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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학의 經世사상 연구 -양명학의 형성과 분화의 정치문화사적 함의를 중심으로-
A Study on the governing thought of Yang-ming Studies -focusing on the politico-culture historical implication of the formation and differentiation of Yang-ming Studies-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학문후속세대양성_학술연구교수& #40;인문사회& #41;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4S1A5B5A02010934
선정년도 2014 년
연구기간 3 년 (2014년 07월 01일 ~ 2017년 06월 30일)
연구책임자 한정길
연구수행기관 대진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연구목적>
    본 연구는 양명학에서 제시하는 經世 원리와 다양한 경세 방안들을 그 주요 이론과의 연관 속에서 고찰함으로써 양명학적 경세사상의 특성을 규명하고, 명대 양명학의 형성과 분화 과정에 나타난 정치문화사적 함의를 탐색함과 아울러 양명학의 경세사상이 동아시아의 정치와 사회문화에 끼친 영향과 의의를 밝히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연구의 필요성>
    1) 내성 방면에 편중된 기존 양명학 연구의 한계 극복: 유학은 內聖外王을 지향하는 학문이다. 양명학도 내성외왕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해왔다. 이 점은 王守仁만이 아니라 양명후학들에게서도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양명학의 근본 취지와 전체 규모 및 그 전개 양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인이 되는 공부 방법만이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는 경세의 방법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양명학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는 주로 ‘內聖’ 방면에 편중되어 있다. 이러한 기존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고 양명학에 대한 균형 있는 시각을 갖기 위해서는 양명학을 경세의 측면에서 읽어낼 필요가 있다.
    2) 양명학의 분화를 경세사상의 관점에서 재조명: 양명 사후에 그 후학들은 공부론에 대한 이해의 차이로 인하여 다양하게 분화된다. 그런데 그들의 공부론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는 경세의 방법에 대한 상이한 이해가 함축되어 있다. 그렇다면 양명후학의 분화를 공부론만이 아니라, 경세사상의 관점에서도 조명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양명학의 분화를 경세사상의 측면에서 조명하는 본 연구를 통하여 지금까지 본체와 공부의 문제를 중심으로 양명후학의 분화를 설명해 왔던 기존 연구가 얼마나 적절한지도 재검토 할 수 있을 것이다. 왕수인이 경세방면에서 일으킨 변혁이 명대 中後期의 정치․사회․문화의 전 영역에 걸쳐서 다양하게 확산되는 양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양명학의 경세사상에 관한 연구는 필수적이다.
    3) 주자학과 대비되는 양명학적 경세사상의 특성 규명: 주자학과 양명학은 경세의 기본원리와 구체적인 방안에서 서로 대립과 갈등을 일으킨다. 이러한 대립과 갈등은 구체적인 정치 사안에 대한 해법을 둘러싸고 전개될 뿐만 아니라, 역사 전개 과정에서 시대의 思潮를 바꾸는 양상으로도 나타난다. 명대 중기 이후에 학술 사조가 주자학으로부터 양명학으로 전환되고, 그 이후 양명학이 명대 학문의 주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양명학이 경세사상 방면에서 일으킨 혁명적인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자학과 구분되는 양명학적 경세사상의 특성은 아직 뚜렷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이를 위해서는 양명학의 기초 이론들을 경세의 측면에서 읽어낼 필요가 있다.
    4) 조선양명학의 양명우파적 특성 이해: 조선양명학은 양명우파적 성격을 띠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조선과 명대의 정치환경의 차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명대의 정치는 사대부가 군주를 통해서 유가의 왕도정치를 구현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양명학은 그러한 정치상황에서 군주에 의지하지 않고도 왕도를 실행할 수 있는 새로운 통로를 찾았고, 그로 인하여 크게 유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경연이나 언관제도 등이 활성화됨으로써 군주를 성인군주로 만들 수 있는 길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러한 정치 환경에서는 양명학이 크게 유행하기 어렵다. 평민대중을 각성시키는 방식으로 道를 구현하는 것이 불필요했기 때문이다. 본 연구를 통하여 조선의 양명학자들이 양명우파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 이유를 보다 분명하게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5) 양명학이 동아시아의 정치․사회사상사에 끼친 영향과 그 원동력 규명: 양명학의 경세사상은 양명학을 수용한 동아시아 사상가들에 의해서 창조적으로 계승된다. 그들은 동아시아의 근현대사만이 아니라, 전근대사에서도 시대를 진단하고 처방하는 논리와 방법을 양명학에서 찾았다. 이것은 시대의 변화에 주체적․능동적․집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이 양명학에 있었기 때문이다. 본 연구를 통해서 양명학이 경세방면에서 발휘한 그 힘의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보다 명확하게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 기대효과
  • 1) 명대 중후기 양명학의 전개와 분화를 설명하는 새로운 시각 제시: 양명학의 형성과 분화를 경세사상의 측면에서 조명하려는 본 연구는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시각에서 양명학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이 연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다면 그 토대위에서 본 연구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다른 양명후학들에게까지 그 연구를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2) 양명학 연구의 편향된 시각 교정: 기존 양명학 연구는 대부분 ‘內聖 방면 연구’와 ‘태주학파 연구’에 편중되어 있다. 양명학 연구가 ‘내성’ 방면에 치우치게 된 까닭은 일차적으로 양명학 자체가 일체의 문제를 마음으로 환원해서 해결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본 연구를 통하여 양명학의 근본취지가 경세 방면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내성 방면으로 편향된 시각을 교정하고 양명학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를 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편 양명후학에 관한 기존 연구는 대부분 태주학파에 편향되어 있다. 거기에는 태주학파에게서 ‘근대성’을 읽어내려는 연구가들의 주관적인 의도가 다분히 스며들어 있다. 이제는 근대의 시선에서 양명학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객관적 사실에 부합하는가를 냉철하게 살펴야 한다. 태주학파만이 아니라 양명학의 정통으로 평가받는 강우학파에게도 유의미한 경세사상이 있음을 밝히는 본 연구를 통하여 태주학파로 편향된 연구시각을 교정하고, 그 연구 대상도 다른 양명학파에로까지 확대시킬 수 있을 것이다.
    3) 양명학적 경세사상의 의의와 한계 규명: 양명학에서는 ‘내 마음의 양지[吾心良知]’를 중시한다. 즉 ‘내 마음’이라는 개체성을 떠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내 마음의 양지’에 기반한 양명학의 경세사상은 개체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며, 그것은 개체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결과를 가지고 올 수 있다. 본 연구는 양명학이 어떻게 개체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긍정함으로써 근대적 인간관에 접근하고 있는지, 또 그 문제점은 무엇인지를 규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4) 조선양명학의 양명우파적 성격 이해에 기여: 정치문화사적 측면에서 양명학의 경세사상을 조명하는 본 연구는 조선양명학의 양명우파적 성격을 이해하는데도 기여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양명학이 ‘覺民行道’의 노선으로 전개되지 않은 이유를 보다 쉽게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이다.
    5) 양명학과 조선후기 실학의 연관성 이해: 본 연구의 예비조사에서 강우학파 양명학자 가운데 나홍선은 그 친민활동을 경세치용의 사업으로 전개시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점은 양명학과 조선후기 실학의 연관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정치문화에서 양명학은 관료지식인들을 통해서는 그 빛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조선양명학의 전개 양상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재야 양명학자들이 민중을 각성시키는 운동을 펼치는 대신, 백성의 민생을 살피는 친민 활동을 어떻게 전개해나가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조선양명학은 조선후기 실학과 만날 가능성이 있다. 본 연구는 바로 조선양명학과 조선후기 실학의 통로를 열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6) 조선양명학자의 발굴에 기여: 양명학적 경세사상의 특징을 탐색하는 본 연구는 조선사상가들 가운데 양명학의 영향을 받은 인물들을 새로 발굴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양명학은 조선에서 이단으로 간주된 바 있다. 이러한 학술풍토에서는 양명학을 익혔더라도 그것을 학술적으로 표현해내기는 어려웠다. 이 때문에 학술자료만으로는 양명학자를 찾아내는 데 어려움이 있다. 조선양명학자들을 발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을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경세사상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양명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것을 비록 학술적으로 표현해내지는 못했을 지라도, 경세방면으로는 표현해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 연구를 통하여 양명학적 경세사상의 특성이 드러난다면, 그것을 준거로 삼아 조선학자들의 경세사상을 고찰하여 조선양명학자들을 새롭게 발굴할 수 있을 것이다.
  • 연구요약
  • 1) 양명학 형성 과정과 治道의 새로운 발견
    왕수인의 경세사상은 당시의 정치 환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명대의 정치는 황제권이 강화되고 환관 중심의 정치가 이루어졌으며, 억지로 徵召된 선비가 그 부름에 항거할 수 없었고, 이미 벼슬한 선비도 존중하지 않아서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처형을 면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정치 환경은 양명으로 하여금 왕도를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게 한 정치문화적 배경이 되고 있다.
    ‘龍場悟道’로 불리는 왕수인의 깨달음은 성인이 되는 방법에서만이 아니라 경세 방면에서도 획기적인 변화를 가지고 왔다. ‘仁心眞體’의 자각을 통하여 ‘親民’의 仁政을 베풀 수 있는 ‘親民行道’의 길이 처음으로 마련되었다. 그리고 성인이 되기 위하여 외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할 필요 없이 자기 본성만으로 충분하다는 자각은 일반인들을 더욱 쉽게 聖學으로 끌어들일 수 있게 했다. 이것은 왕도를 실현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민중의 마음을 직접 각성시킴으로써 왕도를 실천하는 길, 이른바 ‘覺民行道’의 노선이 양명에 의해서 비로소 열리게 된 것이다. 양명후학, 특히 태주학파는 양명이 개척한 이 길을 따라 자신들의 강학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이들의 활동을 통해서 민중 개개인이 聖學을 탐구하는 주체일 뿐만 아니라, 도를 구현하는 정치 주체로 등장하게 된다.

    2) 양명학 주요 이론들의 경세사상적 함의
    용장오도 이후에 전개되는 양명의 모든 이론적․실천적 활동은 모두 세상에 대한 우환의식과 구세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양명학의 주요 이론들, 즉 ‘심즉리’․‘지행합일’․‘천지만물일체’․‘치양지’․‘사상마련’ 등은 그의 경세사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여기에서는 양명학의 주요이론들이 경세사상의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음을 밝힐 것이다.

    3) 양명학의 경세 방안
    왕수인이 경세방면에서 일으킨 가장 큰 변혁은 出處를 막론하고 자기가 현재 처한 곳을 왕도정치를 구현하는 경세의 장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왕수인은 강학 활동과 대민 활동을 통하여 ‘親民行道’와 ‘覺民行道’의 노선을 구체화시킬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경세원리를 정치․경제․사회․교육․예법․군사 등의 다양한 방면에 발휘한다. 본 연구에서는 왕수인의 ‘親民’과 ‘覺民’의 활동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무에 직면하여 제출한 경세방안들을 분석함으로써 그 특성을 밝힐 것이다.

    4) 江右學派 관료 지식인 양명학자들의 ‘親民’과 ‘格君行道’의 경세사상
    양명학의 경세사상에서 왕도정치의 실현은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전개된다. 첫째는 ‘親民’활동이고, 둘째는 ‘覺民’활동이며, 셋째는 ‘格君’활동이다. 이 연구에서는 ‘격군’과 ‘친민’ 활동을 활발히 개진한 강우학파의 대표적인 在朝 양명학자인 鄒守益, 歐陽德, 羅洪先의 경세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格君行道’ 혹은 ‘得君行道’의 노선은 유가 경세사상에서 도를 현실정치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이들이 따랐던 전통적인 방식이다. 임금을 道로 인도하기 어려운 정치 환경에서 강우학파의 在朝 양명학자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정치적인 이상을 구현하고자 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고난과 좌절을 겪는지를 탐색할 것이다. 그리고 양명을 통해서 내려오는 ‘친민’의 경세원리가 그들의 대민활동에 어떻게 표출되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5) 泰州學派 양명학자의 ‘覺民行道’의 경세사상
    양명학의 경세사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왕간과 태주학파에 의해 전개된 ‘覺民行道’의 활동이다. ‘覺民行道’의 길을 왕수인이 열어놓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 길을 확장하고 몸소 실천한 인물은 王艮이다. 이 연구에서는 왕간이 ‘각민행도’의 길을 확장하기 위해서 펼친 이론적 장치와 그 실천적 활동은 무엇인지를 고찰할 것이다. 그리고 왕간이 개척한 길을 따라 걷고 있는 그 후예들의 활동을 羅汝芳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하여 태주학파 ‘각민행도’의 경세사상이 지니고 있는 사상사적 의의와 문제점을 점검해보고자 한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양명학의 經世사상 연구
    -양명학의 형성과 분화의 정치문화사적 함의를 중심으로-

    본 연구는 양명학에서 제시하는 經世 원리와 다양한 경세 방안들을 그 주요 이론과의 연관 속에서 고찰함으로써 양명학적 경세사상의 특성을 규명하고, 명대 양명학의 형성과 분화 과정에 나타난 정치문화사적 함의를 탐색함과 아울러 양명학의 경세사상이 동아시아의 정치와 사회문화에 끼친 영향과 의의를 밝히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제1차년도 연구: 王守仁의 경세사상 -‘治道’의 새로운 발견과 그 이론화 및 실천을 중심으로 ->
    왕양명이 경세방면에서 일으킨 변혁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이론화하고 실천하는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왕양명은 어려서부터 성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만이 아니라,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전제군주제 하에서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이상을 지닌 사대부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임금을 얻어 왕도를 시행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은 적어도 군신간의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정치문화를 전제로 해서야 실현 가능하다. 그러나 명대는 황제권이 강화되고 신권이 약화됨으로써 사대부가 군주를 통하여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기 어려운 정치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문화는 양명으로 하여금 ‘得君行道’ 이외에 다른 노선을 탐색하도록 하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양명의 ‘龍場悟道’는 성인이 되는 방법에서만이 아니라 경세의 방법에서도 혁명적인 변화를 가지고 왔다. 바로 ‘親民行道’와 ‘覺民行道’의 길이 마련된 것이다. 양명이 용장에서 깨우친 道의 실질 내용은 ‘仁心眞體’이다. 이 마음을 백성에게 베푸는 것이 바로 ‘親民行道’이다. 그리고 일반 대중 개개인의 양지를 각성시킴으로써 도를 실행하는 ‘覺民行道’의 방법이 양명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된다. 그 뒤로 양명학에서는 ‘親民’·‘覺民’·‘得君’의 이 세 가지 '도를 실천하는[行道]' 방법이 함께 유행하게 된다.
    용장오도 이후에 전개된 양명의 모든 이론적·실천적 활동은 모두 세상에 대한 우환의식과 구세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심즉리’·‘지행합일’·‘천지만물일체’·‘치양지’·‘사상마련’ 등 양명학의 주요이론은 경세사상의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다. ‘심즉리’설은 왕도의 이론적 근거이고, ‘지행합일’설은 당시 士人層의 知行不一致 현상에 대한 비판의식 하에 왕도정치의 구현을 지향하고 있으며, ‘천지만물일체’설은 친민정치의 이론적 근거이고, ‘치양지’설은 수기치인의 통일적 실천방법이며, ‘사상마련’설은 民事에 온 힘을 기울이는 정치행위의 근거가 되고 있다.
    왕수인이 경세사상 방면에서 일으킨 가장 큰 변혁은 出處를 막론하고 자기가 현재 처한 곳을 왕도정치를 구현하는 경세의 장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양명학의 경세원리는 정치·경제·사회·교육·예법·군사 등의 다양한 방면으로 발휘된다. 양명은 ‘四民同道’說을 주장함으로써 民의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고양시켰다. 경제방면에서는 세금 감면과 소금을 운반하는 통로를 개척하여 군자금을 마련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다. 군사방면에서는 도적을 토벌하고 내란을 평정했다. 대민활동으로는 鄕約과 十家牌法 및 保甲制를 시행하였다.

    <제2차년도 연구: 江右學派 官僚 知識人 양명학자들의 ‘親民’과 ‘格君行道’의 경세사상 -鄒守益·歐陽德·羅洪先을 중심으로-」
    왕수인이 경세사상에서 일으킨 변혁이 강우학파의 관료지식인 양명학자들에게 전개되는 양상을 고찰하였다.
    추수익은 ‘戒愼恐懼’의 ‘敬’ 공부를 강조한다. 이것은 경세사상에서 ‘敬事’를 강령으로 삼아 禮治를 중시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는 ‘예’를 ‘양지’와 연계시키는 양명학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구체적인 사회실천과 정치실천을 통하여 예의 현실적 의의를 강조한다. 나아가서 예치를 통하여 군권을 통제함으로써 군신관계를 바로잡고자 하였으며, 평민들을 각성시킴으로써 향촌사회의 예치문화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태주학파의 ‘覺民行道’가 개인의 자유로운 개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개된 것과 대조된다.
    구양덕은 ‘事上磨鍊’ 공부를 중시한다. 이것은 경세사상에서 구체적인 民事에 직면하여 양지를 발휘하는 ‘致知之政’으로 나타난다. 그는 정치와 학문을 통일적으로 이해한다. 민사에서 양지를 실현하는 학문이 바로 ‘致知之政’이자 親民정치라고 보는 것이다. 구양덕은 ‘格君行道’의 유효한 방법으로 經筵을 제시함과 아울러, ‘覺民行道’의 노선을 따라 강학활동과 대민정책을 펼친다. 그가 평민대중보다 지식인들을 일차적인 강학대상으로 삼은 것은 태주학파가 평민대중을 각성의 대상으로 삼아 양명학을 民學으로 전개시킨 것과 대조된다.
    나홍선은 無欲의 主靜 공부를 강조한다. 그는 無欲의 마음을 ‘자기 몸에 베풀고’, ‘백성에게 베풀어’, 궁극적으로 천하를 구제하고자 한다. 나홍선은 ‘득군행도’의 노선을 따라 정치활동을 전개하는 중에 좌절을 겪는 한편, 백성들을 직접 각성의 대상으로 삼는 ‘각민행도’의 노선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그는 친민의 경세원리에 기초한 대민활동과 경세치용의 탐구로 자신의 경세의 뜻을 펼친다.

    <제3차년도 연구: 泰州學派 양명학자들의 ‘覺民行道’의 경세사상 -王艮과 羅汝芳을 중심으로->
    왕수인이 경세사상에서 일으킨 혁명이 王艮과 羅汝芳을 중심으로 한 태주학파에서 전개되는 양상을 살펴보았다.
    왕간은 천지만물이 일체임을 자각하고, 천하를 구제하고자 한다. 그는 개개인이 도덕 주체로 거듭나고, 집집마다 정치를 담당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사회를 만들고자 하였다. 천하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행위주체인 몸을 안정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왕간은 이 安身을 전제로 하는 층위에서 새로운 출처관을 제시한다. 그의 출처관은 ‘出爲帝者師’와 ‘處爲天下萬世之師’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명대의 정치상황에서 ‘군주의 스승이 된다’는 것은 어려웠다. 왕간은 출사하지 않고 민간에 있으면서도 왕도를 시행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다. 그것이 바로 ‘處爲天下萬世之師’이다. 그 길은 바로 ‘覺民’하여 도를 실천함으로써 천하 사람들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 왕간은 이러한 구세방식의 모범을 공자가 ‘修身講學以見於世’한 데서 찾는다. 왕간의 강학은 그 대상과 내용 및 형식에서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다. 먼저 왕간의 강학은 주로 하층민인 민중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강학 형식도 서원이나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중강연과 같은 강회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그 강의 내용은 良知見成이다. 즉 양지가 道이고, 그것은 日用之事를 떠나지 않으므로 일상생활에서 양지의 천리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강학의 목적은 백성이 양지를 계발하여 몸을 보존할 줄 알게 하고, 본심을 밝히도록 도와주려는 데 있다. 결국 백성들을 도덕과 정치주체가 되게 하려는 데 있었다. 왕간의 이러한 경세사상은 민중의 정신생활 수준을 향상시킴으로써 민중을 도덕·정치·경제의 주체로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한편 ‘각민행도’의 방식은 당시 집권층의 비판과 공격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양명학의 종말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전제군주제하에서 왕간이 몸소 실천한 왕도 구현의 새로운 방식이 가지고 온 파장은 매우 컸다.
    왕수인이 처음 길을 열고 왕간이 확장시킨 ‘각민행도’의 방식은 왕간의 제자들에 의해서 활성화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顔鈞과 羅汝芳이다. 안균은 왕간의 평민유학 전통을 계승하여 그것을 독특한 형태로 발전시킨다. 그는 당시 피폐해진 민심을 구제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라고 보았다. 그는 유학의 이론을 ‘大中’ 두 글자로 요약하여 평민대중들이 깨닫기 쉽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인욕을 적극적으로 긍정하였으며, 傳道 활동에서도 책 속의 지식이 아니라 ‘天啓’와 ‘心悟’를 중시함으로써 유가에 신비색채와 종교적인 분위기를 덧보탰다. 그리고 민간강학회를 설립하여 민간 공론을 형성하고 현실정치에 반영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평민대중을 정치세력화하고자 한 것으로, 급기야는 당시 집권층에 의해서 정치적인 탄압을 받게 된다.
    나여방은 ‘立身行道’의 경세사상을 제시한다. ‘몸을 세운다’는 것은 바로 천하의 대본을 세우는 것이며, ‘도를 행한다’는 것은 바로 천하의 달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나여방은 ‘立身行道’의 구체적 방법을 ‘孝弟’에서 찾는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부모를 섬기고 형을 따르는 사이에 양지양능의 오묘함을 함양하고, 이 몸을 이 효제의 道에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게 한다면 사람마다 요순이 될 수 있고, 世道도 태평하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람은 처음 태어나면서부터 효제의 도리를 알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赤子之心’을 부여받고 있다고 가르친다. 이 가르침은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효제의 도리로 이끌었다.
  • 영문
  • A Study on the governing thought of Yang-ming Studies
    -focusing on the politico-culture historical implication of the formation and differentiation of Yang-ming Studies-


    This study examines the principles of governing and various ways of governing proposed by Yang-ming Studies in connection with its main theories.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larify the characteristics of Yang-ming Studies’s governing thought and explore the politico-culture historical implication of the formation and differentiation of Yang-ming Studies, and to clarify the implications and significance of Yang-ming Studies’s governing thought on the political and social culture of East Asia.

    <First Year Research: A Study on the governing thought of Wang shou-ren - focused on New awakening of ‘governing method’ and its theorization->

    This thesis is to define what Wang shou-ren’s innovation in terms of governing is, and states how it was put into theory.
    Wang yang-ming had a will to not only becoming a sage in his earlier life but also to govern the whole world. For the scholar-officials who has the ideal of leading the world under the autocracy, the most important thing was to get the mind of monarch and implement the rule of right. And this method can be realized only by assuming a political culture in which the communication between the monarch and the servants can be done properly. However, Ming dynasty had a political culture that is hard for the scholar-official to realize the ideal of the rule of right politics due to the strengthening of imperial and weakening of divine. Such political culture became the direct reason of looking into other lines other than the ‘get the mind of monarch and implement the rule of right’ for Wang yang-ming.
    ‘Enlightenment in long chang(龍場)’ of Wang yang-ming brought an innovational change for not only the method of becoming a sage but also the method of ruling the world. The road for ‘loving the people and implement the rule of right’ and ‘enlighten the people and implement the rule of right’ has been introduced. The actual content that Wang yang-ming enlightens from long chang is ‘benevolence’. Actualizing such mind to the people is ‘loving the people and implement the rule of right’. Also, the method of ‘enlighten the people and implement the rule of right’ that actualize morality by enlightening the innate knowledge of normal people was found by Wang yang-ming. After then in Yang ming studies, the three method of ‘loving the people’·‘enlighten the people ’·‘get the mind of monarch’ has become popular.
    All the theoretical and actual activities of Wang yang-ming that was presented after enlightenment in long chang risen from the consciousness of anxiety and the spirit of succor the world. The major theory of Wang yang-ming such as ‘the mind is principle’ ‘the unity of knowledge and action’ ‘the Heaven, Earth and all things are one body’ ‘the extension of innate knowledge’ and ‘training and polishing in the actual affairs of life‘ has become the theoretical grounding of the governing thought. The theory of ‘the mind is principle’ is the theoretic grounding of the rule of right, and the theory of ‘the unity of knowledge and action’ goes for the realization of the politics of the rule of right under the criticism of the non-unity of knowledge and action phenomenon of the normal level people, and the theory of ‘the Heaven, Earth and all things are one body’ became of the theoretical grounding of the politics of loving the people, and the theory of ‘the extension of innate knowledge’ is the unified acting method of self-cultivation and governing people, and the theory of ‘training and polishing in the actual affairs of life’ has become the grounding of political acts that concentrate on the actual affairs of governing people.
    The greatest change that the Wang yang-ming made in the governing thought was to make the place where he is now, whether he is a bureaucrat or not, as a place to realize the rule of right politics. Yang-ming's governing principle is exercised in various aspects such as politics, economy, society, education, courtesy, and military.

    <Second Year Research: A Study on the governing thought of the Jiang you(江右) school’s Bureaucratic Intellectual scholars.-focused on Zou shou yi(鄒守益)·Ou yang-de(歐陽德)·Luo hong xian(羅洪先)->

    This article examines the governing thought of the Jiang you(江右) school’s Bureaucratic Intellectual scholars. Zou shou yi(鄒守益) emphasizes the effort to be cautious and apprehensive. This appears as an emphasis on the rule of Li(禮), taking "respect work" as a code in the governing thought. He succeeds the tradition of Yang-ming Studies linking 'Li(禮)' to 'the innate knowledge', while emphasizing the practical significance of Li(禮) through concrete social practice and political practice. Furthermore, by regulating military affairs through the rule of Li(禮), he tried to correct the relationship between monarch and servants, and to revive the courtesy culture of local community by awakening the commoners. This contrasts with the development of the Tai Zhou school's 'enlighten the people and implement the rule of right' in the direction of an individual's free personality.
    Ou yang-de(歐陽德) emphasizes the effort of 'training and polishing in the actual affairs of life'. This appears to be a political act that realizes the innate knowledge in concrete civil affairs. He understands politics and scholars in a unified way. He thinks that the scholarship that realizes the innate knowledge in the civil affairs is the politics of loving the people. He intends to make the monarch right through the Classics Mat (Gyong-Yon, 經筵). Following the route of 'enlighten the people and implement the rule of right(覺民行道)', he practices lectures and public policy. He made intellectuals the primary subject of lectures. This contrasts with the fact that the Tai zhou(泰州) school made the common people an object of awakening.
    Luo hong xian(羅洪先) emphasizes the effort of regarding tranquillity as fundamental. He realizes the heart without greed in his own body and realizes to the people that he ultimately wants to save the world. He is frustrated with his political activities along the lines of "get the mind of monarch and implement the rule of right(得君行道)", and he is also critical of the route of the 'enlighten the people and implement the rule of right(覺民行道)', which makes the people directly subject to awakening. He pursues his will to save the world in accordance with the loving the people and implement the rule of right(親民行道).

    <Third Year Research: A Study on the governing thought of the Tai zhou(泰州) school.-focused on Wang gen(王艮)·Luo ru fang(羅汝芳)->

    This article examines the governing thought of the Tai zhou(泰州) school. Wang gen(王艮) was aware of the fact that ‘the Heaven, Earth and all things are one body’. And he became a master of the world, tried to save the people. He suggests a new rule of conduct based on the theory of 'stabilize the body'. He claims that when he becomes a bureaucrat, he must become a teacher of the emperor, and when he is a civilian he must become a teacher of people. At that time, it was difficult to become an emperor's master in the political situation of the Ming Dynasty. So he explores the way of becoming a teacher of the world. He finds his way through the Confucius who revealed himself to the world by 'self-discipline' and 'lecture.' And through the form of public lectures, he teaches people in the lower classes to practice the innate knowledge in everyday life.
    Luo ru fang(羅汝芳) presents the governing thought of 'establishing the body and implement the rule of right(立身行道)'. ‘To establish the body’ is to establish the great foundation for humanity, and to implement the rule of right is to follow the universal way. He finds a concrete method of 'establishing the body and implement the rule of right' in filial piety and brotherly respect. And he teaches that man is inherently given 'the mind of infant' to know 'filial piety and brotherly respect' and practice it. This teaching led people to 'filial piety and brotherly respect' without difficult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양명학에서 제시하는 經世 원리와 다양한 경세 방안들을 그 주요 이론과의 연관 속에서 고찰함으로써 양명학적 경세사상의 특성을 규명하고자 한 것이다.

    1) 왕수인의 경세사상
    왕수인이 새롭게 발견해낸 ‘治道’는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이론화하고 실천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는지를 밝혔다.
    명대는 사대부가 군주를 통하여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기 어려운 정치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정덕 연간의 정치 행태는 양명으로 하여금 ‘得君行道’ 이외에 다른 노선을 탐색하게 했다. 양명의 ‘龍場悟道’는 성인이 되는 방법에서만이 아니라 경세의 방법에서도 혁명적인 변화를 가지고 왔다. ‘親民行道’와 ‘覺民行道’의 길이 마련된 것이다. 양명이 용장에서 깨우친 道의 실질 내용은 ‘仁心眞體’이며, 이 마음을 백성에게 베푸는 것이 바로 ‘親民行道’이다. 그리고 일반 대중 개개인의 양지를 각성시킴으로써 도를 실행하는 ‘覺民行道’의 방법이 양명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된다. 그 이후로 양명학에서는 ‘親民’·‘覺民’·‘得君’의 '도를 실천하는[行道]' 방법이 함께 유행하게 된다.
    양명학의 주요이론인 ‘심즉리’·‘지행합일’·‘천지만물일체’·‘치양지’·‘사상마련’ 등은 경세사상의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다. 왕수인이 경세사상에서 일으킨 가장 큰 변혁은 出處를 막론하고 자기가 현재 처한 곳을 왕도정치를 구현하는 경세의 장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2) 江右學派 관료지식인 양명학자들의 ‘친민’과 ‘득군행도’의 경세사상-鄒守益·歐陽德·羅洪先을 중심으로-
    왕수인이 경세사상에서 일으킨 변혁이 강우학파의 관료지식인 양명학자들에게 전개되는 양상을 분석하였다.
    추수익은 ‘戒愼恐懼’의 ‘敬’ 공부를 강조한다. 이것은 경세사상에서 ‘敬事’를 강령으로 삼아 禮治를 중시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는 ‘예’를 ‘양지’와 연계시키는 한편, 사회실천과 정치실천을 통하여 예의 현실적 의의를 강조한다. 그는 예치를 통하여 군권을 통제함으로써 군신관계를 바로잡고자 하였고, 평민들을 각성시킴으로써 향촌사회의 예치문화를 회복하고자 했다.
    구양덕은 ‘事上磨鍊’ 공부를 중시한다. 이것은 경세사상에서 民事에 직면하여 양지를 발휘하는 ‘致知之政’으로 나타난다. 그는 정치와 학문을 통일적으로 이해한다. 민사에서 양지를 실현하는 학문이 바로 ‘致知之政’이자 親民정치라고 보았다. 구양덕은 ‘格君行道’의 유효한 방법으로 經筵을 제시함과 아울러, ‘覺民行道’의 노선을 따라 강학활동과 대민정책을 펼쳤다.
    나홍선은 無欲의 主靜 공부를 강조한다. 그는 無欲의 마음을 ‘자기 몸에 베풀고’, ‘백성에게 베풀어’, 궁극적으로 천하를 구제하고자 한다. 나홍선은 ‘득군행도’의 노선을 따라 정치활동을 전개하는 중에 좌절을 겪는 한편, 백성들을 직접 각성의 대상으로 삼는 ‘각민행도’의 노선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그는 친민의 경세원리에 기초한 대민활동과 경세치용의 탐구로 자신의 경세의 뜻을 펼친다.

    3) 泰州學派 양명학자들의 ‘覺民行道’의 경세사상 -王艮과 羅汝芳을 중심으로-
    왕수인이 경세사상에서 일으킨 혁명이 王艮과 羅汝芳을 중심으로 한 태주학파에서 전개되는 양상을 살펴보았다.
    왕간은 천지만물이 일체임을 자각하고, 천하의 스승이 되어 세상을 구제하고자 한다. 왕간은 安身을 토대로 ‘出爲帝者師’와 ‘處爲天下萬世之師’의 출처관을 제시한다. 당시 명대의 정치상황에서 황제의 스승이 되기는 어려웠다. 그는 민간에 있으면서 천하 만세의 스승이 되는 길을 탐색한다. 왕간은 ‘修身’과 ‘講學’을 통하여 세상에 드러난 공자에게서 그 길을 발견한다. 그리고 대중강연의 형식으로 하층민에게 일상생활에서 양지를 밝힐 것을 가르친다.
    나여방은 ‘立身行道’의 경세사상을 제시한다. ‘몸을 세운다’는 것은 바로 천하의 대본을 세우는 것이며, ‘도를 행한다’는 것은 바로 천하의 달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나여방은 ‘立身行道’의 구체적 방법을 ‘孝弟’에서 찾는다. 그리고 사람은 선천적으로 효제의 도리를 알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赤子之心’을 부여받고 있다고 가르친다. 이 가르침은 사람들을 쉽게 감동시켜서 효제의 도리로 끌어들일 수 있게 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양명학의 형성과 분화의 정치문화사적 함의를 중심으로 살펴본 「양명학의 경세사상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면에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1) 명대 중후기 양명학의 전개와 분화를 경세사상의 측면에서 조명하는데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그 분석대상이 왕수인 이외에 양명후학의 5개 유파 가운데 4개 유파의 대표적인 인물 5명으로 제한되어 있다. 이 때문에 본 연구는 시론적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 연구의 토대위에서 본 연구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다른 양명후학들에게까지 그 연구를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2) 양명학 연구의 편향된 시각을 교정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 양명학 연구는 대부분 ‘內聖 방면 연구’와 ‘태주학파 연구’에 편중되어 있다. 양명학 연구가 ‘내성’ 방면에 치우치게 된 까닭은 일차적으로 양명학 자체가 일체의 문제를 마음으로 환원해서 해결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본 연구를 통하여 양명학의 근본취지가 경세 방면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따라서 본 연구는 내성 방면으로 편향된 시각을 교정하고 양명학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를 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편 양명후학에 관한 기존 연구는 대부분 태주학파에 편향되어 있다. 거기에는 태주학파에게서 ‘근대성’을 읽어내려는 연구가들의 주관적인 의도가 다분히 스며들어 있다. 이러한 연구 경향은 지금도 여전히 많은 연구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제는 근대의 시선에서 양명학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객관적 사실에 부합하는가를 냉철하게 살펴야 한다. 이제 태주학파만이 아니라 양명학의 정통으로 평가받는 강우학파에게도 유의미한 경세사상이 있음을 밝힌 본 연구를 통하여 태주학파로 편향된 연구시각을 교정하고, 그 연구 대상도 다른 양명학파에게까지 확대시킬 수 있을 것이다.
    3) 양명학적 경세사상의 의의와 한계를 규명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양명학의 경세사상은 양지라는 도덕적 주체성에 그 근거를 둔다. 그런데 양지는 ‘내 마음의 양지[吾心良知]’이다. 즉 ‘내 마음’이라는 개체성을 떠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내 마음의 양지’에 기반한 양명학의 경세사상은 개체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며, 그것은 개체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결과를 가지고 올 수 있다. 실제로 명대 양명학의 한 흐름은 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것은 양명학 본연의 모습에서 이탈한 것이다. 그러나 욕망하는 개체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인간관을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도 적지 않다. 본 연구는 양명학이 어떻게 개체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긍정함으로써 근대적 인간관에 접근하고 있는지, 또 그 문제점은 무엇인지를 규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4) 본 연구는 조선양명학이 양명우파적 성격을 띠게 된 이유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명대에 양명학이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은 명대 특유의 정치 환경이 조성한 정치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명대의 정치는 사대부가 군주를 통해서 유가의 왕도정치를 구현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양명학은 그러한 정치상황에서 군주에 의지하지 않고도 왕도를 실행할 수 있는 새로운 통로를 찾았고, 그로 인하여 크게 유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경연이나 언관제도 등이 활성화됨으로써 군주를 성인군주로 만들 수 있는 길이 마련되어 있었다. 조선의 이러한 정치 환경에서는 양명학이 크게 유행하기 어렵다. 태주학파와 같이 평민대중을 각성시키는 방식으로 도를 구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조선의 양명학자들은 ‘覺民行道’가 가지고 올 수 있는 위험성, 즉 개인의 욕망을 긍정하고 예교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조선 양명학자들이 양명우파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 이유이다.
  • 색인어
  • 陽明學, 王守仁, 鄒守益, 歐陽德, 羅洪先, 王艮, 顔鈞, 羅汝芳, 江右學派, 泰州學派, 內聖外王, 經世思想, 新民, 親民, 覺民, 得君, 格君, 行道, 治道, 權道, 得君行道, 格君行道, 親民行道, 覺民行道, 仁心眞體, 心卽理, 知行合一, 天地萬物一體, 良知, 致良知, 事上磨鍊, 戒愼恐懼, 主敬, 敬事, 禮治, 師道, 盡力民事, 政學不二, 致知之政, 講學, 無欲, 主靜, 經世致用, 見成良知, 安身, 出處觀, 出爲帝者師, 處爲天下萬世之師, 修身, 立身行道, 孝弟, 赤子之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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