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삼국시대 연유도기의 조형적 특징과 제작시기
1. 고구려 연유도기의 조형과 제작시기
2. 백제 연유도기의 조형과 제작시기
3. 신라 연유도기의 조형과 제작시기
Ⅲ. 삼국시대 연유도기의 기술적 특징과 계통
1. 고구려의 연유기술과 ...
[목차]
Ⅰ. 머리말
Ⅱ. 삼국시대 연유도기의 조형적 특징과 제작시기
1. 고구려 연유도기의 조형과 제작시기
2. 백제 연유도기의 조형과 제작시기
3. 신라 연유도기의 조형과 제작시기
Ⅲ. 삼국시대 연유도기의 기술적 특징과 계통
1. 고구려의 연유기술과 계통
2. 백제의 연유기술과 계통
3. 신라의 연유기술과 계통
Ⅳ. 연유도기의 성격
Ⅴ. 맺음말
[연구결과 요약]
고구려의 경우 연유도기는 극히 한정된 기종이 확인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盤, 壺, 耳杯, 시루, 솥, 화덕, 四耳長頸壺, 四耳壺 등이 알려져 있다. 이들이 발견되는 곳은 주로 무덤유적으로써 장사를 지내는 용도, 혹은 부장용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도기가 발견되는 지점은 集安의 麻線溝 1호묘, 七星山 96호묘, 禹山下 41호묘, 撫順前屯 및 洼渾木의 무덤군 등과 大同郡 土浦里 大冢 등이다. 이들 지역은 고구려의 수도가 있었던 주변의 무덤들로써 국내성시대와 427년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이후에도 연유도기가 제작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증거가 된다. 현재까지의 예로 볼 때 고구려의 연유도기는 4~5세기경에 집중적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연유도기는 주로 사비기에 집중 생산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사비기에 생산된 연유도기의 기종으로는 器台, 長頸甁, 잔과 盞托, 臺付碗, 壺, 벼루, 서까래기와, 불상 등이 있으며 부여와 익산, 나주 등 사비시대의 수도나 중심도시에서 확인되고 있다. 연유도기가 발견되는 유적의 성격은 백제의 왕실관련 건물지나 사찰, 거점지역의 무덤 등으로 최상위층이 소비대상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사비기는 538년~660년 사이로 이 시기는 중국도자의 수입이 활발해지고 한쪽에서는 수입대체품으로써 중국자기를 번안한 토기들이 생산되고 있었다. 시기적으로 보면 고구려보다 1세기 늦은 시점에 왕성한 연유도기를 생산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 연유도기는 현재까지 지방 분묘와 경주 나정에서 출토된 예가 알려져 있다. 출토 기종으로는 고배, 대부완, 대부발, 장경호, 뚜껑, 기대 등이며 특이한 것은 초기 印花文이 시문되어 있다는 점이다. 인화문의 소재는 음각의 삼각집선문과 인화의 이중원문을 결합한 문양, 순수한 인화기법의 圓文류와 花文 등이 표현되었으며 당시에 제작되었던 無釉의 신라도기와 유사한 형태를 지닌다. 신라에서 연유도기가 제작된 시점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적은 편이지만, 기형의 양식과 문양의 변천과정으로 파악할 때 연유도기의 제작시점은 7세기 1/4분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렇게 본다면 신라의 연유도기 생산시점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늦은 시점에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연유기술을 전해주었던 나라도 이들 국가와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의 연유도기는 황록색, 황갈색의 연유가 시유되어 있는 것들이 포함되어 다. 현재 알려진 연유도기의 유물관찰 결과 전면시유가 아닌 부분시유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전면시유를 할 경우 유약과 가마의 바닥이 들러붙어 불량이 발생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연유의 유색이 황록, 황갈색을 띠는 이유는 정색제로 사용된 금속산화물질의 핵심이 산화철(Fe2O3)이었기 때문이다. 산화철은 자연에서 채취할 수 있는 가장 흔한 발색제로 번조방식에 따라 여러 가지 색을 보인다. 고구려의 연유도기들은 가마에 도기를 재임한 후 번조하는 과정에서 산화염으로 번조한 듯하다. 연유기술은 고구려가 독자적으로 습득한 기술이 아니었다. 고구려의 외교관계는 북조, 남조를 가리지 않으나 당시 중국의 연유기술은 北朝계열의 왕조였다. 고구려와 외교관계를 갖고 있었던 나라는 北魏였으므로 漢代의 도자문화를 계승하고 있던 북위의 연유기술이 고구려에 접목되었다고 판단된다.
백제의 연유도기는 녹유계통으로 산화동을 정색제로 활용한 것이다. 백제는 전통적으로 중국 남북조시대의 남조계통 왕조들과 교류를 하였다. 그러나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의 인물도용, 부여와 익산에서 발견된 첩화기법에 의한 청자항아리편 등은 중국의 북조와의 관련성을 추측하게 해주며 시간상으로 볼 때 북제, 북주와 같은 곳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의 연유도기는 황갈색조를 띠는 경우가 많아 정색제로 산화철(Fe2O3)을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는 진평왕 43년(621)부터 당에 꾸준히 사신을 보내 조공하면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였다. 신라말기에 보이는 연유도기들은 이 시점에 받아들인 새로운 시유기술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연구결과 활용방안]
1. 학부, 대학원 수업과정의 자료 활용
2. 삼국시대 도기발달사의 공백부분 해결
3. 추가적인 파생연구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