다는 의미로서 이것이 도가학파 언어부정론의 근원이라고 볼 수 있다. 유가학파의 대표 경전인 『논어』에서도 “予欲無言” “巧言亂德” 등과 같이 언어가 가지는 제약성과 부정적인 요소들을 많이 제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논어』에서 다루고 있는 언어의 제약성에 대한 인식은 도가와는 성격이 다르다. 공자는 “군자는 이름이 바르면 반드시 말할 수 있어야 한다(君子名之必可言也.)”라고 한 것이나.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말을 해야 한다.(有德者必有言.)”라고 하였던 것만 보더라도 『논어』에 나타난 언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오히려 그러한 부정적인 요소와 제약성을 극복하여 언어의 사회적인 작용과 효용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미더우며, 신중하며, 실질적인 내용이 있는 말하기를 실천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내세운 전제조건들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그리고 제자백가의 언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연원은 친자연주의적인 농경문화로 말미암아서 천명이나 천도와 같은 자연물 혹은 그러한 이치에 빗대어서 말하고자 했던 의식과 중국이 지정학적으로 넓은 지역에 많은 방언과 다양한 문화적 요소를 띠고 있어서 표준화된 언어로 통일하기가 어려웠던 이유 때문에 언어보다는 문자가 군주의 통치와 일상의 삶에서 보다 중시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영문
  • Language is the human ability to use complex systems of communication, and Chinese language has a very unique character to be traced back over 3,000 years to the first written records, and even earlier to a hypothetical Sino-Tibetan proto-language. The view of language of Taoism and Confucianism was proposed as long ago as in the year 2000, Spring and Autumn period. Their common denominator was the language`s constraints and negative consciousness. Laozi`s Taodejing said “The Tao we talk about is impermanent, The names we attach to also impermanent.” “he who knows doesn't speak, he who speaks doesn't know.” The Tao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terms in Chinese thought. A name is a word used for identification. But the name of a specific entity sometimes can not be called a proper name. The written characters are not the full exponent of speech, Words cannot completely express ideas, it is a saying from The Book of Changes. This is a beginning of the language negative consciousness in the pre-Qin days. Confucius also said “I would not say anything.” “Clever words disrupt virtue.”, “Like not able to speak.” But his real mean is that “Virtue will always have something to say.” His language negative consciousness is due to Pro-naturalistic farming culture, “Heaven never say anything.” and First character oriented communication culture.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고대 중국에 있어서 언어에 대한 초보적인 인식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周나라 후반기인 春秋時代에 이르러서 諸子百家에 의해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周易․繫辭上』에서는 “글은 말을 다 나타내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 표현할 수 없다.”라고 한 것처럼, 말로는 말하고자 하는 제 뜻을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해서 언어가 가진 제약성을 제기하였다. 본고는 고대 중국에서 언어와 문자가 보편화 되면서 학술과 지식 정보가 체계를 갖추고 인간 중심의 문화가 비로소 싹트기 시작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는 춘추전국시대 당시 주요 사상가들 가운데 유가학파를 중심으로 언어가 제약성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의 연원과 양상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서 당시 문예를 비롯해서 학문이나 언어 문자 등 인간의 인위적인 문명에 대한 부정론을 편 주류는 道家라고 할 수 있는데, 춘추전국시대 유가에 나타난 언어의 제약성에 대한 인식의 양상이 당시 도가의 언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어떻게 다른지 등을 비교하는 것 역시 의의가 있으리라 여겨진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인류만이 가지는 공통된 특징인 언어와 문자의 구사가 형성되는 데에 있어서 고대 중국의 주요 사상관념이라고 할 수 있는 유가와 도가에 대한 영향 관계를 탐구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고대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의 형성에도 깊은 연관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으니, 앞으로도 더욱 폭넓고 깊이 있는 연구가 이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 색인어
  • 선진유가, 언어의 제약성과 부정적 요소, 도가, 이름, 자연친화적인 농경문화, 소통문화
  • 연구성과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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