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흔히 정치철학자로서보다는 도덕철학자로서 보다 잘 알려진 칸트에게 있어서 도덕과 정치가 서로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지를 밝히는 데에 궁극적인 목적을 갖는다. 다만 본 연구는 칸트에게 있어서 법이나 도덕에로 환원되어지지 않는 ‘정치’ 혹은 ‘정치적인 것 ...
본 연구는 흔히 정치철학자로서보다는 도덕철학자로서 보다 잘 알려진 칸트에게 있어서 도덕과 정치가 서로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지를 밝히는 데에 궁극적인 목적을 갖는다. 다만 본 연구는 칸트에게 있어서 법이나 도덕에로 환원되어지지 않는 ‘정치’ 혹은 ‘정치적인 것’ 고유의 특성, 즉 독자성이 과연 존재하는지, 만일 존재한다면 그것의 핵심과 본질은 과연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등을 밝혀보려는 보다 장기적인 도정에서의 연구계획의 일환인바, 작년도 동 사업에 선정된 이래 진행해오고 있는 “칸트에게 있어서의 정치 혹은 정치적인 것의 의미에 관한 연구”의 연장 내지 확장에 해당한다. 결과적으로 본 연구는 연구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데에도 주안점을 둔다.
지난 해 동 사업에 지원할 당시 연구자가 제기한 바 있는 첫 번째 의문, 즉 <법이나 도덕에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정치,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하는 정치라는 것 본연의 정체성은 과연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그것은 무엇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그것의 역할과 기능은 무엇이며, 또 그것은 어떤 목표와 가치를 추구하는 부문인가?>는 필연적으로 두 번째 의문, 즉 <만일 정치가 법이나 도덕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거나 혹은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사실이 결국 정치는 도덕률의 실현에 봉사해야 한다”로 귀결되는 것이라면, 정치가 그것의 실현에 봉사해야 하는 ‘도덕률’이란 과연 어떤 것을 가리키는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칸트가 자신의 주저 중 하나인 영구평화론을 통해 그와 같은 도덕률이 국내정치적 차원과 국제정치적 차원, 그리고 세계 내지 ‘글로벌’ 정치적 차원 등 세 층위의 정치영역에서 각각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파하고 있다는 것이 연구자의 판단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그와 같이 세 층위의 정치영역 모두에서 발견되는 도덕률의 내용을 분석 및 체계화하는 데에 주된 목적이 있다.
이러한 맥락 하에 본 연구는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중심으로 그가 국내정치적 차원(대표적으로 공화국, 대의, 인민주권 등)과 국제정치적 차원(대표적으로 反세력균형, 反세계공화국, 느슨한 형태의 국가 간 연합 등) 그리고 ‘글로벌’ 정치적 차원(대표적으로 무역에 기반을 둔 상호의존과 反고립주의, 환대 내지 우호에 기초한 세계시민사회론 등)에서 제시하고 있는 도덕률들의 실체를 밝혀보고자 하며, 나아가 그들 사이의 상호연관성에 주목함으로써 언뜻 보아 단편적이고 분절적으로 비칠 수 있는 칸트의 정치철학에 체계성과 독자성을 부여해 보고자 한다.
칸트에게 있어서 정치 혹은 정치적인 것의 속성은 - “진정한 정치는 먼저 도덕에 경의를 표하고 나서야만 전진할 수 있다”라든가 혹은 “모든 정치는 법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혹은 “결국에는 정직함이 최선의 정치이다”라든가 혹은 “어떠한 경우에도 법이 정치에 순응해서는 안 되며, 그와는 반대로 정치가 언제나 법에 순응해야 한다”라는 주장들에서 보이듯 - 언뜻 보아 법 및 도덕과의 ‘바람직한’ 관계, 보다 구체적으로는 정치에 대한 법과 도덕의 우위 내지 우선성에 놓여있다.
칸트의 그러한 기본입장은 “칸트적 체계에는 윤리학과 국가이론 사이에 중요한 관계들이 존재한다”고 천명한 슈람을 거쳐 “윤리학은 법철학 및 국가철학 분야에서의 질문과 답변에 대한 기반을 제공한다”는 주장에 더해 “정치는 오로지 도덕에 복속됨으로써만 정당성을 얻는다. 칸트에게 있어서 정치는 도덕률(Sittengesetz)의 실현에 봉사할 뿐이며, 결코 자연적 욕구나 이해관계의 실현에 봉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이른 슈반에 의해 계승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반면 칸트에게 있어서 정치 혹은 정치적인 것이 지니는 의미와 관련된 논의라면 의당 제기해야 마땅하다고 판단되는 의문 및 그에 대한 해법을 기존 연구에서는 좀처럼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이 연구자의 논지이다. 작년도 동 사업에 지원할 당시 본 연구자는 상호 연관성을 갖는 세 가지의 의문을 차례로 제기했는바, 그 중 첫 번째 - 법이나 도덕에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정치,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하는 정치라는 것 본연의 정체성은 과연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그것은 무엇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그것의 역할과 기능은 무엇이며, 또 그것은 어떤 목표와 가치를 추구하는 부문인가? - 와 관련해 연구를 마무리하는 단계에 있다.
그런데 이러한 첫 번째 의문은 필연적으로 두 번째 의문 - 정치가 법이나 도덕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거나 혹은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의 의미인즉, 앞서 슈반이 언급하듯 “정치가 도덕률의 실현에 봉사해야 함”으로 수렴하는 것이라면, 정치가 그것의 실현에 봉사해야 한다는 ‘도덕률’이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가? - 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칸트는 대표적으로 영구평화론에서의 체계적 논의를 통해 그러한 도덕률이 국가적 혹은 국내적 차원과 국가 간 내지 국제적 차원, 그리고 세계(시민)적 차원 등 세 가지 차원에서 각각 존재한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 따라서 세 차원에서 존재하는 그와 같은 도덕률의 내용을 분석 및 종합하는 작업이 연구의 두 번째 단계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슈람 및 슈반 이외에도 ‘법 및 도덕에 대한 정치의 바람직한 관계’라는 대전제 하에 칸트의 정치철학에 다가서려는 다양한 시도들은 꾸준히 이어져왔다. 선행연구에 대한 검토는 한 가지 중요한 결론으로 수렴되는데, 그것은 칸트의 정치사상에 관한 기존연구가 갖는 공통의 한계인즉, 그것이 – 가령 평화에 관한 논의이든, 국가론에 관한 논의이든, 혁명이나 개혁에 관한 논의이든 혹은 정부형태나 대의에 관한 논의이든 - 국내정치적 영역이나 국제정치적 영역 혹은 세계 내지 글로벌 정치적 영역 어느 한 차원에만 국한된 채 진행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국가적 혹은 국내적 차원과 국가 간 내지 국제적 차원, 그리고 세계(시민)적 차원 등 세 가지 차원에서 각각 존재하는 도덕률의 내용을 분석 및 종합하는 작업이 불가피하다.
칸트에게 있어서 정치와 도덕 간의 관계가 “정치는 도덕률의 실현에 봉사할 뿐”이라는 표현으로 압축될 수 있다면, 정치가 그것의 실현에 봉사해야만 하는 ‘도덕률’에는 칸트에 따를 때 과연 어떤 것들이 있는가를 살펴보는 작업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치가 그것의 실현에 봉사해야만 하는 도덕률’이 곧 본 연구의 주된 내용이다.
한편 ‘정치’ 혹은 ‘정치적인 것’의 본질이 어디에 놓여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학자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 있겠지만, ‘국가’라는 대표적인 정치공동체 내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공동체적인 삶’,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공동체적인 삶이 이루어지는 정치공동체의 전형인 ‘국가’, 이 두 가지와 전혀 무관하게 답변이 제시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칸트의 경우, 제3·제4의 항목이 추가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공동체적인 삶이 이루어지는 개별국가들 사이의 관계, 즉 이른바 ‘국제관계’ 내지 ‘국제사회’, 그리고 그에 더해 그러한 개별국가 모두를 포괄하는 ‘하나로서의 세계사회’, 즉 오늘날의 ‘글로벌’ 사회이다. 그렇다면 칸트의 경우 왜 그와 같은 추가적인 항목들에 대한 종합적인 고려가 필수적인가? 왜냐하면 칸트에게 있어서 개별국가 차원에서의 ‘이성적 정치질서’로서의 ‘공화국’ 이념의 실현 여부, 다시 말해 전적으로 국내정치 차원의 문제는 개별국가들 간 평화정착 및 (상거래에 입각한)상호의존 및 그를 위한 부단한 협력의 여부, 다시 말해 기본적으로 국제 및 세계정치 차원의 문제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을 가장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칸트의 저작이 다름 아닌 영구평화론임은 물론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성적 정치질서’로서의 ‘공화국’ 이념 실현이라는 국내정치 차원에서의 도덕률은 ‘대의’ 및 ‘인민주권’의 이념 실현과 무관할 수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 개별국가들 간 평화정착이라는 국제정치적 차원에서의 도덕률은 反세력균형, 反세계공화국, 느슨한 형태의 국가 간 연합 이념의 실현과 무관할 수 없고, 또 다른 한편으로 (상거래에 입각한)상호의존 및 그를 위한 부단한 협력이라는 ‘글로벌’ 차원의 도덕률은 反고립주의, 환대 내지 우호에 기초한 세계시민사회 이념의 실현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
이와 같이 하여 칸트의 경우 ‘정치가 그것의 실현에 봉사해야 한다는 도덕률’의 실체를 국가적 혹은 국내적 차원과 국가 간 내지 국제적 차원, 그리고 세계(시민)적 차원 등 세 가지 차원에서 - 이들 사이의 유기적 연관성에 근거해 –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논의를 통해 본 연구가 가지게 되는 가장 큰 차별성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칸트의 의도를 가장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해 기본에 가장 충실한 기획이라는 사실에서 찾아질 수 있다. 왜냐하면 앞서 선행연구에 대한 검토에서 여실히 드러나듯이 칸트의 정치사상에 관한 기존연구가 갖는 공통의 한계인즉, 그것이 – 가령 평화에 관한 논의이든, 국가론에 관한 논의이든, 혁명이나 개혁에 관한 논의이든 혹은 정부형태나 대의에 관한 논의이든 - 국내정치적 영역이나 국제정치적 영역 혹은 세계 내지 글로벌 정치적 영역 어느 한 차원에만 국한돼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본 연구가 갖는 두 번째 차별성은 칸트의 정치사상에 관한 대부분의 기존연구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또 다른 한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한계인즉 실천철학과 관련된 칸트의 주요저술 못지않게 중요한 1차 자료에 해당하는 초고나 성찰원고 및 서신 등과 같은 수고 형태의 글에 대한 불충분한 고려이다. 이와는 달리 본 연구는 그와 같은 수고 형태의 글 또한 대상으로 삼아 개별저작 및 개별표현들 사이의 연관성을 염두에 두고 독해 및 분석에 임하고자 하였으며, 그를 통해 일견 단편적이고 분절적으로 읽히기 십상인 칸트의 후기저작들을 일관적이고 체계적으로 해석해 내고자 시도하였다.